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오한을 쉽게 간과해 버린 결과일까?
한밤중에 급격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밤새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거리기를 반복했다. 목이 잔뜩 부은 듯 아팠고,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속은 끝없이 메슥거렸다. 아주 혹독한 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너무 아픈데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서 그저 죽은 듯 침대 위에서 숨만 내쉬었다.
“세상에, 이마가 불덩이잖아!”
다음 날 아침, 초주검과 다를 바 없는 리브가의 상태를 발견한 케시가 경악했다. 그녀는 오늘 하루 일을 쉬고 곁에 있겠다고 하였으나 리브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괜찮겠어?”
“응.”
“어쩜 좋아, 목소리 쉰 거 봐. ……돌아올 때 진료소에 들러서 약이라도 사 올게.”
“부탁해.”
케시는 걱정이 한 가득인 얼굴로 집을 나섰다.
홀로 남은 리브가는 적막을 곱씹으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비에 쫄딱 젖고서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잠이 든 대가였다.
어제의 기억이 누수처럼 왈칵 새어 나왔다. 저처럼 흠뻑 젖은 남자의 형상이 제멋대로 어른거렸다. 리브가는 두 눈을 꼭 감음으로써 잔상을 애써 떨쳐 냈다.
몽롱한 정신은 고통에 침식되다가 서서히 잠이 들었다.
‘……서, 왜 이러…….’
‘……고! 빨리 약이라도…….’
그녀가 깨어난 건 여러 가지의 소음과 기척이 오감을 불편하게 건드릴 때였다.
입술에 무언가 맞닿은 게 가장 먼저 감각을 깨웠다. 부드럽게 맞물린 입안으로 무언가가 밀어 넣어졌다. 그 뒤를 따라 입속을 파고든 물컹한 것이 휘저어지는 바람에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다음으로 서늘한 찬기를 지닌 무언가가 이마를 어루만졌다. 시원했다. 잔뜩 고인 열기가 잠시 흩어지는 듯했다. 고개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쫓아갔다.
그러자 얼굴을 쓰다듬던 것이 움찔, 하고 떨었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여유라기보다는 조심스러움. 너무 느려서 답답할 정도로까지 느껴지는 움직임이 관자놀이를 타고 뺨으로 미끄러졌다.
그것이 밭은 숨을 연달아 내쉬는 입술에 닿았다.
그때쯤 리브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인영이 덧그려졌다. 몇 번 더 깜빡거리자 인영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자마자 리브가는 몸을 굳혔다. 초점이 돌아온 그녀의 눈을 확인한 발렌틴 역시 뺨을 쓸던 손길을 멈추었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리브가는 미련이 남은 양 뺨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손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별것 아닌 행동에도 송곳으로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에 뒷골이 쑤셨다.
“……뭐예요?”
왜 자다 일어나니 그가 집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지?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최악이라 그런지 생각이 곧잘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어졌다.
“바구니에 약 담겨 있는 거 알고 있었잖아.”
허공을 헤매던 열 오른 눈빛이 발렌틴에게로 향했다. 그가 입은 포엣 셔츠가 살짝 젖어 있었다. 비가 아직까지 오나?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럼 왜 젖어 있는 거지. 한 박자 늦게야 그게 땀임을 알아차렸다.
“한데 왜 미련하게……!”
거칠게 갈라진 음성에 리브가의 눈길이 다시 그에게로 못 박혔다. 무심코 언성이 높아졌던 그는 그녀의 시선에 주춤하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 리브가를 어루만지던 손으로 헝클어진 제 흑발을 몇 번이고 쓸어 올렸다.
이게 아닌데. 꼭 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또 오셨어요?”
리브가는 그의 타박을 가벼이 무시하고는 심드렁히 반응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그 정도의 반응을 해 주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발렌틴은 땀으로 젖어 머리카락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그녀의 이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깨어나기 전에 넘겨 줄걸. 열이 나는 이마와 뺨을 쓸어내리는 데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조금쯤은 제멋대로 치민 음험한 욕구를 채우는 데에…….
그녀가 정신이 든 지금은 차마 손을 뻗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주 동안 바깥에서 냉대받은 바구니처럼 내쳐질 게 눈에 훤했으니까.
바구니에 상비약을 챙겨 두어 다행이었다. 주치의가 강조한 음식과 함께 그것은 혹여 필요한 일이 생길까 싶어 넣어뒀다. 그리고 꽃은…… 그래, 이 전날 그녀가 응접실에서 이따금 꽃병을 갈아 주던 게 떠올라서 그랬다. 꽃을 좋아하는 듯 보였으니까. 그게 나름의 소소한 유희 거리라도 되지 않을까 해서.
달리 말하자면 그녀를 그런 수준으로밖에 알지 못해서…….
발렌틴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얼른 뒤따라 일어나 그를 내보내려고 했지만 썩 여의치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눈앞이 어질어질거렸다. 아직 빠지지 않은 열 기운이 몸속에 잔뜩 고여 뇌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딘가로 사라졌던 그가 돌아왔다. 커다란 손에는 이 변변찮은 집구석에서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그릇이 들려 있었다.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한술 크게 뜬 수프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지금 뭐 하는.”
꽉 막힌 말문을 가까스로 열었다. 잔뜩 쉰 어조에 기막힌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먹으면 얌전히 돌아갈게.”
그는 리브가가 무얼 바라고 있는지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먹는 걸 보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태도가 따로 없었다. 리브가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켜낸 후 손을 들었다.
“그럼 주세요, 제가 먹을 테니까.”
“…….”
그는 스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발렌틴의 고집스러운 성미는 여전했다. 고분고분 눈치 보는 척하면서, 곧 죽어도 제가 하고자 하는 건 행하려는 지금 이런 태도가 증거였다.
혹독한 감기만 아니었다면 입가까지 들이밀어진 스푼을 당장 쳐 냈을 테다. 그러나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그래, 먹기만 하면 얌전히 간다잖아. 쓸데없는 일로 힘을 뺄 바에야 얼른 먹고 보내는 게 나을 성싶었다.
리브가가 순순히 입을 벌렸을 때 외려 발렌틴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굳어있던 그는 행여나 리브가가 말을 바꿀까 불안했는지 얼른 스푼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맛이 혀에 착 감겼다. 식욕이 바닥을 쳤지만 그럼에도 맛이 훌륭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공작저에서 직접 공수해 온 유동식인 모양이었다.
“…….”
리브가가 이상한 걸 발견한 건 몇 숟갈을 더 받아먹은 후였다.
스푼을 쥔 그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리브가가 그것을 쳐다보자 시선의 행방을 알아챈 발렌틴은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자충수였다. 다른 손에 감긴 붕대를 잇달아 발견했으니까.
양 팔에 성한 곳이 없었다. 한쪽은 붕대로 칭칭, 한쪽은 맥을 못 추듯 덜덜…….
“별것 아니야.”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변명조로 읊조렸다.
“신경 안 써요.”
언제 눈길을 주었느냐는 듯 리브가는 냉정하게 잘랐다.
“이제 주인님, 신경 안 쓴다고요.”
“…….”
“그러니까 주인님도 저 좀 그만 신경 쓰세요.”
휴지기처럼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분위기가 쩌적 깨졌다. 적막 속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리브가는 저와 그의 사이에 인 일종의 변화를 느꼈다.
자신을 담아내는 그의 시선이 변했다.
“그게 안 되는데 어떡해.”
내도록 반응이 없던 발렌틴이 입술을 열었다. 볼품없이 갈라진 음성이었다.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왜요?”
“…….”
“제가 왜 신경이 쓰여요? 그럴 이유 없잖아요.”
“네가 그랬잖아. 감정에 이유가 어딨냐고.”
“…….”
“……나 역시 그래.”
발렌틴은 가끔 말을 아주 애매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백 같기도 하고 겁박 같기도 하던 지난번의 말처럼, 오늘 역시도 그러했다.
감정에는 이유가 없다. 리브가가 저 말을 했을 때는 그에게 제 어리석은 사랑에 대해 고백하고 있었다. 그러니만큼 지금 그가 이 시점에서 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리브가의 입가에 버석하게 마른 실소가 감돌았다.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졌나 봐요. 왜 그게…….”
꼭 사랑이라도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지.
발렌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그녀가 무슨 짐작을 한지 알아챘으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 태도가 오히려 리브가의 마음을 바짝 조여들게 했다.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건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온몸이 불덩이인데도 속에서 치미는 그것이 훨씬 더 뜨거웠다.
리브가가 이불을 휙 걷었다. 낡은 천 자락이 나부끼며 그의 손에 얌전히 들린 그릇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내용물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며 순식간에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그녀가 간신히 내린 발 한쪽이 미지근하게 식은 수프의 잔해를 밟았다. 발렌틴이 얼른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다시 침대에 앉혔다. 한 쌍의 몸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리브가는 제 시야를 가로막은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가세요.”
고작 그거 움직였다고 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날카로운 두통이 뇌를 험난하게 들쑤셨다. 리브가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거듭 뇌까렸다.
“원하시는 대로 먹었잖아요.”
“이브.”
“저 이브 아니에요.”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응시했다.
“저 리브가예요, 이브가 아니라고요.”
그가 과거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슬럼가에서 숨죽여 살던 어릴 적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골방에 갇힌 사내아이 하나 보는 게 유일한 삶의 낙이었던 그 보잘것없는 어린아이. 풋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기에 여념이 없던.
그러니까, 그를 어리석게 사랑하던 때의 자신이 자꾸만.
“……주인님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리브가요.”
리브가는 부러 웃었다. 그걸 보는 발렌틴은 외려 울 것처럼 낯을 일그러뜨렸다. 그 어떤 힐난보다도 강렬하게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리브가의 발목을 쥔 발렌틴의 아귀힘이 풀렸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그녀는 등골이 움츠러들었다. 침대 위에서 발목이 꽉 붙잡혔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그때는, 그땐 억지로 가랑이가 벌어지고,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치미는 불안은 금방 흐려졌다. 발렌틴이 소매를 끌어다 그녀의 발에 묻은 질척한 음식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어서였다.
“돌아갈게. 돌아갈 테니까…….”
그러고는 바닥에 닿지 않도록 침대 위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예전엔 제가 있는 수렁으로 끌어들이기 바빴다면, 지금은 행여나 그 흔적에 그녀가 조금이라도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기색이 짙었다.
이전과는 확실한 변화가 그녀의 속을 배배 꼬았다.
리브가는 흐릿한 동공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물렸다. 쓰러지듯이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이제 오지 마세요.”
제가 들어도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발렌틴은 불리할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간 이어지던 기척은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와중에도 성질 한 번 내지 않고 곱게 닫았는지 소리는 아주 희미했다.
리브가는 정수리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침대 밑을 너저분하게 만들던 수프와 유리 조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깨끗해진 바닥을 보던 리브가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다시 베개 위에 뉘었다. 그래도 몇 숟갈 먹어서 그런가 속이 아까처럼 쓰리지는 않았다. 그 든든함이 거북했다.
“…….”
힘없는 손가락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맑았다. 너무 눈이 부셔서 그런가? 눈물샘이 아릿아릿하다. 날씨가 어제와 달리 화창한 게 서글픈지, 든든하게 채워진 속이 서글픈지, 아니면…….
* * *
“열은 좀 떨어졌네? 다행이다.”
저녁 무렵 돌아온 케시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식사하고 약 먹도록 해.”
약이라는 말에 리브가의 손끝이 움찔했다. 발렌틴이 돌아가고 난 후 열이 펄펄 끓던 상태가 차츰 호전되었다. 그제야 리브가는 그가 제게 약을 먹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방법 역시 흐릿한 기억 너머로 알 듯 말 듯 하게 떠올랐다. 제 속만 상할 게 뻔하여 골몰하지는 않았다.
“케시, 할 말이 있어.”
“응. 잠시만.”
케시는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저녁 식사는 금방 차려졌다. 리브가는 입맛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마른 빵을 찢어 대충 입에 욱여넣고 씹었다. 기분이 별로라서인지 아님 진종일 목이 칼칼해서인지 퍽퍽한 모래를 씹는 느낌이었다.
“케시.”
“응?”
리브가는 숨을 한 번 골랐다.
“나 여길 떠나려고.”
케시의 포크질이 멎었다. 리브가는 눈이 화등장만해진 그녀를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시기가 너무 늦어졌지.”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어버버거리던 케시가 이윽고 미약한 침음을 냈다.
“……주인님 때문에?”
조금 가신 편두통이 재차 엄습했다. 리브가는 그 고통을 덜어내고 싶은 것처럼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나 주인님께 말했거든. 아기, 이제 없다고…….”
케시는 조금 전보다 더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약을 먹었어? 언제?”
리브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먹었어.”
낡은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이 스르르 내려가 배를 덮었다.
“아직 여기 있어.”
“…….”
“자꾸 찾아오셔서, 아기 때문인가 하고 그렇게 말해 본 거야.”
차라리 아기가 이유였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런데…….”
그는 애초에 아기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는 양 굴었다. 정말로 단지, 리브가가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행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히려 유산으로 인해 몸에 부담이 가지는 않았을지 애달아 저를 걱정했었다.
기대하던 충격은 직후 잠자리를 운운하며 제 벗은 몸을 볼 때나 받은 듯했다. 스스로 옷을 벗을 때는 괜찮았는데, 이상하게도 무너진 그의 표정을 보니 순식간에 속이 꼬였다. 씁쓸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무어라 정의를 내리기 힘든 심정이었다.
“아기…… 유산했다고 거짓말하기도 했고.”
“…….”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도 없어서…….”
케시는 이미 두 번이나 저와 함께해 주겠다고 하였다. 이번에도 큰 이변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고개를 들었을 때 케시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케시?”
“아, 리브가. 그게 실은…….”
케시는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저주저했다.
“너에게 미리 말 못 한 게 있어. 오늘 나…… 빌리언에게 청혼 받았거든.”
리브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빌리언이라면 케시가 현재 일하는 푸줏간의 주인이었다. 이해관계는 순식간에 정립되었다. 케시가 하녀직을 관두자마자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지금 떠나겠다는 말을 이전처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케시. 꼭 너와 함께 가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괜찮아. 나 혼자 떠나도.”
“…….”
“지금껏 넌 몇 번이고 내게 의향을 맞춰 줬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리브가에게 주어진 그녀만의 생이 있듯 케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걸 타인이 침해할 권한은 없었다.
“반드시…… 떠나야겠어?”
케시는 어느새 울음기가 가득 배인 눈동자를 한 채 물었다. 우정과 사랑의 저울질 아래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리브가는 애써 활짝 웃어 보이며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케시의 말에는 아주 사소한 오차가 있을 뿐이다.
“반드시 여기여야 할 이유가 없어.”
이제는…….
할아버지는 황혼을 건너셨고 제 사랑은 스스로 버렸다. 친구인 케시는 마음 둥지를 틀 이가 생긴 이상 이곳에 남아 소담한 가정을 꾸리는 편이 좋으리라.
모든 관계가 이렇게나 깔끔히 정리된 지금이야말로 떠나야 할 때였다.
그날 밤 케시는 많이 울었다. 붙잡고 싶으나 리브가의 사정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신 가득 차오른 걱정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다리는 어떡해? 이제 괜찮아?’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어. 비가 오면 조금 쑤시지만.’
‘아기는…… 혼자서 키울 수 있겠어?’
‘해 봐야지.’
‘네가 너무 보고 싶어지면 어떡해?’
‘만나면 되지. 영영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잖아.’
차근차근 대답을 해 주다 보니 밤은 훌쩍 지나갔다.
감기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서 리브가가 떠나는 날은 일주일 후로 결정되었다. 그다음 날부터 생활은 달라진 듯 아닌 듯 미묘했다. 실은 대체로 비슷하게 흘러갔다. 케시는 향후 새 보금자리가 될 푸줏간으로 매일같이 출근했고 리브가 역시 아침마다 도착하는 달갑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단 하나.
늘 주변을 맴돌던 마차는 그다음 날부터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오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날 이후부터 발렌틴은 어설픈 자취로나마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바구니는 꾸준히 도착했으나 그 호의의 주인공은 머리칼 한 올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은 물 흐르듯 지났다.
리브가는 그날 처음으로 문 앞에 놓인 바구니를 집 안에 들여놓았다. 이제 그녀가 집밖으로 나설 것이니 그건 한낱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무심코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걷었다.
바구니의 한쪽, 하이얀 바탕에 연분홍빛이 은은하게 물든 라일락 몇 송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라일락은 봄에 개화하는 꽃이라 키우기는커녕 구하는 것조차 힘들 텐데. 겨울이 한창인 차에 어디서 이렇게 싱싱한 걸 얻어 온 건가 모르겠다.
“…….”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라고 했던가.
“리브가?”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던 케시의 부름이 들렸다.
“응. 지금 나가.”
시시하고 하잘것없는 생각이었다. 손을 펴자 꽃송이가 허공에서 팔랑대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줍지 않았다. 그것이 어두운 땅바닥에서 먼지와 함께 뒹굴건 말건 리브가는 개의치 않았다.
문을 열자 겨울바람이 차게 스쳐 지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 마당의 무덤을 찾았다. 봉분에 손바닥을 얹는데, 불현듯 눈물이 엄습했다. 고작 바람이 부는데도 울음이 터지는 날이 있기 마련이었다. 단지 그런 것뿐이라고 치부하며 헤널드에게 인사를 마친 리브가는 몸을 일으켰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꼭 돌아와, 알겠지?”
울음을 참지 못하는 케시를 꼭 안아 준 후 리브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기 전, 무심결에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지난 일주일과 마찬가지로 오늘 역시도 어쭙잖은 위장을 한 마차는 발견할 수 없었다. 살얼음 같은 차가운 공기만 내려앉을 뿐이었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마차가 출발했다.
* * *
지난 새벽과 달리 오늘은 태양이 쨍쨍한 한낮에 도착해서 그런지 로트링사일런 역은 꽤나 북적거렸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리저리 분주한 사람들 틈에 떨궈진 도토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때는 도망자의 신세인지라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고개를 푹 숙일 필요가 없었고, 잔뜩 위축되어 있을 이유도 없었으며, 그렇기에 걸음걸이가 여유로웠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떠난다는 건 이토록 홀가분하구나.
리브가가 위화감을 눈치챈 건 역내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자연스럽게 섞여 드는 인파 사이로 제가 사람들의 무리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꼭, 사람들을 하나의 벽처럼 만들어서 그녀를 가둔 듯한…….
별안간 팔목이 붙잡혔다.
“잠……!”
화들짝 놀라 외마디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입에 무언가 욱여넣어졌다. 그 상태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질질 끌려갔다. 우악스러운 힘을 좀처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반항을 할 새도 없이 어딘가에 처박혔다. 양 손목이 눈 깜짝할 새에 결박당했다. 뒤통수를 세게 부딪친 리브가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헐떡이며 간신히 눈을 들었다.
마차 안이었다.
모로 쓰러진 상태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씩씩대는 거대한 체구가 있었다. 빛줄기가 그 인영의 머리맡으로 쏟아지는 바람에 검푸른 역광이 졌다.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리브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코올리 밴텀……?’
그는 바로 저를 겁간하려고 했던 발렌틴의 친우였다. 그가 대체 왜 여기에? 지난날 발렌틴에게 총을 맞고 급히 수도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던 이답지 않게 매우 건장해 보였다. 그 쌩쌩한 모습이 리브가의 등줄기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그녀가 저를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코올리는 허둥지둥거렸다.
“빌어먹을, 벌써 따라붙었단 말이야?”
“아무래도 이 여자에게 따로 기사를 붙여 둔 모양입니다.”
리브가가 상황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마차 문이 쾅 닫혔다. 바깥에서 스며들던 빛줄기가 사그라들자 꼭 커다란 얼음이 갇힌 양 오한이 들었다. 이들이 저를 납치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리브가는 몸을 비틀며 발버둥을 쳤다.
코올리는 발치에서 일어나는 몸부림을 알아채고 상체를 숙였다.
“안녕, 오랜만이지?”
헝클어진 머리칼을 움켜쥐어 들어 올리는 손속이 무자비했다. 리브가는 고통에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코올리는 킬킬 웃어 대다가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벌컥 열어젖혔다.
“둘로 찢어져 움직인다. 난 이 계집을 데리고 먼저 출발할 테니 너희들은 따라붙은 놈들 싹 처리하고 와.”
코올리의 명에 바깥에서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이후 그녀를 실은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브가는 사색이 되었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코올리는 비열한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는 리브가의 머리칼을 놔주고는 허옇게 질린 뺨을 톡톡 두드렸다. 시정잡배 같은 손길이었다.
“갑자기 사직했다길래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기사까지 따로 붙여 놨을 정도면 발렌틴 그 빌어먹을 새끼가 여전히 네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그것참 다행이야.”
코올리 밴텀의 눈빛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핀트가 나간 듯 도통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양껏 고인 안광이 눈알을 번들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야 내가 너를 건드리는 의미가 있지.”
음산하게 킬킬대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 세워 리브가를 걷어찼다.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몸이 뒤로 맥없이 밀려나며 뒤통수를 한 번 더 세게 부딪쳤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마지막 몸부림처럼 바닥을 긁어대던 손에 힘이 빠졌다.
서서히 의식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