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6)

10장

살면서 사람의 숨이 끊기는 건 너무도 자주 접해 온 순간이었다.

필연적으로 그 직전의 순간까지도.

약을 한계치 이상으로 복용하여 동공을 까뒤집은 누군가가 핏대 선 목을 부여잡은 채 껄떡거린 적이 있다. 그러다가 죽은 게 바로 발렌틴이 이곳, 영지로 내려오게 된 사교 모임에서의 변고였다. 그 외에도 변변찮은 시비가 붙어 칼부림이 일어나 맥없이 명을 다한 이도 있었으며 또 감정의 조절이 망가지는 바람에 홧김에 자결을 시도한 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 코올리 밴텀의 복부에 총을 쏜 적도 있고 말이다.

발렌틴이 느끼는 감각의 역치는 아주 높아졌고, 또 쇠심줄처럼 질겨진 지 오래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도록 담금질하여 굳건하게 응결시킨 것처럼 어떠한 자극에도 끄떡이 없었다. 그게 그의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찰나에 깃든 충동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비루하고 너절한 삶…….

한데 리브가가 눈앞에서 추락하는 그 장면은.

한 번도 시각에 문제가 생긴 적이 없는데 그 장면만은 유독 망막 위에서 느리게 재생되었다.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쥐고 있던 총을 내던지고 급히 벼랑 끝으로 향하였다. 손을 쭉 내밀었으나 닿지 못하였다. 거리는 이미 멀었다.

“이브!”

제 목소리가 아닌 줄로만 알았다. 그가 알기로 자신은 그런 목소리를 낸 적도 없었고, 내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성마른 비명은 분명하게 실존하여 적요한 산을 쩌렁 울렸다.

발렌틴은 까마득한 저 아래의 전경에 가슴이 밑바닥까지 철렁했다. 떨어진 건 그녀인데 제가 그런 꼴이 되어 버린 듯 실로 아찔하기만 했다.

설마, 정말로, 몸을 던질 줄은…….

등골을 타고 올라온 아스스한 소름이 전신을 뒤덮었다. 오한 같기도 하고, 아연함 같기도 하고, 황망 같기도 한 그것은 그에게 분명한 자극이었다. 단순히 자극을 넘어 검은 구렁 같은 공포심과도 유사했다.

그녀가 제 심장을 움켜쥔 채로 낙하해 버린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리는 아뜩함이 일었다. 뒤편에 몸을 숨기던 기사들이 소란스러운 상황에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발렌틴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절벽의 아래만 주시했다.

어둠에 반쯤 잠긴 침엽수의 향연이 꼭 리브가를 집어삼킬 흉측한 나락 같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말이 뇌리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제 두 눈으로 목격했던 리브가의 텅 빈 동공도.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역린과 다를 바가 없는 과거사였다. 일당 중 누구 하나라도 잡으려고 하였으나 전소되어 까만 재밖에 나오지 않았다던 이복형의 전언.

당시, 제가 충동적으로 입에 올리려다가 말았던 질문이 이 순간 덧없이 드리웠다.

걔도 죽었어?

그 여자애도 죽었어?

이브도, 죽었어?

“당장…… 수색해.”

그때는 스스로의 눈으로 본 기억이 없어 알 수 없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이브가 제게 끼쳤던 영향력이 생각보다 강렬했다는 건 이후 약에 취할 때마다 귓전을 맴도는 환청으로 말미암아 깨달았다. 정신이 멀쩡하지 않을 때만 저를 찾아오기에, 그래서 더더욱 죽은 줄로만 알았다.

실상 그녀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지금 그 사실이 뒤집힐지 모를 형국이었다.

리브가가, 이브가, 그러니까…….

“당장…… 찾아와, 당장!”

원치 않음에도 몸이 발발 떨렸다. 꼭 그의 세상에 지진이 난 듯 요동이 멈추지가 않았다. 사지의 경련을 단속할 여력조차 없었다. 발렌틴은 그녀의 뒤를 어떻게든 쫓고 싶은 것처럼 점차 벼랑의 끝으로 다가갔다.

“발렌!”

뒤늦게 등장한 퀄린이 그런 그의 팔뚝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아슬아슬한 개입으로 발렌틴마저 추락하는 불상사는 막았다. 그럼에도 발렌틴의 눈길은 진창처럼 어둡기만 한 저 아래에서 멀어지지 못하였다.

야밤중의 색출이 시작되었다.

로트링겐 문양의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산을 도려낼 것처럼 죄다 파헤치고 다녔다. 당연히 인력이 집중된 곳은 리브가가 추락한 낭떠러지 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눈이 뒤집힌 채 다른 곳을 뒤져내던 발렌틴은 큰 소리가 나자마자 부리나케 그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축 늘어진 리브가를 보는 순간 그는 사고 회로를 포함한 모든 인체 반응에 제동이 걸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도 시야가 자꾸만 점멸했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더듬더듬 걸어 나갔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갈색 머리칼에 휘감긴 발렌틴의 손끝이 어딘가를 짚었다. 맥이 뛰는 부위였다.

그것이 여전히 반응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는 짙은 숨을 터뜨렸다.

죽지 않았다.

발렌틴은 리브가를 안아 들려는 기사의 손을 매섭게 내치고는 직접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자그마한 뒤통수를 끌어안았을 때 그는 멈칫했다. 손가락 끝에 적색의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났다. 리브가의 뒤통수가 축축했다. 아무래도 낙하하며 부상이 생긴 듯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그칠 겨를이 없는 불안감이 범람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를 옮겼다. 어려운 일이었다.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발렌틴은 생애 처음으로 온 신경을 기울여 그녀를 운반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마차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리브가만 살펴보았다. 제 품에 안긴 리브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속이 다 타고 남은 재가 된 것만 같았다.

그때 즈음 감감무소식이던 태양이 산 너머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의 색이 고작 일각에 기대어 차츰차츰 달라졌다. 부유스름하면서도 불그스름한 색채감은 피 같기도 하고 사랑 같기도 하였다. 그것이 발렌틴의 얼굴과 몸을 모조리 물들였다.

하물며 평정을 잃은 그의 눈동자까지도.

* * *

침실 내부에 고요하면서도 묘하게 살 떨리는 적막이 감돌았다. 의자에 앉은 발렌틴은 부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어두칙칙한 낯으로 침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길의 끝에는 고요히 잠든 리브가가 있었다.

다행히 추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견하였으며 더불어 곧장 데려와 조치를 취한 탓에 그녀의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래, 생명에는…….

<후두부의 살갗이 찢어진 모양입니다. 출혈량이 조금 있었다만 그리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일단 충격이 가해진 상태라…… 뇌 쪽에 문제가 생겼는지는 의식을 차려야 알 듯합니다.>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린 주치의는 그 시점에서 어색하게 쭈뼛거렸다. 옷에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 리브가만을 직시하는 발렌틴을 대신하여 퀄린이 눈짓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주치의는 눈치라도 보듯 동공을 빠르게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이분, 현재 임신하신 상태입니다.>

오로지 리브가에게만 못 박혀 있던 발렌틴의 눈가가 움찔한 건 바로 그때였다. 주치의는 제게로 돌아오는 주인의 살벌한 동공에 흠칫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은 것뿐임에도 없는 말을 지어낸 사람처럼 오금이 조여들었다.

<임신……?>

먹먹한 바닷속에 빠진 것처럼 망연하게 구는 발렌틴과 달리 퀄린은 당장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단단히 꼬일 수는 없다는 침통한 낯으로 그는 침실을 빠져나갔다.

하루 진종일 그녀가 누운 침대 곁에 머무르며 발렌틴은 생각을 그치지 않았다. 그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누게 된, 처음으로 민낯을 드러낸 그녀와의 대화가 도통 떠나가지를 않은 까닭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애초부터 복수의 염원으로 묶인 사이, 언젠가 한 번쯤은 이렇게 속내를 철저히 까발리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발렌틴은 그 속에서 무수한 상상을 했다.

과연 과거 이야기를 할 때 이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의 속에 해묵을 대로 해묵은 감정 덩어리를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궁금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찔려 할 것이고, 그마저도 없다면 사람이길 포기한 게 분명한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혀 위로 농락을 운운했을 때 리브가의 반응은 예상한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저를 일평생 괴롭혀 온 염증을 다시 겪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못지않은 고통으로 얼룩진 안색이었다. 그것마저 간교한 연기라기에는 함께 보인 패닉 상태를 간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제게 내뱉은 그 말들.

<그래서 제가 도와 드렸잖아요!>

<주인님을…… 구하지 말 걸 그랬어요.>

도왔다고.

구했다고? 네가 나를?

반병신의 꼴로 만든 게 아니라? 약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머저리로 만든 게 아니라?

영영 벗어나지 못할 지옥으로 밀어뜨린 게 아니라?

그러나 그 말을 내뱉을 때의 그녀는 정말로 후회를 곱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 후회를 하는가.

정말로 자신이 그를 구하기라도 했다고 믿는 것처럼.

그런데 그가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저를 괴롭히기라도 한다 여기는 것처럼.

“…….”

발렌틴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리브가가 잠들어 있는 침실을 고요히 나선 그가 향한 곳은 퀄린의 집무실이었다. 야행의 소요로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정무를 보던 퀄린이 얼떨떨한 낯으로 일어났다. 그는 발렌틴의 눈가 아래에 짙게 드리운 음영을 발견하고 한숨 쉬듯 운을 뗐다.

“발렌.”

“어디 있지?”

“뭐?”

그는 발씨가 익은 곳으로 이동하여 서랍장을 열었다.

“그 평민 새끼.”

그 안에 담겨 있던 은빛 총을 챙겨 들며 턱을 반쯤 비틀었다. 본능이 강하게 울렸다. 수년 전의 진실, 그것의 본질을 무슨 수로든 파헤쳐 봐야 한다고.

돌연히 고개를 쳐든 가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사실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곤혹스럽고 아니라도 께름칙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퀄린은 골머리를 앓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발렌틴의 기색을 부단히 살폈다. 밤중 달아난 하녀를 붙잡아 오고서 나사가 몇 개 풀린 것처럼 굴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그런 만큼 지금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별관 지하에 구금 중이다.”

간략한 대답과 함께 발렌틴은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자취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진흙처럼 툭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퀄린은 긴 탄식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별관의 지하.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 꽤 오래도록 갇혀 있던 제이미는 난데없는 인기척에 귀를 쫑긋 세웠다. 초겨울에 스미는 냉기처럼 한랭하기만 한 복도에 공음이 울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저를 살릴 구원자일까 저를 죽일 괴물일까. 제이미는 폐쇄적인 상황에 자연스럽게 스밀 수밖에 없는 공포심에 반쯤 저려 발발 떨었다.

이윽고 기사 중 누군가가 굳게 닫혀 있던 철창문을 열어젖혔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어도 발목을 감싸 절그럭절그럭대는 족쇄 때문에 무리였다. 길들어진 무력감은 희망을 꿀꺽 삼켜 버린 지 오래였다.

무릎에 얼굴을 박고 있던 제이미는 제 위로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에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고개가 떠듬떠듬 위를 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만하고 빈틈없는 권위자처럼 저를 내려다보는 발렌틴을 발견하는 순간 ‘히익’ 하고 물러났다. 가로막힌 벽과 하나가 될 것처럼 달라붙어 날 것 어린 두려움에 잠식됐다.

다음 순간 크게 움찔했는데, 그건 발렌틴이 자신을 보게끔 총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려서였다. 마주친 동공에 절로 전신이 움츠러들고 심장이 기묘하게 조여들었다.

발렌틴은 천천히 다리를 굽혀 앉았다. 눈높이가 일직선이 되어 맞닿았다. 그게 더 집채만 한 질겁을 선사했다.

“나는 말이지.”

음산한 어조가 실내를 떠돌았다.

“난…… 이브를 철저히 망가뜨리려고 했다.”

“…….”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날 생각을 했다는 게 기가 막힌 정도를 넘어서서…… 이마저도 한낱 유희거리인가 싶어 견딜 수가 없었거든. 그런 만큼 동등하게 망쳐 줘야 공평할 거라고 생각했어.”

제이미는 자칫했다가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아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동공이 희부옇게 흐려진 이 사내의 앞에서는 숨 한 자락도 자체적으로 검열해야 할 본능이 들었다. 무엇 하나라도 신경을 거슬렸다가는 당장 목덜미에 탄환이 처박혀 피를 홍수처럼 뿜어내게 될 것 같았다.

“한데 왜 그런 말을 꺼낸 거지.”

“…….”

“왜 나를 도와줬다는…… 가당치도 않는 소리를.”

그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건 이 음침한 내부의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 자신에게도 닿지 못하고 점점이 흩어져 버렸다. 을씨년스러운 속엣말이 따로 없었다.

제이미는 그가 넋두리처럼 꺼내 드는 말에 차츰차츰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서야 실로 아름다운 얼굴에 밴 소용돌이 같은 혼란을 똑똑히 목도했다. 움츠릴 대로 움츠러든 제이미마저 눈치챌 정도로, 그는 정체 모를 혼돈에 잠겨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잠시 후 발렌틴은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동공의 초점이 얼추 잡혔다. 그녀가 벼랑 끝에서 눈물바람으로 꺼낸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다시 골수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브가 학대를 당했나?”

이번 것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명백히 제게 향하는 질문임을 깨닫고 제이미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예, 예?”

“두 번 묻지 않는다.”

총구가 조금 더 디밀어졌다. 척추뼈 사이로 생생한 공포심이 차올랐다.

“모, 모, 모릅니다. 그런 건……!”

“네 기억을 더듬는 정성이라도 보이지 그래.”

제이미의 눈이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 데굴데굴 굴렀다. 초췌해진 안색으로 그런 짓을 하니 정말 여지없이 가련했다. 그러나 발렌틴은 그에 상응하는 동정심은커녕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온 신경은 다른 곳에만 꽂혀 있었으니까.

서릿발 같은 시선에 주눅이 들어서 제이미는 움푹 조여든 목구멍을 억지로 벌렸다.

“학, 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이브가 상처를 달고 있을 때, 때가 있었…….”

“상처.”

“뺨이나 팔, 팔뚝에 시퍼런 멍이 들, 어 있을 때가 간혹 있어서. 그래서…….”

그 순간 발렌틴은 어떠한 잔상을 떠올렸다.

저를 챙겨 주러 온 여자아이가 문득문득 내고는 했던 앓는 소리. 둘만 있을 때 가끔씩 ‘아야’ 하며 고통 어린 호소를 했었다. 그때는 단지 저를 챙겨 주다가 어딘가에 부딪치거나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마약상이라는 친부가 정말로 그녀를 학대했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도 그런 자국이 났었다면 옷으로 가려진 부분은……. 이가 절로 아득 갈렸다. 문득 고개를 든 가정이 뇌리에서 점점 선연해지고 있었다. 본질과 함께 묻어 둔 그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되풀이되었다.

발렌틴은 그것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 사람처럼 조급히 물었다.

“무엇이라도 말해 봐.”

“예, 예……?”

“네가 그곳에서 도망치기 전에 본 것 중 이상하거나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면 뭐라도 좋으니 지껄여 보라고.”

그 초조한 음성은 제이미에게 효과 좋은 윽박이 따로 없었다. 제이미는 그가 일컬은 ‘무엇’이라도 기억해 내기 위해 죽도록 머리를 쥐어짰다. 마침내 탈출을 하던 그 순간까지 의심이 가시지 않던 묘한 이질감을 상기해 냈다.

“문이…… 늘 잠겨 있던 문이 열려 있었어요.”

“…….”

“이상하게도 그날만, 도망친 그날 밤만요. 다른 날에는 잠겨 있어서 나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 거든요.”

납치를 당한 아이들은 아주 운이 좋게도 불이 나기 전에 슬럼가를 빠져나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운이 좋아서’ 벌어진 일일까?

이 역시 우연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도와주기 위해 부러 나섰던 거라면…….

<저를 멸시하는 그 아이들한테조차 미안해서…….>

먹먹하게 젖어 든 음성이 고막에서 널을 뛰었다.

발렌틴은 아주 느린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골몰하느라 나름 평정을 되찾았던 얼굴에서는 또다시 감정이 지워지고 있었다. 거세당한 것처럼 통째로 부정당한 감정의 자리 위로 스며드는 건 불현듯 고개를 들이민 가정 하나뿐이었다.

마침내 다리를 펴고 선 발렌틴은 총을 든 손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하여 제이미가 안심하려는 순간 위기는 기습처럼 찾아왔다.

“……! 웁, 음!”

제이미는 제 입술을 억지로 벌리며 파고드는 총구에 기겁하여 몸을 뒤틀었다. 확장된 동공에 생리적인 물기가 고여 넘실댔다. 그의 손목을 잡으며 발버둥을 쳐도 총구는 더욱 우악스럽게 들어찰 뿐 결코 밀려나지 않았다.

천장에 달린 등화의 빛살이 시야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사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운 마음은 배가 되었다.

그가 손을 까딱만 하면 정말 죽어 버릴 위기에 처했다. 눈물은 제 의지를 배반하고 범람하였다. 혀가 눌린 채로도 살려 달라는 말을 토해 내며 웁웁댔다. 미처 다물리지 못한 잇새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발렌틴은 총구를 입 속에 깊숙이 밀어 넣어 위협하는 사람답지 않게 망연히 제이미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뇌에 검을 수십 개 박아 놓은 것처럼 뒷골이 쑤셨다. 무언가 뒤틀리고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마음 한구석으로 체감할 때부터 관뒀어야 했을까. 그때라도…… 제대로 대화를 했었어야 했던 건가. 그때는 그저, 그저. 화풀이나 진배없는 지금처럼 분노에 두 눈이 멀어서…….

그는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점점 힘이 실리더니 결국 살갗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쇠 맛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발렌!”

입구 부근에서 소요가 일더니 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관에서부터 여기까지 부리나케 달려온 듯 머리칼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무기질 같던 발렌틴의 눈동자가 일순 비틀렸다. 현시점에서 그가 저렇게 호들갑스레 굴 만한 이유는 오로지 한 사람뿐이 없었다.

“너 얼른, 침실로…….”

역시나 짐작대로.

“그 하녀 깨어났다.”

그가 급하게 가져온 소식은 리브가에 관한 것이었다. 발렌틴은 입에 총을 처넣고 있던 제이미를 구석으로 내팽개치고는 곧장 지하를 나섰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내달려 본관으로 돌아왔다. 제 뒤를 따르는 퀄린의 보고는 아주 간신히 귓가에 욱여넣어진 차였다.

제가 나서기 전만 하더라도 고요하던 침실 앞이 분주했다. 모여든 인파가 제법 많았다. 퀄린이 한데 모인 이들을 손짓과 윽박으로 흩어지게 하는 사이 발렌틴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한 발 내디뎌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마자 무언가 휙 날아와 벽에 처박혔다. 쨍그랑! 창가에 다소곳이 놓여 있던 화병이었다. 발렌틴은 산산이 조각나 뾰족한 잔해로만 남은 유리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디 지, 진정을……!”

침대 기둥에 숨듯이 선 주치의가 두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창가 가까이에 선 리브가는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파르라니 질린 입술을 말아 문 채로 주치의를 역적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생기보다도 분노, 분노보다도 어떠한 부정에 가까운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주치의가 환부를 살피다가 그만 임신에 대해 말했어.>

퀄린이 황급히 저를 찾아 꺼낸 가장 주요한 본론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발렌틴은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믿기 힘든 사실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헐떡대는 리브가를 주시했다. 겨울철 비쩍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더군다나 머리통에는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몸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여 연신 비틀대는 게 마냥 안쓰러워 보였다.

“다 나가.”

발렌틴의 싸늘한 음성이 어수선하던 실내를 쭉 갈랐다. 그가 온지도 모르게 리브가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던 주치의는 뒤늦게 히익, 하고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 인사한 그는 헐레벌떡 침실을 빠져나갔다.

발렌틴은 그 누구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침실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리브가를 마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발렌틴의 얼굴 위로 창가에서 스며드는 오후의 볕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에게로 다시 무언가 휙 날아왔다. 이번엔 기다란 촛대였다. 일렬로 늘어져 있던 그것은 하나의 흉기가 되어 발렌틴에게로 달려들었다. 맞지는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저는 잠시였다. 너무도 잠시라서, 주저했다고도 볼 수 없는 찰나. 발렌틴은 제게로 무어가 쏟아지던 꿋꿋이 걸어 나갔다. 그 어떠한 장애물이 앞을 막을지언정 절대로 저를 막아 세울 수 없다는 양 굳건하게까지 보이는 태도였다.

그러던 차, 퍽!

그녀가 던진 은빛 촛대가 정확히 뺨을 가격했다. 날카로운 장식 부분이 뺨을 따갑게 스치며 기다란 생채기까지 났다. 화끈한 통증에도 주춤거렸을 뿐, 그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리브가는 제 앞까지 다가와 손목을 붙드는 그에게 경기하듯 상체를 마구 비틀었다.

“싫어, 놔, 놔……!”

그러다가 무슨 영문인지 몸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맥없이 무너졌다. 발렌틴이 놀라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반항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지금 제 발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 저를 지탱해 줄 게 없다면 일어설 수 없음에도, 그것이 발렌틴의 품이자 손길이라면 차라리 지옥에 떨어져 버리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발렌틴 역시도 절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리브가는 끝의 끝까지 버티다가 그가 아닌 벽에 기대섰다. 잔뜩 부르튼 입술 끝에 허망한 실소가 감돌았다.

“아기?”

“…….”

“임신이라고……?”

잔바람에도 꺼져 버리고 말, 연약한 불씨 같은 목소리였다.

차마 음성에 담기지 못한 힘은 눈동자로 가득 집결해 있었다. 언제나 심약하게 휘청대기만 하던 동공 위로 격노의 기류가 넘실댔다. 그것은 날붙이처럼 첨예하게 번쩍거려서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굳이 입술이 아니더라도 눈빛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살기이며 원망이었다.

바로 서지도 못하는 와중에 눈을 흉흉하게 치켜세울 만큼, 그것으로라도 제 의견을 내비치고 싶을 만큼 그녀는 벼랑에 몰린 상태였다.

“어떻게 이래, 어떻게…… 어떻게!”

비탄이 한 움큼 서린 음성이 갈급하게 터져 나올 때마다 허옇게 질린 뺨을 타고 눈물 역시 흘러내렸다. 믿었던 신에게 무참히 버림받기라도 한 것처럼 처연한 낯빛이 따로 없었다.

리브가의 저항은 불시에 재개되었다.

그녀는 붙잡힌 손을 되는 대로 휘둘렀다. 발렌틴이 무심결에 그것을 놓쳤을 때 그녀의 손바닥은 그의 뺨을 짝, 하고 후려쳤다. 광대뼈 부근에 후끈한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초연했다. 촛대로 맞았을 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거망동하다며 분노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어야 할 울분의 몫까지 그녀가 전부 탈탈 털어 간 것만 같아서.

아니, 별안간 고개를 든 가정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렇게 노여움을 터뜨리는 그녀를 온전히 받아 줄 수밖에 없기에.

그 조마조마한 심정에 고통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손바닥으로 모자라 손톱까지 세운 탓에 발렌틴의 얼굴은 갈수록 엉망이 되어 갔다. 그러나 지금은 손찌검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녀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었다. 그리하여 발버둥을 있는 그대로 맞이해 주던 발렌틴은 그녀가 제풀에 지쳐 조금쯤 힘이 빠졌을 때 가녀린 양 손목을 다시 한번 붙잡았다.

“너야?”

그리고, 목이 메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확히는 숨통이 조이는 얼굴로.

“네가.”

“…….”

“네가 그곳에…… 불을 지른 거였나?”

발렌틴은 목 끝에 걸려 있던 가시 같은 의문을 마침내 토해 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 비감이 한 움큼 서린 표정을 한 채 제게 털어놓았던 그녀의 서러움, 그리고 제이미의 잇따른 전언이 뭉치고 뭉쳐 들었다.

스스로 까발린 설움대로, 이브 역시 그곳이 지옥이기는 마찬가지였다면. 그녀가 저를 챙겨 준 건 농락이 아니었으며 그곳으로 납치를 당해 끌려온 가엾은 아이들까지 도망가게 해 주었다면.

몽글몽글 피어오른 상념들이 하나둘씩 집약되어 탄생시킨 가정이 그것이었다.

슬럼가 방화의 원인.

어쩌면, 어쩌면.

“대답해.”

오만하게 말하고 싶지 않은데, 닦달하는 뉘앙스를 내고 싶지 않은데. 성급하고 간이 마르는 심정에 도통 이성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안달복달하는 마음에 나오는 보챔이 따로 없었다.

“당장 대답해!”

예전이었다면 팔목을 억세게 그러쥐어 호통을 놓았을 것이다.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민 채 겁박이라도 하는 무뢰한처럼 사정없이 밀어붙였을 테지.

그러나 그 행위 자체를 유발시킨 감정이 애초 무용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그를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힘을 주면 부러질지 모를 정도로 가냘픈 두 손목을 최대한 약하게 붙든 채 대답을 독촉하는 것뿐이었다.

씨근덕대는 리브가의 숨결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속에서부터 괴어올라 무척 뜨거운 호흡임에도 그것을 체감할 때마다 발렌틴은 폐부가 다 써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와서.”

수분기 없이 건조해진 입술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였다. 여타의 감정에 젖어 촉촉했을 때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꺼칠꺼칠했다. 그래서일까, 속을 피가 나도록 긁어내어 간신히 뱉어 내는 신음 같았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정수리까지 차오른 맥이 탁 풀렸다.

발렌틴에게는 그 말이 어떠한 시인보다 강력하게 와닿아서였다. 현재에 이르러 그러한 과거의 사실 따위 조명해 보았자 무얼 하느냐는 듯한 울분의 항변이.

그게 발렌틴의 가슴속에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얹혔다.

“내게는 중요해.”

이미 답을 알면서도 겨우 한 줌 남은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발버둥이 애처로웠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뻔한 현실을 앞에 두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리브가는 숨을 헐떡이다가 그만 주르륵 주저앉았다. 발렌틴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와중에도 제겐 기대기 싫은지 벽에 무게를 싣는 그녀의 행동에 속이 뒤틀렸다.

그도 심약해진 리브가를 이리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했다. 복수를 염원한 뒤로 작정하고 짓뭉갰다. 애초에 그러려고 제 침실로, 침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무너뜨린 대상이 어쩌면, 저를 살려 준 은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거듭 초조하게 만들었다.

리브가는 더듬더듬 고개를 들었다. 이채를 잃고 푹 꺼진 연회색 눈동자가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라 사슬처럼 목을 조였다.

그토록 원한다면.

“……네.”

바라는 대로 내어 주고 끝내겠다는 듯.

“제가 그랬어요.”

탈력의 능선을 걷는 음성이었다.

“주인님 한 사람 구하겠다고 가족이고 뭐고, 다 불구덩이로 밀어 넣어 버렸죠.”

한 줌 남은 이성마저 결국엔 시꺼먼 재로 만들어 버리는 인정이었다.

그는 지옥 같던 슬럼가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기억이 희미했다. 작은 골방을 가득 에운 매캐한 연기에 질식할 것처럼 몸부림을 치다가 끝내 기절해 버린 탓이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슬럼가를 탈출한 후였다. 저잣거리와 이어지는 숲속 나무에 기대앉은 채였다. 저조차도 스스로가 왜 거기에 있는지, 어떻게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슬럼가에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급히 그리로 향하던 기사들이 그런 그를 발견한 덕택에 구사일생했다.

고작 그 정도의 수준으로만 알았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지 않는 일이었다. 제가 저만의 오해로 망쳐 버린 일을 회고하니 웃음은커녕 입 안이 견딜 수 없이 깔깔해졌다. 모래를 퍼먹고 또 퍼먹은 것처럼 속이 추레해지며 동시에 바짝바짝 말라붙었다.

“그래서, 저는…….”

리브가는 한계에 부닥친 것처럼 몸을 늘어뜨렸다. 축 늘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녀가 간신히 토해 낸 발악은 발렌틴에게 피할 겨를도 없이 꽂혀 들었다. 쥐어 짜낸 토로 후 맥없이 쓰러진 그녀를 껴안은 채로, 발렌틴은 잠시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주인님이 꼭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망령이라 믿었으나 결코 망령이 아니었던. 살아 있는 이브가 제게 밀어 넣은 원망은 그토록 원색적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