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덩어리 2
9장
일이 무언가 틀어졌음을 알아챈 건 그로부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케시는 기차 출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양 조급하게 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차가 출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브가는 가방 속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이미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지나 있던 것이었다.
등골을 아스스하게 건드리는 불길함에 리브가는 가방을 고쳐 안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로 이루어진 문 너머 다음 칸에서 얼마 없는 여객에게 무언가를 고하는 역무원을 발견했다.
의례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망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이상하고 위화감이 들게만 느껴졌다. 가슴이 선득하게 말랐다. 무엇보다 기차 시각이 이미 지났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속을 험하게 주물렀다.
리브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기차에서 내렸다.
강한 바람이 그녀가 쓴 로브 후드를 흔들었다. 역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려던 그녀는 제가 막 도착했을 때와 달리 묘하게 소란스러운 입구 부근을 인지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곧게 나아가면 나오는 승차구 대신 발을 틀어 측문으로 로트링사일런 역을 빠져나갔다. 차분한 척, 그러나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는 발씨를 한 채 대로로 나섰다.
새벽녘이라 몇 대 없는 삯마차를 간신히 붙잡았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영지로 가 주세요.”
“소아르 산 건너에 있는 트라움 영지가 가장 가깝기는 하다만, 밤길인 데다가 산세가 워낙 험난한 터라…… 괜찮겠소?”
리브가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낯빛을 뒤늦게 발견하고 수상쩍은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더 의심을 사기 전에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소분하여 나누어 둔 돈주머니를 하나 건네니 마부는 그 안을 확인하고는 금세 히죽대며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에 올라탄 리브가는 곧바로 커튼을 쳤다.
그러기 전, 역으로 들이닥치는 어떠한 기사의 무리를 보았다. 그 기사들이 착용한 제복의 등판에는 교차한 창 아래로 비단뱀이 똬리를 튼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리브가가 몇 년 가까이 드나들던 로트링겐 공작가의 공식 엠블럼이었다. 척추뼈 사이로 안개처럼 스며들던 새까만 불길함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가 탄 마차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커튼이 쳐졌다. 내부와 바깥 공간이 차단되었다. 그제야 일순간 제한받았던 호흡이 자유로워졌다.
리브가의 손은 그 커튼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꾹 움켜쥐었다. 예쁘지 않은 주름이 그어진 천 조각 위로, 그녀의 손등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차는 댓바람으로 달려 나갔다.
덜컹덜컹. 아직 산의 초입에는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내부는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초조함에 되삼켰던 구역질이 재차 치밀어 오르는 듯하여 리브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정을 위해 호흡을 잠시 멈추어 봐도 심장의 뜀박질은 도통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발렌틴이 시종일관 풍기던 비릿하고 매캐한 내음. 그것을 닮은 긴장감이 가슴 안쪽을 제멋대로 장악했다.
침실을 나서기 전, 저를 끌어안고 곤히 잠들었던 발렌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순간이나마 수면제의 영향으로 그의 얼굴은 평온을 되찾았다. 매사 나른하여도 그 기저에 첨예하고 신랄한, 이를테면 바늘 같은 면이 촘촘히 깔린 발렌틴에게서 좀체 보기 힘든 낯이었다.
그 모습을 분명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왔음에도.
늘 저를 향하여 정욕, 그리고 그보다 더욱 이슥하고 삿되게 일렁이는 감각을 내재하고 있던 그 눈동자는 결국 약 기운이 무색하게 깨 버린 걸까.
깨어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진 저를 찾아서…….
덜컹!
매끄럽게 달려 나가던 마차가 제동이 걸린 양 멈춰 섰다. 몸이 덜컹 흔들리며 골수마저도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리브가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부터 넘실대던 욕지기가 용솟음치듯 올라와 목구멍을 두드렸다.
그녀는 간신히 벽을 짚고 마부석과 연결되는 창을 열었다.
“빌어먹을, 왜 멀쩡한 통행로를 죄다 통제하는 거야?”
마부가 툴툴 털어놓는 넋두리에 리브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바깥이 묘하게 소란스러워졌다. 달빛 아래 새벽과 어울리는 고요함이 차츰 깨어져 나갔다.
마부가 그녀에게 바깥 상황을 전하기 위해 고개를 비틀었을 때였다.
“이보쇼, 지금…… 어? 어어! 아가씨!”
리브가는 마부의 말을 듣지 않고 삯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새벽임에도 주변에서 번뜩이는 섬광에 눈이 멀어 버릴 듯 부셨다. 시야가 아득하게 점멸했다. 이 모든 빛살이 전부 다 저를 찾아 옭아매려는 발렌틴의 수작이며 거미줄 같았다. 사방에서 뻗어져 나온 그것에 피부 한 자락 스쳤다가는 숨 한번 내쉬지 못하고 질질 끌려 들어갈 듯했다. 리브가의 얼굴이 피죽도 못 먹은 양 파리해졌다.
그녀는 곧장 바로 옆으로 난 산길로 뛰쳐 들었다.
마차가 다닐 수 있게끔 정비해 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신 아래로 닿는 지면이 무척이나 울퉁불퉁했다. 시야 또한 나무와 빼곡한 이파리로 가득 차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것에 달빛마저 가려져 꼭 어두컴컴한 미로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리브가는 흉측한 괴물이 제 뒤를 쫓아온다 믿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내달렸다. 야음을 실은 밤바람과 건조하게 마른 잎사귀가 얼굴과 팔을 좋을 대로 할퀴어 댔다.
“당최 무슨 일인지, 허 참.”
마부는 붙잡기도 전에 쏜살같이 달아나 버린 리브가의 자취를 어안이 벙벙하게 좇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당혹감은 잠시간의 감정일 뿐이다. 곧장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이만 로트링사일런 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다시 마부석에 올랐다. 새벽에 느닷없이 등장한 객이 내던지듯 떠안기고 사라진 돈주머니가 품 안에서 잘그락거렸다. 그는 마치 제 새끼를 대하듯 그것을 조심스레 더듬거렸다.
잠시 후 마부가 고삐를 다시 쥐어 잡고서 말채찍을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뭐, 뭐요?”
제복을 입은 기사 몇이 그의 마차를 둘러싸더니 마부를 몰인정한 손길로 끌어 내렸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억, 하고 신음을 터뜨린 마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마에 무언가 지그시 닿았다. 처음에 그것이 무언지 알아보지 못하고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던 마부는 곧 혀를 깨물 뻔했다.
제 이마 정중앙에 겨누어진 것은 다름 아닌 총구였다.
“무, 무, 무슨…….”
뜻하지 않은 거액도 벌었겠다, 이만 퇴근하여 돌아가려던 차였다. 상상만으로도 맘이 편안해지는 계획이 때아닌 소요로 엉망이 되었다. 기습과도 같은 상황에 오줌을 왈칵 지릴 것만 같았다. 시야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제게 총구를 겨눈 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님.”
마부를 끌어 내리자마자 마차 안을 뒤져 보던 기사가 냉큼 고했다.
마부의 정신이 별안간 깨어났다. 이들의 용건이 제가 아니라, 종전까지 제가 태우고 있던 객이었음을 깨닫고 얼른 침을 꼴깍 삼켰다. 까닭 모르게 내밀어진 총구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제야 눈앞이 조금쯤 맑아지며 위협적인 사내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마부는 능폭한 기세와 어울리지 않는 한밤중의 미목수려에 찰나 넋을 잃었다. 휘영청 뜬 달빛을 신의 가호처럼 두른 그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같은 사내가 보아도 이견이 없을 만큼 한 폭의 명화를 떠올리게 하는 외피였다.
그러나 금빛 눈동자에 급물살처럼 넘실대는 안광을 발견하는 순간 그 모든 건 의미가 없어졌다. 눈빛만으로 풍겨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백에 모골이 송연해지고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사내가 이 밤을 빨아먹은 듯한 흑발을 투박하게 쓸어 올렸다.
“어디로 갔지?”
툭, 총구가 조금 더 들이밀어졌다. 밤공기를 담은 그것의 촉감은 상당히 차가웠다. 오금을 움츠리게 만드는 뻑뻑한 한기가 아닐 수 없다. 위협은 다시 한 발 다가와 목구멍을 죽일 듯이 조였다.
“세 번은 묻지 않아.”
어둑한 호박빛 홍채에 떠돌아다니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잘 벼린 날붙이가 그 안에 박혀 있는 듯도 하고, 신랄한 광기가 방벽처럼 휘둘러진 것도 같았다.
“어디 갔느냐고. 네가 이곳까지 태우고 온 여자.”
뭐가 되었든, 그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 * *
“헉, 헉…….”
산세가 여간 험한 편이 아니라는 마부의 전언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었다. 마차의 통행을 위해 만들어 둔 길목마저 그리도 거칠고 척박할진대,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은 길을 뚫는 도주자는 어떻겠는가. 마치 맨몸으로 허허벌판의 척지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리브가는 다리가 맥없이 꺾이는 느낌에 헉, 하며 거대한 나무 몸통을 짚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오른 탓인지 목구멍에서 옅은 피 맛이 났다.
“욱……!”
돌연히 속이 울렁거려 상체를 숙였다. 위액이 신물과 함께 넘어와 쏟아졌다. 목구멍이 한층 더 쓰라려졌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 갑작스럽게 벌어진 현상은 아니었다.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속되던 현상이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온몸의 기력이 뚝 꺾인 것처럼 그녀는 도통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사를 찾아간다거나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의지마저도 타의에 의해 부러지고 잘린 지 오래였다.
치료도 의지가 있어야지만 할 수 있는 번거로운 짓이었다. 작금 그녀의 삶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나날일 뿐이었다. 그 정점을 찍은 건 당연히도 가족 같던 이의 죽음이었고.
조악한 집 뒤편에 고이 묻어 준 할아버지를 상기하자 눈물이 별안간 엄습했다. 까끌까끌한 나무를 짚은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헤널드에 대한 죽음을 아직 제대로 털어 내지도 못한 차였다. 그런 와중에 도망치고자 결심했다. 마음은 무거웠으나 그 안에 살고자 하는 절박한 욕구는 분명히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계속 이곳에 머물다가는 제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함 역시 몸소 체감한 것이다.
하나 무슨 영문인지 현재, 모든 퇴로가 막히고 있다. 이 영지 내에서, 기차역과 통행로를 제 입맛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은 아무리 헤아려 봐도 단 한 사람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제 목에 채운 목줄을 요령껏 조였다가 풀었다 하며 목숨을 간 보던 오만한 주인.
발렌틴이 사신의 낫을 든 채 목을 싹둑 베려고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리브가는 저도 모르게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갔다. 입가에 제멋대로 묻어난 타액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 거푸 삼켜 내는 타액에서 쓰고 비린 맛이 올라왔다.
‘케시는…….’
저를 도와준 그녀는 어떻게 된 걸까.
이쯤 되니 저택 앞에서 저를 배웅해 주던 그녀에 대한 걱정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케시마저도 위험에 처한 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눈시울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속에서 잔뜩 뭉친 무언가가 제멋대로 엉겨 몸집을 부풀렸다. 고통과 번민, 후회와 좌절, 한데 뭉친 그것들은 삿된 부정 덩어리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계속해서 치미는 욕지기는 신체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 감정의 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뱉어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래 봤자 입을 열면 쓰디쓴 위액만 역류할 뿐이었다.
혹여나 케시가 붙잡히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모진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이쯤에서 포기하고 발렌틴에게로 돌아가는 게 옳은가. 그래야만 하는 걸까. 케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발은 이다지도 무겁다. 돌아갈 용기 따위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떠듬떠듬 나아가는 와중에도 생각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가 푹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탕!
“꺄악!”
예기치 못하게 귀를 울리는 총성에 리브가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서없이 쿵쾅댔다. 소스라친 마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총성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그건 그녀에게 겨누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아나는 입장인지라 오감이 평소의 배는 예민해진 리브가는 모든 걸 제게 향하는 공격처럼 받아들이고 기민하게 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꺼멓게 물든 어두움만 가득할 뿐이다.
한 박자 늦게야 그녀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
벌써 산까지 쫓아온 게 분명하다. 목표물도 지정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쏘아 올린 한 발의 총탄. 그건 제 위치를 알아내려고 발포한 게 확실할 테고.
리브가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악문 채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케시가 정성스레, 또 조심스레 입혀 준 로브는 진작 더럽혀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리브가는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이 뒷골을 뜨겁게 울렸다.
과거를 내버린 만큼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발렌틴을 향했던 저의 사랑이 거푸 발목을 잡아챘다. 족쇄 같은 사랑이었다. 그의 존재나 그를 향해 품었던 사랑이나 올가미가 따로 없었다. 자꾸만 뒤를 확인하고, 불안해하고, 홧홧하게 달아오른 잔숨을 삼키고, 감정이 좀먹히는 고통에 헐떡거리는 이 꼬락서니가.
이제는, 그 무엇 하나 제 스스로 하지 못해 더러운 진창에 팔다리가 매여 있던 어린 날의 저와 지금의 저 중, 과연 어느 것이 나은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탕!’ 하고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 등줄기를 타고 뾰족뾰족 가시 같은 소름이 빼곡히 돋았다. 곧이어 말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밀접해지고 있었다. 가만히 몸을 낮춰 숨는 게 나을 수도 있겠으나,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이 재차 들리는 순간 그녀는 이미 내달리고 있었다. 본능이 부추긴 공포심이었다. 제 지척에서 쓰러진 코올리 밴텀과 그의 몸에서 나온 피의 홍수가 여전히 눈에 선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가빴다. 경황없이 내디디는 걸음 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한 줄기의 월광이 강렬하게 비쳤다. 온통 어두운 환경 가운데, 철장처럼 뻗은 잔가지와 한없는 이파리들 사이로 비치는 그것은 꼭 신의 자비 같았다.
홀려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리브가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헉……!”
한 발.
딱 한 발만 크게 나아갔다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하였다. 급히 멈춰 선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는 어찌나 멀고 아득한지 시야가 확보되지도 않았다. 리브가는 나무와 덤불이 사라져 휑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래서 달빛이 그리도 환하게 파고든 것이었다.
놀란 마음에 남은 여진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 할 때였다.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고요한 야음에 잠긴 산속은 너무나 조용했고 그 가운데를 비집어 벌리듯 제멋대로 파고든 무법자들은 소란스러웠다. 그것은 도망치는 쪽에게는 독이었고, 뒤쫓는 자에게는 운이었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 말발굽이 차츰차츰 느려지다가 멎는 기척, 그리고…….
사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토록 열을 다해 피한 게 무색해질 만큼 리브가는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말, 끈질기고 집요하게 여기까지 저를 뒤따라온 파괴자를 두 눈에 담았다. 안장에 앉은 발렌틴의 동공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한 침대에 누워 껴안고 있던 남녀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냉랭하고 살벌했다. 늘 그러했듯 그것은 발렌틴이 내뿜는 숨 막히는 살기와 광기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요새 아래에서는 그것에 무참히 짓눌리고 뭉개졌다. 하지만 사랑을 내버리자 결심하고서 그를 대면하니 그저 마른 땅에 바람이 불 듯 잠잠할 뿐이었다.
발렌틴이 말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직시했다. 한겨울의 강가처럼 서늘하고 차가운데 그 이면에서는 깊게 비틀린 성정이 사납게 들끓었다. 애정에 상응하는 게 아님을 안다. 그런 호쾌하고 애틋한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저건 그저 해묵고 해묵었을 복수심일 테니까.
“이리 와.”
그런 눈을 한 채로 발렌틴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만한 명령이었다. 심장 끝이 저릿한 건 그에게 입은 상처가 떠올라서일까, 아님 완연히 털어 내지 못한 감정의 부스러기 때문일까. 또렷이 분간할 수 없었다.
여태껏 리브가는 겸손을 눈곱만치도 알지 못할 저 거만한 주인 앞에 납작 수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탈을 쓴 빚인지, 혹은 빚의 탈을 쓴 사랑인지 모를 감정이 그리 굴도록 만들었다. 사랑은 그 주체를 너무도 쉽게 약자로 전락시켜 버리고는 했다.
하지만…….
“이리 오라고.”
제 다리 사이를 파고들 때 말고는 좀처럼 굳어지는 법이 없는 나태한 미간. 그것이 꼭 생각지도 못한 모욕이라도 당한 양 잔뜩 일그러졌다. 그건, 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조급함의 모양새를 닮아 있었다. 리브가가 제게로 오지 않아 애라도 끓는 것처럼.
리브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순히 응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눈동자에 딱딱히 뭉쳐 있던 결집이 풀렸다.
그러나 그건 다음 순간 곧장 비틀렸다.
그에게로 다가가는 대신 리브가는 절벽을 향해 한 발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직, 발을 끄는 소리에 반응하듯 발렌틴의 눈빛에는 서슴없이 균열이 일었다. 아주 까만 밤중임에도 이상하게 그게 속속들이 보였다.
그는 골치 아픈 난제를 앞에 둔 것처럼 이마를 감싸 쥐었다.
“네가…… 도망을 갈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
“그거 알고 있나? 나는 약을 하도 처먹어서 다른 약은 잘 듣지 않아. 들어도 겨우 10분 내지는 20분.”
“…….”
“그래서 마신 거야. 네가 물에 무언갈 넣은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래, 물맛이 미묘하게 이상한 걸 느끼고 멈칫했었다. 그리고 돌아본 그 끝에 저를 빤히 응시하는, 심약하면서도 강단 있는 눈길로 말미암아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깨우쳤다.
그런데도 발렌틴은 보란 듯이 물 잔을 비웠다.
모르겠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늘 그러했듯 한순간 깃들어 버리고야 만 충동에 가까웠다. 단순히 수면제가 아니라 독약이었다면 꼼짝없이 죽게 될진대. 그럼에도 그냥, 그때, 그 순간에 그러고 싶었다. 알면서도 삼켰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적어도 속아 넘어가 주는 척했으면…….”
그때는 그런 마음이었다.
여기서 속았다는 듯이 넘어가 주면 리브가가 저를 안 떠나지 않을까 하는.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지경을 넘어 우스운 가정이었다. 애초에 저를 처리하기 위하여 혹은 방심하게 만들려고 벌인 짓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바란 대로 행해 주면 리브가로서는 이득일 테다.
주저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를 떠날 게 뻔했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그따위 영양가 없는 가정이 떠올랐는지는 그도 모른다.
어쩌면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떠나가지 않기를.
계속 제 곁에 있어 주기를.
그는 남을 붙잡는 방법 따위 모른다. 주변에서 그를 원하는 사람은 들끓었으나 발렌틴 그 스스로 제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 사람은 없었다.
저속한 욕망이 판을 치는 온상지 속에서 그 누구보다 고고하게 군림했으면서, 모순적이게도 그는 욕망이 없던 것에 가까웠다.
인생사 제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 하나 전무했다. 가족이라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도 없었으며 진실된 유대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친구 역시도 없다. 다른 어떤 인연도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혼자였고 앞으로의 여생 역시 계속 그러리라 생각했다.
바라는 게 없으니 아쉬움과도 거리가 먼 삶이었다. 미련을 품고 입발림을 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를 제 곁에 있도록 만드는 법 따위 알지 못했다.
발렌틴 역시 코올리 밴텀의 사건 이후 제가 상당히 이상하게 변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코올리 밴텀 뒤로 헝클어진 리브가를 발견했을 때 속에 얕은 불씨가 지펴졌다. 차츰차츰 흐트러진 매무새를 눈에 담자 그것은 마른 숲으로 번진 불씨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눈이 한순간에 까뒤집히는 심정이었다. 격정적으로 치미는 노여움을 참아 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막역하면 막역하다고 볼 수 있는 그놈의 뱃가죽에 총탄까지 박아 넣었다.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음에도 모자랐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풍겨도 부족했다. 그는 리브가에게 멋대로 손을 댄 코올리 밴텀의 사지를 토막 내어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주 우스워서 실소가 다 나올 일이었다.
그녀를 부서뜨리는 게 주목적이었다. 과거의 저처럼 일어설 힘을 찾다 못해 결국은 스스로 붕괴되어 버리는, 그런 비참함을 떠안겨 주려고 했다. 그렇다면 코올리 밴텀이 그녀를 건드리는 건 오히려 목적에 부합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견딜 수가 없었다. 도통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배알이 뒤틀리고 머리가 깨질 듯한 격분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분노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왜?
그 계집이 뭐라고?
그리하여 그 분노를,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해갈되지 않는 분노를 리브가에게 풀었다.
네가 나를 점점 망쳐 가고 있는 것 같아.
과거로 모자라 현재까지. 어릴 적에 그딴 식으로 괴롭혔으면 됐잖아. 한데 왜 또 내 앞에 나타나 나를 이리도 엉망진창으로 뒤흔들고 있는지.
왜 그렇게 볼썽사납고 기분 더러운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
대체 나의 어떠한 이면을 이리도 거슬리게 건드리는 것인지.
이게 아니었다. 잔뜩 고여 엉킨 채 썩어 버린 감정의 덩어리. 비틀린 유년 시절에 대한 보상. 그리하여 그녀를 망가뜨리고 부서뜨리고, 그렇게 잔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해진 꼴이 되었을 때 보기 좋게 내버리는 게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왜…….
왜 갈수록 그녀를 찾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목이 마르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속이 바짝바짝 탔다. 어린 시절 맺힌 결핍이 속에 못 박혀 똬리를 틀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결핍을 채워 주는 게 바로 리브가였다.
어느 순간부터 무얼 하든 그녀가 생각났다. 과거를 감춘 채 마주한 재회 당시 보았던 어수룩한 웃음, 은밀하게 들춰진 이면으로 그녀를 억압했을 때 쏟은 눈물, 그 모든 걸 포함하여 다 제 손아귀에 거머쥐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안온과 분노, 그 모든 걸 포함한 삶 속의 일희일비를.
제게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게 올가미처럼 친친 감아 버리고 싶었다. 약과 술에 찌들어 사는 그조차도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아주 저열하고 원초적인 소유욕이었다.
‘발목을 부러뜨리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발목으로 간 것 역시도 그런 난폭한 소유욕의 일부였다. 발목을 분질러 버리면 도망가고 싶어도 못 갈 것 아니야. 그냥 부숴 버릴까? 그 섬찟한 패악질을 가까스로 참아 내게 한 건 그녀의 손에 여태껏 남아 있던 하얀 붕대였다.
제 발치에 엎드린 채 발발 떨며 유리 조각을 짚던 그때의 잔상이 유독 길게 길게 남는 탓에…….
“이제 주인님 곁으로는 가지 않아요.”
그토록 음침하고 검측측한 욕망을 목격하고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리브가는 한 발 더 물러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위험천만한 평지에 놓인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녀의 발뒤꿈치와 부딪쳐 절벽으로 추락했다. 타다다, 구른 그것이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허공 속에서 잡아먹힌 추락이 따로 없었다. 그만큼 까마득한 높이였다.
리브가는 제 말에 핏발 선 눈을 한 그를 여전히도 담담하게 응시했다. 담담이라기보다는 자포자기가 옳았다. 이렇게까지 궁지로 내몰렸는데도 묵묵히 순응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빚의 대가처럼 바쳐진 제 사랑은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빛바랜 그것은 더 이상 무가치했다. 무용할 뿐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렌틴의 낮은 음계가 리브가의 것을 덮어 쓰듯 따라 읊었다. 밤바람에 실린 그것이 귓가를 오싹하게 긁었다.
심상치 않은 눈빛임은 진작 인지했다. 매일의 밤마다 저를 깔아뭉개고 짓누르며 여지없이 짐승처럼 허리를 놀리던 그 열락의 때보다 더 사나운 눈빛.
완전히 돌아 버렸다는 방증처럼 발렌틴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럼 죽어야지.”
“…….”
“난 널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 버릴 것이다. 내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가질 수 없게끔 아주 산산이 조각을 내어 버릴 셈이다. 저건 오직 제 것이었다. 제 아래에 두고 제 맘대로 휘둘러야만 직성이 풀릴 제 것이라는 말이다.
혹여나 빼앗긴다면 그건 인간의 영역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죽음뿐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거든 죽음밖에 해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파멸적이고 파괴적인 탐욕을 리브가 역시 체감했다. 그녀는 정확히 저를 목표물로 잡고 겨누어진 총구를 망연히 응시했다.
자신은 그를 납치한 부친이 아닌데, 제 이기심대로 굴던 코올리 밴텀 역시도 아닌데.
그러나 결국 저것이 제게로 향해진 것을 보면 리브가의 짐작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발렌틴이 행하려는 복수의 끝은 죽음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입가에서 비소가 스며 나왔다. 메마른 속내를 닮은 건조한 웃음이었다.
저는 어떻게든 사랑을 지켜 보겠다고 아등바등했으나 제 사랑은 저를 죽일 생각만 해 왔다니.
이다지도 비련하고 비참한 꼴이 따로 있을까. 차라리 가지고 놀다가 버려지는 게 이보다는 나을 성싶었다. 아니, 그것과 별반 다를 바도 없나. 심장을 뒤흔드는 비감에 손끝이 다 움츠러들었다.
“이 정도 하셨으면 됐잖아요.”
파르라니 질린 입술을 타고 여린 곡조가 울분처럼 샜다.
“이 정도로…… 망치셨으면 됐잖아요…….”
보잘것없는 오두막집 뒤편에 세운 무덤을 떠올렸다. 성년이 된 시절부터는 그를 위해 살았다 싶을 만큼 제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였다. 그를 잃고서야 비로소 제가 빠져든 사랑이 얼마나 우매했는지 리브가는 똑똑히 깨달았다.
조금 더 살 수 있는 헤널드가 맥없이 떠나야만 했던 건, 사랑에 눈이 팔려 저지른 저의 실책이었다.
깨달음의 파도는 매서웠다. 어찌나 쓰고 독한지 부딪쳐 올 때마다 마음이 다 으깨지는 것만 같았다. 그 새삼스러운 고통에 리브가의 눈동자에 물기가 고였다.
“제가 얼마나, 더 잃어야…….”
만족스러우시겠어요.
몇 없던 친구도, 가족 같은 존재도, 심지어 사랑까지 잃은 내게 무얼 더 바라길래 이래.
“얼마나?”
발렌틴은 우스운 농지거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입꼬리를 휘었다. 서슬 퍼런 빛깔이 물씬 감도는 미소였다. 온도로 따지면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밑바닥보다도 차갑다. 큭큭대는 웃음이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을 우롱하는 악마의 것처럼 저급했다.
곧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큰 손바닥의 마찰에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은 조금 전과 대조될 만큼 서늘했다.
“나는 이따위로 더럽혀 놓고서.”
“…….”
“왜 너는 깨끗하려고 하지?”
리브가의 심장이 기묘한 각도로 비틀렸다.
처음이었다. 그가 그의 입으로 과거를 끄집어낸 것은. 두 사람 각자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골짜기에 담겨 있던. 담겼다기보다는 숨겨 둔.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 보지도 못하고 열리지도 않던 그 케케묵은 파편을.
그녀는 물기가 어린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제 앞에 나타났던, 이 세상 처음 겪어 본 고결함의 순간이 회상됐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지금 마주하는 저와 그가 어린 시절의 나이대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입으로 시인하는 복수심은 그녀에게 예고 없는 서글픔을 일으켰다. 리브가의 속눈썹이 떨렸을 때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애통함의 응집체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주인님은 정상이 아니에요.”
“날 이따위로 만든 게 누군데, 이브.”
기꺼이 과거에 버리고 온 이름을 그가 읊었을 때 리브가는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만 해도 그런 적이 있다. 그가 제 이름을 불러 주기를 맹목적으로 바라던 순간이 있었다.
저 아름답고 유려한 입술로 ‘이브’라고 한번 불러 주기를 그토록 학수고대했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제 이름을 꼬박꼬박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나는 이브야. 이브라고 해. 내 이름은 이브야. 그가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엿보이기 바빴던 제 사랑은, 돌이켜 보면 그토록 무자비하고 이기적이었다.
그렇게나 원했던 그것을 지금에서야 듣게 된 감상이라면, 참 모순적이게도 무감했다. 마음에 이는 설렘의 요동은 전무했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 바람에 흔들릴 꽃은 뿌리째 뽑힌 지 오래였다. 예전엔 그가 자신을 불러 주기만 해도 날아갈 듯 기쁘고 괜히 발을 동동 구르고는 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이젠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잘것없고 변변찮았던 인생이니만큼 얼마나 재밌었겠어.”
“…….”
“응? 어느 날 굴러들어 온 살아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 얼마나 좋았느냐고. 꼬박꼬박 식사를 처먹여 주기만 하면 알아서 병신 꼴이 되어서 껄떡대는 놈 구경하느라…….”
리브가의 미간이 비틀렸다.
“아주, 신이 났던 거잖아. 안 그래?”
씹어뱉는 한 자 한 자에 검붉은 빛깔의 원망이 한 움큼씩 서려 있다. 언제나 겉핥기식으로만 드러나던 그의 감정이 몹시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리브가로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는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재미있었다고, 좋았다고. 신이 났다고.
그 토로를 곱씹자니 누가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막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말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속내 깊은 곳에 그 단어의 모양 그대로 생채기가 죽죽 그어진다.
발렌틴이 굳어 버린 그녀에게로 한 발 다가왔다.
“대답해 봐, 어디.”
리브가는 가까워진 그의 그림자로부터 한 발 물러났다. 잊고 있던 아버지의 음성이 다시 귓가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황의 시작은 예고조차 없었다. 발렌틴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것에 덧대어진 채로 그녀의 가슴을 찢어발길 듯 파헤쳤다.
“그 요망하기 짝이 없는 입술로 지껄여 보라고.”
낄낄낄. 사람 수십 명이 저를 둘러싸고 귓가에 칼날 같은 비소를 꽂았다. 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망령들이 지금 이 순간 발렌틴의 원망을 토대로 저 지옥에서 기어 나와 신경을 사정없이 옥죄었다.
빠르게 깜박대는 망막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금 제 앞에 서서 총구를 들이대는 게 발렌틴인지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세상에 하나뿐인 피붙이를 지옥으로 떠민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며 키득키득 조소했다.
“하지…… 마세요.”
“내 귀에 잘도 속살대던 계집애는 어디 갔어?”
“하, 하지…….”
“왜 이렇게 순진한 척 구느냐고 묻잖아. 이브.”
“그만…….”
“대답해 보라고. 한 사람 인생을 구렁으로 떨어뜨린 소감이 어땠는지!”
“그래서 제가 도와 드렸잖아요!”
그녀를 당장 휘어잡을 것처럼 다가오던 발렌틴이 우뚝 멈췄다. 리브가는 그런 그의 움직임도 알지 못한 채 아우성이 끝없이 울리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서, 나는, 그래서, 그래서…….”
그를 살리기 위하여 피가 섞인 가족까지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슬럼가가 불에 타며 나온 것은 전소된 재뿐이었다. 사람의 뼈가 타고 타고 또 타올라서 부옇게 쌓아졌을 그것들.
단지 제 사랑을 구하자는 일념으로 수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았다. 물론, 벌을 받아도 마땅할 인간들이었다. 악마도 그보다는 나을 듯한 악독한 무뢰배였다. 한때 제가 몸을 담고 있었다고 하여 그 추악한 짓거리들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이를 납치하여 끌고 와 일을 시키고 약을 먹이고 감금하고…….
그러니 옳은 일이었다고 판단했다. 헤널드 역시도 동조하였다.
하지만 죄책감을 단번에 지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야만 했다는 정당성으로 덮어씌운 양심의 책망이 진물처럼 들솟았다. 가슴 안쪽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도와줘? 네가? 나를?”
발렌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둑한 동공은 다소 치열하게 리브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공황을 엿보이는 지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그 역시도 조금쯤은 눈치챈 바였다.
정물이 되어 버린 양 꼼짝도 않고 굳어 있던 리브가는 오래지 않아 귀를 틀어막고 있는 손을 내렸다. 한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빗줄기처럼 뺨을 타고 툭투둑 흘러내렸다.
“…….”
바람이 멈춘 찰나의 일이었다. 그가 영혼을 쭉 잡아 뺀 듯 텅 비어 공허해진 리브가의 동공을 확인한 건.
그게 뭐라고.
그 변화가 뭐라고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철렁하게 만드는지.
마치 그녀가 여태 간신히 붙잡고 있던 고작 한 줄의 동아줄마저도 놓아 버린 듯한 착각이 일어서…… 발렌틴은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총구를 쥔 손끝이 떨렸다. 리브가는 한순간에 그를 그런 상태로 만들어 버린 사람답지 않게 무표정한 얼굴로 총구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열렸을 때 흘러나온 건.
“그거 아세요?”
무기질 같은 눈처럼 의지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무리 파헤쳐 봐도 심오한 체념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음성.
“그곳이 지옥 같았던 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어요.”
“…….”
“원치도 않는 일을 하고,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그런 와중에도, 저를 멸시하는 그 아이들한테조차 미안해서…….”
시들시들 죽어 가고 있던 건 그녀도 매한가지였거늘.
그 나락에서 타인을 구해 보고자 했던 제 마음은 결국, 속단이고 오만이며 주제를 몰랐던 욕망이 따로 없었다. 그 사실을 완벽하게 직면한 지금 이 상황에서야 답이 명확해졌다.
이런 결말이 될 줄 알았다면.
그래, 그랬다면.
“주인님을 구하지 말 걸 그랬어요.”
인연까지 바란 적도 없거늘, 이렇게나 악연만이 쌓이는 것도 참 지독했다.
그 악연으로부터 영영 멀어지고 싶은 것처럼 리브가가 한 발을 더 물렸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더 이상 남은 평지는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누군가 붙잡을 새도 없이 기울었다. 흐릿해진 시야 속에 그가 내도록 저를 향해 겨누던 총을 내던지는 게 보였다. 그러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새도 없이 추락했다.
서서히, 서서히. 조금 전 굴러떨어진 그 돌멩이처럼, 그렇게.
보잘것없이.
하잘것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