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6)

7장

침대 헤드에 나른하게 기댄 발렌틴은 바닥에 떨어진 의복을 주섬주섬 줍는 여자의 뒤태를 물끄럼 바라보았다.

리브가는 침대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주인의 명에 철저히 복종했다. 섹스가 끝난 후 보기 싫다는 말 한마디에 매번 고된 몸을 이끌고 아득바득 침대를 나섰다. 발렌틴은 오늘 역시 기대를 비껴 나가지 않는 모습을 예의 주시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밤새 뒹군 여자와 해가 뜬 아침에 만나는 건 언제든 예외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데 꼭 지나간 밤을 부정하듯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려는 저 모습이 기분을 순식간에 나락까지 처박았다.

이유는 그도 알지 못한다. 지랄 맞은 성질머리에 걸맞게 변덕을 부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주변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도 그 자신을 이해하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변덕은 오늘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하녀복과 속옷을 챙긴 뒤 휘장을 걷고 나가려던 리브가는 별안간 허리를 감싸 쥐는 손길에 멈칫했다.

“아……?”

발렌틴은 제가 밤새 물고 뜯어 붉은 자국이 여실한 날갯죽지에 이마를 문질렀다.

울혈로 뒤덮인 것과 다르게 살갗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가 서서히 위로 올라와 사슴처럼 곱고 가느다란 목선에 콧대를 비볐다. 살짝만 숨을 들이마셔도 폐부로 담뿍 들이차는 사붓한 꽃내음에 가시처럼 돋아난 신경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희한했다. 약을 해야지만 간신히 진정되는 난폭한 기류가 이 별것 아닌 향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듯 얌전해졌다. 약에 집어삼켜지기 전 줄기차게 맡아 온 향이, 제 상태를 멀쩡하던 때로 회귀시키는 착각이라도 낳는 걸까.

“주, 주인님.”

발렌틴이 목덜미를 깊이 빨아들였다. 리브가는 당황하여 창밖을 보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절이 달라지며 해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제보다 어제 더, 또 어제보다 오늘 더 빠르게 여명이 밝아 오는 것이 어슴푸레하게 느껴졌다.

아침이 되면 침실에서 나가야 하는데. 그게 주인이 제게 내민 조건이 아니던가.

발렌틴은 리브가의 불안을 조금도 모르듯 그녀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강압적인 아귀힘에 의해 쥐고 있던 옷과 속옷이 다시 침대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발렌틴은 허리를 안고 있던 한쪽 손을 위로 올려 젖꼭지를 꼬집었다. 이미 한차례의 교접으로 통통하게 부푼 그것이 그의 손 아래에서 뭉개지며 뜨끈한 쾌감을 호소했다. 리브가의 입가에서 새는 신음이 발렌틴의 고막을 뭉근하게 긁어내렸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그가 그녀를 확 끌어당겨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천장을 보고 누운 리브가는 제 젖가슴 위에 반반한 얼굴을 묻는 주인을 당혹스레 응시했다. 군침 새는 모양새로 벌떡 선 불그스름한 유두가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에서마저.

“으…… 흣, 주, 인님……!”

“…….”

“아, 아침. 아침인데…….”

그 말에 발렌틴은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그는 조금 전 침칠하듯이 혀를 돌려 대 타액으로 축축해진 젖꼭지를 잡아당겨 문지르며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대었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그런데.”

“아침엔…… 나가라고.”

밤새 뒹군 년과 마주하면 기분 더러우니 깨기 전에 나가라고 한 건 바로 그였다. 리브가는 제 마음에 비수처럼 꽂힌, 저를 영락없이 창부로 대하던 그 태도를 아직도 선연히 기억했다.

발렌틴은 난감해하면서도 몸을 어루만지니 쾌락을 느끼고 일렁이는 청회색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내내 이 색깔이었겠지. 아니면 이보다는 조금 더 옅었으려나. 그로서는 해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는 어린 그녀와 함께하는 내내 늘 눈이 가려져 있지 않았던가.

유두를 뾰족이 발기하게 만들던 손이 불시에 내려가 리브가의 엉덩이를 잡았다. 한쪽 둔기짝을 그악스레 벌리며, 그녀의 향을 맡을 때부터 이미 성성하게 일어난 좆을 가져다 입구에 문질렀다. 미어터지도록 싸 놓은 정액 덕분인지, 혹은 그녀가 쾌락에 굴복하며 쏟아 낸 음액 때문인지 비부가 미끌미끌했다.

“흐……!”

밤새 곤혹스러운 살기둥에 치인 음부는 그럼에도 모자란 양 먹을 걸 달라 연신 뻐끔댔다. 발렌틴은 애액과 함께 울컥 터져 나온 정액에 물씬 젖은 질 안으로 큼지막한 귀두를 밀어 넣었다. 존득한 물기를 헤치며 귀두가 구멍 주름을 벌렸다.

“주인님, 잠…… 아앗……!”

고작 몇 분간의 실랑이로 이미 휘장 밖은 희부연 빛이 충만했다. 어둠과 함께 끝없이 몰락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는 또렷한 증거였다. 그럼에도 저는 어찌하여 이 침대 위에서 여전히 그의 성기를 받아야만 하는 걸까. 리브가의 눈동자가 혼란에 잠식된 채 그를 담았다.

희미한 등불의 빛만으로 보이던 실루엣이 사방을 밝히는 아침의 햇살에 힘입어 선명한 선을 둘렀다. 주인의 존재감은 더더욱 진해졌다. 온갖 부패한 것을 몸에 쏟아붓었음에도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는 몸이었다. 그것이 밤뿐 아니라 햇살 선명한 아침에도 저를 뭉개고 있으니 그녀는 진정 눈앞이 빙그르르 도는 심정이었다.

“흐……!”

“내가, 명한 거니.”

발렌틴은 밤새 쑤셔 댔음에도 여전히 곤란할 정도로 비좁은 안에 눈살을 찌푸렸다. 빠듯하게 제 것을 조여 무는 안쪽이 번거로우면서도 황홀하다. 이 길을 함부로 내어 씨를 뿌린 게 저뿐이라는 증거처럼 느껴져서. 그녀의 첫 남자가 저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 사실을 거듭 되뇌게 하는 몸의 반응이 이상하게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거두어들이는 것도, 큿, 내 맘이지.”

“하, 으, 흐으……!”

자궁에 닿을 만치 욕심껏 밀어 넣은 것을 반쯤 빼냈다가 도로 짓쳐 놓을 때마다 뽀얀 젖가슴이 파도처럼 출렁댔다. 그 시각적 효과가 아랫배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고관절 안쪽의 신경체가 빳빳하게 일어서 성기에 더더욱 피를 몰리게 한다. 밤새 줄기차게 이어진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좆은 사납게 꿈틀대며 백탁액을 쏟아붓기를 원했다.

발렌틴이 상체를 기울였다. 판판한 제 유두와 발기한 그녀의 유두가 맞닿아 비벼지니 그녀의 가량가량한 몸 선이 움찔대며 여간 맥을 추지 못했다. 최근 발견한 그녀의 예민한 반응이었다. 전신을 달구는 전율로 인하여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니 저절로 좆을 머금은 내부 또한 빠끔히 조여들었다.

“아응, 응……!”

“아주, 못 씹어 대서, 안달은.”

턱턱, 고환이 회음부에 부딪칠 만큼 강렬하게 쳐올리며 발렌틴은 아예 그녀와 몸을 접붙였다. 두 쪽으로 나눠진 엉덩이를 더욱 잡아 벌리며, 물큰하게 터진 애액으로 번들번들해진 거근을 푹푹 쑤셔 박았다. 말랑거리면서도 탄력적으로 조이는 내벽이 그의 것을 꿀꺽꿀꺽 맛있게도 삼켜 물었다.

발렌틴은 제 성기를 아래로 물며 헐떡거리는 여자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주인의 시선이 버거운지 눈을 내리깐 여자는 붉은 입술을 벌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잇새로 연달아 터지는 호흡이 폭염의 공기처럼 무덥고 질겼다. 그 안쪽에서 움찔대는 요사스러운 혓바닥이 보인다. 발렌틴의 날렵한 시선이 자그마한 살덩이에 꽂혔다.

빨아 보고 싶다, 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입을 맞춘 후였다.

“음……!”

화들짝 놀란 리브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발렌틴의 키스는 감미로움과 거리가 멀었다. 은근한 유혹에 넘어가 두 눈이 먼 채로 처음 주인의 이면을 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퇴폐적인 냄새로 가득 차 있던 응접실의 거나한 풍경. 그곳에서 발렌틴은 제 얼굴에 끈적한 정액을 흩뿌리고 입을 맞췄었다. 비리디비린 첫 키스였다.

그날 이후 발렌틴이 입을 맞춘 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지펴지는 찌릿한 불씨보다도 당혹감이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려고 하자 한발 앞서 그를 짐작한 듯 그가 턱을 그악스레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발렌틴은 꺼끌꺼끌한 혓바닥을 그녀의 목구멍이 찔릴 만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우웁……!”

발버둥 치니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몇 번 더 반복하자 리브가는 반항할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숨을 죽였다. 발렌틴은 그녀의 윗입술, 아랫입술을 차례대로 게걸스레 쪽쪽 빨아 댔다. 그 사이로 다시 혀를 집어넣어 안을 비비 후벼 대는 것 역시도 잊지 않았다.

“응……! 응, 읍, 읏……!”

입술이 먹힌 채로 격렬하게 아래가 치받아졌다. 허공에서 덜렁대는 리브가의 다리를 제 허리에 두른 그가 전력으로 맞부딪치며 입 안을 숨넘어갈 듯 쑤석거렸다. 맞붙은 위에서는 쪽쪽대는 소리가, 아래에서는 찌덕, 질꺽, 퍽퍽거리는 난잡한 소리가 잡다하게 섞여 울렸다.

리브가가 저도 모르게 감긴 눈을 떴을 때, 어둠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휘장 밖으로 스며들어 오는 여러 조각,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침대 위에서 나신으로 뒤엉킨 서로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하아, 안이 요동을 쳐. 밤새 헐도록 박아 대도 말이지.”

“흑, 응…… 으읏……!”

“사내 좆이 그렇게 좋나? 걸신들린 것처럼 빨아 대잖아.”

조롱조의 음성이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아득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런 와중에도 정말 그의 페니스를 머금은 안이 빠끔히 좁아 드는 게 스스로조차 잘 느껴졌다. 눈을 깜박거리자 속눈썹에 애처로이 매달려 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발렌틴은 소리 죽여 우는 얼굴을 헉헉대며 내려다보았다. 희붐한 광이 스며드는 침대 위에서 그 눈물 자욱은 너무나 또렷이 보였다. 그것이 그의 망막 위로 아로새겨질 듯 박히는 순간, 그는 이상하게 맘이 배배 꼬이는 걸 느꼈다.

왜?

바라 온 거지 않던가. 저를 지옥으로 밀어 넣어 버린 보잘것없는 계집이 이렇게 저로 인해 망가지는 걸 그토록 원했으면서 왜.

발렌틴은 검고 끈끈한 무언가가 목에 걸린 것만 같은 답답함을 체감했다. 그를 해결하는 방법 따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녀를 가졌다. 이 계집만 보면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쳐들게 된 갈증은 여전히 그를 목마르게 했다. 결국, 리브가의 눈물까지 죄다 빨아 먹고 핥아 먹었다. 깊게 팬 보조개에 고여 들진 않았는지 혀로 삭삭 긁어 대며 스퍼트를 올렸다.

“아, 아, 아앗, 흑, 아아앙……!”

리브가는 가랑이가 볼썽사납게 벌어진 채 못질하듯 미친 듯이 혹사당했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번쩍 터지더니 이윽고 그녀의 이지는 쾌락을 갈구하는 본능에 꿀꺽 잡아삼켜져 버렸다.

마침내 그가 잘록한 허리를 움킨 채 뿌리 끝까지 삽입했다. 자궁구가 울릴 만큼 한계를 모르게 파고든 삽입과 함께 리브가는 무심결에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를 의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정체도 끝도 모를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절정감에 눈앞의 무어라도 잡아야겠다 싶어서였다.

하녀가 그를 껴안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내내 그를 좀먹어 가던 타는 듯한 갈증이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 그러나 직후 뒷골을 뜨겁게 울리는 사정의 여운에 그 깨달음을 깊게 파헤쳐 볼 새도 없었다.

리브가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눅진함 속에 잠겨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빙글빙글 돌던 시야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으며 이제야 상황이 한층 더 또렷하게 인식이 됐다.

그리고,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렸다는 아찔함 역시도.

* * *

불현듯 몰아친 불길함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주인이 집요해졌다. 발렌틴은 그날 이후로 밤낮 할 것 없이 그녀에게 손을 뻗쳐 오기 시작했다.

<너에게만 들이는 돈이 하루에 자그마치 100루벨인데. 아랫구멍이 헐거워지도록 박아는 봐야 그 돈의 값어치는 되지 않겠어.>

그런 말을…… 하면서.

밤 동안의 정사가 끝나고 리브가는 더는 하녀들의 숙소로 돌아가지 못했다. 저를 꽉 붙들어 맨 그의 품 안에서 쪽잠이 들었다가 간신히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녀의 몸 역시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이제 그가 살짝 건들기만 해도 잘 여물어 흐물렁하게 벌어지는 과육처럼, 금세 예민해지고 울컥 젖어 갔다.

발렌틴의 신호는 늘 한결같았다. ‘탐욕’의 시간을 보내자는 신호 말이다.

가만히 서서 일을 하고 있다 보면 지나치게 아름다운 주인은 조용히 뒤로 다가와 치마로 가려진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그 손길이 노골적으로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 때쯤이면 이미 턱이 비틀려 그에게 입술을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입술을 검질기게 빨아 대며 그는 늘 하얀 다리를 감싸는 검은 치맛자락을 급히 끌어 올리고 속옷을 벗겨 냈다. 가끔은 집적 풍성한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얼굴을 처박은 채 도톰한 살점과 음핵을 핥아 주었고 그보다 급할 때는 손가락 두어 개를 쑤셔 휘젓는 방식으로 아래를 풀었다.

혀가 아릴 만큼 다디단 액이 쏟아질 즈음, 혹은 피스톤질하듯 들쑤시던 손가락이 애액으로 불어 터질 즈음이 되면 그는 본격적인 행위로 접어들었다. 이후 옷도 벗지 못한 채 아래를 짜 맞추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기에 여념이 없어졌다.

그에게 사로잡혀 흔들릴 때면, 리브가는 ‘발정기의 금수가 이런 기분이었나’ 하는 터무니없는 상념을 한 번씩 떠올리고는 했다. 그만큼 그녀는 식사를 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자주 그와 흘레붙었다.

“응, 음……!”

오늘도 여과 없이 한낮의 농탕질이 한창이었다.

창틀에 간신히 등을 기댄 채 주인에게 혀를 빨리던 리브가는 아래에서 깊숙이 치들어 오는 흉포한 살덩이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홉뜬 동공 위로 한밤에 뜬 달처럼 고혹한 주인의 얼굴이 면밀히 박혔다.

그는 키스할 때마다 늘 눈을 감지 않고 리브가를 관찰했다. 유리 조각이 박힌 것처럼 선득한 안광이 코앞에서 반들거렸다. 리브가는 저 눈동자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안을 들여다볼 용기도 없었고, 정신없이 쾌락에 떨 때에는 언제나처럼 모든 생각이 보얗게 휘발되어 버리고 말기에.

한쪽 다리로만 선 자세로 남성을 받아들여 힘겹고 버거운지 리브가의 동공이 혼몽하게 풀렸다. 그녀의 모든 반응을 주시하던 그에게는 너무도 쉽게 발각되는 반응이었다.

“흐읏!”

그가 리브가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감싸 쥐고 아기 안듯 받쳐 올렸다. 그리고 옆에 놓인 소파로 가 착석했다. 반쯤 빠졌던 거근이 민감하게 좁아 든 내벽을 즈윽, 긁어 대며 묵직이 꽂혀 들어왔다. 리브가의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결합부가 뭉그러지며 그의 까슬까슬한 음모가 음핵을 자극해 아래에서 반사적으로 물이 왈칵 샜다.

“허리 돌려.”

간단히 명을 내린 그가 옆에 놓인 시가를 붙잡았다. 하얗고 기름한 손을 어벙히 응시하던 리브가는 그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고 엉덩이를 비비적대듯 움직였다. 발렌틴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시가의 필러를 봉분처럼 쌓인 하얀 가루 더미에 푹 찍었다가 들어 입에 물었다. 그것을 깊게 빨아들이며 다른 손으로 리브가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하아, 흐읏, 아, 핫……!”

주인의 손가락은 길쭉하고 하얘서 마냥 서늘할 듯한데, 실제로는 제법 따듯한 편이었다. 오늘 역시도 온기를 실은 그것이 리브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더니 이윽고 서서히 옷깃을 젖혔다. 이미 죄다 풀어진 앞섶을 타고 메이드복의 상의 부분이 살결 위로 미끄러졌다. 하얀 나신에 직접적으로 닿는 공기에도 이제 어깨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나체로 그의 품에 안긴 게 수두룩하다 보니 일일이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발렌틴은 가녀린 날갯죽지를 더듬듯 어루만지고는 선을 그리며 등줄기를 훑었다. 척추뼈 하나하나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만 같은 끈질기고 느릿한 손길에 리브가는 건침을 거푸 삼켰다. 별 볼 일 없는 손짓을 타고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멈추라고 했던가?”

별안간 주인의 음성에 벌어진 안쪽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리브가는 멈춘 감탕질을 재개하며 헛숨을 꼴딱꼴딱 삼켰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둔부 바로 윗부분까지 미끄러진 순간 손바닥 전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어 홱 끌어당겼다.

“핫……!”

안에 든 성기의 방향이 찰나 비틀려 그녀가 가장 느끼는 극점을 콱 치받았다. 그 상태로 멈추자 느릿하게 비벼 대는 감각까지 더해져 리브가는 금세 자지러지듯 몸을 떨었다. 발렌틴은 감싸 쥔 그녀의 등허리가 발발 떨리는 걸 느끼고 그녀가 가벼운 절정에 다다랐음을 알아챘다.

하녀는 늘 오르가슴을 겪을 때면 무언가를 움켜잡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금 역시도 발렌틴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그의 팔뚝을 그러쥐고 있지 않는가.

비싼 자재의 옷감이 험한 주름의 침범과 함께 구겨지고 있는데도 발렌틴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신경은 오직, 가늘고 긴 하얀 손가락에만 꽂혀 있었다. 그는 마치 더 안기라 종용하듯 리브가의 허리를 더더욱 끌어당겼다.

이상하게 저것이, 그녀가 추락하는 듯 위태로운 상태에서 저만을 의지하는 게 그의 속에 깃든 갈증을 잠시나마 축였기 때문에.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축여지자마자 동시에 더한 갈증을 낳았다. 홧홧한 불구덩이를 삼킨 듯,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구갈이었다.

“하아, 하……. 으읍.”

발렌틴은 시가를 한 번 깊이 빨아 문 뒤, 제 어깨에 묻은 고개를 들게 해 입술을 포갰다. 약에 절여진 향이 담뿍 밴 혀로 작고 젖은 입 안을 들쑤시듯 헤집었다. 리브가는 쓴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콜록댔다. 제가 잘 아는 비린 맛이 잘못 삼킨 것처럼 입 안에 역하게 감돌았다.

눈살을 찌푸린 발렌틴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명했다.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제대로 빨아.”

그러고는 시가를 다시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놓았다.

리브가는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 든 눈망울을 깜박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가만가만 입을 맞췄다. 맞물린 입술이 벌어지며 역한 향이 다시금 넘어왔다. 그것이 타액과 숨결을 따라 꿀꺽 삼켜질 때면 알 수 없는 감각이 배를 쥐어짜는 듯했다. 역겨운 것 같기도 했고, 짜릿한 것 같기도 했다. 도통 정의할 수 없는 맛이었다.

발렌틴은 지시를 해 놓고서 제가 더 격렬하고 지저분하게 리브가의 혀를 비벼 댔다. 그렇게 쪽쪽대며 무더운 숨결을 난잡하고 음탕하게 뒤섞던 찰나였다.

벌컥.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촉, 하는 작은 마찰음과 함께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리브가의 몸이 목석처럼 꼿꼿하게 굳었다. 그간 주인과 함께 있는 공간을 누군가 이토록 무례하게 침범해 온 적이 없어서 한순간 머리가 꼬였다. 뒤늦게야 자신의 상의가 죄다 벗겨져 등줄기가 훤히 노출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단두대처럼 리브가의 목을 차츰차츰 조여 왔다. 그들은 침대 옆 소파에서 일을 치르는 중이었다. 문가에서는 지금 위치가 침대에 가려져 안 보일지 몰라도, 조금만 걸어 들어오면 무리 없이 눈에 띄고 마리라.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리브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무렵, 시가를 내려놓고 옆 소파에 있던 제 가운을 펼친 발렌틴이 관능적으로 드러나는 하녀의 반라를 쓱 가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안아 숨기듯이 제 어깨 쪽으로 폭 끌어안았다. 침실의 안쪽으로 누군가 발을 들이밀며 등장한 것 역시 동시였다.

허용 없이 나타난 인기척을 향해 발렌틴의 날 선 시선이 뜸지근하게 이동했다.

“뭐야.”

나타난 이는 다름이 아닌 밴텀 백작가의 영식이었다.

코올리 밴텀. 발렌틴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에서 아주 높은 참석률을 보이는 망나니.

처음부터 느닷없는 방문인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발렌틴은 태연했다. 노크도 없이 멋대로 들어온 방만한 태도부터가 귀족 놈들 중 하나임을 증명했다. 개중에서도 제 허락 없이 성큼 들어오는 자는 코올리 정도 간이 큰 놈은 되어야 실행할 수 있었다.

“발렌, 물을 게…….”

코올리는 발렌틴을 발견하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근육으로 이루어진 거구의 몸피를 갖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발렌틴의 품에 안긴 여자에게 꽂혔다. 시선의 행방을 눈치챈 발렌틴의 눈썹이 깊게 패었다.

곧 코올리가 히죽 웃었다.

“뭐냐고 물었는데.”

발렌틴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아, 다름이 아니라 저택 뒤편의 숲에서 사냥을 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했지.”

“맘대로 해.”

묻고 답하는 간략한 질의응답이 끝났음에도 코올리는 침실에서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콧등을 찡긋거렸다.

“언제부턴가 침실에서 처박혀서 도통 나오지를 않더니. 이런 재미를 보고 계셨구먼.”

“나가, 귀찮게 하지 말고.”

“함께 가겠어?”

“안 본 새에 장님이라도 된 모양이군.”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안 보이느냐는 말의 신랄한 완곡어법이었다. 벨벳 재질의 가운에 감싸인 리브가는 주인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흠칫했다. 품에 안겨 있어서 그런 걸까, 그가 내풍기는 분위기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는 게 실로 잘 느껴졌다. 그러나 대치하고 선 이에게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건지, 사내는 잘도 버티고 서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

코올리가 돌연 꺼낸 말에 리브가는 주춤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꼭 초겨울의 날씨에 호수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등줄기를 타고 오한이 끼쳤다.

“요즘 끼고돈다는 그 하녀군.”

“…….”

“밑구멍 맛이 그렇게 좋나 보지?”

발렌틴의 옷자락을 그러쥔 리브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제 품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품에 안긴 여체가, 폐부가 욱신 조여들 만큼 급히 숨을 들이켠 것 역시도 눈치챘다.

그 즉시 발렌틴의 동공이 한층 더 감때사나워졌다. 도 넘는 코올리의 행동이 언짢음의 도화선이 되었고, 리브가가 겁을 먹은 듯 보이는 행동이 그 도화선에 불씨를 지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만 해도 저런 망나니들 앞에서 관계를 가지려고 했던 만큼 리브가를 막 대할 생각으로 몸이 달았던 자신이, 어찌하여 지금 리브가의 맨몸을 조금도 남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은 걸까.

의문을 골몰히 헤아려 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말이다. 발렌틴은 후, 하고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형형한 눈을 치켜떴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이 영지에서 쫓아낼 줄 알아.”

“…….”

“볼 장 다 봤으면 그만 입 다물고 꺼져.”

얼음을 입 안에 문 채로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간담이 다 서늘해지는 음성이었다.

코올리는 ‘아무렴, 누구 말씀이신데’ 하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발을 돌렸다. 그러기 전, 발렌틴의 가운에 파묻힌 리브가를 끈적한 눈길로 훑는 걸 잊지 않았다. 정수리부터, 의자 아래로 드러난 얄팍한 종아리까지. 그 소름 돋는 시선을 두 눈으로 마주한 양, 리브가는 어느새 숨도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망부석의 상태에서 풀려난 건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그럼에도 살갗이 일어날 만큼 돋아난 소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 * *

발렌틴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2주에 한 번 있는 외출 날이 유일했다. 물론 밤새 그에게 시달리다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찬물로 목욕을 한 뒤, 옷만 갈아입고 나가기에 지독하게도 피곤했다.

하루는 외출을 나섰다가 공작저로 귀환하기 전, 삯마차를 붙잡았다. 괜찮으니 영지의 마을을 크게 몇 바퀴 돌아 달라고 했다. 마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녀가 돈에 돈을 얹어 주니 두말 않고 얼른 태워 주었다.

리브가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벽에 기댄 채로 간신히 눈을 붙였다. 휴식을 취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든, 주인의 품속만 아니라면 조금쯤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더는 영지로 내려오지 않을 것 같다는구먼.>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누가?>

<누구긴 누구야. 저 높으신 영주댁 나리들 말이야. 왜, 이번에 그 사건 있잖아.>

<막내 도련님 납치 사건 말인가?>

<그래, 그거.>

막 타지로 떠나기 직전, 헤널드가 쓰러졌다. 외곽에 버려진 오두막에 그를 잠시 눕혀 두고 서둘러 마을의 진료소를 찾은 참이었다.

리브가는 당시 헤널드가 슬럼가에서 훔쳐 온 보석을 들고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갈아 오가는 대화는 의사와 그에게 치료를 받던 마을 주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리브가는 얼마 안 가 그게 발렌틴에 관한 화제임을 깨달았다. 제 발 저린 양 심장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납치를 당했다가 이번에 대형 지하수로가 불타고서 그 옆 숲속에서 간신히 발견됐다잖아.>

<나이도 아직 어리다던데 충격이 오죽하겠소.>

<그렇지. 그래서인지 어젯밤 바로 채비하여 여길 떠났다고 하더군.>

<더는 영지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말은 뭐요?>

<거기서 주방 하인으로 일하는 내 인척이 있단 말이지. 며칠 전에 귀부인께서 집사에게 하는 말을 얼핏 들었다는 거야. 앞으로는 영지로 내려올 계획이 없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하기야, 그런 사달이 있었으니……. 무슨 심정인지는 알겠구먼.>

당시의 리브가는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소식은 그녀에게 꽤나 깊은 양가감정을 떠안겼다. 어쨌든 발렌틴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는 한편, 앞으로 다시는 이곳 영지로 내려오지 않으리라는 건 조금 서글펐다. 그때에는 왜 서글픔을 느끼는 건지, 아니, 그 감정이 서글픔인지도 알지 못했다.

리브가는 본래 헤널드와 함께 슬럼가를 빠져나오면 곧장 이 로트링겐 영지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헤널드의 몸 상태와 더불어 로트링겐 가문의 수도행으로 인해 납치 사건의 진상 조사와 처벌은 흐지부지 끝이 나 버렸다. 그들은 슬럼가가 전소되어 가해자가 전부 죽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행여나 의심을 사 범인으로 지목될 일이 없다면, 아픈 몸을 이끌고서라도 타 영지로 향할 이유는 없었다.

처음에는 헤널드의 상태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로트링겐 영지에 남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갈수록 변했다.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차근차근.

타 영지로 향하게 된다면 이제 앞으로 다시는, 발렌틴을 만나지 못할 게 분명하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아이러니했다.

발렌틴을 만나면 안 되는데, 그가 너무 보고 싶었던 것이니까.

그런 모순적인 마음으로부터 욕망의 싹이 슬금 자라났다. 그 욕망은 ‘같은 영지에는 있어도 되겠지’, ‘떠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출발선상에서 시작되어 차츰차츰 제멋대로 크기를 불려 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리브가, 우리 같이 로트링겐 저택의 하녀로 일해 보지 않을래?>

<하녀로?>

<으응. 거기서 일할 사람을 구한대.>

리브가의 허름한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던 케시와 우연히 안면을 텄고, 이후로 막역하게 지내던 차였다. 로트링겐 공작저에서 하녀를 구하는 소식을 일러 준 게 바로 케시였다.

당시 헤널드가 슬럼가에서 훔쳐 나온 보석과 돈도 서서히 떨어지던 차였다. 헤널드의 약값과 두 사람이 생활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어찌 보면 그간 버텨 온 게 용할 정도로 지출은 꽤 컸다. 헤널드는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일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리브가는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시가 제안을 건넨 하녀의 일은 보수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아니, 사실은 무척이나.

어차피 그는, 발렌틴은 영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행여나 다시 만날지라도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어떻게 보면 그렇게나 단순하고, 또 어떻게 보면 그렇게나 복잡한 사정으로 공작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때, 과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땠을까.

그를 다시 한 번만 만났으면 하고 품었던 그 미련스러운 욕망이 이렇게나 제 세상과 관계를 다 깨부술 줄 알았다면.

“…….”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현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지길 원했으나 안타깝게도 지옥 같은 상태 그대로였다.

마차는 한 시간 가까이 마을 가장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으로나마 휴식을 취하고, 저택으로 귀환했을 무렵이었다.

“안녕?”

별안간 거대한 인기척이 앞을 막아섰다. 기력 없는 리브가의 시선이 더듬더듬 올라갔다. 열없는 동공 위로 빠듯하게 차오르는 인물이 퍽 익숙했다. 리브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코올리 밴텀.

요 며칠간 리브가의 눈에 자주 띄는 제 주인의 손님이었다. 그는 정확히 발렌틴과의 정사를 들켰던 그날 이후부터 거슬릴 정도로 쉽게 시야에 나타났다. 마치 리브가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느 때처럼 발렌틴과 관계를 가진 후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침실을 나섰을 때, 혹은 주인이 없는 공간에서 청소를 하고 나왔을 때.

무어가 됐든 어딘가에 있다가 홀로 나올 때면 이 귀족 사내가 늘 주변에 있었다. 열린 문 맞은편이나, 쭉 이어지는 복도 어딘가에 팔짱을 끼고 서서 저를 지켜봤다. 검측측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히죽 웃는 낯은 수상쩍기 짝이 없어서 리브가는 흠칫흠칫하고는 했다. 그리고 속이 메스껍기도 했는데 지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리브가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으면서까지 욕지기를 참아 내며, 일단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시선이 뒤통수를 콕콕 찔러 댔다. 눈길은 곧 행동으로까지 전염이 되었다. 코올리 밴텀이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움찔한 리브가는 당장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견뎠다.

“너, 다른 하녀들에게 제법 미움을 받고 있는가 보던데?”

다가온 그가 꺼낸 말은 어떤 식으로든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코올리 밴텀이 악동처럼 콧등을 찡긋거렸다.

“누구에게나 물어도 반응이 똑같아.”

“…….”

“‘아, 그 욕심 많은 리브가 말이죠.’라더군.”

“……별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코올리 밴텀은 리브가의 아픈 부분을 가감 없이 후려쳐 왔다.

발렌틴이 제게 알 수 없이 집착적으로 굴수록 리브가는 자신의 세상과 멀어지고 있었다. 동년배의 하녀들과 시시하고도 평화로운 잡담을 이어 가던, 그런 아늑하고 단란한 세상과.

케시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리브가는 이제 숙소보다 발렌틴의 침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으며 가끔 낮에 업무를 하며 케시와 마주쳐도 주변에 이목이 많아 여러모로 말을 섞기가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리브가가 지레 겁을 먹는 것도 있었다.

케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하녀 중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런 케시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쩐지 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변한 듯하여, 그게 혹 빨래터에서 자신을 비아냥대던 다른 하녀들의 것과 같은 기류가 아닌가 싶어서.

두렵고 무서웠다. 함부로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리브가의 세상은 작은 균열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코올리 밴텀은 리브가가 그토록 견디기 버거워하는 부분을 무참히 찔러 왔다. 높은 이임을 알지만 더 있다가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워질 듯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중히 허리를 숙인 리브가는 잰걸음으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려고 했지만…….

“잠……! 뭐 하시는……!”

코올리가 대뜸 팔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오만한 손길이 허리를 휘감았다. 발렌틴의 것과는 다른, 왠지 모르게 역한 사내 특유의 체향이 코를 찔렀다. 리브가의 인상이 이번엔 참을 새도 없이 찌푸려졌다.

“나도 재밌게 놀아 줄 수 있는데.”

“놓아주세요.”

제법 당찬 어투였다. 하지만 코올리는 제가 붙잡은 하녀의 팔목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오히려 그는 겁먹은 다람쥐처럼 떠는 그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강제로 하는 데에 쾌락을 느끼는 타입으로서, 다소 고약하고 기괴한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분류해 보자면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다. 리브가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번뜩이는 사내의 눈만 보아도 이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급히 팔을 비틀었다. 그러나 체격 차이에서부터 분명하듯 버둥질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코올리는 시종일관 재밌다는 얼굴로 그녀를 붙잡고 저택 본관으로 향하였다.

볕 좋은 오후 3시의 시간대는 저택 외부나, 내부나 고요한 편이었다. 그는 그 흐름을 깨고서 1층 구석의 방에 리브가를 처넣었다. 거친 손속에 밀려 탁자에 부딪친 리브가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아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철컥,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만큼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정신을 아뜩하게 휘감았다.

“지금, 대체…….”

“네 주인 때문에 그래? 걱정하지 마. 발렌은 내가 널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을걸.”

키득거리는 목소리에 리브가는 심장이 선득하게 굳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가온 코올리의 그림자가 모든 걸 꿀꺽 삼킬 밤의 장막처럼 짙게 드리웠다. 태양은 쨍쨍하나 리브가의 눈앞은 그만큼 말도 안 되게 어두컴컴했다.

“녀석이 안는 하녀 따위야, 대용품이 될 것들은 널렸지. 그래도 너만 안는 걸 보면 아랫입 맛이 제법인가 보지? 여자라고는 하루가 다르게 바꿔 가던 놈이 너만 끼고도니까 이거 영, 궁금해지잖아.”

“…….”

“우리는 생각보다 여자 취향이 비슷해서, 함께 돌려 먹은 적도 여러 번이거든.”

“…….”

“걱정하지 마. 나도 발렌만큼은 아니지만 큰 편이니까. 아주 암캐처럼 헥헥대며 자지러지게 만들어 주지.”

주저앉은 저를 사이에 두고 가죽 벨트를 푸는 그 행동 자체가 너무도 천박하고 역겹게만 느껴졌다. 구역질은 어느새 한계 수준까지 치고 올라 기도를 아슬아슬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위액이 역류하는 듯한 씁쓰름한 맛이 혀끝에 느껴질 정도였다.

리브가는 너무도 낯설게 뛰는 심장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불안의 박동을 감추려고 하는 것처럼 더듬더듬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봐야 등 뒤는 벽이었다.

그 순간, 코올리 밴텀이 몸을 숙여 가는 발목을 잡아챘다.

“놔주세요! 하지, 하지 말아 주세요. 이러지……!”

“조용히 좀, 해. 나랑 씹질하는 걸 여기저기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엉?”

귀족의 품위 따위 저 바닥에 내던져 버린 듯한 천박한 말투였다. 그러고 나니 코올리 밴텀은 저를 겁간하려는 무뢰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꼭 제게 다가올 일을 암시하는 듯해 사지가 떨렸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반항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그녀를 제압하던 코올리는 짜증이 났는지 두꺼비 같은 손으로 리브가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

순간 눈앞이 비틀리며 뺨에 퍼지는 후끈한 통증에 리브가는 넋이 나갔다.

저를 그렇게 막대하던 주인도 제게 이런 식의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대번 허옇게 물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남자가 제게 이렇게 우악스럽고 추저분한 손길을 뻗치는 건 결국 주인의 탓이었다.

희한하게도, 주인을 재회하고부터 어그러진 모든 것이 그 순간 확연히 인지됐다.

어릴 적의 오판으로 말미암아 이토록 벌을 받는 제 처지가, 저의 삶이, 이전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진 모든 것이.

뺨을 얻어맞고서야 조용해진 리브가를 보며 코올리는 재차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을 내려 곱게 잠긴 그녀의 옷깃,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벌어지는 속살에 성적인 조급함이 왈칵 치밀었다. 야만스레 벌어진 입술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두 번째 단추를 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쾅!

굳게 걸어 닫힌 방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동쳤다. 리브가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오며 뒤늦게서야 코올리의 손을 쳐내며 몸을 비틀었다. 쳇, 하고 혀를 찬 코올리가 다시금 손을 저 위로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쾅.

쾅, 쾅!

문은 걸쇠가 완전히 작살날 만큼 격렬하게 흔들렸다. 무언가로 연신 내려치는 듯 과격한 소음이 일었다. 코올리는 더러운 감정으로 이글이글 끓는 눈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반쯤 풀리다 만 그의 바지춤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리브가는 다시금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제기랄, 누구…… 발렌?”

문 바깥에는 들고 있던 한쪽 다리를 내리는 발렌틴이 서 있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태양을 삼킨 듯한 금안이 코올리를 빤히 응시하다가 차츰 그의 어깨 너머로 이동했다.

“놀랐잖아. 왜 문을 발로 차고 그래?”

코올리의 태도에서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사람 특유의 당혹감이나 멋쩍음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경우가 일상인 양 태연자약하게 느물거렸다. 그러한 태도로, 그는 몸을 돌려 리브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사실 네가 알기 전에 몰래 먹어 보려고 했는데. 이왕 들켰으니 뭐. 함께 하겠어?”

권유마저도 자연스러움에 신물이 난다.

리브가는 다가오는 코올리의 그림자조차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어느새 벌겋게 부어오른 뺨에, 연약한 입가는 터졌는지 비린 피 맛이 났다. 하지만 그 부분을 만져 보지도, 눈살을 찌푸리지도 못했다. 그저 먹이사슬의 포식 동물을 마주친 피식 동물처럼 사방을 경계하며 몸을 발발 떨었다.

코올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발렌틴이 우뚝 멈춰 서 리브가를 응시했다.

육욕으로 감싸여 있을 때마저도 고귀하게 느껴지던 금안.

그것이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부어오른 뺨과 피를 비친 입가, 그리고 단추가 풀려 헐겁게 벌어진 앞섶과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 아래 드러난 하얀 다리를 차근차근 스쳤다.

더없이 느렸고 그래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제가 어떤 꼴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볼썽사나울 테다. 온갖 꼬인 감정의 실타래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이런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리브가는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옹송그렸다. 주인의 침묵 어린 반응이 공포스러웠다. 어쩌면, 정말, 그가 이 파렴치한 귀족 사내와 저를 함께 탐하기라도 하면……. 그 두려움에 물씬 잠겨서 정작 주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헤아리지 못했다.

“음? 왜 아무 말이…….”

코올리가 무반응인 발렌틴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탕!

사람이 셋이나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괴괴하던 실내의 분위기를, 어느 소음이 쭉 갈랐다. 다소 살벌하고 난폭하게.

“컥, 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쥐고 있는지도 몰랐던 발렌틴의 총이 총탄을 발포한 소리였다. 리브가는 제 얼굴과 옷자락에 후드득 튄 뜨끈한 액체를 맞고 넋을 잃었다. 그녀가 눈을 간신히 깜박이니, 속눈썹에 엉기어 있던 핏방울이 뺨을 타고 눈물처럼 주르륵 흘렀다.

리브가를 가리고 서 있던 코올리는 전신을 바짝 굳혔다가 이내 비틀거렸다. 그가 더듬더듬 부여잡은 복부에서 피가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마침내 거대한 체구는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리브가는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망연히 응시했다. 귀에서는 흉흉한 발포음이 남긴 여운 대신 이명이 삐이이, 울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리브가는 주검처럼 고꾸라진 사내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손을 들어 제 뺨을 쓱 쓸었다. 하얀 손가락 위에 핏자국이 여실하게 묻어났다. 그걸 보고서야 잠시 마비가 된 양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오감이 제자리를 찾았다.

코를 찌르는 비린 쇠 냄새, 단순한 액체라기에는 너무도 끈적하고 끕끕하게 들러붙는 촉감. 죽음의 기류가 피어오르듯 궤궤하기 짝이 없는 공기, 비정상적으로 급박하게 맥동하는 심장…….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 리브가는 제 발치로 웅덩이처럼 고이는 피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결국 목구멍까지 치민 구역질을 견디지 못했다. 점심을 걸러서인지 타액과 함께 역류하는 건 위액뿐이었다.

그녀가 욱욱대고 있던 사이 반쯤 닫힌 문이 벌컥 열렸다.

“방금 무슨……!”

퀄린이었다.

저택 전체를 뒤흔드는 총성을 듣고 온 모양인지 소스라친 얼굴로 등장한 그는 실내의 상황을 마주하고 아연해졌다. 퀄린 혼자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방의 입구는 삽시간 소란스러워졌다. 검은색에 하얀 에이프런의 단정한 차림새를 한 하녀들 역시도 웅성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건 발렌틴은 예사로운 손길로 탄환을 재장전했다. 조경이 어두운 방 안에서 지금 막 발포하여 뜨겁게 달아오른 총구가 시리게 번들거렸다. 발렌틴은 그것을 진즉 쓰러진 코올리 밴텀의 몸 위로 재차 겨누었다.

“발렌! 발렌, 이러지 마!”

한 박자 늦게야 정신을 차린 퀄린이 다급히 뛰쳐 와 그를 말렸다.

“비켜.”

퀄린은 한겨울의 심해를 떠올리게 하는 차디찬 음성에 움찔했다. 약에 취할 때마저도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운 금안은 초점이 흐릿했다.

퀄린은 그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음을 알아챘다.

급히 총을 쥔 발렌틴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퀄린은 저 구석에 생쥐처럼 몸을 웅크린 리브가를 발견했다.

퀄린의 눈길이 종전 발렌틴처럼, 쓰러진 코올리 밴텀과 리브가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엉망인 차림새의 그녀는, 누가 보아도 겁탈을 당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눈 뜨고 못 봐 줄 만큼 처참하고 가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을 쏜 발렌틴의 행동을 그 상황 가운데 대입해 보았다.

더 가 볼 것도 없이 앞뒤 정황이 유추가 됐다.

쯧, 퀄린이 혀를 차고는 서둘러 집사에게 손짓했다. 리브가는 벅적벅적 모여든 하녀들 사이를 헤치며 멀어지는 집사를 아득하게 응시했다. 조금쯤 선명해진 시야로, 익숙한 하녀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들어찼다.

개중에서도 선두에 서 있던 케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진짜 돈 많이 받긴 하더라. 주인님 침실에 드나드는 걔네, 하룻밤에 받는 돈만 100루벨이래. 나 액수 듣고 입 떡 벌어졌잖아.>

<하긴. 그 일이 좀 위험하기는 하지.>

왜 언젠가 주방에 나란히 서서 나눈 대화가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지.

다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리브가는 사용인들의 얼굴이 하나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모두 동일하게 느껴졌다. 다들, 하나같이 치정으로 얽힌 촌스러운 촌극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주인의 행동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다. 수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이자 친구에게 총을 쐈는데 그 이유가 고작 제 하녀를 건드리려 했단 것이었다. 피라미나 다를 바 없는 존재를 위하여, 저와 같은 고결한 대상을 해쳤다. 그러니 모두 저렇게 귀를 쪼아 대는 듯한 숙덕공론을 펼치는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리브가는 어렴풋이 까발려졌음을 깨달았다.

왜 그녀의 차림새가 이다지도 헝클어져 있는지. 그러니까, 주인의 손님인 귀족 나리가 그녀를 대상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발렌틴이 그것을 알아채고 어떤 기가 막힌 행동을 벌였는지…….

그 연장 선상으로 여태껏 ‘밤 시중’이라는 명목하에 제가 발렌틴과 밤마다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자신이 그간 받은 대우는 창부와 같고, 그로부터 받은 거액의 보수는 일종의 화대라는 것을.

빨래터에서 들었던 조롱조의 질문이 귀청을 울렸다.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기분이 어때?>

추악해. 음탕해. 더럽고, 난잡하며, 끔찍해. 너절하고, 추저분하지.

다른 건 몰라도, 결코 깨끗하지는 않겠지…….

머릿속이 맹렬하게 꼬여 갔다. 그 무엇 하나도 그녀를 편하게 두지 않았다. 사방에서 아귀 같은 상념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머릿속을 혼미하게 뒤집어 놓았다.

리브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행하게도 시야가 차단되니 모든 게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몇몇이 입을 모여 연신 쑥덕대는 소리, 피에 젖은 채 엉망이 된 저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눈길들, 가시지 않은 총성의 잔상이 그녀를 차근차근 좀먹어 갔다.

눈을 감는 걸로는 안되었다. 부족했다.

리브가는 양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피로 젖어 든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살아 있는 지옥 같았다.

* * *

코올리 밴텀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퀄린의 빠른 조치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이후 로트링겐 공작저는 한차례의 파도가 휩쓸었다가 물러간 것처럼 고요해졌다. 발렌틴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의 손님으로서 초대된 모든 귀족들이 수도로 돌아간 까닭이었다. 이는 분명, 발렌틴이 코올리의 복부에 총탄을 박은 것과 지독히도 깊은 상관관계가 있을 터.

그들은 발렌틴이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로부터 유발되는 소란에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자제들이 대다수였다. 스스로 정재계에 나서기보다는 부모의 권위에 휘둘리며, 그에 두말없이 굴종해야 하는 영랑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뒤꽁무니가 빠지도록 수도로 향한 그들과 달리 이곳 영지로 온 자도 있었다. 밴텀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이 문제를 황실에 고발하겠다고 하였다가 퀄린이 꺼내 든 ‘약’이라는 주제에 금세 꼬리를 말았다.

이것이 법적으로 엄중한 문제가 되는 이상, 밝혀져 봤자 가문의 명망에 흠집만 가해지는 꼴이었다. 그는 만약 코올리가 위급해지기라도 했다가는 두고 보자며 실속 없는 엄포를 놓았으나, 탄환이 위험한 부분을 비껴 나가는 통에 그는 생명에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이는 의사의 소견이었으므로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정리되어 갈 무렵.

리브가는 저의 변변찮은 밑바닥이 친구, 그리고 친구처럼 지내던 이들에게 까발려졌음에도 여전히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발렌틴은 코올리 사건 이후로 더욱 집착적으로 변했다.

그녀를 이전보다 더욱 끈질기게 찾았고, 난폭하게 안았다. 침대에서 놓아주지 않는 시간 역시 길어졌다. 언젠가 하루는 하녀일을 할 새도 없이 진종일 그의 품에 안겨 있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그는 리브가의 눈 밑 아래에 난 점을 습관적으로 핥아 올리고, 쏙 패는 볼우물을 손끝으로 긁기를 반복했다. 사정과 함께 흩뿌려진 정액을 몸 여기저기에 치덕치덕 바르는 비건전한 행위 역시도 매한가지였다. 제 소유물이라고 철저히 낙인을 찍듯, 그렇게.

코올리 밴텀이 사달을 낸 날 그는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 녀석과 무얼 하려고 했느냐고.

그 녀석이 널 만졌느냐고.

만졌다면 어디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만진 것이냐고.

매섭고 잔혹할 정도로 몰아붙여졌지만, 리브가는 그에 일일이 대응할 만큼의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력하게 주저앉은 자존심이 한때나마 친구였던 이들에게 들키며 완전히 갈라지고 허물어졌다. 원래의 형태는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리브가는 이제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얼 위하여 그에게 이렇게 짓밟히고 유린당해야 하는지. 대체 무얼 위해서……. 과거의 속죄, 그 무게는 도대체 언제까지 짊어져야만 가벼워지는 걸까. 가벼워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발렌틴은 그날 이후로 약을 하지 않을 때도 이따금 불안정한 모습을 내비쳤다. 꼭 거센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아차 하는 순간 그대로 뒤집혀 버릴, 금빛 조각배처럼. 거칠고 난폭하고 사나운데 그게 꼭 휘청대는 제 속내를 어떻게든 숨기려는 몸부림 같았다.

문란하고 방탕한 사교 모임이 종지부를 찍었으나 그의 불건전한 생활은 지속되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리브가는 발렌틴 탓에 간접적으로 약을 흡입하게 되는 일이 늘어났다. 그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는 빈도가 갈수록 증가했다. 요즘은 성교를 하는 도중에도 불쑥불쑥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전이라면 하지 말아 달라는 애걸이라도 해 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제 너무 많은 의지를 잃었고, 발렌틴은 나날이 능폭해져서 감당하기도 벅찼다.

그런, 파괴적인 나날이었다.

그 복잡다단한 관계와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꾸준히 흘렀다.

새가 우는 소리에 리브가는 조금씩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백한 청백색의 기운이 침실에 여실했다. 가슴 위까지 이불로 가려진 몸 위에 발렌틴의 팔이 감겨 있었다.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브가는 그 팔을 조심스레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밤에도 한차례의 폭풍이 인 듯 섹스를 했다. 그 여파로 다리가 뻐근하고 사정없이 후들거렸다. 리브가는 혹시나 발렌틴이 깨기라도 할까 봐 옷을 주워 든 채 휘장을 걷고 나섰다.

오늘은 그에게 붙잡히면 안 되었다. 외출하는 날이라서였다. 헤널드에게 약을 얼른 가져다주어야 했다.

리브가는 지난밤 발렌틴이 함부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잔뜩 흐트러진 매무새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고 가야 할 듯했다. 다른 하녀들이 출근을 하는 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숙소로 돌아갔다. 제가 머물던 방으로 향하던 리브가는 별안간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출근하는지 문을 닫고 나오던 케시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침 하나 삼키기 버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마주치는 시선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더 이상 서로의 치부를 선뜻 내보여 주며 친근하게 지내던 친구는 그 자리에 없었다. 리브가는 그녀와 한 공간에 있으나 홀로 놓인 것만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케시는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끝내 착잡한 표정으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스쳐 지나가는 공기가 속을 차갑게 굳혔다.

리브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온몸의 기력이 발바닥을 통해 모조리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진이 빠졌다. 순간 눈앞이 핑 도는 빈혈에 그녀는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피로가 몸을 야금야금 뜯어먹는 기분이었다.

‘잠시만…….’

쉬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눈이 감긴 후였다.

* * *

“……브가, 리브가.”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힘에 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은 가물가물한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가만 들여다보니 그녀는 바로 케시였다.

무슨 일인지 케시는 전에 없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외출 일 아니야? 여기서 뭐 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리브가는 등 뒤를 타고 흐르는 오한을 느꼈다. 모로 누운 채라 턱을 살짝만 들어도 창밖이 보였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하늘의 색깔이 이상했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리브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기가 완전히 달아나지 않아서일까, 잠시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곧 내장이 쥐어짜지는 듯한 메슥거림과 함께 현실이 피부 끝으로 마구 몰려들었다.

“너 괜찮니? 안색이…… 리브가!”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서둘러 숙소를 뛰쳐나갔다. 사용인들 전용 출구로 나서서 급히 삯마차를 붙잡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심장을 함부로 주물럭대고 있었다. 로트링겐 공작저에서 일한 몇 년간 리브가는 단 한 번도 외출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아침 일찍 나서고는 했다.

그 생소한 일을 오늘 처음 겪어서 그런 걸 테다.

그러니,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일 테다.

무엇보다 이전에 진료소의 의사에게 부탁도 해 놓은 참이었다. 제가 혹 언제나 오는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부디 언덕 위의 허름한 집으로 약을 좀 가져다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그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목돈까지 얹어 주지 않았던가.

고작 몇 시간이다.

헤널드는 제가 예상하는 것보다 허약하지 않았다. 그러니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만약 그가 몸이 아파 지어 놓은 약을 평소보다 더 먹었다면? 그래서 지금 약이 없는 상태라면? 그런 상태에서 발작이 일어나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과 함께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좀처럼 참아 내지 못했다. 불안감이 오한처럼 그녀의 심장을 슬금슬금 뒤덮었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리브가는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직접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요 근래 몸이 축축 처지는 듯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언덕 위를 뛰쳐 올라가는 발길은 굉장히 날래고 분주했다. 어느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낡은 문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든 건 허름한 탁자 위에 놓인 약 봉투였다.

‘내가 들르지 않으니 와 주신 거구나.’

미리 부탁을 해 둔 의사가 집에 다녀간 게 틀림없었다.

불길한 느낌으로 펑 터질 것만 같던 폐부가 서서히 안도를 되찾았다. 리브가는 발소리를 죽인 채 안으로 들어섰다. 헤널드는 등을 보인 채 누운 상태였다. 의사가 노인의 상태를 봐주고 갔을 테니 지금 저건 깊이 잠이 든 모습일 것이다.

문득, 노인의 몸에 덮인 이불이 너무 흐트러져 있음을 인지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워 잘 덮지 않으면 감기에 들지도 몰랐다. 리브가는 일단 약 봉투를 잘 갈무리한 후 헤널드에게로 다가갔다.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발씨가 절로 소극적이 되었다. 간밤 험하게 굴려진 몸 여기저기가 쑤실 때면 신음이라도 터뜨릴까 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그가 무사하다면 다 괜찮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리브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심장 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서늘하게 굳었다. 그건 조금 전부터 그녀를 쥐락펴락하던 불안감이었다.

그게 언제 물러갔느냐는 듯 다시 안개처럼 엄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아주아주 깊이 잠든 게 분명했다.

그래야만 한다.

“……할아버지?”

리브가는 어느새 제 심장이 터질 듯 발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박이 너무도 요란하게 전신을 뒤흔들어서 세상이 다 엉망으로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토기가 치밀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을 느끼며 상체를 굽혔다.

리브가의 귀가 헤널드의 가슴팍에 닿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나 차가운 냉기가 피부 끝으로 스며들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기울여도, 끝끝내 심장 박동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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