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대각선으로 파고드는 빛줄기가 선명했다.
창틀 위로 드리우는 나뭇가지에 참새들이 새초롬히 앉아 있었다. 짹짹. 낭랑한 지저귐에 리브가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여기서 자고 일어나는 게 너무도 어린 날의 기억이 되어 버린 까닭일까, 요즈음은 기상하면 한동안 정신이 빠진 것처럼 멍했다.
리브가는 나무통이 퍼즐처럼 맞춰진 천장을 응시하다가 슬금 고개를 틀었다. 집안이 조용했다. 케시는 벌써 나간 모양이었다. 잠이 덜 깬 그녀는 꾸물꾸물 옆으로 돌아누웠다.
협탁에 가지런히 놓인 약포지를 발견한 건 거의 동시였다.
“…….”
로트링겐 저택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요즈음 기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시간의 흐름 역시도 무뎌졌다. 아마도 한 달쯤 되었을 테다.
밤중의 대화를 나눈 후 발렌틴은 정말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다음 날 떠날 채비를 직접 지시했으니까. 실상 채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몸만 나오면 되었다. 그게 뭐라고 참, 형용 못 할 씁쓸함을 끼치는지. 이렇게 보니 정말 그와 저 사이에 연결된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은 느낌이라서였다.
과거의 악연 말고는 무엇도 없다.
허무하고 속이 쓰릴 만큼.
그 거리감 그대로 이제 끊어지기만 하면 된다.
남으로, 타인으로.
그러나 불가능했다.
아직, 몹시 강력하게 연결된 하나의 고리가 남아 있었다. 리브가는 배를 어루만졌다. 약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무슨 변화가 있을까 싶다만 그래도 늘 처음처럼 생경하고 어색했다.
이 안에 누군가 살아 숨 쉰다니.
리브가는 배꼽 부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저 약포지를 열면 가루 형태의 약이 있을 것이다. 사흘 전 케시가 데려온 의사에게 부탁하여 마련한 유산약이었다.
<아직 초기시군요. 조금이라도 빨리 섭취하셔야 효과가 있을 겁니다.>
깍듯하던 공작가 주치의와 달리 의사는 사무적인 얼굴로 외알 안경을 쓱 들었다가 내리며 말했다. 그 태도를 두 눈으로 목격했을 때 리브가는 별안간 심장이 철렁했다. 마치 그녀에게 달라붙은 해충이라도 떼어 내듯, 너무도 단조롭고 예사로운 반응이어서였다.
이것 역시도 죽음이라면 죽음인데.
뭐랄까, 오히려 그 형식적인 태도가 가여운 생명을 지운다는 거북함을 양껏 부풀렸다. 특히나 그날 불현듯 헤널드와 나눈 옛적의 대화가 떠올라 버렸다.
<이브, 네가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나는 그 애를 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길 거란다.>
<정말요?>
<그럼. 그때까지 오래오래 살 터이니 내 걱정은 하지 말려무나.>
아마 그건 미래의 자식보다는, 아픈 그를 보며 늘 염려 어린 표정을 짓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대화가 그녀의 마음에 콕 박혀 자꾸만 망설임을 낳았다. 의사가 놓고 간 약을 선뜻 복용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에 있었다.
‘이미 생겨 버렸는데…….’
처음에는 미웠다. 제 안에 씨를 뿌린 그만큼이나 원망스러운 존재였다. 오죽했으면 생명이 아니라 절망처럼 느껴졌을까.
그러나 혼자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차츰, 미움의 대상이 변질됐음을 깨달았다. 원색적인 비난과 분노를 보낼 건 아기가 아니라 그 남자니까.
그리고 막연히 두렵기도 하였다.
이미 한 번, 제 이기심에 피붙이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전적이 있는 그녀였다. 아버지는 일평생 저를 학대했고, 또 죄 없는 타인을 고통 속에 빠뜨렸으니 정당한 행위였다고 합리화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기는?
이 아기에게는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생명은 아무 잘못 없이 태어났는데 어찌하여 이유도 없이 숨을 거두어야만 하는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고, 그건 애초 품으면 안 됐을 의문이었다. 한 번 솟아오른 후부터는 도통 간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평생을, 사무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세상에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존재도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유산 약을 먹는 생각만 해도 속이 쓰릴 지경에 다다랐다.
하지만 안쓰러운 감정 하나 가지고 부딪치기에는 현실의 난관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발렌틴의 핏줄이라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와의 관계 속에 연결고리를 남겨두는 것도 염려되었고, 미래의 처우 역시도 그러했다. 간신히 결심하여 출산한다고 해도 핏줄을 근거로 공작가에서 아기를 뺏어갈지 모를 일이었다.
이 모든 건 로트링겐 공작가에서 관심을 꺼 주기만 한다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똑똑.
반사적으로 한숨이 샜다. 아직 문은 열지 않았으나 바깥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리브가는 탁자에 놔둔 지팡이를 짚고서 문가로 다가갔다. 이곳으로 돌아와 처방받은 약을 먹고 되도록 움직이려고 노력하니 이제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불안정한 면이 있어서 지난날 케시가 지팡이를 마련해 준 참이었다.
끽.
열린 문 너머에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기사가 있었다. 손에는 천이 덮인 바구니를 든 채였다. 이것도 한 달째 보다 보니 슬슬 질렸다. 그래서인지 리브가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가지고 돌아가라는 말도 안 나왔다. 왜냐 이 기사는 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 테니까. 리브가의 눈길이 기사의 어깨 너머로 미끄러졌다. 좁다란 언덕길 아래, 이 평화로운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고급스러운 마차가 있었다.
이 기사의 주인은 저 안에 있을 테다.
“두고 가겠습니다. 혹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사용하셔도 좋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기사는 익숙하게 문 옆에 바구니를 내려두었다.
작금 발렌틴은 그녀에게 무얼 해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양 굴었다. 물론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게 할 때도 그러했으나 요즈음은 그 정성의 정도가 남달랐다.
먼저, 로트링겐 저택을 막 벗어날 때는 거처를 옮겨 주겠다고 했다. 헤널드와 살던 집인 언덕길 위의 그것보다 훨씬 더 나은 곳을 알아봐 놓았으니 그곳에서 지내라고.
리브가는 무시했다.
다음으로는 돈과 휘황찬란한 보석 더미였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탄 마차의 짐칸을 모조리 그것으로 채워놓았다. 리브가는 그것을 보고 제가 밤마다 당한 짓으로 받은 화대가 떠올라 속을 한차례 게워 냈다.
그 보고가 착실히 전해졌는지, 이후에 그는 이런 사소한 수준으로만 접근했다.
처음에는 그가 직접 이 집으로 찾아왔었다. 리브가는 그런 그에게 불쾌와 진저리를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말이다. 그가 내미는 무엇이든 바닥에 집어던지거나 내던지기를 반복했다. 성의를 짓밟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다.
리브가는 그때서야 바리바리 챙겨 온 바구니 안에 신선한 식재료와 몇 가지의 상비약, 그리고 이유를 모르겠으나 몇 송이의 꽃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근근이 먹고사는 평민으로서 순식간에 내버려진 그것들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학을 떼는 모습을 보여야지만 그가 더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패악과도 같은 행동 이후 하루 이틀 안 보이나 싶더라니, 다음으로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 대신 이런 방식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정말 성가시고 교묘한 방식이었다.
그는 죄가 있지만 그의 기사는 죄가 없었다. 그리고 리브가는 그 죄 없는 자에게 화풀이를 할 만큼의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위태로운 곡선을 그리던 감정선이 바닥을 찍은 이후로 발렌틴과 관련된 모든 감정이 불필요한 소모로 다가왔다. 이제는 일일이 신경 쓰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리브가는 늘 바구니를 문 앞에 놔두라고 한 뒤 손도 대지 않았다. 다음 날 여명이 밝기도 전에 바구니는 사라졌고, 아침이 돌아오면 새로운 바구니가 도착했다. 물론 안의 내용물 또한 새것으로 교체된 채로.
종종 집 밖으로 나오거나 할 때에 마차 한 대가 늘 집 근처에 있었다. 부러 공작가 소유의 마차를 타지 않는 듯했으나 이 부근에는 마차의 유동이 적어서 정체가 빤히 보였다.
리브가는 이제 그가 주는 그 어떠한 것도 받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에게서 받았던 만큼 시련이 쏟아졌다. 무언갈 받아먹으면 체할 정도로 굴러야 했다.
여태껏 그러하지 않았나. 그가 주는 호의는 달콤하지만 실상 그 안에는 독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받아먹지 않는 게 나았다. 잠깐의 유혹에 눈이 멀어 자멸하는 꼴이 따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렌틴이 지금 하는 행동은 모조리 헛수고였다.
“……후유.”
물론 하녀로서 일하는 봉급도, 그의 밤을 책임지는 대가로 받던 목돈도 없으니 생활은 대번 휘청거렸다. 그러나 차라리 이게 나았다. 속이 훨씬 편했다.
그녀가 저택을 나서며 덩달아 하녀 일을 관둔 케시는 현재 마을의 푸줏간에서 조수로 일을 했다. 하녀의 신분으로 장을 다니던 예전부터 얼굴도장을 찍어 둔 덕에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리브가 역시도 다리 상태가 정상적일 만큼 호전이 되면 다시 일을 구해 볼 생각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휴식은 바빠지기 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호사일 테다.
생각을 그쯤에서 자르고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무기력이 다시 몰려왔다.
“…….”
기사는 물러갔으나 마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집 안을 지켜보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알 바도 아니었다. 리브가는 두 눈을 감았다. 익숙한 수마가 몰려 왔다.
* * *
혹자가 말하기를, 인생은 욕망과 권태의 끊임없는 반복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덧없는 곡률을 그리는 그 사이에서 끝없이 헤엄치며 하루하루를 나아가고 있는 것뿐. 약쟁이 발렌틴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외려 그는 그 꼭짓점이 다소 극단적인 편에 가까웠다.
품는 욕망은 정도를 몰라 주변에서 학을 떼게 만들고, 깃드는 권태는 그 본인을 바닥 없는 저 아래까지 고꾸라지게 하였다. 약과 술, 그리고 여자와의 잠자리로부터 얻어 내는 쾌락은 그 극단적인 상하 곡선에서 어떻게든 버텨 내고자 하는 일종의 발악과 같았다.
하지만 그리 아등바등했음에도 그는 결국, 극단에 치닫아 버리고야 말았다.
모든 건 리브가로부터였다. 그녀를 욕망할 때는 원치도 않는 감정이 제멋대로 뇌를 들쑤셔 놓더니, 그녀가 제 욕망을 이겨 내지 못해 무참히 망가졌을 때 맞이한 권태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수렁에 갇힌 기분을 선사했다.
그래, 딱 지금처럼…….
“…….”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깨어났다.
포악스레 눈꺼풀을 벌리는 빛줄기가 따가웠다. 발렌틴은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별것 아닌 움직임에도 욱신욱신한 통증이 일었다. 간밤 그를 물고 뜯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거슬렸다. 슬쩍 확인하니 팔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을 설치는 도중 수군거리는 말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발렌틴은 일어나 물을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축여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뭐가 결핍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매가리 없는 시선을 한 채 응접실로 들어서던 그는 멈칫했다.
그나마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때.
리브가가 단정한 모습으로 이곳을 누비던 장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창가, 테이블, 소파.
싱그러운 생기를 품은 채 발을 놀리던 그때의 그 모습. 바빠 보이면서도 오히려 평화로워서 여유롭게만 느껴지던 아침의 여가. 그게 발렌틴의 과민함을 이따금 누그러뜨렸다. 그래서 그는 종종 응접실 문가에 서서 리브가를 가만 지켜보고는 했다. 그건 본인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과거의 그날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발렌틴은 느릿느릿 걸어 소파에 착석했다. 한쪽에 놓인 시가를 입에 물고 성냥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 역시 한발 앞선 주저함이 다음 행동을 막았다.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돌아 버리겠다는 얼굴로 시가를 확 구겼다. 손끝에서 바스라진 부스러기를 아무렇게나 흩뿌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망할.”
혓바닥 위로 거친 말이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리브가가 약에 의해 고통받은 이후부터 도통 이전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지금 내동댕이친 시가의 부스러기처럼, 그를 고삐 풀린 망나니로 만들던 모든 유희 거리를 손에서 전부 내던지게 되었다.
앞서는 망설임, 뒤따르는 주저, 결국 진하게 남아 버리는 후회가 그의 삿된 향락을 시시각각 방해했다.
마른세수를 하고 내린 두 손이 옅게 떨렸다. 허구한 날 몸속에 들이붓던 그 중독적인 것들을 대뜸 끊어 버렸으니 부작용이 없을 리가. 리브가는 미미한 수준이었기에 금세 호전되었다고 하지만 발렌틴은 달랐다.
그는 이제 약이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밤중의 시간에 그는 거의 반쯤 실성하여 지냈다. 온몸을 송곳으로 찔러 대는 듯한 고통은 슬럼가에서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날의 통증을 상기시켰다. 결국 살기 위해 억지로 입에 약을 처넣어도 리브가가 품 안에서 헐떡거리던 게 떠올라 죄다 토해 냈다. 속을 억지로 긁어내서 그런지 늘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났다.
잠을 자려고만 하면 갖가지 환청이 그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예전엔 저를 챙겨 주던 여자아이의 곰살맞은 음성이었다면 이제는 울음기 섞인 리브가의 목소리가 대다수였다.
그녀가 저를 질책하고, 힐난하고, 원망하며, 지옥으로 떨어졌으면 좋겠다던 그 원색적인 비난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커다란 손을 허우적대다가 귀퉁이를 내려치기도 했다. 한 번은 힘 조절을 하지 못해 고막이 터지는 불상사까지 일었다. 그런데도 환청은 여전했고 그는 야금야금 좀먹혔다.
그에게 고통은 익숙하다. 납치를 당했다가 돌아온 이후부터 한결같이 아프기만 했던 삶이었다. 그가 통증을 느끼지 않을 때는 약에 절여져 모든 게 흐리터분해질 때가 아니고야 없었다. 그러니 그의 삶에서 고통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이골이 났기에 익숙도 하건만.
요즈음 엄습하는 고통은 그것들과는 완전히 궤가 달랐다. 새로운 고통, 새로운 통증, 새로운 아픔이었다. 피부가 따갑거나 신경이 예민해지는 등, 감각할 수 있는 그런 부위가 아니라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속내 어딘가가 잔뜩 으스러졌다.
잔뜩 상한 속내가 나을 새도 없이 자꾸자꾸 곪아 터지는 느낌.
“발렌.”
곧 문이 열리고 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은 좀 어때?”
역시, 그가 간밤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이었다. 흐리멍덩한 시선의 발렌틴은 그가 제게로 다가오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준비는?”
“오늘도 갈 셈이야?”
퀄린은 무심코 혀를 내두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얼른 갈무리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쉬지그래. 너 어젯밤에 상태도 좋지 않았고…….”
……라고 하기에는 최근 들어 저놈 상태가 괜찮은 적이 없었다만.
향락은 그에게 일종의 도피처였다. 삶 속에서 유일하게 찾아낸 숨구멍. 보고 있다 보면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쾌락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하루를 버텨 낼 뿐이라는 걸. 그런 놈이 그것들을 전부 관둔다는 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숨구멍이 틀어막히고 도피처를 잃었으니 당연히…… 삶은 황폐해지고 몰락한다.
“괜히 무리하지 말고…….”
“준비가 끝났는지를 물었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제 염려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에 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즈음 발렌틴을 보고 있노라면, 퀄린은 ‘위태로움’의 정의를 새롭게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 하녀를 침실에 가둬둔 시점부터 영 불안불안하더니 그녀가 이곳에서 나간 후로는 아주 눈 뜨고 못 볼 짓만 벌였다. 특히나 밤에는 괴로운 금단 증세에 못 이겨 제 살갗을 날붙이로 긁어 대는 자해행위를 벌이면서, 아침만 되면 꼬박꼬박 그녀를 보러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행보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일단은.”
끝내 저 지경까지 간 것도 이해는 갔다.
처음, 발렌틴은 이곳의 사용하지 않는 별관을 내어 주려고 했으나 하녀가 저택이라면 넌더리를 쳤기에 무리였다. 다른 아늑한 거처를 마련해 주려고 했으나 무시했다고 한다. 직접적인 보살핌을 싫어하는 듯하여 마지막 보루처럼 돈과 보석을 쥐여 줬더니 그것을 보고는 한차례 토악질을 했다고…….
그 보고를 듣는 동안 퀄린은 발렌틴의 곁에 있었다.
<임부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지?>
아무 말 없이 보고를 듣던 발렌틴은 주치의를 향해 대뜸 질문했다.
<당연히 휴식과 안정입니다.>
그건 자신으로서는 해 줄 수가 없는 영역인지라 발렌틴은 무반응으로 다른 것을 재촉했다.
<그 밖에 라면…… 아무래도 음식이겠지요.>
<음식?>
<예. 한 사람을 더 짊어지고 있는 것이니 넉넉한 식사로 영양분이 충족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날부터 발렌틴은 꼬박꼬박 음식을 챙겨 하녀가 있다는 언덕 위의 집으로 향했다. 그를 보필하는 기사에게 슬쩍 물으니 첫날에는 그것마저도 거부를 당했다고 했다. 무엇 하나 더 챙겨 주지 못해 한 아름 챙겨 간 그것들이 흙바닥을 나뒹구는 결과를 낳았다지.
그러자 이젠 아예 마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로 멀거니 지켜보기만 한다고.
‘눈물겹다, 눈물겨워.’
퀄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응접실을 나서는 발렌틴의 뒤를 따랐다. 쫓아가는 내도록 오늘은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날씨도 흐린 게 비가 한바탕 내릴 것만 같다, 괜찮은 술이 들어왔는데 시음해 보지 않겠느냐, 수도의 스푸이트 백작가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확인부터 해 보는 게 어떻겠냐 등등.
그의 주의를 끌 만한 화제라면 무엇이든 다 꺼내 보았으나 발렌틴은 굳건했다. 결국 오늘도 만신창이가 따로 없는 꼴로 마차에 오르는 발렌틴을 묵묵히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벽창호 새끼를 누가 말려!
“이봐, 발렌.”
마차 문이 닫히기 전, 퀄린은 그를 붙잡았다.
“잘못한 게 있다면, 아무리 늦더라도 사과는 해야 하는 거다.”
암말 않고 지켜보려고 했는데, 작금 내비치는 꼴이 여간 가련한 게 아니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관계 속에서 응당 오고 가는 겸손, 배려, 관용 그런 것들을 아예 배워 먹지 못한 것처럼 살아오던 놈이었다. 지금껏 남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 급급했지, 그가 누구의 비위를 맞추려고 이토록 애를 끓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서투르고 어설픈 면모가 훤히 드러났다.
발렌틴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한편, 지금 자신이 벌이는 짓에 대해서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듯했다.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는 폐인의 꼴이 되어가면서도 왜 그 하녀에게 이리도 목을 매는지 말이다.
퀄린의 눈에는 너무도 훤히 보이는데.
“용서가 아픈 자의 몫이라면, 사과는 아프게 한 자의 몫이니까.”
“…….”
“용서의 여부와 관계없이 사과는 늘 유효하기 마련이야.”
문이 닫혔다.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하는 마차를 지켜보던 퀄린은 복잡한 얼굴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그나저나 스푸이트 백작가에서 보낸 서신은 뭐지?’
스푸이트라면 약 두 달 전, 발렌틴의 초대를 받아 이곳까지 내려온 벨라 스푸이트의 가문이 아니던가.
코올리 밴텀의 사건으로 도망치듯 영지를 빠져나간 그녀가 대관절 무슨 일로 서신을 보낸 건지 알 턱이 없었다. 발렌틴은 어차피 외출했으니 제가 먼저 확인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는 덩달아 착잡해진 마음으로 발을 돌렸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이었다. 한바탕 쏟아부을 거라는 말은 허황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시원하게 퍼부었으면 좋겠다. 먹구름은 비를 한껏 쏟아 내야지만 사라지는 거니까.
호우가 지나가면 날은 필연적으로 밝아진다.
퀄린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을 흘려보내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한편, 여느 때처럼 발렌틴은 언덕길 아래에 도착했다.
의례처럼 기사를 보냈고, 노크했고, 문이 열렸다. 리브가의 선한 심성은 여기에서도 훤히 드러났다. 마뜩잖은 얼굴과 냉랭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결코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적은 없었다.
아마도 발렌틴, 그가 직접 갔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테다. 그걸 알고 기사를 보냈다. 약았다고 욕을 처먹어도 좋았다. 이런 방식으로나마 리브가의 얼굴을 볼 수야 있다면.
저의 존재를 지워서라도 그녀가 제발 좀 제 호의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으니까.
그러나 리브가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용하는 건 죄 없는 기사까지만이다. 발렌틴의 호의가 든 바구니는 여느 때처럼 차디찬 땅바닥에 버려져 행해지는 손길 하나 없이 써늘하게 식어만 갔다.
이럴 때마다 발렌틴은 제 처지가 저 바구니와 다를 바가 없음을 체감했다. 리브가에게서 받을 수 있는 반응이란 외면과 냉대, 싸늘함뿐인 양.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곁에서 한없이 위축되어갔다.
그 뼈아픈 사실을 맞닥뜨릴 때마다 여지없이 속이 아렸다.
이전에도 종종 이랬다. 그녀가 섹스 중 저를 붙잡으려다 말고 손을 물릴 때, 한창 매달리다가도 사정이 끝나면 제게서 등을 돌리고 누울 때.
외면과 회피가 속절없이 눈에 닿던 그 순간들.
그때는 강압적으로 굴어서라도 그녀의 신경을 억지로 제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미미하지만 그래도 만족감이 일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돌파구로 간신히 찾은 약의 쾌락처럼.
꺼림칙하고 찜찜하지만 어쨌든 이전보다는 나은, 그런 상태.
하지만 이제 그런 방법은 그녀를 파멸시키기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발렌틴이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밤이라도 채워지던 그의 일상은 처참히 일그러졌다. 이제 그는 낮이건 밤이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갈증에 파훼돼 헐떡거렸다. 그토록 몸다는 갈증이 해갈되는 시간이 이때였다.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리브가를 훔쳐라도 볼 수 있는 바로 이때, 이 순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라일락 향이 떠올랐고 그게 그나마 그를 한 톨 정도는 안정시켜 주었다. 매일매일이 모래를 퍼먹는 시정이니 그 사이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마저도 단비 같았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밝아진 그녀의 안색에 안도했다가도, 절뚝대는 걸음새를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기분이 저조해진다.
발렌틴은 늘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그야말로 내일이 없는 삶이었다. 그 정도로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며 그러니 당연히 죽음에 가까운 고통 역시 헤아려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작금 들어 겪는 고통이 그 수준을 한 번씩 짐작하게 했다.
이런 게 아닐까?
리브가의 반응, 모습, 태도 하나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 아찔한 급류가 그 고통과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은 이보다 더 지독한 아픔도 자주 겪어 보았는데. 이건 신체가 아니라 저 마음 한구석이 얼얼한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팔다리가 잘려 나간 듯한 작열통이나 뇌하수체가 파먹히는 듯 과민한 두통보다 이게 더 쓰라리고 아팠다.
여운이 사납고 짙어서 그를 끝모르는 한계로 내몰았다. 인내심이 다 타 버린 심지처럼 짧아져도 결코 제멋대로 굴 수 없게 만드는 그 압박감과 옭아맴이.
행동이 통제당하고 신경이 구속당한다.
그렇게나 감정적으로 굴종하게 되어버리는 이 낯선 기분이, 참.
언젠가 한 번, 사랑은 몹시도 아픈 거라고 지껄이던 영애가 있었다. 평소에도 곧잘 사랑 타령을 하던 여인이었기에 다들 큰 관심은 없었다. 그 가운데서 발렌틴만이 그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이유는 그때마저도, 이브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고 있어서.
종달새처럼 쫑알거리는 환청 위로 사랑을 운운하던 군소리가 덧씌워졌다. 사랑은 기쁨으로 점철된 감정이라지만 실상 그건 무척이나 아픈 거라고. 마음이 닿으면 행복하지만 그전까지의 과정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경우가 대다수라서…….
그 말이 이제야 얼추 이해가 갔다.
그의 사랑이 딱 그 짝이었다.
파르라니한 빛깔이었다. 아프고 병든 색.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고 나서야 도드라진 감정이라서.
설마 제 인생에 나타나게 될지도, 그 대상과 이렇게 꼬여 버리게 될지도 몰랐던 사랑은 어리석고 아둔했다. 언뜻 리브가의 사랑과 비슷해 보이나 달랐다. 그녀도, 그도 어리석었으나 그녀는 이타적이었고 그는 이기적이었다.
리브가는 저를 위해 주기 바빴던 희생적인 사랑이라 어리석었고, 그는 제 분노로 얼룩진 탐욕의 사랑이었으므로 어리석었다.
끝을 모르고 속을 곯게 만드는 회한을 곱씹던 차.
톡, 토독.
아까부터 귀를 긁는 소음이 들린다 싶더라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차창을 두드렸다. 보슬비라기에는 시야가 좁아질 만큼 줄기가 굵었다.
발렌틴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손을 움켜쥐었다. 잔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금단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붕대가 둘둘 말린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내상적으로 끼치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외상으로 눈을 돌리려하는 몸부림이 제가 느끼기에도 퍽 볼썽사나웠다.
그때였다.
“…….”
그에게는 영원히 열리기가 요원해 보이던 문이 벌컥 열리고 리브가가 나왔다. 발렌틴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주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지금 모습이 추하지는 않나. 머리칼을 깔끔하게 넘기고 올 걸 그랬나. 옷은 어떠하지. 괜찮은 편인가. 혹시라도 그녀를 대면할 시 생길 외양적인 걱정이 끝없이 모락거렸다.
그러나 리브가는 마차가 있는 쪽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마당 쪽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쭉 늘어놓은 빨랫감을 걷기 위해 나온 듯했다. 오늘은 지팡이 없이 걸어 나온 그녀가 조심조심 빨랫감을 걷었다. 그사이 빗발은 계속해서 굵어져만 갔다.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던 중, 발렌틴의 눈동자가 한순간 요동쳤다. 그는 말릴 겨를도 없이 마차를 뛰쳐나갔다.
비가 쏟아지는 그 호우 속으로 우산 하나 없이.
* * *
아침부터 비가 올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허름한 집안은 금세 꿉꿉한 습기로 가득 찼다. 리브가는 멍하니 누워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눈만 가물거렸다. 그러던 중 기력 없는 눈동자 위로 무언가가 죽죽 그어졌다.
창밖에서 내리는 빗줄기였다.
‘……아, 빨래.’
리브가는 오늘 아침 케시가 널어놓고 간 빨랫감을 떠올렸다. 이제 지팡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돼서 리브가는 빈손으로 나섰다.
무념무상으로 손과 발만 움직여 간신히 빨랫감을 걷어 냈다. 그사이 빗줄이 제법 굵어졌다. 허술하게 지어진 집 주변의 땅은 고르지 못하였다. 물기를 머금자 금세 축축한 진흙탕으로 변하고 있었다.
품에 한가득 껴안은 빨랫감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내디디던 도중이었다.
“읏!”
시야가 가려져 앞에 툭 삐져나온 돌멩이를 미처 넘지 못했다. 앞코가 걸리고 어찌할 겨를도 없이 몸이 철퍼덕 고꾸라졌다. 하얀 빨랫감은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입은 옷까지 질퍽한 진흙에 더럽혀졌다.
리브가는 바닥 위로 너저분하게 늘어진 옷감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일어나면 되는 일이다. 일어나서 떨어진 빨랫감을 줍고, 집으로 들어가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별것 아닌 과정이 왜 그렇게 멀고 버겁게만 느껴지는지.
예전이라면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움직였을 텐데. 지금은 망연한 심정이 되어 널브러진 옷만 응시했다. 시도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질퍽해진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이 쭉 빠졌다. 까끌까끌한 흙먼지가 손바닥을 불편하게 긁었다.
하지만 끝없이 처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잠깐 나와 있었다고 벌써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잔바람에도 소름이 돋는 게 무시할 수 없는 추위가 엄습하고 있었다. 지체하다가는 감기에 들어 고생할지도 모른다.
결심을 내세워 일어서려던 차.
“……!”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에 몸이 덜렁 들어 올려졌다. 휘둥그레진 눈동자에 익숙한 얼굴이 담겼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림막 하나 없이 맞으면서도 미려한 면모는 도통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낯짝이었다.
바람처럼 나타난 발렌틴은 그녀를 안아 든 채로 황급히 발을 옮겼다.
그새 축축해진 땅 때문인지 걸음새가 영 매끄럽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지탱한 손길에는 한 줌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안정성 때문일까, 리브가는 잠시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정신이 번쩍 돌아온 건 그가 막 집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거부감이 치밀었다. 헤널드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겨진 이 공간에 추악한 그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제 기억대로 남은 이 공간마저 바스라지고 오염될 것만 같았다.
“내려 주세요…… 놔주시라고요!”
문가에 다다랐을 무렵 거센 버둥질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고쳐 안는 도중이었던지라 발렌틴은 행여나 그녀를 떨어뜨릴 불상사를 대비하여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주었다.
리브가는 제 발로 바닥을 딛자마자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두 눈에 적대감이 선명히 어른거렸다. 곧 빨랫감을 마당에 두고 왔음을 깨닫고 무심결에 그쪽을 힐끔거렸다.
“……여기 있어. 가져다줄 테니.”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걸까.
발렌틴이 침묵을 갈라 말하고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리브가가 됐다고 거절을 하기도 전에 쌩하니 자취를 감추었다.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리브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발렌틴의 손에는 그녀가 조금 전 낑낑대며 붙잡으려 한 것들이 들려 있었다.
“…….”
아이러니했다. 예전엔 제가 쥔 것이라면 뭔들 놓게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이제 와 이렇게 친절히 제 품에 원하는 걸 안겨다 주다니.
곤죽이 되어 버린 빨랫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저를 마주한 채 선 발렌틴 역시도.
그는 아까보다 조금 더 젖어 있었다. 도기처럼 매끄러운 뺨을 타고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날카로워진 턱선에 고인 물방울이 눈에 콕 박혔다.
이내 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시선을 내렸을 때 리브가는 그의 한쪽 발이 집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발견했다. 흙탕물로 더러워진 그것이 제 사적 영역마저 침범했다는 생각에 기분은 붙잡을 새도 없이 곤두박질쳤다.
“왜 자꾸 오시는 건가요?”
저조해진 심경을 따라 목소리가 음산하리만치 낮아졌다. 발렌틴의 몸이 설핏 굳었다.
지금껏 외면하고 무시한 건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그와 저 사이에 남은 게 있기는 한가?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고, 더 이상 그의 하녀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여전히 제 주위를 맴돌고 있다. 껄끄러운 현실이 마음을 모나게 만들었다. 대체 내게 무얼 바라길래. 뺏어 가고 부서뜨릴 게 뭐가 더 남아서.
리브가는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응시하는 사내를 마주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아기 때문에 이러시나요?”
“뭐?”
“그럼 걱정하실 것 없어요.”
리브가가 땅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기 없어요, 이제.”
열린 문틈으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싸하게 지나갔다.
“……없다니?”
“말 그대로예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발렌틴의 가슴 안쪽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확고한 선이 그어진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가 대번 발을 내디뎠다.
리브가는 뚜벅뚜벅 다가와 제 어깨를 움켜쥐는 힘에 움찔했다.
“너, 그럼 몸은…….”
유산을 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 역시도 지금의 리브가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테다. 그렇지 않아도 추락상 이후 내도록 건강이 좋지 못하던 그녀인데.
리브가 역시, 뜨거운 숨 섞인 그 음성 안에 담긴 염려를 알아차렸다. 아기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는 양 구는 모습에 말문이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저를 걱정해 주는 모습이 그렇게나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아니야. 나는.”
그녀를 붙잡은 채로 발렌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조급한 움직임이었다.
“아니라고. 줄곧 아기 때문에 너를 찾아왔던 게 아니라….”
“그럼요?”
그녀의 추측을 부정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입술이 찰나 굳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그에게서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늘 권태롭고 나른하거나 혹은 오만하기만 하던 이가 이토록 전전긍긍할 수도 있다니.
어깨를 쥔 손 역시도 형편없는 낯짝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그 진동이 맞닿은 리브가에게 절절히도 전해져왔다. 그러나 감정의 동화는 없었다.
리브가는 건조한 시선으로 그 손을 응시하다가 툭 뱉었다.
“아니면 잠자리 때문인가요?”
“……뭐?”
그녀가 손을 들었다.
가는 손가락이 상의를 여미는 단추를 성의 없이 하나둘씩 풀기 시작했을 때 발렌틴의 눈이 점차 커졌다.
리브가는 아연해진 사내의 얼굴을 담담히 응시하며 계속해서 탈의했다. 젖은 옷자락이 풀어지며 안으로 뽀얀 피부가 비치기 시작했다. 언젠가 발렌틴이 원 없이 물고 빨던 그 탐스러운 살결 말이다.
예전이라면 여지없이 흥분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그녀만 보면 주체할 도리 없는 성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눈치도 없는 바지춤이 의지를 벗어나 불뚝불뚝 솟아올랐다.
그러나 뜨거운 흥분보다 앞서는 게 있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서글픔이…….
“하고 싶으면 하세요.”
이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미건조하게 말라붙은 눈을 한 그녀의 모습이 그를 처참하게 뭉그러뜨리는 기분이라서.
“대신, 이번에 하고 나면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강압적인 제 앞에서 이러지 말아 달라고 무릎까지 꿇으며 빌던 리브가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둑한 침실 속에서 애걸하는 그녀의 얼굴은 애처로운 물기로 가득 젖어 있었다.
그렇게나 자기 자신을 아낄 줄 알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이다지도 스스로에게 소홀해진 건…….
발렌틴은 일순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망의 감각과 비슷했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
“아기도, 잠자리도 아니면 제게 바라실 건 없잖아요.”
때마침 리브가가 걸치고 있던 옷자락이 바닥으로 축 떨어졌다.
리넨의 슈미즈를 걸친 상태였지만 그것마저도 물에 젖은 채라 의복으로서의 기능은 전혀 없었다. 살갗에 달라붙어 투명한 피부를 훤히 드러내는 모양새는 그에게 너무도 복합적인 심경을 떠안겼다.
자신이 기억하던 그녀가 고작 저를 쫓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아무렇지 않게 몸을 내어주는 자책감, 이런 와중에도 여지없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 그 외에도 말로 표현 못 할 여러 가지의 감정들이 혼잡하게 뒤엉켰다.
발렌틴은 이전이라면 머뭇거리지 않고 손댔을 나신을 앞에 두고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경직된 상태로 수 초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떨구듯 숙여 리브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팔을 뻗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어깨에 무언가가 둘러졌다. 탁자에 놓여있던 양담요로 그녀의 몸 어디도 노출되지 않도록 꼭꼭 여미는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금단 증세가 아니었다. 마음으로부터 이는 어느 격동이 사지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도록 몰아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날, 발렌틴은 그렇게 담요만 꽉 붙잡고 있다가 말없이 떠났다.
혼자 남겨진 리브가는 축축한 빗소리를 풍경 삼아 서 있다가 침대로 가 누웠다. 맨살 위로 담요 하나만 덮어서 그런지 유난히 추웠다. 발치까지 말린 이불을 끌고 와 덮었다. 그럼에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추운 게 아니라 마음이 허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왜 허한지는 알 수 없었다.
리브가는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까맣게 변한 머릿속에, 핼쑥하게 질려 버렸던 발렌틴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빗소리가 끝없이 귓전을 때렸다. 마음이 그토록 먹먹한 울적함에 젖어 드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