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

11장

리브가는 아주 오래간만에 과거를 꿈꾸었다.

<계획은 실패야. 내일 밤 로트링겐 꼬맹이의 목숨을 끊는다.>

허름한 문 뒤에서 마약상 친부가 수하에게 내린 명령을 엿듣게 된 이브는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안 돼.

차마 새어 나가지 못할 갈급한 항변이 혓바닥을 따갑게 긁었다. 납치당하여 이곳으로 와 꾀죄죄하고 별 볼 일 없는 꼴이 된 소년, 그에 대한 처형이 결정되었다.

숨이 가빠져 왔다. 이브 역시도 그를 돌보며 나름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생아라고는 하나 공작가의 핏줄이었다. 누군가 구해 주러 올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슬럼가가 진을 치고 있는 대형 수로의 지하는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몸을 숨기며 음밀한 행위를 자행하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였다. 더군다나 어린 귀공자, 발렌틴을 가둬 놓은 곳은 지하 중에서도 지하. 길을 잘 아는 자가 아니라면 찾아 들어오기도 힘들 정도였다.

구조가 늦어지며 덩달아 초조해진 건 이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초조함의 농도는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끝내 결단의 날이 와 버렸다. 마약상 친부는 천금을 얻기 위한 거래를 내던지고 발렌틴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브는 들키지 않게 그곳을 벗어나며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생각을 거듭했다.

살려야 한다. 발렌틴을 살려야 해. 그가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썩 똑똑하지 못한 머리를 미치도록 굴려 댔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직접 이곳을 빠져나가 발렌틴의 사람에게 이곳의 위치를 발설하는 것.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브는 어린 나이이니만큼 살아온 생이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생활하며 오간 곳이라고는 이 지하수로 안이 다였다.

세상 밖은 변수가 많은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느닷없이 이곳을 알려 주었다가는 오히려 제가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라도, 아니, 오히려 어렸기에 죽음이 무서운 건 당연했다.

아무리 그녀가 발렌틴을 지극정성으로 돌아보았다고는 하나 결국 납치범의 일행이며 더하여 주범인 마약상의 여식이었다. 그뿐인가? 발렌틴에게 마약을 먹여 중독시킨 범인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해야 해요, 할아버지. 어떻게 해야…….>

당혹과 울분으로 가득 찬 이브가 향한 곳은 의사, 헤널드의 품이었다. 그를 구하고 싶으나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이브는 이제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나는 심정이었다.

이 퇴폐적으로 타락한 공간도 싫었고, 그런 곳을 만들고 이끌어 나가는 아버지가 지긋지긋했다. 무엇보다도 죄없이 끌려와 무력히 죽어 나갈 발렌틴만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이브.>

<제 삶은 왜 늘 이러는 걸까요. 아무도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그런 일이 생겨요. 아버지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왜 매번 누군가를 아프고 힘들게 만드는 걸까요.>

옅은 회색빛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이브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희생된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가련하게 끌려와 발렌틴처럼 약에 중독된 사람들, 화대를 받고 그를 상대하다가 죽어 나간 창부들, 그 외에 불쌍하게 끌려온 제 또래의 일꾼들.

이 시기쯤 제가 배분하는 식사에 약이 들었음을 깨달은 이브의 죄책감은 머리끝까지 달한 상태였다. 그건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고역이었다. 모조리 아버지의 죄악임에도 그가 마냥 떳떳하게 구니, 그 모든 가책은 연좌제처럼 양심적인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모두를 구하고 싶더냐?>

헤널드가 돌연 물었다. 이브는 눈물로 흠뻑 젖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자한 기류가 흐르는 눈빛 속에 뜻 모를 결연함이 엿보였다.

<이브, 대답해 보거라.>

<…….>

<모두를 구하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인 게야?>

그 가정은 실로 달콤했다. 그녀가 비좁고 편협스러운 제 세상에서 겪어 본 어떠한 질문보다 황홀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조금쯤 아찔하기도 했다.

이브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널드는 자상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닦아 주었다.

<그것이 성공으로 돌아가면 네 가족이 죽고, 실패로 돌아가면 네가 죽는다고 해도?>

그녀의 안색이 ‘죽는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바르르 떨렸다. 헤널드는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낯으로 가만 대답을 기다렸다. 대화의 흐름이 거기까지 왔을 때 이브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을 잡지 못한 그 의미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제는.>

<…….>

<그래야만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더 이상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업을 모른 체하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웅크린 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일어설 때를 아는 것이었다. 이브는 그게 바로 지금임을 익히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이 아니고서야 영영 용기가 들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으로 검게 가려져 있던 양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맥동하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아버지의 단죄를.

죄 없는 자들이 겪은 수모를.

……발렌틴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요…….>

내게 떨어진 이 지옥을.

그리하여 이브는 헤널드의 지시 아래에 모든 것을 행하였다.

여느 날처럼 술과 약에 진탕 빠져 희희낙락하는 아버지 무리의 눈을 피하여 은밀하게 움직였다. 헤널드는 보석과 돈을 빼돌렸고, 이브는 술통에 담은 기름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납치당한 아이들이 머무는 숙소의 문을 남몰래 풀어놓았다.

끼릭. 훔친 열쇠로 녹이 슨 자물쇠를 돌려놓는 그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줄 알았다. 걸리는 순간 아주 위험해질 거라는 헤널드의 경고가 귓가에서 널을 뛰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하에서도 지하, 골방 중에서도 골방에 갇힌 발렌틴을 찾아갔다. 늦어진 시각인지라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브는 그의 눈에 둘러진 검은 천을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내가 널 구해 줄게. 꼭.>

실패로 돌아간다면 너와 나 둘 다 죽겠지만.

그래도 힘이 닿는 데까지는…….

설령 성공하여 우리 둘 다 무사한다고 한들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 폐부에서부터 고여 오른 슬픔과 애통이 숨 자락에 겹겹이 묻어났다.

이브는 저조차도 모르는 새에 흐른 눈물을 닦아 훔치고 아주 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납치되어 온 아이 중 한 명에게서 이게 축복을 빌어주는 행위와 같다는 걸 들은 이유였다. 죄없이 이곳으로 끌려온 만큼 앞으로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다음 날, 실행은 일사천리였다.

다행히 이브가 풀어놓은 숙소에서 아이들은 간밤 몰래 도망쳤다. 다음 날이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약상은 펄쩍펄쩍 뛰며 수하들을 두들겨 팼다. 점심쯤 이브는 대량으로 만든 식사에 수면제를 탔다. 그녀가 식사 당번인지라 주방을 서성대는 것에 의심받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하여 모두를 잠재웠다. 계획은 이후부터 진행되었다. 술병에 숨겨 둔 기름을 곳곳에 뿌린 후 불을 붙였다. 간밤 억울하게 잡혀 온 아이들이 전부 탈출했기에 이곳에 남은 무리라고는 죄만 그득그득 쌓아 온 악한들 뿐이었다.

지난밤 술과 약을 들이부은 악한들이 잠든 맹수처럼 곤하게 구는 사이, 새빨갛고 뜨거운 불길은 빠르게 번졌다. 이브는 보석과 돈이 든 가방을 챙긴 헤널드와 함께 곧장 발렌틴이 갇힌 골방으로 향했다.

발렌틴은 뿌연 연기 때문인지 기절해 있었다. 헤널드가 그를 업고, 이브가 가방을 맨 뒤 그들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간발의 차로 그들이 빠져나오는 순간 화염에 휩싸인 그곳이 폭삭 무너져 내렸다. 이브는 일평생 저를 옭아매던 지옥이 불바다로 변한 현장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발을 돌렸다.

그 순간엔 죄책감이나 슬픔, 그런 것들보다 아버지에게 후려 맞아 시퍼런 멍이 든 뺨의 통증이 더욱 강렬하게 엄습했다.

숲길을 따라 걷다가 발렌틴을 적당히 눈에 띄는 위치에 내려두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운 헤널드가 물었다.

<정말 인사도 하지 않고 갈 셈이냐?>

<…….>

<오늘이 지나면 다신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암담한 짐작이며 다소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브는 빠져나오는 내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발렌틴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그의 고결함은 역시 명확했다. 저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랬듯 햇살이 오붓이 내리쬐는 이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빛났다. 결 좋은 흑발이 잔뜩 꼬여 헝클어져 있음에도, 살이 내려 날렵해진 턱에 재가 묻었을지언정, 몇 날 며칠 동안 입은 옷이 꾀죄죄해졌더라도.

그는 고결하고 완벽한 제 보석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에 흠집을 내 버렸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만큼 치명적이고 끔찍한.

<……저와 만난 건 이 아이에게 악몽인걸요.>

<그래도…….>

<차라리 잊었으면 좋겠어요.>

그걸로 여생이 행복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런 마음임에도 망설임이 일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여진으로 흔들렸다. 그게 일어서야 할 몸의 움직임을 막고 자꾸만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브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졌다. 발렌틴의 눈가에 쓰인 검은 천을 애처로이 쓰다듬다가 그것을 쓱 풀었다. 그러자 발치에서 넘실대던 욕심이 훅 몸집을 부풀렸다. 당장 발렌틴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래서는 안되었다.

옅게 떨리던 손은 끝내 주먹을 쥐는 것으로 갈무리됐다. 이브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기억해 봤자 원망만 받을 존재이니까.

<그럼 이만 가자꾸나. 저쪽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화재를 알아챈 모양이야.>

헤널드가 주저하는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브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까부터 묘하게 시야가 먹먹하다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물기가 고여 있었나 보다. 소리도 없이 흐른 눈물이 하얀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그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미안해.

행복해.

미안해.

행복해…….

무엇이 더 먼저일지 모를 만큼 우열을 다투는 진심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사과는 아버지의 몫이고 앞날에 대한 축복은 저의 몫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내 전하기보다는 속내로 꾸역꾸역 삼켜 낸 전언 후 이브는 더듬더듬 몸을 일으켰다. 헤널드와 숲을 빠져나가며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나무의 몸통이 겹겹이 쌓이며 점차 시야가 흐려졌다. 그렇게 흐려지고, 흐려지고, 또 흐려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암전된 양 시야가 거멓게 물들었다.

아득한 꿈결을 빠져나오며 동시에 잠에서도 깨어났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리브가의 낯은 망연자실에 가까웠다. 익숙한 문양의 그림이 망막에 억지로 욱여넣어졌다.

발렌틴의 침실이다.

이미 한 번 깨어났으나 그때는 머리가 얼얼하고 몸 여기저기가 쑤시는 둥 여러 이유로 도통 정신을 찾질 못했다. 그러나 이제 헷갈릴 여지는 없었다. 감각이 이토록 선명한데 여기가 지옥일 리가 없었다. 저는 살아남았다. 그 높은 곳에서 몸을 던졌음에도 결국.

아쉬웠다. 그 정도 높이의 추락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하다못해 죽음으로마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러 기억이 혼용되듯 덧씌우고 뒤섞였다. 누군가의 고함, 염려, 근심. 잡다한 그것들이 머릿속에서 꼬여 들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건.

“…….”

시트 위에 가만 올려져 있던 손이 배 위로 안착했다. 납작하고 밋밋했다. 텅 빈 것만 같은데… 여기에 뭐가 있다고? 뭐가? 뭐가. 뭐가……?

<태중의 아기를 생각하셔서라도 부디 진정을…….>

주치의는 쩔쩔대며 그리 말했다. 서서히 올라오는 현실감은 오감을 넘어서는 고통을 수반했다. 아기를 가졌다고. 아기가 맞는 걸까. 배 속에 심어진 건 생명이 아니라 절망 같은데.

친부가 누구인지는 골몰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응시하는 천장이 부정할 여지 없이 명확한 증거였다. 저것을 안 보고 그릴 수 있을 수준으로 눈에 담았으니까. 그 정도로 이곳에서 매일같이 몸을 섞었으니까.

“……욱.”

속이 불편해졌다. 리브가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좋지 않았다. 침실의 곳곳이 더 세세히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것 때문에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될 뼈아픈 순간들까지 하나둘씩 떠올랐다.

숨을 쉬면 토할 것 같았고, 숨을 멈추니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곳이 싫었다.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도 또다시 이 장소로 돌아오게 됐다는 사실이 그녀를 좀먹어 갔다. 고작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서 서둘러 침대 바깥으로 발을 뻗었다. 오른쪽, 다음으로 왼쪽 다리를 바닥에 내디디는 순간 그녀는 ‘아윽!’ 하는 신음과 함께 침대 밑으로 고꾸라졌다.

빈혈이라도 이는지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왼쪽 다리가 마비라도 된 양 반응을 하지 않아서 결국, 죽기 살기로 기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처럼. 응접실로 통하는 쪽이 아니라 복도와 연결된 침실 문을 향해서.

죽고자 하여 절벽 밑으로 몸을 내던졌으면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살고 싶어서 버둥질을 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녀의 삶은 늘 모순투성이었다.

뭣보다 지금은 그런 게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발버둥이 무색하게 문가에 다다르기도 전에 어깨가 붙잡혔다. 그대로 몸이 돌아갔다.

“너, 지금…….”

이제껏 흐리기만 하던 시야는 왜 갑자기 멀쩡해지는 걸까.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주인의 뺨 위에 어디서 긁힌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그래 봐야 그의 고통 따위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리브가는 저를 붙잡는 손을 끙끙대며 떼어 내려고 애썼다. 발렌틴의 표정이 구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야.”

“놔, 주세요. 전, 저는 갈 거예요.”

“가다니…….”

“이곳이 싫어요, 여기 있기 싫다고요……!”

발렌틴은 그녀의 손길에 짝! 하고 내쳐진 제 손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깨어나기 전까지 그는 계속 응접실에 있었다. 주치의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연신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가며 어렵사리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데 몸의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걸로 보아 하체 쪽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진찰을 해 보아야…….>

때마침 그 보고를 듣던 차에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부리나케 달려와 본 침실의 광경은 넋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리브가가 발목이 싹둑 잘려 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은 채로, 그런 가련한 꼴을 한 채로 문을 향해 기어가는 건 정말이지…….

숨이 속에서부터 뜨겁게 괴어올랐다. 발렌틴은 어금니를 사리물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치마폭에 가려진 다리를 먼저 살펴봐야 했다. 일전에 깨어났을 때보다는 조금 더 정신이 있는 듯한 모습인데도 여전히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긴 게 확실했다.

그 의지에 눈이 멀어 발렌틴은 버둥거리는 리브가를 붙잡아 멋대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기실 그에게는 다리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감싸쥐자마자 리브가는 얼어붙었다.

동결은 잠시였다.

“싫어!”

리브가는 치마 속으로 파고든 그의 팔뚝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힘쓰며 고개를 저었다. 안색이 허옇게 질린 채였다. 꼭 그의 손길이 아주 징그러운 벌레라도 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 하지 마세요……!”

예기치 못한 격렬한 저항에 발렌틴은 손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리브가는 그의 가슴팍을 밀치고 그나마 움직여지는 오른쪽 다리를 바동거리며 그를 밀어내기만을 고집했다.

악에 받친 저항에 응접실 쪽에서부터 후다닥 뛰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명령으로 대기하던 주치의와 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발렌틴은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리브가의 눈동자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목격한 것과 비슷한 공황 상태였다. 물기로 젖은 그 눈에 두려움, 아니, 그보다도 조금 더 뚜렷한 공포심이 서려 있었다.

“여기선, 여기서는…….”

시퍼렇게 질린 채 간신히 끄집어내는 항변이 기어들어 가는 음성에 덧입혀졌다.

발렌틴은 아연해졌다. 아직도 치맛자락 안에 자리하여 종아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얼른 빼냈다. 그제야 리브가의 저항이 조금쯤 멎었다. 하지만 아직도 불길한지 씨근덕대는 호흡은 멈추지 않았다.

발렌틴의 눈동자가 푹 꺼졌다.

뒤통수를 여러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니 아득바득 기어서라도 가는 모습에 한 번, 이곳이 싫어 몸서리를 치는 토로에 한 번, 혹여나 자신이 강제로 성행위를 하려는 줄 알고 질겁하는 데에 한 번. 그리고 그 변변찮은 몸 상태로도 어떻게 해서든지 저와 거리를 벌리려고 혈안이 된 절실함에 한 번.

뒷골이 당겼다. 언짢으냐 묻는다면 아니다. 불쾌하다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속에서부터 번져 그를 쥐어짰다.

볼 안쪽 살을 꽉 짓씹은 발렌틴이 몸을 일으켰다. 주저앉은 리브가의 다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번쩍 안아 올렸다. 리브가가 몸을 비틀고 팔을 휘두르며 거부했으나 그는 되레 단단히 힘을 주고는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리브가는 그가 다른 침실의 침대 위에 내려 주자마자 다시 달아나려고 하였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아주 갸륵한 형태로 말이다. 침실뿐 아니라 그냥 이 저택 자체가 싫은 모양이었다.

덫에 걸려 곧 죽을 거라 믿는 동물처럼 도통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결국 발렌틴은 그녀를 꽉 끌어안아 지탱하는 방식을 택해야만 했다. 하는 수 없었다. 지금은 그녀의 상태를 살펴봐야 하는 게 우선이란 판단에서였다.

“시끄러워, 그만, 그만…….”

어느새 피죽도 못 먹은 낯이 된 리브가는 진찰 내내 계속해서 그런 헛소리를 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동자의 상태가 범상치 않았다. 간간이 속이 좋지 않다는 말도 했다. 정말 구역질이 올라오는지 욱욱대기도 하였다.

무릎 부근을 살펴보던 주치의는 한 박자 후에야 그 증상을 의아하게 관찰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시끄럽다니.

지금 이 침실에는 그녀와 발렌틴, 주치의,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퀄린뿐이었으므로 조금도 시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발렌틴의 눈치를 살피느라 리브가를 제외한 둘은 불가항력으로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내부에는 그녀의 앓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쥐 죽은 듯 써늘한 적막뿐이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환청이라도 듣는 양 자꾸만 두 귀로 손을 올렸다. 맥없이 풀린 동공하며 수전증 온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 역시도 예사롭지 않았다.

찰나, 멈칫한 주치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주인님, 외람된 질문이오나.”

서릿발 같은 기색의 주인이 두려웠으나 지금 이 여자를 똑바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필시 이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다. 그 두려움이 억지로 입을 벌렸다.

“혹 이분께 약을 먹이셨습니까?”

리브가의 발버둥에 뺨을 긁히고 턱을 얻어맞아도 꿈쩍하지 않던 발렌틴은 그 대목에서 움찔했다. 침대 근처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퀄린 역시도 비슷한 의문이 피어오르던 차였다. 지금 리브가가 보이는 반응은 일반적인 외상 환자의 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발렌틴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긍정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기에 퀄린은 마른세수를 했다. 주치의 역시도 티를 내지 않았으나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으로 한숨을 간신히 참아 냈다. 어쩐지 영 상태가 이상하더라니. 아무래도 뒤탈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짐작하는 바를 발렌틴 역시 짐작하고도 남았다. 지금 그녀가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게 제가 무심코 섭취하게 만든 약 때문이라는 걸.

그간 밤중의 기억이 발렌틴의 머릿속을 비수처럼 파헤쳤다. 직접 먹이지는 않았으나 간접으로도 충분했다. 저는 이제 부작용을 느낄 수도 없는 처지이나 약에 노출되지 않은 리브가라면 사정이 달랐다.

시간이 그토록 오래 지났음에도, 그는 몸이 약에 절여지던 처음의 고통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 숨 막히고 잔인한 고통을.

냉수와 온수를 오가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난리였다. 손과 발끝에서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 간질거리는 따끔함이 끝이 없었다. 이따금 일어나는 환청과 환각이 뇌하수체를 해충처럼 갉아먹고는 했다.

의지도, 기력도 전부 다 깎여 나간다. 그렇게나 견디기 지난한 고통이었다. 그걸 지금 리브가가 겪고 있다고…….

주치의는 흘끗 살핀 주인의 표정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그 정도로 사람 숨 막히게 살벌한 안색이었다.

머지않아 발렌틴이 정신을 차린 건.

“……이봐.”

품 안에서 바르작대던 리브가의 고개가 불현듯 툭 꺾였을 때였다. 그의 간담이 서늘하게 식었다. 얼굴과 목덜미가 땀으로 젖은 그녀의 얼굴에서 발렌틴은 아주 어릴 적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겪었던 괴로움 역시도.

“이브!”

의식을 잃고 늘어진 몸뚱어리를 껴안은 손등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깃펜의 움직임이 멎었다.

목을 옥죄는 크라바트를 잡아당긴 퀄린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정결하여 그만큼 경직된 집무실 속,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은 이의 옆태가 보였다.

비스듬한 자세를 취한 발렌틴의 손에서 이제 몇 개비째인지 모를 시가가 두 동강이 났다. 하얗고 기름한 손가락 아래로 재같이 검은 부스러기가 바스스, 떨어졌다.

예전이라면 매캐한 향을 조금이라도 제 폐에 욱여넣지 못해 안달을 내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그리 아끼던 애용품을 미련 없이 뚝뚝 끊어대고 있으니 퀄린은 진정 살이 떨리는 심정이었다. 더 무서운 건, 지금 저놈이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옆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눈동자가 밤을 삼킨 것처럼 어둑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며칠째지?’

놈이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흐리멍덩하게 굴기 시작한 게.

퀄린이 기억하기로 도망친 하녀를 잡아다가 침실에 가둬 놓은 이후부터였다.

<약에 의한 부작용이 확실합니다. 주인님께서도 겪어 보셨으니 잘 아실 테지만요. 헛구역질은 단순히 임신 증상일 수도 있지만, 환각 현상이 동반된다면 틀림없습니다.>

<…….>

<그리고 하체의 문제 역시도……. 추락하던 차에 무릎에 큰 충격이 가해져 근육에 일시적인 마비 증상이 온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꾸준히 약을 먹고 재활 차원으로 하루에 한 번씩 습보를 병행해야 할 듯합니다.>

주치의의 보고를 듣던 발렌틴의 표정이 어제 일처럼 상기됐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낯이었다.

보고대로, 현재 하녀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태중인지라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상태에 발렌틴이 먹인 약으로 약간의 정신 이상 증상 동반, 게다가 왼쪽 다리에는 근육 마비가 와 제대로 서는 것조차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찢어져 붕대를 감은 뒤통수는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원흉이 바로 눈앞에 있는 발렌틴이었다.

도망가고 싶게 만든 것도 쟤, 절벽에서 떨어지게 한 것도 쟤, 임신시킨 것도 쟤, 게다가 약까지 처먹인 것도 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자초한 게 쟤라는 말이다.

솔직히 퀄린은 조금 놀랐다.

골칫덩어리 발렌틴이 설마 지금껏 저런 반병신 꼴 만든 이 하나 없었겠는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죄 없는 귀족 영랑의 장례식을 치르게 만들지 않았었나. 물론 그는 제가 그놈의 멱이라도 땄느냐며 신랄하게 비웃었지만, 오히려 그 초연한 태도가 퀄린의 의구심에 불을 지폈다. 모든 게 다 그의 의도대로 된 양 싶어서.

그 정도로 양심을 찾아볼 수가 없는 뻔뻔한 놈이었다.

그러니 이번 역시도 그러든지 말든지 같은 후안무치의 태도로 나올 줄 알았건만…….

‘왜 저 새끼도 덩달아 병신이 돼 가는지 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할 겸 물었다.

“발렌. 식사가 아직이지 않나? 챙겨 오라고 할까?”

곰살맞은 제안에도 발렌틴은 며칠째 그러했던 것처럼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놈이 애초 집무실에 와 있는 이유가 자신을 독대하고자 함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증거처럼 그의 시선은 오직 문에만 꽂혀 있었다.

그때, 애가 바짝바짝 타는 그의 심경을 이해한 신이 자비를 한 줄기 내려 준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열린 문 너머에는 주치의가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발렌틴에게, 그리고 퀄린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저, 오늘 역시도…….”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차마 끝맺음 짓지 못한 말을 가까스로 털어놓았다. 목이 조이는 표정이 꼭 단두대 위에 올려지기라도 한 양 불안하게만 보였다. 그 우려대로, 발렌틴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리브가를 침실에 감금 아닌 감금을 한 지 2주째였다.

처음 깼을 때는 난동, 다음 깼을 때는 발악이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리브가는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정확히는 침실을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 앞을 지키는 공작가 기사들로 인해 그게 수포로 돌아가자 무얼 해 보고자 하는 기력을 아예 내던진 양 굴었다.

괜한 일로 힘을 빼지 않는 건 다행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지금 상태가 좋다는 것도 아니었다. 매사에 무기력해진다는 건 그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또 치료를 거부했다고.”

주치의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단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스스로를 돌볼 의지조차 사라진 리브가는 시종일관 치료를 거부했다. 주치의가 와도 요지부동이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 상태로 죽어도 좋다는 듯 완전히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었다.

기사를 부르거나 사용인을 시키는 등 무력을 동원한다면 충분히 진찰을 받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도무지 그런 강제적인 방식을 쓸 수가 없었다. 제가 다리를 만진 것만으로도 바들바들 떨던 지난날의 기억이 부단히 충동을 억눌렀다.

“그 계집은.”

발렌틴이 어느새 또 꺼내든 시가를 손끝에서 부러뜨리며 물었다.

“지금 함께 있습니다. 그래도 그 하녀가 곁을 지켜주는 덕분에 식사는 하시는 모양입니다. 식사에 약을 섞으라 따로 지시도 내려 둔 참입니다. 그리고 약의 부작용 역시 복용의 정도가 미미해서인지 차츰 가라앉고 있습니다.”

주치의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쓱 닦으며 냉큼 고했다.

발렌틴은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리브가의 생활은 그의 지시 아래에 철저히 통제당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했으나 발렌틴이 그를 두고 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그의 앞에서 목숨을 함부로 내팽개친 전적이 있는 그녀였다. 한 번 일어난 일, 두 번이라도 어려울 게 무어가 있나. 오히려 더 쉬워졌을 테고 어쩌면 실패한 데서 괜한 오기가 생겼을지 모른다.

발렌틴은 행여나 제가 손을 놨다가 또다시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리브가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불상사가.

요즈음 보이는 무기력한 태도가 그 짐작에 힘을 실었다.

뭣보다 이대로 리브가를 놓아줄 수가 없는 건,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까닭이었다.

속이 복잡한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심경이 사나운데 그녀에게 그 어떤 짓도 할 수 없었다. 일단 부상에 대한 치료가 급했고, 그다음에는…….

사실 이제 그는 자신이 그녀와 무얼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망가뜨리고자 하는 목적이 흐지부지해진 이상 둘 사이에 남은 건 과거, 그리고 현재로까지 이어진 악연뿐이었다.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학을 떼는 본래의 침실 대신 다른 곳을 내어 주고 기사들을 문 앞에 배치시켰다. 리브가가 잠이 든 사이 흉기가 될 만한 것들도 모조리 치우라 지시한 지 오래였다.

<지금부터 리브가를 보살펴라. 보수는 부르는 대로 줄 테니.>

또한 리브가가 제게서 도망친 새벽 날 붙잡아 가둔 케시를 그녀 옆에 붙였다.

<보수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보다도 저를 곁에 붙이기보다는 리브가를 이만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케시는 며칠 갇혀 있던 이답지 않게 눈망울을 또렷이 드러내며 그리 말했다. 반항적인 눈빛에 담긴 함의가 술술 읽혔다. 너 같은 쓰레기가 주는 돈을 받느니 차라리 나가 죽는 게 나으며, 더 이상 리브가를 괴롭히지 말라는 가시 박힌 속뜻 말이다.

두 사람의 대치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보며 퀄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껏 발렌틴이 여자를 때리는 건 본 적 없으나 어쩌면 오늘 그걸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곤혹스러움의 형태로 드러났다.

하지만 발렌틴의 태도는 예상외로 온순했다.

<……지금은 안돼.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

케시의 낯빛은 그 말에 대번 바뀌었다. 발렌틴은 상황을 간추려 설명했고 그럴수록 그녀의 안색은 굳어져만 갔다.

이윽고 말을 마쳤을 때 케시는 주인을 역적 보듯 쏘아보고 있었다. 당장 매질을 당하고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그 증거처럼, 퀄린 역시도 그녀의 태도에 심기가 슬슬 불편해졌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발렌틴은 덤덤했다. 지금으로서는 리브가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이 계집밖에 없음을 실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발렌틴이 접근할수록 리브가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불안정해진다. 그러니 그녀를 안정시킬 존재를 곁에 붙여둘 필요가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돈이 탐나서가 아니에요. 당연히 따로 보수도 받지 않을 거고요.>

제안을 수락하기 무섭게 케시는 리브가가 있는 침실로 안내되었다.

과연, 짐작대로 산송장과 다를 바 없던 리브가가 그럴싸한 생기를 찾은 건 케시를 재회했을 때였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눈물 젖은 얼굴로 친구를 끌어안던 그녀의 모습이 발렌틴의 속에 대못처럼 박혔다. 그 장면은 다시금 뒤통수를 후려치는 일종의 비참한 심정을 떠안겼다.

이런 장면을 직면할 때마다 자신이 리브가의 삶에 있어 주어진 아주 끔찍한 형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자신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렇게 망가질 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됐으니 이만 물러가.”

발렌틴은 주치의를 향해 손을 내저은 후 얼굴을 감싸쥐었다. 신경이 뾰족뾰족하게 날 선 과민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시가나 술을 찾았다. 이번 역시도 그러려고 품을 뒤졌다. 하지만 손길은 얼마 안 가 딱딱히 얼어 버리고야 만다.

<시끄러워, 그만, 그만…….>

<여기선, 여기서는…….>

자신이 술과 약에 반쯤 눈이 돌아 저지른 짓이, 아니, 그보다는 그로 인하여 리브가가 힘들어하던 게 자꾸만 생각나서.

혀끝이 떫어지고 속이 무언가에 긁힌 양 껄끄러워진다.

술렁술렁. 익숙지 않은 감각은 생경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럴 때면 불쑥 치미는 충동은 가라앉고 이를 악물게 된다. 의지가 충동을 이기는 작금의 상태는, 그가 본격적으로 망가진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치의가 나가기 무섭게 퀄린이 말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보러 가든지.”

왜 며칠째 여기 죽치고 앉아서 지랄인 거지.

차마 뒷말까지 뱉을 용기가 없는 퀄린은 적당히 속엣말을 삼켜 넘겼다. 발렌틴은 2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직 이곳에서 보고만 받고 좀처럼 그 하녀가 있는 침실로 찾아가지 않았다.

퀄린에게는, 정말 설마설마 싶지만, 그게 꼭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뭐가 두려운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그로서는 모른다. 그럼에도 꼭 보이는 게 그랬다. 넋이 나간 와중에도 문소리만 들리면 고개를 쳐드는 건 이를테면 초조함 같았고, 숨길 겨를 없는 초췌한 안색은 정체 모를 불안 속을 헤매는 것 같고…….

‘쟤가 그런 걸 느끼기는 하는 놈이었나?’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발렌틴이 두려워한다라. 마약 하나로 첼레스테의 고지에 서서 음전한 귀족들을 제 입맛대로 주무르는 놈이었다. 저놈이 작정한다면 수도를 당장 난장판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테다. 그렇게나 떠받들어 주는 세상 속에서 살아온 놈이니만큼 그런 위기감을 느껴 본 적조차 없을 터. 발렌틴에게 두려움이란, 가난한 부자라는 말과 비등비등한 수준의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녀석이 일개 하녀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을 두려워한다?

‘……아냐, 고작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기는 했지.’

잠자코 있었으나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처지기에 퀄린도 돌아가는 상황을 얼추 알고는 있었다.

단지 질린다는 이유로 하루가 멀다 하고 침대 덥히는 여자를 갈아치우던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대관절 무엇에 핀트가 나갔는지 줄기차게 리브가만을 찾았다. 약이 아니고서야 소유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는 녀석이 처음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굴었다.

한 번은 발렌틴을 찾으러 갔다가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의 정사를 엿본 적이 있었다.

그때 발렌틴은 하녀가 퀄린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제게 고정시킨 채로 살벌한 눈빛을 내보였었다. 온몸에 가시가 박힌 양 움츠리게 만드는 눈빛은 당장 꺼지라는 엄포나 다름없었다.

와중에도 저보다 작고 가녀린 하녀의 품으로 파고드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주저는커녕,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적나라한 행위에 임하면서도 그녀와 더 달라붙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눈만 뒤집어까지지 않았지, 완전히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하녀에게 눈이 돌아간 발렌틴의 태도는 바짝 마른 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뻑뻑한 모래 가루가 낭자한 사막 속에서, 간신히 오아시스를 발견한 나무처럼 그 샘 속에 제 몸을 꽂지 못하여 안달이 난 양 굴었다. 그리하여 그 풍성한 물을 쭉쭉 빨아들여 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무는 윤택해졌을지언정 샘은 건조하게 말라 버리고야 말았다. 공생이 버거운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발렌틴과 그 하녀가 딱 그 짝이었다.

벌떡.

“……! 깜짝이야.”

퀄린은 갑자기 몸을 일으킨 발렌틴을 보고 토끼 눈을 했다. 그는 사람이 머쓱할 만큼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집무실을 훌쩍 나섰다. 발렌틴이 자취를 감추고서야 눈치 안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쉴 수가 있었다.

‘보러 가지도 못하고 저 지랄 떨 거면 차라리 사과를 하든가.’

퀄린은 머잖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지. 저놈이 사과를 할 리가……. 뭣보다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갔지.’

굳이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건, 제가 보아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용서에도 한계선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난날, 피임약을 건네받던 리브가의 표정이 불쑥 떠올랐다. 사람을 식물로 대입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퀄린은 그녀가 서서히 메마르고 시들어 가는 과정을 엿본 기분이었다. 발렌틴에게 속한 사람인지라 어떻게 개입하진 못했으나, 그녀가 처한 상황이 여간 혹독한 게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등신.’

속으로나마 핀잔을 놓고 있자니, 불쑥 생각난 장면이 있었다.

리브가가 친족처럼 여기던 노인이 죽은 날이었다. 발렌틴은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저택을 나서기 직전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해서 퀄린은 우산을 들고 헐레벌떡 그의 뒤를 쫓았다.

태풍이 치면 그대로 날아갈 것처럼 조악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집. 허름하고 너저분한 뒷마당에 하녀가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리브가는 온몸이 비에 젖든 말든, 진흙에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망연히 땅만 응시하고 있었다. 봉분처럼 살짝 솟아난 땅이었다. 그 아래에 바로 전날 숨을 거두었다는 노인이 묻어졌음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발렌틴은 비가 내리는 언덕길 위에 서서 그 장면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의 두 눈은 지독하리만치 굳건하게 리브가에게만 꽂혀 있었다. 싸아아.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는데도, 바람이 불어 이따금 물줄기가 얼굴을 서늘하게 후려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퀄린은 몇 번이고 어깨 너머의 발렌틴을 힐끗거렸다.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감정이 그 안에 고여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빛과 비슷한 색깔의 감정이었다. 아니면 빗물에 흠뻑 젖어 생긴 칙칙한 진흙탕…….

그 상태로 말없이 지켜만 보다가 발을 물리던 때의 발렌틴은, 마치 제 손으로 저지른 끔찍한 실수를 목격한 듯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건 적어도 퀄린이 처음 보는 그의 표정이었다.

‘……에휴, 정말이지.’

단정한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퀄린은 펜촉을 잉크통에 넣었다가 빼냈다.

‘그나저나 임신이라고…….’

깃펜을 종이 위에 가져다 대니 하얀 종이가 서서히 물들었다. 까만 흔적이 고민처럼 길게 길게 이어졌다.

한편.

발렌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향한 곳은 당연히 리브가가 머무는 침실이었다. 진즉 도착했음에도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가만 서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그런 그에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리브가가 이곳에서 지내게 된 지 2주.

개중 1주일간 발렌틴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거부당했다. 정말 말 그대로 ‘거부’였다. 기사가 안쪽에 말을 전하면 얼굴을 드러낸 건 리브가가 아닌 케시였다.

<지금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리브가의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아침에 찾아가도, 점심에 찾아가도, 저녁에 찾아가도 답변은 한결같았다. 본래의 성질머리 같았으면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밀친 후 보란 듯 문을 열어젖혔을 것이다. 그 후 그나마 주치의에게는 뒷모습이라도 보여 주는 리브가를 잡아끌어 기어이 얼굴을 마주했을 테지.

하나 그렇게 저 좋을 대로 굴지 못한 건…….

<지금의 상황에서는 뭣보다 안정이 중요합니다, 주인님. 절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됩니다. 부상뿐 아니라 임부임을 고려해서라도요. 특히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가장 그러합니다. 저분에게는 휴식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주치의의 신신당부를 간과할 수가 없던 탓이었다.

그가 약의 부작용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 이후로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잡힌 기분이었다. 주치의를 포함하여 누구든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면 저답지 않게 주춤거리고야 말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렸다.

미치도록 신경이 쓰여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사람 돌아 버리도록 짜증스러웠다. 내가 왜 이렇게 절절매야 하나 싶다가도 또다시 충동에 몸을 맡기면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본능이 깃들었다.

다리가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는데도 제게서 도망치려고 몸부림치던 리브가의 모습이 사고 회로를 엉망으로 부서뜨렸다. 그게 모든 충동에 급격한 제동을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굳어 버린 동상처럼 가만히 문고리만 잡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

발렌틴이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닫힌 문 너머로 제법 큰 소음이 났다. 헛것이라도 들었나 싶었다. 하나 문을 지키던 기사들까지 뒤를 돌아보는 걸 보니 아닌 듯했다.

그는 언제 주저했느냐는 듯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잠시 후 발렌틴은 바닥에 주저앉은 리브가와 그 앞에 다리를 굽혀 앉은 케시를 발견했다. 리브가의 옆으로 엎어진 테이블과 촛대, 장식품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케시는 주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브가는 문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등장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애초 그녀는 다른 이에게 신경을 기울일 틈도 없어 보였다. 케시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으니까.

슬쩍 보이는 옆얼굴이 진중하며 이마에는 땀도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용을 쓰는 게 발렌틴의 눈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뭐.’

그 장면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데 리브가는 케시의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세웠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틴 그녀가 왼쪽 다리를 한 발 앞으로 뻗었다. 그러니까, 걸음마 연습을 하는 아이처럼.

누가 억지로 잡아끄는 게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행하는, 그녀의 의지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도록 치료에 의지가 없는 양 시체처럼 군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 이 장면은 아무리 봐도 리브가가 이전처럼 걷기 위해 매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발렌틴은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때마침 인기척을 느꼈는지 리브가 역시도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거부로, 그의 망설임으로 자그마치 2주 만의 대면이었다.

“치료를 받지 않겠다 버틴다더니…….”

잇새로 스며 나오는 그의 음성이 서느랬다.

상황은 급물살 타듯 몰아쳤다. 당황하여 리브가의 앞을 막아선 케시는 발렌틴의 명을 받은 기사들로 인해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대는데 발렌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은 케시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둘만 남겨지기 무섭게 문을 쾅, 닫은 발렌틴은 이글이글 끓어 대는 눈으로 리브가에게 다가왔다.

“문제가 뭐야.”

“읏.”

어깨를 부여잡는 힘이 그악스러웠다. 가까스로 세운 다리에 힘이 풀리며 리브가가 비틀거렸다. 발렌틴은 그녀의 손목을 확 끌어당겨 침대에 내던지듯이 앉혔다. 그리고 도망치지 못할 벽을 만드는 것처럼 상체를 가까이 붙인 채로 음산하게 읊조렸다.

“낫고 싶으면서 의사는 왜 거부해.”

리브가가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그를 밀어냈다. 가슴팍 위에 얹어진 가녀린 손등을 보니 입 안에 다시금 모래가 퍼부어지는 심정이었다. 속이 까끌하게 말라 갔다. 수분기 없는 땅 위에는 당연히 균열이 바짝바짝 일었다. 왜 초조한지 모르겠으나 초조했고, 그 정체 모를 감각에 배알이 사정없이 뒤틀렸다.

“치료할 마음이 있으면서 왜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느냐고!”

“놔주세요.”

“내가 네게 한 짓이 열받아? 그래서 이러나? 어쭙잖은 복수라도 하겠다고?”

지금 그녀가 보이는 태도는 그를 아주 우스꽝스러운 처지로 만들고 있었다. 누구는 눈치 보듯 숨만 간신히 쉬고 지낸 2주였는데, 누구는 무기력하게 굴면서 뒤로는 이런 발칙하고 불가해한 행보를 벌이고 있을 줄이야.

납득의 농도가 떨어지는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한 방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간 제가 애끓고 힘겨웠던 만큼 너 역시도 당해 보라는.

그 방식에 열이 받은 게 아니었다.

복수?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도 된다. 그가 분노하는 건, 그 방식으로 고작 스스로의 몸을 축내는 쪽을 택한 리브가의 선택이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총을 들고 널 죽여 버리겠다고 설치는 게 이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복수를 할 거면 원흉인 그가 피해를 입도록 해야지, 왜 미련하게 그녀 자신을 망치느냐는 말이다.

“아, 어쩌면 이게 더 효과적인 걸 알고서 그러는 건가? 내가 네 눈치만 살피면서 설설 기는 쪽이 더 속 시원할 테니까!”

리브가는 저를 옭아매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는 입을 가렸다. 그의 거친 손속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린 까닭인지 메슥거림이 목청까지 치밀었다. 소량에다가 간접적으로 섭취해서인지 환청과 같은 미약한 정신 이상 증세는 호전됐으나 임신으로 인한 증상은 여전했다.

“그만, 속이…… 속이 안 좋아요.”

종전까지만 해도 혹독하게 굴던 발렌틴의 아귀힘이 순간 약해졌다. 핑계가 아닌지 리브가는 정말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오롯이 발렌틴을 담던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게 이상하게도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그녀가 구역질이든 뭐든, 어떠한 이유를 핑계로 들며 또다시 상황을 어영부영 넘기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 전 제 두 눈으로 목격한 장면은 반드시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말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제게서 떨어지는 것 역시도 마뜩잖았다. 저 회색빛 눈동자의 외면을 가히 넘길 수가 없었다. 가슴 안쪽이 실을 칭칭 감아 놓은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입술을 가린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갸름한 턱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내 손에 해.”

리브가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는 덧붙여 말해 주기까지 했다.

“토할 것 같으면 내 손에 하라고.”

그는 작정한 것처럼 그녀의 턱 아래에 손을 딱 붙였다. 팔목을 붙잡아 거푸 밀어내도 꼼짝하지 않았다. 리브가의 힘이 약한 것도 있지만 그의 의지 역시 굳건했다.

애초에 게워 낼 생각도 없었다. 리브가는 힘겹게 그의 손을 치우는 대신 고개를 비틀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짧은 심호흡을 거푸 내쉬었다.

발렌틴은 바로 코앞에서 그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볼우물이 깊이 팰 만큼 사력을 다해 구역질을 참아넘기는 모습이 꼭 견디기 벅찬 모욕을 씹어 삼키는 듯 보였다. 단순히 비위가 상한 걸로 모자라 일종의 수모를 겪고 있기라도 한 양. 그러니까, 임신으로 인한 증상이 그토록 거북하고 불쾌한…….

발렌틴의 동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비틀렸다.

뒷골이 다시금 찡하니 울렸다.

“……임신 때문인가?”

잠깐의 침묵 후 묻자 리브가가 손을 꽉 말아쥐었다. 치맛자락 위, 발렌틴의 손바닥 안에 놓인 그 움직임은 마치 하나의 발악처럼 느껴졌다. 그게 그에게는 명료한 확신이 되었다.

황당함에 말문이 더러 막혔다.

그러니까, 홀로 걷는 연습을 할 만큼 치료 의지가 있음에도 주치의의 진찰을 거부한 게…….

“고작, 임신 때문이라고……?”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주치의를 만나면 태아까지 다시 제 눈과 귀로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

발렌틴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실소가 비죽 새어져 나왔다. 그러나 미간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어서 웃는 상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임신에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구는 그녀만큼이나 형편없는 낯짝이었다.

“제정신이야?”

“…….”

“왜 미련하게 그따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해!”

핏줄이 툭툭 올라설 만큼 힘이 실린 그의 손이 리브가의 어깨를 잡아챘다. 조절이 되지 않는 힘에 리브가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그러나 발렌틴은 오히려 그런 그녀의 위로 올라타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왼쪽 다리를 움켜쥐었다. 사색이 된 리브가가 발버둥을 쳤으나 눈에 뵈는 게 없는 발렌틴 앞에서는 무용한 짓이었다.

“지금 잘 걷지도 못하는 네 상태를 본인이 알지 못하나? 안 답답해? 안 힘드냐고! 평생 절름발이처럼 살고 싶어?”

제 애를 뱄다는 사실이 그녀의 건강마저 해치고 있는 상황에 눈이 돌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화낼 일이 아닌 걸 안다. 기실 분통을 터뜨린다면 그 스스로에게 향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발렌틴은 그 노여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서투르고 어설퍼서 웅덩이처럼 고인 감정의 덩어리는 그대로 리브가에게 쏟아졌다. 아주 지독한 흑빛깔의 덩어리였다.

리브가는 발버둥을 치다가 그럴 여력도 떨어졌는지 서서히 몸에 힘을 풀었다. 곧 그녀가 매가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어조로 물었다.

“왜 이러세요.”

씨근덕대던 발렌틴이 움찔했다.

리브가는 제 위에 올라탄 그를 마주 보는 대신 고집스레 옆만 쳐다봤다. 저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아 주는 옆태가 냉랭하고 야속하여 속이 여지없이 지끈거렸다.

“이게 주인님이 바라던 제 모습이잖아요.”

저를 담지 않는 회색빛 동공은 무광했다. 아니면 윤기도 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지고 부스러져서…….

발렌틴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추한 꼴이 되길 원하셨으면서…….”

발버둥도 희망이 있을 때야 주어지는 발악이었다. 구조의 여지가 보이는 해수면이라면 곧 죽을 것처럼 바동거릴 수 있지만, 아주 깊은 곳까지 가라앉으면 살고자 하는 의지도 부옇게 흐려져 버리고 만다. 암담한 현실에 순응하여 체념에 몸을 맡긴다.

제 아래에 깔린 리브가가 그랬다.

풍덩 빠져서 가라앉고 또 가라앉다가 결국 저 어둑한 심해에 가라앉은 유리병처럼.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텅 비어 버려서.

아.

발렌틴은 지금에 와서야 또렷이 보였다.

오만한 자신이 무얼 망치고 또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이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 까닭에…….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이래, 내도록 술렁거리던 마음을 자각한 것 역시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불안과 초조, 혹은 두려움. 어쩌면 질겁. 갖가지 생경한 감각이 똘똘 뭉쳐 저를 파도처럼 덮친 건 모조리 후회로부터 기인하는 마음이었음을.

* * *

일주일이 빠르게 지났다.

로트링겐 공작저는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는 양, 혹은 깨진 얼음 조각의 잔해를 밟는 양 사뭇 정적인 긴장감이 흘렀다.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달라진 건 없었다. 리브가의 상태도, 그리고 그런 리브가를 대하는 발렌틴의 태도도.

리브가가 치료를 거부하는 정확한 이유에 대해 알게 된 그날, 발렌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자기가 손을 밀어 넣느라 헝클어진 치맛자락을 내려 주고 이불을 덮어 준 뒤,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제가 이러는 게 보기 싫다면, 보내 주시면 돼요.>

<…….>

<그럼 다 편할 거예요. 저도, 주인님도.>

그가 침실을 빠져나가기 직전, 침대에서부터 흘러나온 목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기력을 찾아볼 수 없는 어조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밤, 현재.

발렌틴은 그녀가 머무는 침실로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때마침 은빛 대야와 보송보송한 수건을 든 하녀가 나타났다. 주치의의 지시로 밤마다 리브가의 다리를 안마한다고 했다.

“이리 주지.”

하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건 말건 발렌틴은 그것을 직접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에도 내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미 밤이 깊어진 야심이었다.

발렌틴은 침대로 직행했다. 협탁에 마련된 촛대 위에 불을 붙였다. 부유스름한 빛으로 조금쯤 시야가 밝아졌다.

“…….”

그제야 곤히 눈을 감고 있는 리브가를 발견했다. 약이 든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온수가 담긴 대야와 수건을 협탁에 올려 두고서 발렌틴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스름한 화광에 비치는 얼굴이 꺼칠했다. 이곳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편히 지낸다 한들, 그런 안락함과 별개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마른 수건을 온수에 담갔다가 꺼내 쭉 짰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고서 곤히 놓인 그녀의 왼쪽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치맛자락을 무릎 위까지만 걷어 올린 뒤, 젖은 수건으로 무릎을 감싸 천천히 주물렀다. 누군가를 직접 제 손으로 챙겨 주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모양새가 꽤나 서툴렀다. 지긋한 힘을 싣다가도 혹시 아플까 싶어 얼른 빼기를 반복했다.

깊이 잠들어 있던 건 아니었는지, 얼마 안 가 리브가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가 다리 쪽에 가해지는 힘에 움찔했다. 그 정체가 발렌틴이라는 걸 알고서는 더욱 경직되어 몸을 움츠렸다. 흐릿한 연회색 눈동자에 초점보다 경계심이 먼저 어른거렸다. 또다시 습관처럼 거부를 표하기도 전에, 발렌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대답해.”

“…….”

“이것만 답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어둠 사이로 시선이 얽혀들었다.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

“왜…… 이곳에 있었던 거냐고.”

모호했으나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기도 하는 질문이었다. 같은 과거, 추악한 역린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가해자의 입장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녀가 어찌하여 이 땅, 이 저택에 남아서 이렇게나 우연처럼, 악연처럼 맞닥뜨려버렸는지.

발렌틴이 기를 쓰고 그녀를 찾아낸 게 아니었다.

리브가가 이곳에 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걷어 낸 진실 아래에 남은 건 그 의문 하나뿐이었다.

리브가는 그의 상태가 이전과는 좀 달라졌음을 체감했다. 제 주장만 내세우며 그녀를 곤궁으로 밀어 넣을 때와 달리 지금의 그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줄 위를 거니는 곡예하듯 아슬아슬했다.

예전이라면 희멀겋게 질린 저 뺨을 제 온기로 감싸 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갈피를 잃은 양 요동치는 시선이 제게 닿기를 원했을지 모른다. 거기서 답을 구하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서.”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품은 사랑이 그렇게나 어리석었다. 부질없는 감정에 놀아나다가 결국 맞이한 이 모양 이 꼴은 그런 과거의 자신을 보란 듯 비웃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라는 말에 발렌틴은 목이 조이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사랑?”

사랑이라고? 그딴 말도 안 되는 감정 하나로 내 앞에 나타나고, 곁에 있기를 자처했다고?

“왜……?”

나를? 왜? 언제? 언제부터……? 아니, 왜……?

금빛 홍채가 혼돈으로 젖어 요동쳤다.

“저도 모르겠어요.”

“…….”

“골몰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주인님을 보지 못할 때에도 계속이요. 그런데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나서야 알았어요. 애초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애써 곱씹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구나.”

“…….”

“감정에 이유를 찾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구나…….”

그와 함께한 고작 두 달간의 기억이 삶의 뿌리를 쥐고 뒤흔들었다. 그건 분명 사랑이 맞았다. 그토록 강렬하고 찬란한 게 사랑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랑에 관하여 곰곰이 헤아려본 적은 있어도 그게 아니라는 부정을 떠올려 본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경우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고, 발렌틴은 지금에 와 그녀를 보고서야 깨달은 바였다.

리브가의 말대로였다.

세상에 이유를 가져다 댈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감정이었다. 모순적인 상황에서도 감정이 개입된다면 모든 게 그럴 듯한 탈을 쓸 정도로 그것은 이례적이고 특별했다.

그 각별한 것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참아 내게 하던 원동력이었다.

리브가는 거기까지 말한 후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제 감정을 털어놓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담담하고 무감한 모습이었다. 바람으로 따지자면 누군가의 머리칼 한 올 흔들리게 하지 않을 만큼 잔잔했다.

그게 꼭 어리석은 사랑에 된통 당하여 이제는 그 수렁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후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왜 그게 속을 이토록 아프게 쥐어짜는지.

“그럼…… 지금은.”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제 속을 갈라보면 바짝 마른 넝마쪽이 되어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목이 탔다. 갈증이 났다. 그런데 이게 목이 말라서 나는 갈증인지, 그녀의 반응을 갈구하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긋지긋해요.”

“…….”

“피로하기만 해요.”

원치도 않았는데 멋대로 쥐어지고, 버리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거추장스럽고 성가셨다. 어여쁘고 곱기만 하던 감정은 극단의 극단까지 몰아붙여지다가 결국 이리도 무참한 꼴로 변질됐다. 우습기를 너머 허무하기까지 했다. 몇 년을 고이 품어온 감정인데, 고작 몇 달 만에 풍비박산이 난 게 허무하지 않을 리가.

바라던 대로 그녀가 다시 저를 바라보았으나, 그 눈동자 속에서 발렌틴이 기대하던 감정은 엿볼 수 없었다. 밀려올 조짐이 보이는 게 아니라 이미 다 빠져나간 후였다. 그가 무언가를 시도해 보기 전에 그것들은 벌써…….

그는 아직 시작조차 해 보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끝을 보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리브가의 무릎을 감싸쥐고 있던 발렌틴의 손이 툭 떨궈졌다. 물에 젖은 수건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긋지긋하다는 게, 피로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한 순간이었다.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힘 빠진 어투로 내린 정의가 속을 난도질했다. 날붙이 같은 그 정의가 함부로 휘저어졌다. 신경을 제멋대로 뒤틀던 예민함이 모조리 통각으로 변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신이 이렇게 무력해질 리 없었다.

그 무엇 하나 두려운 게 없던 그였는데, 이상하게도 저 말이 딛고 있는 지반을 흔들 만큼 극심한 불안을 유발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은 온전한 그의 몫일 뿐이다.

그 안에 리브가의 몫은 없었다.

* * *

한편.

“아아악!”

밴텀 백작가의 침실 안쪽에서부터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노여움 가득 찬 소리에 집사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가관이었다. 테이블이고 의자고 제대로 서 있는 게 없었다. 넘어진 의자 뒤편으로 몹쓸 손찌검을 당했는지 얼굴과 뺨 부근에 퍼런 멍이 든 채 숨어 덜덜 떠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상체를 부풀리면서까지 씩씩대는 반나체의 사내를 향했다.

사내는 분을 참기가 힘든지 연신 씨근덕대며 탁자 위에 놓인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그 술잔을 여자가 숨은 의자 쪽으로 던졌다.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꺅!’ 하는 여자의 비명이 혼잡하게 얽혀들었다.

“젠장! 뒈져, 쓸모도 없는 계집년 같으니라고!”

“도련님, 진정하시지요.”

“놔! 제기랄!”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사내, 코올리 밴텀이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로트링겐 영지에서 변고를 당하고서 수도로 올라온 지 몇 달. 발렌틴이 복부에 박아 넣은 총탄으로부터 간신히 목숨은 구했다지만 그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혀를 그따위로 성의 없이 굴리니까 내 좆이 안 서는 거 아니야, 어?”

“…….”

“그게 아니라면 왜 안 서겠어. 어? 서지 않을 리가 없잖아. 왜, 왜 서질 않느냐고!”

그가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감싸쥔 채로 웅얼거렸다.

목숨은 건졌다지만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자로서의 긍지가 뚝 꺾였다. 처음 이 현상이 나타난 건 수도로 올라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발렌틴, 그 사생아 나부랭이한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바닥을 치는 기분을 전환할 겸 창부를 침실로 불러들였다.

<저기, 나리. 왜…….>

창부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턱이 뻐근해질 만큼 오래 물고 있어도 코올리 밴텀의 페니스는 고개를 쳐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기소침해진 양 흐물렁거리며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코올리는 아무래도 영 흥이 나지 않나 보다 싶어 그날은 창부를 내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모욕적인 상태는 지속되었다. 변변찮은 수준부터 그 바닥에서 난다 긴다 하는 창부까지 불러들여 제 것을 입에 물렸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여전히 그의 중심은 반응이 없었다.

그때서야 간담이 서늘해진 그는 황급히 주치의를 찾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결과를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발기 부전의 현상이 맞으신 듯합니다. 지난날 사고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도련님께서 즐겨하시는 약이 문제가 되었을 수도…….>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발기 부전이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에 맴맴 떠돌았다.

이후 그는 한 나라의 폭군처럼 날뛰며 백작가를 살얼음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발악을 해도 오직 한 군데, 다리의 사이는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그게 더 막대한 굴욕감을 끼쳤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시가를 문 채로 다리를 덜덜 떨었다.

‘씨발, 내가 고자라고?’

약을 저보다 더 처먹는 그 발렌틴 개새끼도 멀쩡한데, 왜 내가?

아무리 봐도 이건 지난날 총상의 영향이었다. 그러니까 발렌틴 그 반쪽짜리 사생아가 저를 이따위의 꼴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남자로서의 자긍심이 꺾이고 분노 조절 장애라는 증상까지 덤으로 얻게 된 코올리 밴텀의 노여움이 오늘도 폭발하듯 부풀었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그 어느 부분에서보다 성적인 데서 자부심이 강한 그였다. 그런 코올리에게 처해진 현 상황은 그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존심이 콱 으그러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어쩌면, 숨이 끊기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불명예였다.

이가 아득 갈렸다.

‘개 같은 새끼, 빌어먹을.’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발렌틴을 떠올리고 있자니, 필연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 하녀…….’

저를 보며 구석에 몰린 생쥐처럼 달달 떨던 창백한 안색. 그것을 떠올리며 코올리 밴텀은 히죽 웃었다. 이대로 혼자 썩어 버리기엔 억울하지. 빛이 드나들지 못하는 구석에서 행하는 미소가 어두움에 물든 듯 사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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