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6)

6장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3주가 지난 리브가의 일상은 제법 단조로워졌다.

밤새 본관에 있다가 동이 틀 무렵 사용인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출근을 하기 전까지 두세 시간 정도 간신히 눈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수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져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어느새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케시와 마주쳤다.

“또 새벽에 들어왔어?”

“응.”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깨어난 직후의 리브가는 항상 멍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흐릿한 눈을 가물거리다 보면 케시가 다가와 물 잔을 건네주고는 했다. 쯔쯧, 하고 혀를 차는 건 덤이었다.

“주인님이 아주 애를 잡네, 잡아.”

그녀가 속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리브가는 멈칫했다. 손에 든 잔 속의 냉수처럼 맘이 차게 식는다. 밤새 주인의 페니스에 혹사당한 다리 사이가 아릿아릿했다. 심장은 그 감각보다 더 크게 벌렁거렸다.

그런 리브가의 곁에 잽싸게 앉은 케시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묻고는 했다.

“보수 높게 쳐 주시는 건 확실한 거지? 아니, 밤새 청소를 시키는 거면 기본 봉급에 두 배는 주셔야 하는 거 아니야? 잠도 한숨 못 자고 일하는 건데!”

케시는 그녀가 밤마다 불려 가 주인의 아래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아침 시중과 마찬가지로, 모임이 이루어지는 실내를 청소하거나 뒤치다꺼리나 하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니 저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도 리브가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밤에 한 일을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게 그녀 자신을 번번이 창부의 꼴로 전락시키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가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무심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은 리브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이 받아.”

“그럼 다행이고. 에휴, 그새 안색 나빠진 것 봐.”

케시는 걱정이라는 듯 그녀의 양 뺨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그녀의 온기에도 술렁거리는 마음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밤새 당한 유린이 여전히 제 몸 위에서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리브가는 손을 들어 볼가를 어루만졌다. 주인이 어젯밤 귀두를 차지게 문질러 대며 정액을 울컥울컥 쏟아 낸 부위였다.

“너무 힘들면 다른 하녀들과 분담해서 하겠다고 말해 봐. 리브가 너 말고도 돈이 궁한 애들은 좋다고 자원할 텐데.”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 해고당할 것이다. 해고되지 않는다고 해도 주인이 그 청을 받아 줄리가 없었다. 그는 다른 하녀를 안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애초에 저를 건드린 게 하녀라서는 아니리라. 주인은 오직 리브가만 휘장 속에 들어오는 걸 허용했다. 그러나 그 편애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으므로 되뇔수록 입만 써졌다.

“괜찮아.”

“……정말?”

안색이 정말 안 좋기는 안 좋은지 케시가 대번 염려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리브가는 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봉급을 나눠 받아야 하잖아. 그 돈은 전부 내가 받을 거야.”

“으휴, 일만 하다가 죽을래?”

케시는 그런 리브가의 이마에 꿀밤을 놓으며 툴툴댔다. 말투가 다소 격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게 걱정임을 알기에 리브가는 그냥 웃고 말았다.

“네 아침 구역 청소 내가 해 줄 테니까 좀 더 쉬고 와.”

“하녀장께 들키면 혼날 텐데.”

“내가 잘 둘러대면 되지.”

변명에 일가견이 없는 케시임을 알지만 리브가는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은 두 발을 내려 땅을 내디디기에도 벅찰 만큼 힘에 부쳤다. 바위가 얹어진 것처럼 온몸이 지끈거렸다.

케시가 발을 돌려 나가니 적막이 감도는 방에는 리브가만 남았다. 그녀는 힘겹게 일으킨 몸을 다시 무너뜨렸다. 여전히 기진맥진했다. 천천히 눈을 감으니 산란하게 번지는 통증이 조금 더 세밀히 느껴졌다.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곳을 꼽으라면 리브가는 단번에 마음, 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 * *

주인은 사정이 느린 편이었다.

지루라기보다는 삽입을 지속하여 쾌락을 즐기기 위한 일종의 섹스 방식 같았다. 그간 무수히 거듭되온 행위 속에서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리브가는 첫날 그의 성기를 얼마 빨지도 않았는데 사정에 임한 게 참 이례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웬일로 사정이 빠르냐며 낄낄대던 주변의 반응은 덤처럼 들러붙는 끔찍한 잔상이었다.

“제대로 안 돌려?”

시가를 문 발렌틴이 못마땅한 어조로 퉁을 놓았다. 누운 그의 허리 위에 올라탄 리브가는 호흡을 조절하며 소심한 감탕질에 더욱 속도를 더했다.

“흐, 으응…….”

허리를 돌릴 때마다 안에 박힌 거근이 제멋대로 빠져 어귀를 긁었다가 다시 쏙 파고들어 자궁구를 감질나게 건드렸다.

아래에서 대각선을 타고 올라오는 주인의 시선은 정사 중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사나웠다. 밤의 시간, 약에 취한 그의 동공은 짐승의 것처럼 본능적으로 변했다. 이성은 저 멀리 가라앉고 육욕과 색정만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리브가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더더욱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어느새 기어올라와 보조개를 살근살근 문질렀다. 발렌틴은 유독 이 부위에 집착적으로 굴었다. 3주 가까이 이어진 교접의 시간마다 꼬박꼬박 보조개를 핥거나 여기에 제 뜨거운 정액을 발라 댔다. 꼭 암컷에게 제 냄새를 배게 하고 싶은 수컷처럼. 보아하니 오늘은 손가락으로 후비려는 모양이었다.

“이리 와 봐.”

“흣, 네……?”

“내 위로 엎드리라고.”

허리를 수직으로 세우고 있던 리브가가 멈칫했다. 그녀는 주저주저하더니 손을 내려 그의 머리맡을 짚었다. 가느다란 두 팔이 버거운 것처럼 떨렸다. 곧 그녀가 그의 위로 몸을 숙였다. 순간 그의 유두와 뾰족이 곤두선 리브가의 유두가 맞닿아 비벼져 움찔했다.

그녀의 보조개를 핥으려고 했던 발렌틴은 자세가 영 마땅치 않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가 시가를 내려놓고 불시에 리브가의 허리를 잡아 몸을 돌렸다.

“아응……!”

뿌리 끝까지 박혀 있던 페니스가 자세를 달리함에 따라 내벽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이제는 발정 난 개가 된 양 자극이 가해지니 아래에서 반사적으로 애액이 울컥 터졌다. 그녀를 제 아래로 눕힌 채 발목을 잡아 벌려 습관처럼 음핵을 문질러 주던 발렌틴이 그걸 알아채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알아서 잘 젖네.”

“흑, 하아, 응…….”

“창부 다 됐어. 안 그래?”

오늘도 여전히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어조에 리브가는 대꾸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주인은 자세를 제대로 고쳐 잡고는 내벽을 턱턱 치받아 오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바란 대로 보조개를 혀로 원 없이 긁고 핥으며 추삽질에 임했다. 볼가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이젠 익숙했다.

안으로 콱 처박히는 성기에 헐떡거리며 손을 올리던 리브가는 불현듯 움찔했다. 허공에서 떨리던 손은 결국 더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해 시트를 붙잡았다. 좁진 구멍을 비집어 벌려 쑤셔 대는 와중에도 발렌틴은 기민하게 그 손길의 행방을 눈치챘다.

그녀가 저런 행동을 하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그 이유 또한 잘 알았다. 3주간의 정사 동안 발렌틴은 그녀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어깨나 몸 위로 손을 뻗쳐 올 때마다 그것을 낚아채 시트에 처박고는 했다. 함부로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를 행동으로 대신하듯.

그러고는 까무러치도록 박고 또 박아 댔다. 그 무자비함에 이골이 난 양 리브가는 이제 알아서 손을 물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상할 게 없는데.

그가 들인 습관과도 같은데 발렌틴은 순간 기분이 극도로 언짢아졌다.

“뭐 하는 거지?”

“네……?”

쪽, 소리가 나게 보조개를 빨아올린 그가 시트를 동아줄처럼 움켜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어 제 어깨에 얹었다. 아래에 깔린 가량가량한 여체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긴장이 역력한 기색이다.

발렌틴은 그 상태로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익숙하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가 빼냈다. 질척하게 젖어 든 안쪽 살이 그의 성기를 딱 좋게 조여 물었다가 놓으며 삽입의 여흥을 도왔다.

리브가는 망설이다가 다른 한쪽 손도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제야 언짢은 기분이 풀리는 걸 느끼면서도 발렌틴은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약을 하도 처먹어서 기분을 조절하는 뇌하수체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기라도 했는지 아주 제멋대로 난리였다.

사실, 그건 비단 오늘 일만이 아니었다.

“하으, 응, 응……!”

리브가와 몸을 섞은 이후에 한결같은 반응이기도 했으니까.

발렌틴은 제 좆을 아래로 물고 씨근덕대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럼 바라보았다. 평소 창백하게 보일 만큼 투명하던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며 격한 운동에 땀이 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것만 떠올리면 발기가 됐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게 아니면 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에게라도 잘 서던 성기가 이젠 반응조차 안 했다. 그걸 막 깨달았던 3주 전 어찌나 황당했는지.

<발렌틴, 결국 고자 된 거야?>

모임 초대장을 받아 이곳으로 내려온 귀족 영애, 벨라 스푸이트가 반응 없는 성기를 앞에 두고 한 말이었다. 가끔 약을 필요 이상으로 섭취하여 발기부전이라는 부작용이 생긴 이들을 떠올리며 건넨 말일 게 뻔했다. 나태하기로 저 못지않은 그녀가 낮부터 정사를 벌이려다가 시들한 성기를 보고 어처구니없어하던 게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땐 대체 왜 그랬지? 지금은 아플 정도로 자지가 서 있는데.

“아흐, 흣, 으…… 으응……!”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귀를 스치는 여자의 비음이 달콤했다.

결코 강제로 당하는 편이라고는 볼 수 없는 교성이다. 첫날에는 억눌린 소리만 내던 것에 비하여 지금은 조금이나마 쾌락을 즐기는 법을 배웠는지 어색하게 몸을 비틀며 제 몸짓에 따라 함께 허리를 흔들고는 했다.

그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꼴렸다.

제가 잘 알던 과거의 그 목소리로, 자신의 아래에 깔려 허덕이는 리브가의 모습이 아랫도리로 미치도록 피를 몰리게 했다.

이건 분명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충동을 넘어서는 분노를 풀고 싶은 원대한 복수였으니, 상처만 낭자한 꼴로 만들 속셈이었다. 그 가운데 제가 이 잠자리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결과는 결코 속해 있지 않았다.

하긴, 돌이켜보면 계획은 초장부터 틀어졌다.

그녀를 처음으로 가진 날 밤, 발렌틴은 형용 못 할 불쾌감에 휩싸였었다. 분명 그녀를 제멋대로 안고 유린하면 내내 찝찝하게 속을 채우던 분노가 조금은 가실 줄 알았다. 그녀가 저를 가지고 놀았던 것처럼 저 또한 그리하면 해묵은 감정의 노도가 어느 정도는 사그라들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우는 그녀를 볼 때마다 심경은 한층 더 복잡하게 꼬여 갔다.

이상하게 아파서 우는 리브가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발렌틴은 생전 처음으로 여자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음부를 핥아 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걸 몇 번이나 했다. 마찰열로 벌겋게 부어오른 양 음순을 번갈아 빨아 준 뒤 가운데로 길이 난 구멍을 정성스럽고 게걸스럽게 애무했다. 언제나 제 성기를 다른 여인 입술에 물리기만 하던 그에게는 퍽 진귀한 봉사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그리 역하지가 않아 놀란 건 그 자신이었다. 외려 행하면 행할수록 맛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러한 연유로, 리브가의 감도가 요 근래 부쩍 예민해진 건 전적으로 그의 탓이었다.

그뿐인가?

본래 그는 난교 파티의 선봉자로서 남들 앞에서 성교를 벌이는 데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첫날 리브가를 응접실에서 밀쳐 넘어뜨린 것 또한 그러려고 벌인 짓이었다. 그다음엔 정녕 그녀를 응접실에서, 다들 보는 앞에서 안으려고 했다. 오히려 그편이 리브가의 자존심을 박살 내고 무너뜨리는 데에 적격일 테니.

그 행위를 시도하려는 도중 약에 취해 완전히 풀어진 밴텀가의 영식이 불쑥 다가왔다. 첫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제게로 끌고 온 사내였다. 예전에도 한 여자를 두고 함께 섹스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성기를 리브가에게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게, 그 순간이 참을 수 없이 역겹고 불쾌했다. 배 속에서 구렁이 수십 마리가 마구 꿈틀대는 양 배알이 뒤틀리는 심정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리브가를 끌고 다시 침실에 박혀 발정기의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한 채로 말이다.

그렇게 3주째, 타인의 눈길을 피한 휘장 속에서 이 하녀를 야금야금 삼키고 굴렸다.

“흐, 아, 하응……! 응, 처, 천천히……!”

“후우…… 건방지게.”

쫑알쫑알대며 신음하던 입술이 투박한 일갈 한 번에 쏙 다물린다. 대신 여느 때처럼 울먹울먹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숨이 격해질 만큼 성기를 찍어 내리던 발렌틴은 맥없이 사정에 이르렀다.

성기가 반쯤 빠진 타이밍에 파정이 시작되어서 그는 부러 자지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설익은 호흡을 내쉰 리브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발렌틴은 자신의 것을 빠끔히 물어 삼킨 채 정액을 받는 구멍을 칭찬하듯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오늘 역시도 쾌락의 여운보다는 미묘한 꺼림칙함이 따라붙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도 함께였다. 그는 그 해답을 섹스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또다시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새까만 밤을 지나 아침이 가까워졌다.

리브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허물처럼 늘어진 하녀복과 속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이걸 보니 간밤 제 손으로 이것을 직접 벗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벙하게 굴다가는 주인이 찢는 일이 부지기수였기에, 그간의 밤으로 터득한 처세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주인은 잠이 든 모양인지 미동이 없었다.

조용히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서니 어느새 창은 부유스름한 여명의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보다 정사가 조금 길어졌는지 침실과 이어지는 응접실이 사뭇 조용했다. 낮에는 정숙하고 얌전하다가 밤만 되면 미치광이 광대처럼 돌변하는 귀족들은 날이 밝기 전 저들을 위해 마련된 게스트 룸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럼 미리 대기하던 하녀장과 집사가 응접실의 흔적을 치운다. 간밤의 노골적인 추태를 깔끔하게 숨기기 위하여 짜여진 체계적인 순서였다.

별안간 문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리브가는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하녀장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와 리브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다. 저걸 보니 2주 전 아침의 기억이 불시에 떠올랐다.

오늘처럼 응접실과 침실의 경계에서 저를 기다리던 하녀장을 뒤따라 찾아간 곳은 하울프 백작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에서 백작은 마주 앉은 테이블 위에 저 유리병을 놓았었다.

<이건…….>

<피임약이다.>

리브가는 이미 발렌틴의 주변인들이 그와 저 사이의 낯부끄러운 소행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안면이 뜨거워졌다. 남 앞에서는 보이기 수치스러운 부분이 훤히 까발려진 것만 같다. 눈앞에 있는 피임약이 그 수치심을 한껏 부풀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건네줄 테니 잊지 말고 먹도록 해.>

케시에게 전해 듣기를, 그가 발렌틴의 침실에 드나드는 창부들에게 주로 피임약을 먹였다고 했다. 아마도 천출에게서 공작가의 핏줄을 밸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함일 터. 지금 저에 대한 하울프 백작의 처우는 그 창부들을 향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탈한 웃음이 샐 것처럼 허파가 부풀었으나 정작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가슴 역시도 서늘하게 식어 버린 지 오래였다.

리브가는 하녀장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내민 유리병을 모조리 비웠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끈적함에 속이 더부룩했다.

<원체 변덕이 심한 녀석이니 금방 질려 할 거다.>

핼쑥하게 질린 저를 앞에 둔 하울프 백작이 대뜸 그런 말을 했었다.

<그때까지만 버텨. 녀석도 흥미가 떨어지면 널 부르는 일이 없어질 테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위로가 아니었나 싶다. 말투가 귀족답게 거만하고 내려다보는 식이어서 그렇지……. 다만 안타깝게도 그건 리브가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발렌틴이 질리면, 그래서 내가 더 이상 그의 침실로 불려 가지 않으면.

그럼?

그럼 이 모든 일은 없던 게 되나?

<일반적인 하녀들의 봉급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보수를 받기도 하니까…….>

돈이면 다 된다는 기득권층 특유의 고리타분함에 조금은 기가 질리고, 또 조금은 숨이 막혔던 것도 같다. 이 저택 내에서 가장 높은 발렌틴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상 리브가가 어떻게 깨지고, 무너지고, 균열되고, 붕괴된다 하더라도 저들은 도울 수 없다는 명백한 선 긋기.

사실 선을 그을 필요도 없을 만큼 그녀가 하잘것없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기.

결국, 결국 자신은 주인의 호기심이 사그라들어 끈 떨어진 인형 처지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게…….

이래서야 정말 노리개가 된 꼴과 뭐 다를 바 있나.

리브가는 그 깨달음에 부닥칠 때마다 자신이 번번이 어딘가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 * *

“……양, 리브가 양!”

“아, 네.”

멍하니 앉아 있던 리브가는 부름이 세 번쯤 이어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몰라? 여기, 약.”

의사가 외알 안경을 고쳐 쓰며 그녀에게 약포지가 담긴 천 주머니를 건넸다.

“그보다 이 돈을 대체 어떻게 구해 왔대.”

자기가 내놓은 가격이 터무니없는 편인 건 알고 있는지, 의사는 리브가가 탁자에 내려놓은 돈주머니를 흘긋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맥없이 그리로 따라갔다가 결국엔 쓴웃음과 함께 돌아갔다. 저것을 얻기 위해 한 짓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다음 달에도 부탁드릴게요.”

“혹시 뭐 안 좋은 일 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안색이 퀭한데…….”

아까부터 저를 보며 뭔가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더라니, 저걸 묻기 위해서였나. 리브가는 그가 일컫는 안 좋은 일이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그도 혹여나 제가 몸이라도 팔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더럽고 음탕한 짓을 통해 이 목돈을 마련해 오는 거라고 여기는 걸까.

리브가는 들숨과 함께 부정적이고 소모적인 생각을 부러 그쯤에서 잘라 냈다. 그렇다고 하여 시커먼 안개로 가득 찬 듯 답답한 속이 나아지는 건 아니지만.

묵례로 인사를 전하고 이만 진료소를 나서려던 리브가는 멈칫했다.

“……저기.”

“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의사가 눈짓으로 뒷말을 채근했다. 리브가는 챙겨 온 돈주머니를 하나 더 꺼내며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약속된 날에 약을 가지러 오지 않으면 저 대신 할아버지께 약 좀 챙겨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집 위치 아시니까…….”

“오지 못할 일이 뭐 있나? 리브가 양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온 적 없었잖아.”

물론 그렇기는 했다.

“……앞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요즈음 늦잠을 자는 일이 부쩍 늘었다. 새벽에 기어들어 와 간신히 눈을 붙이는 형국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까딱하면 외출 날마저도 늦게 될지 몰라 염려스러운 마음에 부탁한 것이었다.

의사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이익도 없이 왜 그런 봉사를 해 주어야 하냐는 듯한 함의가 정확히 읽히는 얼굴이었다. 리브가는 꺼내 든 돈주머니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금세 관심 있는 얼굴이 되어 주머니를 열어 본 의사는 그 안에 담긴 목돈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리브가 양. 대체 무슨 수로 이런 거액을 마련한 거야?”

의사의 눈빛에 깃든 의심스러운 기색이 짙어졌다.

하루에 100루벨을 버니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넘치는 게 돈이었다. 고작 2주 만에 리브가의 삶은 이전과 완벽히 뒤바뀌었다. 보잘것없는 몸뚱어리를 내어 주고 취하는 값이면 제법 쏠쏠한 것 같기도 하다. 다소 자기 파괴적인 생각이었다. 리브가는 요즈음 까딱하면 치닫는 자괴감을 메마른 웃음으로 감추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만 가 볼게요.”

“어, 어어. 그래. 걱정하지 마. 할아버님은 내가 잘 돌봐 드릴게.”

진료소 바깥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리브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림막 없이 내리쬐는 햇살이 눈부셨다. 그녀는 그림자를 그리는 말간 햇살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진료소에서 약을 짓고 집으로 돌아가 헤널드를 챙긴 뒤 저택으로 복귀했다. 사소한 소요라면 사용인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에 발생했다.

“리브가, 외출했다 이제 돌아오나 보네.”

쥬다를 포함한 여러 하녀들이 일하는 빨래터를 지나치던 도중이었다. 피곤하고 기력이 없어 ‘응’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지나치려고 했다.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기분이 어때?”

제 발목을 붙드는 별안간의 조롱이 아니었다면.

리브가는 가던 길을 멈추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선 하녀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뭐?”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만큼이나 선명한 적대감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너 요즈음 주인님 밤 시중 들면서 봉급을 그렇게 많이 받는다며?”

“부러워라.”

“그래도 좀 너무한 거 아니니, 리브가? 다들 고만고만한 형편인 거 뻔히 알면서 너만 그렇게 날름 차지해도 되는 거야?”

“그러게 말이지.”

속물, 욕심보, 이기주의자.

들리라고 하는 건지 모를 적나라한 호칭이 이런저런 말문을 타고 그녀의 귓바퀴를 갉아먹었다. 리브가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그래 봐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의는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가릴 것 하나 없는 햇살 아래에 너무도 선명하게 리브가에게로 닿고 있었다.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들을 꺼내는지 알 만했다.

황제가 갑자기 어느 날부터 한 시녀만을 가까이 두고 대접을 잘해 주면 다른 시녀들의 질투심을 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그 시녀가 황제에게 바쳐지는 목적은 바로 ‘침방 시녀’라는 거다.

제가 무엇을 대가로 거액의 보수를 받는지 이들이 알기는 알까…….

아니, 알아도 지금의 태도와 큰 차이는 없으리라.

수려한 주인을 떠올리며 볼을 붉히던 하녀들의 모습이 기억에 선했다. 그들 모두 주인의 방탕한 기질에 기함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그에게 속하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꼈을 테다. 그리고 발렌틴에게 처음부터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던 리브가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깊어지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피곤한 몸은 더더욱 노곤해졌다.

리브가는 저를 노려보는 시선들을 죽 훑어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침착한 척 걷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심장은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지난달만 해도 서로 친구처럼 막역하게 지내던 이들이 고작 주인의 총애와 돈 몇 푼으로 볼품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제 방으로 돌아와 쿵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녀는 서서히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그 상태로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슬럼가에서 그녀는 외톨이었다. 어른들은 언제나 약과 술에 취해 헤롱거렸고 납치를 당하여 잡일꾼으로 온 아이들은 그녀를 경계하고 멀리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다가온 아이가 있어도, 그녀가 저들을 납치한 마약상의 딸인 걸 알면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멀어졌다.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저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속이 상하고 괴로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어두움의 경계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걸 표하듯 이곳에서는 모두 웃으며 친하게 지냈다. 그런 평범한 삶이 몹시 행복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왜, 왜 또 나를 둘러싼 환경은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걸까.

고립되고, 깎여 나가고, 무너지다가, 결국엔 철저히 혼자가 되어 버리는…….

리브가는 묻어 둔 고개를 더듬더듬 들어 올렸다. 비어 있는 케시의 침대가 보였다. 저를 향해 환히 웃어 주던 가장 막역한 친구. 케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제가 주인의 총애를 모조리 독차지하고 싶어 안달 내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런 오해를 한다 한들 무어라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숨 쉴 구멍이 하나둘씩 틀어막히고 있다. 조금씩 들리던 고개가 의지를 잃고 고꾸라지듯 다시 무릎에 처박혔다. 울적함에 머리끝까지 잠겼다. 끝을 알 수 없는 혼돈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토할 것 같았다.

자꾸.

자꾸.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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