14장
리브가가 의식을 찾은 건 코를 찌르는 악취를 맡았을 때였다.
역한 냄새가 어찌나 진동을 하는지 막 정신을 차렸을 때 순간 속을 게워낼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절하기 직전 몇 번이고 부딪친 뒤통수가 얼얼한데, 뇌까지 울렁거리니 딱 죽을 맛이었다.
‘기름 냄새…….’
냄새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기름이었다. 아주 어릴 적 그녀가 제 손으로 슬럼가에 뿌리고 다닌 적이 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했다. 피붙이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냄새이기에 잊을 리가 없었다.
리브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상했다.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시야가 까맸다.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었다기보다는 실낱같은 빛만 간신히 보였다. 뒤늦게 눈이 무언가로 가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두 손은 마차에 막 내던져졌을 때처럼 결박당한 채였고 다리 역시 매한가지였다. 눈과 입은 막아졌고, 코는 역겨우리만치 진하게 풍기는 악취로 인해 도통 제 기능을 못했다. 의지할 건 청각 하나뿐이었다.
그러던 차였다.
뚜벅.
뚜벅, 뚜벅.
귀를 찍어 내리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인지하자마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깨어났군.”
익숙한 목소리.
코올리 밴텀이었다. 기절하기 전 뺨을 두드리던 손길처럼 다소 포악한 움직임이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건드렸다.
“어때? 깨어나서도 앞이 보이지 않으니 무섭지 않나?”
억압된 그녀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아직 널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을 못했거든. 뭐, 지금처럼 두 눈을 멀게 하는 쪽도 괜찮을 것 같고.”
잔악한 말이 귀를 뚫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지금 잠깐 보이지 않는 것도 미칠 듯한 폐쇄를 선사하는데 앞으로 영영 그렇게 된다면……. 리브가의 숨소리가 두려움에 젖어 거칠어졌다.
“너로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군. 평안히 살다가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고 말이지.”
“…….”
“이봐, 뭐라고 말 좀 해 봐. 재미없게.”
“…….”
“벙어리야?”
그리 지껄인 후 낄낄대는 빈정거림이 속을 비틀었다.
성정이 개 같았다. 두 눈이 있다면 리브가가 지금 제 의지대로 입을 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뭣보다 그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아, 내가 말 못하게 만들어 뒀지.”
건성인 손길이 리브가의 뒤통수를 더듬었다. ‘으, 피가 묻잖아.’ 하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니 간신히 완치된 후두부가 재차 찢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가를 가리던 천이 스르르 풀어지고 있어서 고통에 집중할 새도 없었다. 입에 물려져 있던 천도 빠져나갔다.
콜록, 막힌 숨이 들이차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어스름한 빛이 눈을 찔렀다. 리브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절하기 전에도 보았던 육중한 풍채, 그리고 위기감을 조성하는 사내의 얼굴이 시야에 들이찼다.
코올리 밴텀이 씩 웃었다. 컴컴한 동굴 속처럼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였다.
“원망은 네 주인에게 하도록 해.”
“주, 콜록, 주인이라니…….”
“네 주인이 나를 이렇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말 대로였다.
만약 성 기능 불구가 되지만 않았어도 코올리 밴텀은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지는 않았을 테다.
발렌틴은 일개 귀족가의 영랑인 저와 달리 가진 패가 무수했다. 시시껄렁한 사생아 나부랭이로 대우하기에는 그를 따르는 뒷배가 너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따른다기보다는 쾌락이든 수치든, 어떤 식으로든 약점이 잡힌 쪽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러니 귀족들 대다수가 그와 척을 지기보다는 살살 구슬려 그의 편이 되기를 택했다. 듣자 하니 황가의 자녀 몇 명도 그가 벌이는 음란하고도 퇴폐적인 파티를 좋아라하는 편이랬지. 그 고귀하고 뻣뻣한 핏줄마저 용케 아군으로 만드는 놈이었다.
굳이 승패 가려볼 것도 없이,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코올리 밴텀은 그 요란한 패를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강력한 체스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보다도 더 자주 밥 먹듯 여자를 갈아치우던 놈이었다. 그런 녀석이 한 여자에게 빠져서 도통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딱 보였다. 그 대상이 변변찮기 그지없는 하녀라는 게 더 뒤통수가 얼얼하기도 했고.
발렌틴이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겼던 만큼 지켜보는 이 역시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코올리는 지난날 하녀에게 제 좆을 들이밀었다가 발렌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건드리지 말지.>
그 하녀와 신이 나게 떡을 치고 나와서 체스 판에 끼는 척 옆에 앉아 그런 소리까지 했으니 뭐, 말 다 한 셈 아니겠는가.
그날의 체스는 발렌틴이 승리했으나 오늘은 달랐다. 다를 것이다. 코올리 밴텀은 제가 거머쥔 아주 유능한 체스 말을 음흉한 낯으로 내려다보았다.
리브가는 제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는 손길을 뿌리치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엄습하는 통증이 상당한데도 아픈 것보다 코올리 밴텀의 손길이 더 진저리났다. 마구 흔들리던 시야가 우뚝 멈춰 선 건 잠시 후였다.
“뭐, 하는…….”
그녀의 시야에 꽤 많은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낯선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곳곳에 무언가를 뿌리고 있었다. 그 정체는 깨어나자마자 후각으로 알아차린바, 기름이었다.
리브가는 저것으로부터 지펴진 시뻘건 불길이 얼마나 흉포하게 사람을 먹어 치우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배 속에 고인 공포심은 금세 집채만 하게 부풀었다.
“아, 내가 발렌에게 꽤나 열이 받아서 말이야.”
그녀가 경악스럽게 응시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코올리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 새끼 사지 정도는 불태워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살벌한 읊조림에 리브가는 사색이 되었다.
“그래야 그간 바짝바짝 말랐던 내 심정에 조금쯤의 보상은 되겠지.”
“대체,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잔뜩 쉰 목소리로 간신히 항변했다. 내도록 열없이 상황을 관전하던 코올리 밴텀의 눈깔이 돈 건 그때였다.
“왜?”
“헉!”
두꺼비 같은 손아귀가 리브가의 목을 움켜쥐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조르는 힘에 순식간에 숨이 부족해졌다.
“왜 이러느냐고?”
신랄한 기색이었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마음가짐치고는 영 장난스러운 태도였기에 어깃장을 부리나 싶었다. 그러나 지금 완전히 돌아버린 표정 속에 켜켜이 쌓인 원망은 허투루 넘길 게 아니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윽박질과 함께 그악스러운 힘이 더 강해졌다. 리브가의 고개가 마침내 뒤로 꺾이기 직전,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힘이 빠지고 부족하던 숨이 공급되며 리브가는 급히 호흡했다. 생리적으로 차올라 흐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옜다.
“……벌써 도착했나 보군.”
낮게 읊조리는 그를 올려다보던 차였다.
코올리 밴텀이 바닥에 늘어져 헐떡대는 리브가의 머리칼을 휘어잡아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시야가 넓어져 이곳이 남루한 오두막이며 코올리가 몸을 튼 방향에 입구가 있음을 깨달았다.
빛줄기가 아까보다 거세졌다. 문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이게 누구야! 나의 오랜 친구, 발렌틴이잖아.”
과장스러운 어투가 오히려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리브가는 서둘러 눈을 깜박거렸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서야 시야가 맑아졌다.
그 끝에는 정말로 발렌틴이 있었다.
원망스럽고 미운 그라지만 이토록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는 반갑고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가 홀로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코올리 역시 그가 혼자라는 걸 깨닫고 더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예상보다 빠른걸. 네가 붙인 기사들을 전부 처리하고 이동했는데 벌써 여길 찾아내다니.”
그 말대로 발렌틴은 무척이나 조급하게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리브가가 지켜봐 온 이래 지금만큼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닌가. 지난날 비가 왔던 날도 저랬던가.
요즈음의 그를, 리브가는 도통 정의할 수 없었다.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나?”
“스푸이트가 서신을 보냈거든.”
숨을 고른 발렌틴이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코올리가 데려온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총과 검이 혼란하게 뒤섞여 허공 속에서 그에게 겨누어졌다.
그러나 발렌틴은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었다. 날붙이처럼 매서운 시선으로 리브가의 머리칼을 움켜쥔 코올리 밴텀의 손만 주시하고 있었다. 눈초리에도 힘이 있다면 코올리의 손목을 싹둑 베어내고도 남을 만큼 살벌했다.
“네 얘기, 수도에서 이미 자자하다고 들었다.”
리브가는 제 머리카락에 휘감긴 코올리의 손에 점점 힘이 실림을 알아챘다.
“고자 됐다며, 너.”
상황은 위급했다. 금방이라도 피바람이 낭자하게 될 듯 아찔했다. 그럼에도 발렌틴은 말을 돌려하는 법이 없었다. 직설적인 어조는 꼭 코올리 밴텀의 약을 바짝 올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공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방증처럼, 그는 제게로 향하는 수많은 위협을 코앞에 두고 잘도 웃었다. 이 와중에 아리따운 얼굴로 짓는 미소가 너무도 요요해서 이 상황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리브가는 그에게 ‘이제 오지 말라’는 제 말이 통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말한 대로 며칠 전 그는 스푸이트 백작가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코올리 밴텀이 발기 부전의 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라는 당부의 서신이었다. 평소 필요 이상으로 제게 집적대던 그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그녀였다. 보아하니 이번 기회에 발렌틴에게 탈탈 털렸으면 하는 심정에서 고한 밀고인 듯했다.
그것 때문에 그는 며칠간 리브가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행여나 그 칼날이 애꿎은 리브가에게로 향할까 봐. 매일 아침 벌떡벌떡 일어나도, 당장 달려가고 싶어도, 미칠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단지 저를 보기 싫어하는 것과 그 행동으로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건 천지 차이였다. 자신이 가볼 수 없는 대신 공작가의 기사들을 근처에 몰래 배치시켰다.
매일같이 보고를 받으면서도 당장 달려가지 못해 속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던 며칠이었다. 당장 마차에 올라타고 싶어 몸이 달고 피가 끓었다. 상태가 어찌나 심각했느냐면, 제가 지시했음에도 저를 대신하여 그녀를 볼 수 있는 기사들에게 애먼 질투심까지 피어오를 정도였다.
물론 옳은 판단이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일찍이 기사를 배치해 둔 덕분에 리브가가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꽤 빨리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하나 현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코올리 밴텀은 호탕한 성격답게 꽤나 단순한 편이었다. 먹이를 던지면 있는 그대로 받아 물고, 자극을 주면 있는 그대로 반응했다. 그래서 부러 도발했다. 리브가에게 관심을 끄고 원흉인 제게로 모든 원망을 쏟아 붓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능폭해진 기세에 독만 바짝 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스푸이트 그 썅년이…….”
어느새 두피가 아플 정도로 리브가의 머리칼을 세게 움키고 있던 코올리는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보란 듯 걷어찼다. 리브가가 거센 기침을 토해 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발렌틴의 미소가 멎었다.
그 순간의 변화를 목도한 코올리 밴텀이 키득거렸다.
“너 혼자 온 거겠지?”
이곳은 분명 로트링겐 영지인데, 기다란 창과 까만 뱀이 교차한 문양의 기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분명 발렌틴의 뜻이었으리라.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발렌틴은 싸늘하게 식은 낯으로 답했다.
“왜 애먼 사람을 끌어들이지?”
“애먼 사람? 이 계집이 그렇다고? 아닐 텐데.”
코올리 밴텀은 분노에 저린 낯빛을 여유로 가장하며 허리춤을 뒤졌다. 곧이어 등장한 총이 리브가를 향했다. 발렌틴의 표정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험상궂어졌다. 핏발 선 눈이 맹렬하게 번들댔다.
“가지고 있는 무기 당장 다 버려.”
“…….”
“가만히 서 있을 땐가? 이 계집 머리통에 구멍 하나는 나야 행하려나?”
저급한 협박이었다. 리브가는 헐떡거리며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이자가 뜻하는 대로 따라 주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발렌틴은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허리춤에서 빼낸 총과 단검 집을 바닥에 던졌다. 코올리 밴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기가 감돌았다.
이내 그가 턱을 까딱, 기울였다.
“뭐 해?”
거만한 행동대로, 그 입에서는 믿을 수 없는 명이 떨어졌다.
“무릎 꿇지 않고.”
명령의 대상인 발렌틴보다도 리브가가 더욱 놀랐다.
“이 계집을 구하고 싶은 것 아닌가? 그럼 내 비위를 맞춰 줘야지. 네가 내게 벌인 짓만 생각하면 내 신을 개처럼 핥아 대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런데도 관대한 내가 아량을 베풀어 준다잖아.”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꿇으라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할 리가 없다. 그가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리브가만이 아니라 코올리 밴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내린 지시일 테다.
이 상황을 주도한 이답게, 제가 지시한 바를 따르지 않는 순간을 역으로 이용하여 피를 볼 심산일 테니까.
하지만…….
“……!”
발렌틴은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외려 그가 너무 담담하게 나와서 굴욕적이라는 인상도 없었다. 굴욕보다는 마치 신에게 자신만의 고해를 바치듯 실로 정결하게까지 느껴졌다. 오두막 내에 무게를 잴 수 없는 정적이 감돌았다. 창백해진 리브가만큼 어벙한 낯짝이 된 코올리 밴텀이 이윽고 허,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하…… 하하. 하하하.”
“…….”
“하하하!”
코올리 밴텀은 실성한 것처럼 허리까지 젖혀 대며 웃었다.
“이 미친 새끼 좀 보게.”
“…….”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 내가 아는 그 도도한 새끼가 아닌 것만 같잖아. 반반한 거죽만 뒤집어쓴 다른 놈 같다고!”
코올리 밴텀은 제 주도대로 판을 휘두르고 있으면서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상황을 믿지 못했다. 절대로 하지 않을 걸 알고 꺼낸 지시를 그가 덥석 물었다. 오직 제 손에 이 보잘것없는 하녀가 인질로 딸려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계집이 그렇게 소중한가? 응?”
남이 죽어 나가건 말건 눈 하나 깜짝 않던 지독한 놈이었다. 제 몸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듯이 남에게도 가차 없는 새끼였다. 코올리는 언제나 그 상황 속에 함께 있었다. 발렌틴의 잔혹함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산증인이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위해 무릎을 내어 주다니. 더군다나 그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줄로만 알았던 무릎이 고작 변변찮은 계집 하나 값이었다. 이건 코올리의 신경 체계 하나하나를 쾌락으로 비틀 만큼 강렬한 사건이었다.
“설마 사랑이라도 해?”
“그래.”
담담한 인정이 허공을 쭉 갈랐다. 너무도 쉬워서 오히려 김이 팍 식어버리는 시인에 코올리는 말문 잃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리브가조차도.
줄곧 코올리 밴텀만을 응시하던 발렌틴이었다. 그런 그가 ‘그래.’ 하고 간결한 어투로 사랑을 인정하는 대목에서만 리브가를 보았다. 저를 직시하는 눈빛 속에 너무나 많은 감정이 덩어리째로 고여 있었다.
그게 적어도 이전처럼 마냥 피하고 싶은 복수와 분노는 아니었다. 아니, 그토록 뜨거우면서도 열렬한 모양새를 닮은…….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코올리 밴텀은 금세 흥이 식은 낯빛이 되었다. 순순히 따라오기만 하니 영 재미가 없었다. 발버둥을 쳐야 짓밟는 재미도 있기 마련이건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며 총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실로 위험해 보였다.
그 조마조마한 위기감대로…… 탕!
“꺄악!”
총성이 내부를 요란하게 울렸다.
발포는 순식간이었다. 리브가는 패닉에 갇힌 눈을 간신히 추켜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복부를 움켜쥔 채 상체를 숙인 발렌틴을 발견했다. 그가 움킨 의복이 차츰 붉은 빛깔로 물들었다.
그 장면은 꿈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부상을 입고 피가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그 모습이……. 그를 살리기 위하여 아등바등했던 어릴 적의 마음을 떠올리게 했다.
저런 무참한 꼴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죽을 각오로 애를 썼던, 그때의 심정이.
그녀의 눈가에 금세 뜨거운 열감이 고여올랐다.
“그래. 뭐, 사랑한다는 여자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말로지.”
코올리 밴텀이 총을 재차 장전했다. 리브가의 가슴 안쪽이 두려움에 바짝 졸아붙었다. 새하얗게 질려 굳어 있던 그녀는 코올리가 총구를 다시 그에게로 뻗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어떠한 판단을 조리 있게 내리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그의 다리를 잡아챘다.
“제기랄! 이 미친년이!”
순간 몸의 균형을 잃은 코올리 밴텀이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튕겨 나온 총은 다행히 리브가와 가까운 쪽에 떨어졌다. 리브가는 필사적으로 기어 그것을 사수했다. 분노한 코올리 밴텀이 몸을 일으켜 쿵쿵, 요란하게 다가오기 전에 급히 그것을 붙잡아 던졌다.
쨍그랑!
한쪽에 걸린 등불이 추락하며 바닥에 불이 옮겨붙었다.
화르륵!
그렇지 않아도 나무로 이루어진 공간인데 더군다나 기름까지 뿌려 뒀으니 화재는 삽시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졌다.
“뭐야!”
“젠장 할!”
“대피하셔야 합니다!”
“이봐, 출구부터 확보해!”
공기가 화상을 입을 듯 뜨거워졌다. 발화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녀에게 다가오던 코올리 밴텀은 느닷없는 불길 세례에 당황했는지 우왕좌왕하다가 저를 모시는 기사를 따라 얼른 자취를 감추었다.
콜록, 콜록. 매서운 연기와 델 듯한 열기에 기침이 멈추지 않고 나왔다. 어떻게든 일어나고 싶었으나 팔에 이어 다리까지 묶여있어 무리였다. 열기가 점점 거세졌다.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열통에 빠진 것만 같았다. 힘이 들어 씨근대던 중, 리브가는 어깨를 붙잡는 힘에 움찔했다.
발렌틴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그가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옥죄는 밧줄을 단검으로 끊어 냈다.
“설 수 있겠어?”
리브가는 바닥을 짚고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던 발렌틴 역시 다리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크게 비틀거렸다. 놀란 그녀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발렌틴의 이마가 리브가의 어깨에 얹어졌다.
“큭…….”
고통을 억누르는 신음이 귓전을 울렸다. 리브가는 그가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화재가 상당히 진행된 터라 시뻘건 불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세워진 몇 개의 기둥은 벌써부터 재처럼 꺼멓게 타고 있었다.
기둥이 타면 끝이었다. 와르르 무너져 모든 걸 깔아뭉갤 테다. 불은 계속 번져 갈 테니 결국은 잿더미행이었다. 그렇기에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여기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리브가는 그의 팔을 제 어깨에 걸치게 만들어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나아갈 방향을 잡는 것조차 녹록지 않았다. 탈출의 시기가 너무 늦었다.
다급히 시선을 돌리던 리브가는 아직 불길이 완전히 닿지 않은 문을 발견했다. 저기뿐이 없단 생각에 걸음이 제멋대로 나아갔다.
혼자여도 힘든 길, 저보다 훨씬 큰 부상자를 이고 가는 과정에 버거움은 배가 됐다. 그럼에도 리브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은 몇 번이고 찾아왔다. 불길이 예상치도 못하게 엄습하여 향하던 길의 일부가 막히거나. 발렌틴이 환부의 고통으로 발에 힘이 풀리거나. 리브가는 땀에 젖은 얼굴로 그를 흘끗 보았다. 복부를 움켜쥔 그의 손마저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라는 건지, 아니면 더 가면 된다는 건지.
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무슨 주문처럼 그 말만 되뇌며 힘겨이 문가로 향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그리 애를 쓰고 아득바득 버티니 문가가 고지였다. 코올리 밴텀의 무리는 달아나는 데에 정신이 없었는지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거의, 거의 다 왔어요.”
저것만 넘으면 된다. 속도는 더디지만 출구는 확실히 존재하니 희망이 보였다.
발렌틴이 리브가를 흘긋 보았다.
저를 버리고 갔다면 진즉 빠져나갔을 테다. 그럼 꺼먼 잿가루를 고운 뺨에 묻힐 일도 없었을 테고 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헐떡거리지도 않았을 테다.
그녀의 인생 속에서 저는 형벌 같은 존재였다. 있으나 마나가 아니라 없는 쪽이 명백히 나았을 사람. 뒤틀린 인연으로 그토록 힘겨워해 놓고서 지금에 와 저를 챙기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속에 무궁한 회한을 낳았다.
정면만을 응시하며 나아가는 리브가를 대신해 발렌틴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불구덩이 속에서 기이한 소음을 내던 방향을 향하여.
아지랑이가 부옇게 일렁이는 천장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뗐다.
“……바깥, 에.”
고작 한 마디 뗐는데도 폐부가 조여들며 고통이 극렬해졌다. 쿨럭, 터져 나온 기침에 역겹고 비릿한 쇠 맛이 배어 나왔다.
“내 기사들이, 와 있어.”
말한 대로 이곳까지 저를 따라온 로트링겐의 기사들이 있다. 다만 리브가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라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으라 지시한 후 그 혼자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 화재가 난 것을 보았을 테니 지금쯤 바깥에 포진해 있을 테다.
리브가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와닿는 시선에 등골이 찌릿하게 울렸다. 병신. 이젠 그녀가 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은가 보다. 발렌틴은 속으로 신랄하게 자조했다.
“널 도와줄 테니까…….”
리브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그를 의아하게 보았다. 출구를 코앞에 두고 왜 꼭 그녀 홀로 살아남을 것처럼 얘기를 하지?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다리에 힘이나 똑바로 주라고 하려던 차였다.
발렌틴이 무어라 속삭였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 그을린 나무가 사납게 삐걱대는 소리. 어느새 바깥에서 이는 웅성거리는 소음들. 그것 외에도 귀를 긁는 소리들이 한데 모여 소란스럽기 그지없음에도 발렌틴의 미성이 귓가에 못처럼 박혔다.
그건 그가 무릎을 꿇는 것만큼의 놀라움을 선사했다. 순간 뇌리가 새하얘졌다. 그녀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이기도 전에, 발렌틴이 피가 배어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을 부축하던 리브가의 어깨를 강한 힘으로 떠밀었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마지막 사력을 다한 듯 치열하게까지 느껴지는 힘이었다.
“꺅!”
아직 불길이 닿지 않는 곳을 넘어 열린 문까지 밀려 부딪친 리브가가 풀썩 넘어졌다. 문이 끽 소리를 내며 그녀의 상체는 실외로 빠져나왔다.
불시에 일어난 일에 멍해진 사이.
오막집은 리브가가 등화를 깨뜨려 불을 붙인 모퉁이부터 차츰차츰 무너지기 시작하여 손쓸 틈도 없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 무참한 현장에 선 발렌틴과 눈이 마주쳤다. 문가에 주저앉은 리브가는 발렌틴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원목 더미를 보았다.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허리가 붙잡히고 몸이 뒤로 질질 끌렸다.
질서 없는 말소리와 서두르는 기색이 오감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혼이 빠진 양 망연했다. 시야에 발렌틴이 말한 로트링겐 가문의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안도는 들지 않았다.
“이봐!”
누군가 어깨를 억세게 붙잡았다. 힘없이 돌아간 시야에는 퀄린이 있었다.
“발렌은!”
“안에, 안…… 에.”
지체했다가는 늦는다는 걸 알아챈 걸까?
만약 그가 그녀를 밀치지 않았더라면 무너진 판자 더미에 나란히 깔렸을 테다. 그러나 쥐어짜 낸 힘으로 그는 그녀를 빼내고 홀로 저 안에 남았다. 아니, 어쩌면 같이 살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불길이 더 흉악하게 번졌다. 연기와 매캐한 내음이 그 위로 죽음의 기류처럼 넘실댔다. 귀를 스치는 모든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뒤늦게야 사지 곳곳에서 아픔이 올라오며 정신이 희부옇게 흐려졌다.
<미안하다.>
발렌틴이 저를 밀치기 전 건넨 말만이 뇌리에서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