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며칠 내리 비가 내렸다.
여름은 이미 지났는데 뜻밖에 찾아온 장마가 따로 없었다. 우중충한 날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줄기차게 이어졌다.
로트링겐 저택의 주인은 비가 내리는 정원을 풍경 삼아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다. 그 옆에 티팟을 든 채 서 있던 리브가는 제 어깨를 툭 두드리는 손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발렌틴의 눈길이 제게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탄성을 터뜨린 그녀가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빈 찻잔에 찻물을 쪼르륵, 따르는 동안 옆태로 시선이 지독히도 빤하게 달라붙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눈길의 의미 하나하나를 골몰히 헤아렸겠으나 지금의 리브가는 그저 망연하기만 했다. 마치 몸만 그 자리에 있고 영혼은 이미 쏙 달아난 사람처럼 말이다.
요즈음 아주 잠깐의 틈만 있으면 넋을 놓기 일쑤였다. 지금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브가……!”
다급히 팔을 잡아채는 손길이 느껴지고서야, 찻물이 이미 왈칵 넘쳐 주인의 손까지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순간 놀라서, 그리고 하녀장의 우악스러운 행동 탓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고급스러운 무늬가 정결하게 수놓아진 티팟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쨍그랑!
요란하고 첨예한 소음이 허공을 날카롭게 갈랐다. 식당 안 모두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 소리는 아직까지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리브가의 정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자마자 허옇게 질린 낯빛이 되어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죄송, 합니다.”
얼른 무릎을 굽히고 앉아 주인의 발치에 산산이 조각난 유리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얼마나 황망해진 건지 연약한 피부가 뾰족한 단면에 무참히 찢겨 나가는데도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얀 손가락에는 금세 벌건 생채기가 죽죽 그어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리브가는 이제 누구에게 사과를 고하는지도 모를 태세로 그것만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며 피를 비쳤다. 넋 나간 동공이 지금 이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티팟 조각을 줍는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발렌틴이 내려다보는 시야에 그 몰골이 빼곡히 들어찼다.
상처 사이로 흐른 핏방울이 바닥으로 똑, 떨어지는 순간 발렌틴의 눈동자는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그의 눈길이 하녀장에게로 돌아갔다. 주인의 눈짓만으로도 그 안에 함의된 지시를 알아챈 하녀장이 리브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리브가,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 바람 좀 쐬고 오도록 하렴.”
그녀는 그새 정신이 쏙 달아난 사람처럼 어물어물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손에 유리 몇 조각을 쥔 상태라서 상처가 더욱 번져 갔다. 제게서 풍기는 피 냄새에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이 잡히기를 반복했다. 두통과 메스꺼움은 이제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증상이었다.
발렌틴을 향해 가까스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리브가는 문가로 향했다. 그의 으그러진 시선이 제 뒤로 따라붙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비척비척 식당 밖으로 나섰다.
<모, 몰랐어. 나는. 난 그저 잠들어 계신 줄로만 알았다고!>
한참을 정처 없이 걷던 리브가는 복도 중앙에서 우뚝 멈춰 섰다.
무어가 그렇게나 억울한지, 저를 보고 길길이 날뛰던 의사의 음성이 이명처럼 고막을 찔렀다.
<불러도 답이 없으셔서, 단지, 쉬고 계신 거라고 짐작했는데…….>
돈을 그렇게나 많이 얹어 줬음에도 사내는 목돈의 값어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적어도 의사라면 최소한의 사명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온 세상이 사기꾼 천지라던 케시의 말이 지금만큼 이해 가는 순간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의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부탁받은 대로 낡은 오두막집에 찾아갔을 때 헤널드는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저보다 앞서 찾아간 의사가 헤널드의 상태를 제대로 살펴봐 주기만 했더라도 그는 아직까지는 살아 있었을지 모르니까.
인자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세월을 따라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봐 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이제 땅으로 돌아갔다.
물론, 헤널드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일이라는 건 그녀 역시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그는 시한부였다. 심지어 의사가 대략적으로 선고한 기간보다도 오래 버텨 주었다. 그래서 리브가는 늘 마음 저 구석 한편에 그를 떠나보낼 준비를 잘 갈무리해 두었다.
마지막 모습도 그만하면 호상인 양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약을 먹으며 버텼던 시간이 잔혹한 고통의 연장선이었을지 모른다. 죽음이 평안의 안식이 되었을지도.
그럼에도 리브가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버렸다는 고독을 의연히 삼켜 낼 수 없었다.
<네가 진짜 가족을 죽여 버렸으니 그런 것 아니야.>
뇌리를 쑤셔 대듯 파고드는 첨예한 두통에 그녀는 비틀거렸다. 두 다리를 세워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어 벽에 기대섰다.
<천하의 나쁜 계집년, 넌 벌받는 거야. 이 아비를 지옥으로 밀어 놓고 너 혼자만 잘 살려고 하니 신이 노한 거라고!>
요 며칠간 자꾸만 악몽을 꾸었다.
“아니야…….”
악몽에서는 늘 아버지가 나왔다.
어릴 적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채 타락과 나태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던 마약상 친부 말이다. 그는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죄다 피를 흘리며 낄낄 웃어 댔다. 피범벅의 꼴을 한 채로 웅크린 리브가의 귓가에 대고 연신 망령의 저주를 퍼부었다.
네가 아비를 사지로 몰아 너 역시도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가족을 죽였으니 그 대가로 가족 같은 이의 목숨을 떠나보내게 된 것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리브가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발을 내디뎠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영영 벗어나지 못할 아귀지옥에 빠진 양 아주 긴 복도를 분주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느새 숨이 차오를 만큼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귓가에 욱여넣어지는 아버지의 음성은 끝없이 들러붙었다. 아버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그의 수하의 목소리 같기도 하던. 어릴 적 저를 학대하고 괴롭혔던 이들의 목소리가 수십 개는 겹쳐진 채 리브가의 고막을 찢어 버릴 듯 울렸다.
“아냐, 아니라고, 아냐……!”
토악질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배 속이 바다가 되어 버린 양 끝없이 출렁거렸다. 그 안에는 리브가가 그간 꾸역꾸역 삼킨 모든 감정의 울화와 잔재가 가득했다. 어쩌면 죄책감일지 모를 것부터 시작하여 회한, 슬픔, 우울, 울적, 어쩌면 분노까지도. 그것들이 갈퀴 모양이 되어 속을 피가 나도록 긁어 댔다.
공황 상태에 빠진 리브가는 외부와 이어지는 쪽문으로 뛰쳐나갔다. 굵어진 빗줄기가 그대로 쏟아지는 구석에 쪼그린 채 또다시 목구멍이 아릿아릿해질 만큼 토했다.
그럼에도 욕지기는 계속해서 치밀었다. 이게 정말 불편한 속에서부터 발생하는 생리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고일 대로 고여 그 자리에서 썩어 버린 제 자신의 추하고 못난 감정 덩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피할 길 없는 빗발이 온몸을 뚫어 버릴 것처럼 쏟아졌다. 지금의 그녀에겐 그 얇고 별것 아닌 빗줄마저도 견디기 버거운 창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맨몸으로 후려맞는 리브가의 표정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게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가족을, 가족을, 네가, 네가, 죽이고, 죽이고, 나쁜, 나쁜, 나쁜 년.>
부친의 가죽을 뒤집어쓴 망령의 췌언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는 아니라는 부정은 이미 기력을 잃을 대로 잃은 지 오래였다. 눈앞이 부유스름하게 흐려지는데 빗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리브가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였다.
무언가 어깨를 톡 건드렸다.
등골이 움츠러들고 온몸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게 마치 지옥 불에서 살아 돌아온 아비의 처절한 아귀힘 같아서 리브가는 실로 공포스러웠다.
“싫어!”
비명과 함께 화들짝 치들린 얼굴에서 그 감정이 선명하고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탁하게 흐려진 회색빛 동공이 갈피를 잃은 듯 거세게 흔들렸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어 있던 탓에 가까이 다가온 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리브가.”
눈꺼풀이 한 번 흔들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축축한 궤적을 남기며 시야가 조금쯤 맑아졌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염려스러운 표정을 한 케시였다.
“너…… 괜찮니?”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은 평민이 쓰는 것답게 보잘것없고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게 비를 막아 주고 있었다. 너무나 세차서 꼭 화살처럼, 창처럼, 검처럼 느껴지던 그 비를. 이상하게도 케시가 등장하니 내내 리브가를 못살게 굴던 환청이 차차 작아지더니 끝내 멎었다.
리브가의 입에서 허탈하고 힘 빠진 탄식이 터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리브가의 눈물샘은 말릴 겨를도 없이 터졌다. 우산이 씌워졌으나 비는 그녀의 뺨 위로 여전히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케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빗소리와 울음소리가 반반 뒤섞여 떠다니는 공기는 실로 축축했다.
* * *
오래간만의 대면이었다.
리브가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다친 손을 치료하는 과정을 맥없이 응시했다. 케시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아 주면서도 친구가 어렵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씩 분노 혹은 울분을 참지 못할 때마다 잠시 멈칫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밀려날 곳은 없었다. 리브가가 서 있는 곳은 바람만 불어도 그대로 고꾸라져 버릴 절벽의 끝이었다. 더는 버틸 재간도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케시에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까마득해진 자신의 유년 시절과 그곳에서의 인연, 더하여 그것이 어떤 흉측하고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남아 현재의 악연으로 이어졌는지.
어렵사리 끄집어낸 속사정을 마쳤을 때 케시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방 한편에 배치된 상비약 상자를 닫으며 케시는 화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지금껏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
리브가는 잘만 열던 입을 다물었다. 케시라고 하여 집요하게 캐묻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 역시도 정말 대답을 듣고 싶어 꺼낸 질문은 아닐 터였다. 그저 친구인 제게도 털어놓지 않고 내도록 숨겨 온 속사정을 이제야 알게 된 것에 대한 애정 어린 투정이리라.
“너에게 제안을 하는 게 아니었어.”
케시는 붕대로 돌돌 말린 리브가의 손을 바라보다가 자책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언제를 일컫는지는 빤했다. 저 혼자서는 적적할 것 같으니 로트링겐 저택의 하녀로 들어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건넸던 과거의 그날.
리브가는 이제 더 이상 피가 나지 않는 손끝을 꼼지락댔다.
“네 탓 할 것 없어. 함께 가겠다고 결정한 건 나인걸.”
돈이 필요하다는 세속적인 욕망과 어릴 적의 인연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다는 이면의 욕망으로 인한, 저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케시는 속에 무언가 우글우글 차올라 답답한 사람처럼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인님도 어떻게 그런 무도한 짓을……. 몸을 팔으라고, 그게 아니라면 해고라고. 하. 차라리 너로서는 억울하다고 말이라도 해 보지 그랬어!”
“무슨 말을 하겠어.”
폭력과도 같은 정사에 임하며 고통만큼 선연했던 건 다름 아닌 부채감이었다. 저를 탐하던 주인의 모습은 괴물 같았다. 그러나 그런 괴물의 꼴로 만든 게 자신이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에…….
“결국 강제적으로 약을 먹여서 그런 상태로 만든 건 내가 맞는데.”
과거의 악몽을 꾸며 낸 건 제 아비였고, 부친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도 온전한 면죄부를 지녔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주인이 약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발렌틴은 그 고통을 풀어낼 대상도 없이 몇 년을 버티고 또 버티었다.
그러니 해묵은 그의 분노는 정당하였고 제가 수용해야 한다는 죄책감에 기반을 둔 의무감이 들었다. 사랑하기에 품은 용기이고 무지였다. 용감하고 어리석고 참 아둔했다. 제가 품은 사랑이라면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게. 누군가 사랑이 정열적이라고 말하였던가. 동감했다. 정열적으로 타올라 결국은 그녀 본인까지 잿더미처럼 헛헛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참 애처롭고 끔찍한 감정이었다.
리브가의 입가에 허망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건 삶의 끝자락에서 간신히 내지어 보이는 웃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적어도 케시에게는 그런 불길하고 아득한 징조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위태롭게 내비쳤다.
“하지만 그건……!”
“무슨 사정이 있었다고 한들 사실은 바뀌지 않아.”
실수일지 몰라도 결국, 그 행동이 발렌틴을 괴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상처는, 내가 먼저 준 셈인데…….”
그 말대로 누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느냐 묻는다면, 다른 모든 걸 차치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서만 생각해 보자면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리브가였다. 그녀가 먼저 멋모른 채 그를 혹독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셈이었다. 악의 선행은 어떻게 보면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죗값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견뎌 보려고 했어.”
“…….”
“그런데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도.”
혼란이 밴 말투마저도 썩 건조했다. 케시는 리브가가 그리 나약한 성정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역정이나 분노를 한 줌도 토해 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없이 미어졌다. 모든 게 그녀가 지난날 건너온 역경이 무척이나 고단했음을 표하는 방증 같았다.
리브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각했다.
어릴 적의 치기를 부린 대가로 받는 것치고는 보복의 정도가 극심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가 훌쩍 넘어섰다. 그녀 자신이 망가지는 걸로 모자라 친구를 하나둘씩 잃고, 끝내 가족 같던 사람의 이른 죽음까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미 이렇게나 지옥을 걷는 것만 같은데, 앞으로 얼마나 버텨야 하는 걸까.
어쩌면, 이다음으로 저를 기다리는 건 죽음이 아닐까. 발렌틴이 코올리 밴텀에게 총을 발포했던 기억의 잔상이 시도 때도 없이 어른거렸다. 그날 그녀는 목 끝에 칼날이 디밀어지는 것과 같은 섬찟한 공포심을 똑똑히 체감했다.
발렌틴이 행하려는 복수의 끝은, 저 역시 코올리 밴텀과 같은 꼴이 되고 마는 결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하녀장의 태도도 이상했어.”
“…….”
“네가 밤 시중을 들게 된 뒤로 자꾸만 이상한 말을 하더라. 앞으로는 너와 이전처럼 지낼 생각하지 말라는 둥, 더 이상 편하게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둥……. 밤 시중이 봉급이 높다는 이야기도 슬쩍슬쩍 흘렸지. 애들 사이에서 네가 주인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둥, 욕심쟁이라는 둥, 쓸데없는 뒷말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어.”
리브가는 제 옆으로 다가와 앉는 케시를 망연히 응시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하녀장이 괜히 그런 소리를 했겠니?”
그건 즉, 발렌틴의 명령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주인님은…… 널 완전히 고립시키고 망가뜨리려고 작정하신 거야.”
의구심에 쐐기를 박듯 케시가 침체된 어조로 덧붙였다. 차오른 분노를 곱씹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브가의 앞에 마주 섰다. 힘없는 시선이 케시의 동선을 따라 위로 들렸다.
“이 상황이 네가 과거에 저지른 실책에 대한 대가라고?”
“…….”
“아니야. 리브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정도가 심해, 너무 과하다고!”
케시는 밝은 주홍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다리를 굽혀 앉았다. 찰나간 리브가는 그녀의 눈동자에 고인, 저를 향한 걱정과 불안을 똑똑히 목도했다.
“주인님이 정녕 널 그렇게 끝의 끝까지 밀어붙일 작정인 거라면…… 도망가, 리브가.”
케시가 감싸 쥔 리브가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내가 도와줄게.”
“…….”
“당사자가 아닌 만큼 이런 말, 솔직히 의미 없고 그걸 넘어서서 조금은 우습다고도 생각해. 하지만 나는 해야겠어.”
“…….”
“내가 보기에 너는 이미 충분히 대가를 치렀어. 이 이상, 도대체 이 이상 무얼 더…….”
케시의 담갈색 눈동자는 거울 같았다. 제 것과 달리 의지와 생기로 가득 차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하나뿐인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두드러짐으로써 말미암아 엿보여지는 깨끗한 속내였다. 저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부서뜨리려는 발렌틴의 것과는 궤가 달랐다.
리브가는 그 눈동자 속에 비치는 저를 보았다.
이제야, 무너질 대로 무너진 자신이 제대로 보이는 듯했다.
“난 이대로 네가 위험해지는 거, 두 손 놓고 보고 있을 생각 없어.”
손끝이 다시금 오므라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껏 느낄 수 없었던 통증이 뒤늦게 생생해졌다. 그건 그녀가 비로소 지금에 와서야 제 고통과 슬픔을 똑바로 마주한 탓이었다. 죄책감과 무지한 사랑으로 가려져 있던 그것이 걷어진 지금에서야.
머리도, 속도, 손가락도 너무나 아팠다. 그러나 가장 아픈 건 역시 마음이었다. 리브가는 제 손을 감싸 쥔 케시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여러모로 힘겨운 순간이었다.
* * *
맞부딪쳤다가 떨어지는 살갗이 땀으로 번드르르했다. 리브가는 통통하게 부푼 젖꼭지를 집요하게 흡착하는 검은 머리통을 아른히 내려다보았다. 머지않아서는 벌어진 구멍이 나른히 쑤셔지는 감각에 눈을 감고 가는 몸을 떨었다. 허리가 둥근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가 원만해지기를 반복했다.
“읏, 흐으…….”
하얀 붕대로 휘감긴 손가락이 그의 흑발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가지의 색깔이 양극단의 끝에서 대조를 이루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 발렌틴의 손길에 힘이 실렸다. 탐스러운 살집을 몇 번 주무른 그가 아래로 내려가 리브가의 오금을 고쳐 잡았다. 자세를 본격적으로 고치는 건 일종의 신호와도 같았다.
리브가는 신음하느라 입 안에 고인 타액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그리고…….
“응……! 읏, 앗, 하앙……!”
타원을 그리며 느리게 파고들던 추삽질에 불시에 속도가 붙었다. 거대한 살기둥은 안을 세차게 긁으며 애액이 울컥울컥 튀어 오를 만큼 격렬하게 출납했다. 시트를 꾹 움켜쥐고 있던 리브가는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비좁은 구멍을 탐내는 데에 정신이 팔린 듯하던 발렌틴이 그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다. 곧 그는 벌겋게 까진 그녀의 유두를 아예 잘근잘근 씹어 대며 뿌리 끝까지 좆을 짓쳐 넣었다.
“아하응…… 흐윽……!”
팽만감에 폐부가 욱신 조여들었다. 수십 번을 품어도 도통 적응할 수가 없는 크기였다. 리브가의 내벽이 확 좁아 들자 발렌틴은 혀를 내어 손가락을 핥고선 그것으로 결합부 위쪽을 빙글빙글 문질렀다. 돌올하게 솟구친 음핵이 자리한 위치였다.
아예 끊어 먹을 것처럼 옥죄던 내벽의 조임이 움찔움찔 경련하다가 서서히 풀어졌다. 발렌틴은 말캉한 살점을 벌려 음핵에 지그시 자극을 더하며 안을 파헤쳤다. 질내의 살점이 짓뭉개지며 기둥의 선단이 가장 느끼는 극점을 퍽 쑤셨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리브가는 눈을 질끈 감고 발끝을 곱았다.
“후우…….”
건드리자마자 꽉 조여 무는 구간에 깊이 신음한 발렌틴은 리브가의 하얀 목덜미로 올라가 보드라운 살결을 핥았다.
불현듯 휘장 바깥에서 어떠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녀는 잠시 흐려질 뻔한 이성을 간신히 되찾고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발렌틴의 시선이 기척을 느끼고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손길은 사내의 장골이 철썩철썩 부딪쳐 오는 가운데 천천히 올라가 뺨을 감싸 쥐었다.
“주, 흑, 주인님.”
욕정과 집착 개중 어느 경계에 해당하는지 모를, 어찌 됐든 혼탁하게 들끓는 눈동자가 제게 닿는 순간 리브가는 까닭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저것이 희미하게 흐려진 지금이야말로 제가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의 경계가 그나마 풀리는 순간이 침대 위에서의 순간이니 말이다.
“입, 맞춰, 하아, 주세요…… 읏!”
순간 발렌틴이 자궁부에 닿을 만큼 깊숙이 박아 넣은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홍채가 옅게 요동쳤다. 밝고 화려한 색임에도 아주 어두운 밤중의 파도를 떠올리게 하는 눈이 따로 없었다.
리브가는 멈칫한 그를 대신하여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굳은 그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댔다. 평소 주인이 하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고 이후 혀끝으로 윗입술을 간지럽혔다. 슬그머니 벌어지는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기 위해 턱을 비트는 찰나였다.
“웁……! 음, 응……!”
그가 움직임을 재개했다. 발렌틴은 제가 먼저 리브가의 입 속에 혀를 처박아 넣으며 잠시 중단했던 추삽질을 재개했다. 리브가는 두 팔을 뻗어 기꺼이 그의 어깨를 휘감아 안았다. 며칠 굶은 짐승이 먹이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것처럼 그는 정신없이 몸을 부딪쳐 왔다. 잦은 마찰로 결합부에 뿌연 포말이 일었는지, 끈적한 감각이 회음부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상당 시간 이어진 정사를 표하듯, 엉덩이 아래 시트는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하, 읏. 좋아, 좋아요.”
질기게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리브가는 달뜬 음성으로 속삭였다. 코앞에서 반질대는 그의 동공이 확 좁아져 비틀리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더 세게, 더, 더……!”
“이 요부 같은 게.”
발렌틴은 술과 약이 아닌, 온전히 리브가라는 여인에게 취한 것처럼 정신없이 허리를 놀렸다. 철퍽철퍽, 박아 대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최고치를 찍은 스퍼트에 리브가의 눈동자마저도 혼몽하게 풀렸다.
“주인님. 아아, 흣……!”
발렌틴이 리브가의 허리를 껴안아 가벼이 들어 올렸다. 침대가 끼익 소리를 냄과 동시에 두 사람의 자세가 반전되었다. 발렌틴은 침대 헤드의 푹신한 베개에 반쯤 기대앉은 상태였다. 이젠 리브가가 그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그려졌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허리를 흔들며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헤드와 연결된 탁자 위, 재떨이에 걸쳐 둔 시가를 들어 올린 그가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놓았다. 휘장으로 꽁꽁 감싸진 침대 내부에 그윽하고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리브가는 복부를 짚고 있던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여인의 것보다 덜 돌출된 그것을 지그시 문질러 돌리자 발렌틴의 눈빛은 점점이 무너져 내렸다.
“매사 시체처럼 굴기 바쁘더니.”
웬일로 이리 적극적으로 구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었다.
그 말대로 발렌틴의 낯빛엔 약간의 혼돈이 묻어났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맥없이 부추겨지는 흥분 역시 또렷이 존재했다. 리브가는 그간의 밤으로 말미암아, 제가 먼저 만지고 건드리는 행동을 주인이 몹시도 좋아하는 편이란 걸 깨달은 바였다. 예전만 해도 제 몸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던 그가 이제는 손으로 뺨을 쓸거나 머리채만 움켜쥐어도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들었다.
리브가는 상체를 숙여 그의 젖꼭지를 혀로 핥았다. 그녀의 갈색 머리칼을 움켜쥔 발렌틴의 손등에 핏줄이 툭툭 올라섰다.
“하아, 씹…….”
그는 허리를 마구잡이로 쑤셔 올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내며 묵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저 자그맣고 붉은 혓바닥이 제 유두를 살살 핥아 대는 건 정말이지, 모든 생각이 휘발되어 사라질 만큼 좋았다.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는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끝내 척추뼈 하나하나를 타고 오르는 성감을 이기지 못하고 리브가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가녀린 몸체를 제 힘으로 들었다가 내렸다가 반복하며 뭉근하던 추삽질에 자극을 더했다. 리브가는 높은 음조의 비명을 지르며 그의 위에서 자지러졌다.
“아, 아앗, 흑, 으, 살살……!”
발렌틴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아 몸을 빙글 돌렸다. 마주 보는 상태에서 그가 조금 더 그녀의 위로 드리운 자세였다. 가냘픈 리브가의 발목을 붙잡아 반쯤 빠진 번드르르한 페니스를 다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리브가의 두 팔이 제 목을 껴안는 순간, 발렌틴은 전에 없던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술과 약의 비린내로도 지워지지 않는 꽃내음의 체향이 뾰족하게 돋아난 신경을 진정시켰다. 코나 입에 무엇 하나 대지 않았으나 흠뻑 취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맘속에 이는 모든 의문을 뒤로한 채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맹목적으로 섹스에 매달렸다. 한참 밑구멍이 헐도록 박아 대다가 그녀의 손을 떼어 내 그것을 가만 들여다보기도 했다. 붕대가 감긴 쪽의 손이었다.
리브가는 쾌락으로 흐려진 와중에도 제 다친 손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이 깊고, 탁하고, 어두워진 것을 목격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이게 다 당신이 바란 파멸이었으면서.
리브가는 문득 욕지기가 치밀 뻔한 것을 참아 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친 쪽 손을 조심조심 어깨에 얹은 그가 리브가의 턱을 붙잡아 입술을 성급히 빨아 대며 방아질을 했다.
이윽고 자극점이 연신 건드려졌다. 내벽살이 부들부들 경련하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절정을 준비했다.
“아흐윽……!”
제 팔뚝만 한 것이 뿌리 끝까지 박혀 들어오자 시야가 희게 물들며 오르가슴에 다다랐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쾌락이 전신의 신경을 쪼개 놓았다. 입 안에 흠뻑 고인 타액을 삼킬 수도 없었다. 그건 모조리 입술을 겹쳐 온 발렌틴의 혀가 앗아 갔다.
잠시간 한 몸처럼 달라붙어 밭은 숨만 내쉬었다. 쾌락의 여운이 오늘따라 길고 짙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둡게 물든 천장을 응시하는 리브가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격한 섹스로 땀에 젖은 발렌틴이 리브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옅은 라일락의 향.
그것이 폐 안쪽에 가득 들어찼다. 마르고 마른 가뭄의 땅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처럼 쩍쩍 갈라지고 굳어진 속내가 차츰 차오르는 듯도 했다. 따뜻하기도 하고, 안온하기도 한. 그 본인이 잊어버린 지 아주 오래된 감각을.
발렌틴은 더 이상 리브가를 물고 늘어지는 제 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이것 역시 하나의 중독과도 같았다. 이유를 헤아려볼 새도 없이 황홀히 빠져들기에 바빴다. 그는 높다란 콧대로 얇은 피부를 문지르고 몇 번이나 빨아들였다. 멍이 든 것처럼 짙은 자국이 생기고서야 그는 떨어져 나갔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휘장을 걷으며 멀어졌다.
리브가는 간신히 이불을 끌어다 덮은 채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발렌틴은 늘 섹스가 끝나면 갈증을 축이기 위해 물을 마셨다. 잔을 든 그가 그것을 입가에 대고 기울였다. 그 장면이 리브가의 눈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심장이 모든 소음을 잡아먹을 듯 크게 울렸다.
“…….”
발렌틴의 후골이 거칠게 위아래로 꿀렁였다. 한 입 삼킨 그가 잠시 멈칫했다. 알아챈 걸까. 리브가는 시트 안에 숨겨 둔 손을 꾹 말아쥐었다. 빼곡한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나 싶더니, 그는 이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물을 마저 삼켰다. 리브가의 입에서 소리 없는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잔을 다 비운 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농롱한 금안은 신경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껄끄러운 긴장감을 떠안겼다. 발렌틴은 잠시 가만한 시선을 던지다가 빈 잔에 물을 따라 침대로 다가왔다.
“마실 텐가?”
리브가는 그의 손에 들린 물 잔을 힐끗 보고는 답했다.
“괜찮아요.”
몇 시간 내리 혹사당한 탓인지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발렌틴은 그것을 눈치채고 미간을 굳혔으나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물렸다.
침대로 돌아온 그는 잠시간 리브가의 발목 쪽을 지긋하게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실낱같은 오한이 끼쳐서 리브가는 이불을 끌어당겨 그 부분을 가렸다. 그러자 발렌틴은 평소처럼 침대에 올라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잠들기 전 취하는 행동이었다.
얼마 안 가 발렌틴은 서서히 잠이 들었다.
그는 잠들기 전까지 섹스할 때처럼, 붕대로 뒤덮인 리브가의 손을 이따금 만지작거렸다. 혹 상처에 덧이라도 날까 봐 걱정스럽다는 것처럼 지극히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리브가는 그게 제 마음에 어떠한 실금을 긋는 느낌이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무력해지는 것도 같은 아주 미묘한 감정의 끄나풀들이었다.
“…….”
발렌틴의 호흡이 충분히 진정되었다 싶을 즈음 리브가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그가 단숨에 비운 물 잔을 돌아보았다. 워낙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서 잠이 드는 데에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그가 이토록 일찍 눈을 감았다면 수면제가 제대로 통한 것일 테다.
리브가는 침대 밑에 벗겨진 옷가지를 들고 휘장 밖으로 나섰다. 안에 받쳐 입는 슈미즈로 정사의 흔적이 남은 축축한 가랑이 사이를 닦아 냈다.
옷을 꿰어 입는 손길이 처음에는 그리 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렌틴이 언제 저 휘장을 젖히고 나타나 제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들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맘속에 똬리를 틀며 자라났다. 그것을 완전히 자각했을 때는 옷을 갖춰 입고서 허둥지둥 침실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끔 닫힌 문 너머의 복도는 여명조차 들지 않아 쓸쓸하고 처연했다. 리브가는 잠시간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마지막…….’
이 복도를 보는 건 오늘이 끝이기를 바랐다.
그녀는 또다시 치고 올라오는 메슥거림을 심호흡으로 달래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내디디는 한 발 한 발에 그간 발렌틴을 향해 품었던 감정이 검은 덩어리째로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사랑을 닮은 그것은 썩은 구정물처럼 변하였고, 그리움을 닮은 그것은 질퍽한 진흙이 되었다. 리브가가 그를 만난 이래 수렁만을 뒹굴었으니 그 애틋하던 감정 역시 더럽혀지고 오염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내 외부로 나설 수 있는 문 앞에 섰을 때, 리브가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탐내면 안 될 것을 탐내 버렸다는 사실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제 인생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무너지고 나서야.
발렌틴을 처음 보았을 때의 자신은 꼭 아주아주 고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냥 제게로 떨어진 보화인 줄로만 알고 정성스레 닦고 보듬어 주었다. 정작 그런 제 행동으로 그 보석에 흠집이 새겨지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그 황홀한 값어치를 끝도 없이 추락시키는 줄도 알지 못하고.
그러나 기실 보석은 제 것이 아니었고, 흠집을 낸 채로 빼앗겨 버렸다.
뜻하지 않게 가졌던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함과 외로움이 들어찼다. 그리웠고 보고 싶었고 가끔은 애가 닳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본 아프고 써늘한 감각이었다.
보석을 잃어버렸다한들 그것을 향한 열망은 지속되었다. 제가 흠집 내 버렸을지언정, 그 이채와 발광은 여전히 눈이 부셨기에 어떠한 형태라도 좋았다.
그 바람대로 마침내 보석을 되찾았지만.
그것은 간직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한 곤궁으로 빠뜨렸다. 그녀에게 있어 그 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시련이 나날이 새롭게 떨어져 내렸다. 그리하여 리브가는 계속해서 상처를 입었다. 끝없이 무너져 내리고 주저앉았다.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 하나 가지고 버텨 보았다.
하지만 그 시련이 끝내 그녀의 팔다리와 같았던 존재까지 앗아 가 버리니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제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그리하여 리브가는 그 보석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보석을 포용하려거든, 제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쯤 되니 그것에 그토록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가 무얼까, 싶은 근본적인 의문마저 일었다.
나를 내버리면서까지, 나를 망치면서까지 이 사랑을 유지하여야만 하는지.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상태로 잘도 품은 그것을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꼭 하나 간신히 쥐고 있던 무언가마저 갈취당한 양 망연한 심정이 되어 인적이 드문 정원을 걸었다.
“리브가.”
저택 귀퉁이와 이어지는 쪽문에 다다랐을 때, 리브가는 저를 기다리던 케시를 발견했다. 아마도 조금 전 침실에 몰래 들어와 수통에 수면제를 탔을 케시는 그 안에서 벌어진 일 또한 똑똑히 들었을 테다. 그 사실을 되뇌어도 마음에 큰 요동이 없는 걸 보니 정말, 이제는 더 무너질 마음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케시는 아무런 말 없이 로브를 어깨에 걸쳐 주고 끈을 정성스레 묶어 주었다.
“발라파르 영지로 향하는 기차표, 그리고 숙소에 모아 둔 네 돈은 다 가방 안에 넣어 뒀어. 발라파르보다 더 멀리 가는 곳으로 구하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시간대가 이래서 선택할 수 있는 곳이 몇 없었어. 혹시 문제가 생기면 그 역에서 알아보고 이동해야 할 것 같아.”
그녀의 손에는 작은 천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어서 케시는 쪽문 앞에 놓인 삯마차를 눈짓했다.
“마차가 기차역에 서면, 바로 내려서 곧장 발라파르행 기차를 타도록 해.”
리브가는 가방 안을 살펴보았다. 안쪽에는 돈이 담긴 헝겊 주머니와 그 옆에 고스란히 놓인 기차표가 있었다. 이제는 낮이고 밤이고 집착적으로 찾아 옭아매는 발렌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하여 케시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더 이상 리브가는 일자리를 놓고 발렌틴의 곁에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 100루벨이나 드는 할아버지의 약값을 구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녀 마음속에 진 빚이나 마찬가지였던 사랑 역시 무너지고 일그러지다가 결국 산산이 박살 나 버렸기 때문에.
순순히 사직을 입에 올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발렌틴이 저를 이런 식으로 내몰아 차츰차츰 시들게 만든 목적을 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분은 다름 아닌 복수였다. 그는 어릴 적 자신에게 식사를 종용하여 빌어먹을 약쟁이 꼴로 만들어 버린 리브가에게 벌을 주기 위하여 이런 일을 꾸몄다.
리브가는 이미 자신이 혹독하게 치른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발렌틴의 입장에선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저를 순순히 놔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도망가려 한다며 더, 더 자신을 황폐한 우리 속에 가두고 속박하며 말라 죽이려 들지 몰랐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사람인가, 묻는다면…….
<컥, 무…….>
제 앞에서 심약하게 무너지던 거구의 사내가 그 근거처럼 떠오른다. 코올리 밴텀. 리브가는 당시 저를 해코지하려는 코올리에게 총을 발포한 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 눈이 돈 것처럼 돌변하여 저를 시도 때도 없이 침대로 끌어들이던 그 행동 또한.
처음에는 막연히 제 소유물이나 다름없다 여기는 그녀를 빼앗겨서 언짢기라도 하나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제는 그 이면에 깔린 저의가 짐작이 갔다.
‘자신의 몫…… 이니까.’
리브가는 오직 발렌틴, 그 자신이 철저하게 부서뜨려야 하니까.
그의 복수의 대상이니까.
다른 놈의 손을 타 망가지는 건 원치 않아 한다. 자신만이 그녀를 붕괴시키고 으그러뜨려야 하므로 분노한 것이었다. 그가 손수 친 거미줄에 걸려 바둥대는 나비이니만큼 그 먹잇감을 삼키는 것 역시도 제가 되어야 한다는, 과거의 악연으로부터 기인한 아주 파괴적이고 난폭한 욕망.
그러니만큼 도망은 그의 감각이 그나마 온순해지는 어두운 새벽경을 틈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발렌틴은 워낙 약을 장기 복용한 탓인지 언제든 쉽게 잠들지 않았으며, 든다 하더라도 얼마 안 가 깨어나고는 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야 왜 해가 쨍쨍한 백주 대낮에 그리도 권태롭고 나른하게 구는지 알 수 있었다.
하여 케시의 도움을 받았고 그 결과로 지금 리브가는 무사히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그가 리브가의 부재를 알게 되는 건 동이 튼 이후일 것이다. 어쩌면 수면제로 인해 그보다 더 늦어진 시각일지도 모르고.
“네가 먼저 가 있으면 나도 며칠 살펴보다가 얼른 뒤따라갈게.”
케시는 떠나는 그녀와 기꺼이 함께해 주기로 하였다. 발렌틴이 저지른 짓에 혀를 내두르며 학을 뗀 건 친구인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간 나름 화대의 형식으로 받아 모은 돈이 꽤 되었기에 어느 정도 버티기에는 충분했다. 리브가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리브가에게도 그러한 만큼 케시에게도 이곳은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을 순전히 저를 위하여 떠나 준다고 말해 준 친구였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케시는 그런 그녀의 복합적인 마음을 읽었는지 어깨를 두드리고서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얼른 타. 지금 출발해야 시간이 맞을 거야.”
리브가는 마차에 올라타 케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시켜 주는 것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바퀴가 굴렀다. 창 너머의 로트링겐 공작저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리브가는 좌석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약을 한 움큼 들이킨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조금 괜찮아진 것도 같던 속 역시 재차 나빠졌다. 그녀는 배를 감싸 쥔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어지러웠다.
* * *
마차는 무사히 로트링사일런 역에 도착하였다.
리브가는 케시의 당부대로 그 어느 곳도 둘러보지 않고 곧장 발라파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천 가방 안에 든 회중시계를 살펴보니 시침은 숫자 ‘2’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2시경이었다. 그 시간대답게 기차역은 텅텅 비어 있었다.
리브가는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착석했다. 누군가가 각각 머리와 팔, 무릎에 실을 걸어 바닥으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몸이 기진하고 축축 처졌다. 발렌틴과의 정사는 그 횟수가 어느 정도가 되었든 도통 적응할 수가 없었다. 늘 새롭게 고통스럽고 힘겨웠다. 숨이 막혔다. 어쩌면 그 행위의 본질인 사랑 따위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기에 그처럼 느끼는 걸지도.
창가에 기댄 관자놀이에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두통이 나아지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열망에 기대어 그렇게나 버티더니. 결국은 이 지경 이 꼴로 나가떨어지는 저 자신을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 역시도 힘이라고는 하나 들어가지 않아서 그저 메말라 있을 뿐이었다.
‘일찍 떠났다면…….’
그랬으면 좀 나았을까.
폐허처럼 엉망으로 짓이겨진 마음에 드는 건 이제 와 떠올려 봤자 쓸모없는 생각일 뿐이다. 많은 생각은 머리를 무겁게 만든다. 어두운 차창 너머, 희미한 등잔불에 바닥을 뒹구는 낙엽들이 비쳤다.
가을의 끝 무렵에 다다랐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표하듯 저리 버려진 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게 나뒹굴며 양껏 추레해지는 낙엽들.
제 사랑이 형태를 띤다면 딱 저런 모양새일 테다.
‘……피곤하다.’
리브가의 사랑은 더 이상 흉측하고 끔찍한 것들 사이에 고고히 빛나는 파편이 아니었다. 단지 번뜩이는 이채를 머금고 있었기에 제법 특별하게 느껴진 것뿐이지, 그것 역시도 날카로운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가지려고 쥐면 쥘수록 손에 상처만 나는. 그것이 끝내 마음까지 따갑게 할퀴는.
보답받지 못할 사랑은 결국 체념의 형태가 되어 돌아왔다. 자꾸만 바닥을 치고 너저분하게 흩어지는 희망을 긁어모으는 짓도 이젠 지쳤다.
어쩌면 정말 사랑이 아니라 부채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부채감을 저의 고통과 번민으로 맞바꾸었기에 마냥 헛헛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를 다시 한번 만나기를 고대했었더라?
그 설레는 두근거림. 하얗고 밝기만 하던 미래의 소망. 하지만 그건 이제 피로하고 고단하여, 생각하면 기쁨과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의미로 변질되어 버렸다. 빛바랬고 부식된 사랑이 따로 없었다.
리브가는 몸에 힘을 빼며 눈을 감았다.
어서 빨리 기차가 출발했으면 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