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6)

4장

창틀의 먼지를 물 적신 천으로 닦던 리브가는 별안간 멈칫했다. 지난날의 회상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때는 3주 전이었다.

<리브가.>

언제나 비단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응접실에 앉아 권태로운 오전을 보내는 주인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날이었다. 하던 청소를 내팽개치고 얼른 다가가니 그가 성냥을 눈짓했다.

성냥을 왜…… 잠시 고민하던 리브가는 그의 붉은 입술 사이에 끼워진 시가가 발화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공손한 자세로 성냥에 불을 붙이는 순간, 리브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주인이 친히 상체를 제 쪽으로 기울인 것이다. 이골이 나는 냄새에 속이 메스꺼워질 만도 한데, 그 냄새의 주인이 발렌틴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쾌감보다는 심장이 꽉 조여드는 긴장감만이 앞섰다. 그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반응이었다.

리브가가 켠 아슴푸레한 불꽃에 필러를 댄 발렌틴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은밀하다 여겨질 만큼 가까웠다. 내리깔린 사내의 속눈썹이 풍성했다. 그것에 이는 미동은 나비가 요요히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섬세했다.

곧, 시선이 마주쳤다.

<몸에 뭘 바르나?>

주인이 별안간 물었다.

<예, 예?>

<네가 가까이 오면 늘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발렌틴은 그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것처럼 불시에 리브가의 목덜미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날렵한 콧대가 살갗에 스칠 듯 밀접해졌다.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꼭 그런 일이 일어난 듯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슬쩍 물러나며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아니요. 특별히 바르는 건…….>

누가 보면 목이라도 빨린 것처럼, 그의 콧날이 향한 부분을 부산스럽게 만지작거렸다.

한 박자 후에야 그가 일컫는 향이 무언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어릴 적 슬럼가에서 치료를 주로 해 주던 할아버지, 헤널드는 친조부처럼 리브가를 살뜰히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약에 찌들 대로 찌든 슬럼가에서 유일하게 어른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리브가가 친부로부터 얻어맞아 생긴 상처를 곧잘 치료해 주었는데, 그때 주로 사용하던 약에서 은은한 꽃내음이 났었다.

어릴 적, 아주 어릴 적에 리브가는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제 목을 조른 아비의 손길로 인해서였다. 다행히 주변의 만류로 불발에 그쳤지만 리브가는 그날 이후로 한결같은 악몽을 꾸고는 했다. 아버지가 제 목을 조르는 꿈이었다. 깨어나 보면 목덜미 쪽은 그녀 자신이 손톱으로 긁는 바람에 넝마 상태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헤널드의 꽃내음 나는 약은 그녀의 목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었다.

<좋은 향기야.>

후우, 숨을 내뱉는 그의 입술을 따라 뿌연 연기가 퍼졌다. 긍정적인 내용에 비하여 그 어조는 썩 건조했다.

<네가 아침 시중을 들어 줬으면 하는군.>

<아침 시중은 지금도 제가…….>

<여기 말고, 침실에서.>

리브가는 무심결에 치맛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발렌틴이 경직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 침실에서도 그 향을 맡았으면 하거든.>

자칫 들으면 꽤 음밀하게 다가올 법한 말이다. 그의 앞에 설 때면 언제나 남아날 때가 없는 심장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그러했다.

<하지만…… 주인님의 침실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았습니다.>

<누가?>

<집사님과 하녀장께서…….>

<그네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나인데 뭐가 걱정이지?>

<……제가 침실 시중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의중을 떠보는 거나 다름없는 질문이었다. 이곳 응접실을 넘어 침실에서까지 내가 꼭 필요한 이유가 있는지. 그 물음에 발렌틴이 픽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언제 그녀를 향해 친절히 상체를 수그려 주었느냐는 듯 본래의 거만하고 오만한 면모를 눈 깜짝할 새 되찾았다.

<이곳에서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청소하고 차를 준비하고.>

<…….>

<이렇게 내가 원할 때…… 불도 붙여 주고.>

시가의 발화를 돕는 건 보좌관도 하는 예사로운 행위이다. 그런데도 마치 남들에게 보일 수 없을 듯한 내밀한 소행처럼 다가오는 건 주인의 어조가 꽤나 은근한 까닭이었다.

처음부터 리브가가 거절할 명분 따위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그들이 주종 관계인 이상 그건 아무리 좋게 말한들 제안 아닌 명령에 가까웠다. 사용인들은 주인의 불편함이 없게 하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리브가는 그날 이후,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주인의 침실에 드나들 수 있는 하녀가 되었다.

‘정말 향기가 나나?’

회상을 그친 리브가는 열심히 창틀을 닦다 말고 불쑥 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지만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이번엔 발렌틴이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었던 목덜미에 손목을 비벼 다시 코에 가져다 댔으나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아마 그가 없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닐 터다. 간혹 저를 끌어안고 자는 케시나 다른 하녀들도 종종 좋은 향기가 난다고 말해 주고는 했으니까.

그때였다.

사락.

천을 걷는 희미한 소리가 났다. 리브가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뒤를 돌았다. 바짝 오른 긴장감이 무색하게, 침대의 휘장을 조심스레 젖히며 나온 건 웬 여인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 위로 헝클어진 머리칼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이목구비에는 밤새 지우지 못한 화장이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들었어? 오늘은 세 명이었대.>

<뭐기는! 오늘 아침에 주인님 침대에서 나온 여자들 수 말이야.>

리브가가 발렌틴의 침실로 처음 발을 들인 게 3주 전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그의 침대에서 나오는 여자들’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아니, 정정하자면 ‘여자’였다. 지난날 숙소에서 누군가 먹이처럼 던진 정보는 완벽히 틀렸다. 리브가가 침실 전담 하녀가 된 뒤로 발렌틴의 침대에는 늘 한 명의 여자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이 시간이 민망하고 계면쩍었다.

‘오늘도네…….’

창부는 리브가를 마주치고는 흠칫하더니 얼른 옷가지를 챙겨서 후다닥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면 홀로 남은 리브가는 한 박자 후에야 한숨을 푹 내쉬고는 했다.

연한 갈색 머리칼에 진한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회색빛 눈동자.

일주일째 마주하는 창부의 외양은 거울을 맞댄 것처럼 그녀의 특징과 유사했다. 세상에 널린 게 갈색 머리칼이며 잿빛 눈동자 또한 그리 희소성이 있는 편도 아니니 단순히 착각이라고 여기며 넘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3주째 이어지는 아침마다의 거북한 대면이 공연히 이상한 기분을 떠안기고는 했다.

꼭 주인이 부러 저와 닮은 여자라도 고른 듯한…….

막연한 추측 뒤엔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다소 허무맹랑하다는 의견이 따라붙고는 했다. 리브가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젓는 것으로 쓸데없이 소모적인 생각을 그쯤에서 잘랐다.

그녀의 주인이 눈을 뜬 건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종전과 달리 휘장이 거칠게 젖혀졌다. 이 너른 침실의 주인임을 표하듯 손길에 자비나 조심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리브가는 금단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발을 들이밀며 깨달은 게 있었다. 먼저로는 앞서 마주친 창부의 존재였고 다음으로는 제 주인의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응접실로 나오는 주인의 모습은 한없이 나른했다면, 잠에서 막 깬 침대 위의 주인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지금도, 새까만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터는 손길이 상당히 히스테릭했다.

그녀는 얌전히 필요한 것을 챙겨 그의 발치로 다가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꼭 이 아침의 통과 의례가 된 듯, 입에 발린 인사를 꺼낸 리브가가 그에게 정중하게 시가를 내밀었다.

발렌틴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에 들린 시가를 입술로 물었다. 꼭 여자에게서 시가를 이렇게 받아 물어 본 적이 자주 있는 사람처럼 그는 매번 이런 방식으로 그것을 채 갔다. 이 행동을 처음 겪었을 때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맘에 심경이 복잡했는데 이것도 3주가 되니 덤덤해졌다. 그 마음 그대로 리브가는 침착하게 시가 전용 성냥을 켰다.

희미한 불길이 필러로 옮겨붙었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깊게 빨아들인 그가 심호흡하듯 길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상체를 뒤로 기울이는 탓에 대충 여민 가운 앞섶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탄탄한 살갗이 리브가의 신경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아.”

금방이라도 누울 것처럼 몸을 늘어뜨린 그가 별안간 신음했다.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주인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그가 뒷덜미 쪽을 어루만지더니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처가 났군.”

“상처요? 제가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발렌틴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브가는 벌떡 몸을 일으켜 그의 옷깃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날카로운 뭔가에 긁힌 듯 생채기가 여러 줄 나 있었다.

이게 뭐…….

당황하여 눈을 끔벅거리던 리브가는 오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미친 계집이…….”

발렌틴의 짓씹는 듯한 뇌까림이 그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조금 전 후다닥 침실을 뛰쳐나간 창부가 간밤, 그의 몸에 새겨 놓은 열락의 흔적이었다.

“의사를 부를까요?”

“고작 긁힌 걸로 유난 떨 필요 없다. 네가 해.”

리브가는 응접실에 구비되어 있던 구급함을 가져와 약초로 만든 연고를 꺼냈다. 유백색의 연고를 손가락 위에 쭉 덜고서야 이것을 제 주인의 몸에 문질러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의 몸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는 것을.

맞닥뜨린 현실에 굳어 버린 그녀를 흘끗 쳐다본 발렌틴은 헐겁게 묶인 가운 끈을 풀었다. 잔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살갗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장대하며 건장한 체격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흉근을 타고 이어지는 선이 따라 그려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흠잡을 데 없이 예술인 얼굴과 실로 잘 어울리는 몸태였다.

리브가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갈라진 가운의 앞섶을 타고 쭉 미끄러졌다. 하얀 가운에 가까스로 가려진 다리 사이, 두툼한 살덩이의 윤곽이 제법 적나라하게 두드러졌다. 리브가는 불에 덴 듯 화들짝 고개를 치들었다. 시선이 정돈되지 못하고 요동쳤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당혹감에 뒤집어지려는 음성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주인에게로 몸을 붙였다.

어쩌다 보니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다리 사이에 선 자세가 되었다. 리브가는 질척한 점성의 연고를 붉은 생채기 위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렇지 않아도 창부를 보고 이상해졌던 마음에 한층 더 두터운 미묘함이 층층이 깔렸다.

이렇게 허락을 구해야지만이 그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자신과 달리 창부는 거리낌 없이 이 몸을 만지고 쓸었겠지. 무엄하게 상처도 내고. 간밤 섹스의 증거라고 생각하니 리브가는 마치 이것이 상처보다는 하나의 자국 같았다. 열렬히 침대를 뒹굴었다는…… 성애의 자국.

곱씹을수록 속에서 소용돌이가 치는 느낌이다.

묵묵히 약을 바르던 리브가는 조금 늦은 감이 있은 후에야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부러워.’

그건 명백한 선망, 조금 더 나아가 질투이기도 했다.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 없이 그려 온 사내와 그를 거리낌 없이 만질 수 있는 여성. 그러니 그 여성의 존재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변변찮을지 모를 창부라 하더라도 리브가는 마냥 부러웠다.

그녀의 위에 올라탄 제 주인은 밤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안고, 그 살결을 매만지고, 밤의 야음에 함께 취해 갔는지…….

응접실에서는 하녀라는 가면을 쓰고 능숙히 감춰 온 순애보가, 침실이라는 은밀한 장소에 들어서니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게 그가 직접 저를 이 안으로 이끌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직도 선은 확고했다. 리브가는 모든 장막이 걷혀진 아침의 침실은 알지만 밤의 전경은 알지 못했다. 이곳까지 파고들어 왔음에도 여전히 다른 하녀들처럼 일찍 퇴근을 명받았고, 밤새 이곳에서 주인이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 미지가 그녀를 거듭 초조함으로 밀어뜨렸다.

더 다가가고 싶어서.

더 그를 알고 싶어서.

“아.”

순간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가 상처를 세게 스쳤다. 창밖을 보며 시가를 피우던 주인의 신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리브가는 얼른 사과를 전하며 손에 힘을 풀었다. 옆을 응시하던 주인의 시선이 제게로 돌아왔다. 느리고 차분한 눈길의 행방이 몸을 타고 엉금엉금 기어 올라오는 게, 살갗 너머 옷 위로 느껴질 만큼 또렷하고 효과적이었다. 침이 절로 꼴딱 넘어갔다.

영원 같던 잠깐 후 치료가 끝이 났다.

제법 서두르는 감이 있는 모습으로 그에게서 물러났을 때, 흘러내린 가운을 어깨에 걸치며 일어난 주인이 별안간 물었다.

“집중하면 생기나?”

“네?”

시가를 삐딱하게 문 발렌틴이 뚜벅 다가와 리브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천을 대신 들고서 연고가 묻은 검지와 중지를 닦아 주었다. 예기치 못한 주인의 농밀한 접촉에 리브가는 망부석이 되었다.

느릿느릿한 손길이지만 그래서 더욱 의식이 되었다. 그는 친절하게 닦아 줄 생각은 없었는지 그 행동을 두어 번 반복하고는 천을 다시 리브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단발성에 가깝게 그친 탓에 그 행위는 오리무중이 되었다. 연고를 닦아 주려 했다기보다는 리브가의 손을 만져 보고 싶었던 것에 가깝게 느껴져서 말이다.

“아니면…… 긴장할 때인가.”

깊게 생각에 잠길 여유 따위 없었다. 리브가의 손을 놓은 그가 별안간 오른쪽 볼을 쿡 찔렀기 때문이다.

길고 곧으면서도 사내답게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우묵하게 길을 낸 리브가의 볼우물을 쭉 그어 내렸다. 그 순간 리브가는 배 안쪽에서부터 번지는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발렌틴은 미련 없이 손을 떼고는 응접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침실을 빠져나가고서야 리브가는 자신이 숨 한 자락 내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폐로 차오르는 숨이 달뜬 양 뜨거웠다. 아직 다 닦이지 않은 점액질의 연고가 손가락 사이에서 질척거렸다.

* * *

발렌틴은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엄지를 들어 올려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오늘 아침. 제 다리 사이로 들어와 바짝 붙었던 몸에서 나던 은은한 체향, 그리고 손끝으로 찔러 본 볼살의 촉감이 지금 만지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독 세밀하게 다가온다.

“뭐 하는 거야?”

그런 발렌틴의 정신을 깨운 건 옆에 서서 그를 지켜보던 퀄린이었다. 조사하라고 들들 볶던 정보를 눈앞에 가져다 던져 줬는데 그걸 볼 생각은 안 하고 손가락 끝이나 물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을 보낼 만도 했다.

발렌틴은 그제야 제 앞으로 내밀어진 것을 보았다.

어차피 저로서는 답도 모를 의문 따위, 지난날 모조리 잘라 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이후로 발렌틴의 속에서는 시시각각 새로운 ‘왜’가 거품 방울처럼 피어올랐다.

왜 이브는 나를 속였을까.

번번이 잘라 내도 의구심은 새로이 싹텄다. 그 의구심은 하나의 충동이 되어 하녀를 제 침실까지 들이게 만들었다. 이윽고 리브가에 관한 정보가 그의 앞에 대령된 오늘, 발렌틴은 세균처럼 번식하는 모든 의문을 확실히 끊어 냈다. 한 치의 머뭇거림 없는 단념에는 현실을 제대로 마주한 그의 냉담함만이 자리했다.

이제 와 ‘왜’가 무슨 상관인가.

의도가 어쨌든 발렌틴은 그 여자에게 단단히 속았으며, 더불어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반병신이 되었는데. 저를 그렇게 만든 범인이 그 여자아이이자, 제 눈앞에 나타난 하녀인데.

“이곳에 근무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가족처럼 지내는 노인이 한 명 있는데, 친조부가 아닌 모양이야. 혹시 몰라 제이미에게 확인해 보니 네가 붙잡혔던 슬럼가에서 주로 치료를 맡아 주던 의사라더군.”

조사 중 제이미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줄 단서를 발견했다. 그녀가 함께 지내는 노인이 바로 슬럼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제이미의 증언은 갈수록 신빙성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하녀는 여전히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모호하고 아리송한 리브가.

이러면 신뢰가 향할 방향은 확고하지 않겠나.

“어쩌려고 그래?”

짧은 보고를 마친 퀄린이 눈을 굴리며 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미약한 불안감은 여지없이 표출됐다. 또 이 망나니가 무슨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는 건 아닐까 단단히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발렌틴은 그의 불안을 가벼이 무시하며 테이블 위 서류를 바라보았다.

빈궁한 삶을 표하듯 단 한 장으로 정리되는 삶이었다. 그 안에 슬럼가와 관련된 정보는 아무리 눈을 비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의 시절은 전부 세탁한 뒤 올바르고 건전하게 삶을 연명해 온 척이라도 하듯.

그게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남은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고서 저는 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는 듯 평범하게 사는 꼴이.

“나를 실컷 가지고 놀았으니, 나도 그 정도는 해 줘야 공평하지.”

발렌틴은 그 불쾌한 마음을 담아, 리브가의 이름 위에 시가 필러를 꾹 눌렀다. 종이가 살짝 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름이 재로 얼룩져 까맣게 물들었다.

과거에 풀지 못하여 해묵은 채 잠긴 분노와 원한이 용솟음치듯 피어올라 한 곳으로 집결되었다. 그 대상은 우습게도 저를 유일하게 챙겨 준 여자아이였다. 정확히는 저를 챙겨 주는 척 농락했다고 표현해야 옳을.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유일무이 제 편이라 믿었던 이가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저를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러고 보니 나는 대체 무얼 근거로 그 여자아이를 그렇게나 믿었던 걸까.

<나는 네 편이야, 발렌틴.>

<내가, 내가 널 구해 줄게. 꼭.>

눈이 가려진 제 귀에 대고 매일 그딴 식의 속살거림을 욱여넣었으니까.

같잖게.

그것이 단순히 그곳에서 나고 자란 여자아이의 별것 아닌 유희거리인 줄도 모르고 저는 철석같이 믿어 버렸다. 그래, 그게 한낱 유희거리였으니 이렇게 시간이 흐른 현재, 제 앞에 뻔뻔히 모습을 드러낸 것 아니겠는가.

얼굴 한번 보지 못했으니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게 자명하다는 아둔한 확신 하나 가지고.

상념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혹한에 놓인 양 끝없이 서늘해져만 간다. 목덜미가 후끈한 게 상처에 바른 연고 때문인지, 아침에 스친 그 하녀의 손길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게 고통인지 분노인지 구별하는 것 역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로 얼룩덜룩해진 부분을 눈에 담으며 발렌틴이 지시했다.

“초대장을 준비해.”

“초대장?”

“슬슬 모임을 재개해야 하니.”

발렌틴이 일컫는 것이 예의 ‘사교 모임’임을 깨닫고 퀄린의 낯빛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입술만 달싹거리던 퀄린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로 물었다.

“너, 정말 여기로 불러들일 생각이야?”

“이미 많이 지체됐어. 이 이상 늦어지다가는 미쳐 버리고 말걸.”

“미쳐 버리다니…….”

발렌틴은 경악에 잠긴 퀄린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퀄린이 구해 온 서류가 들려 있었다. 햇살이 찬란하게 투과하는 창 앞으로 가 서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하지만 막상 까보면 그 속내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할 터였다.

외설적이고 적나라한.

발렌틴이 품고 있는 욕망은 그러했다. 그토록 너저분하고도 천박한 인상밖에 주지 못했다.

“내가 아니라 그 녀석들이 말이야.”

귀족이란 이름을 뒤집어쓴 저열한 수도의 약쟁이들.

지시를 마치고 고개를 숙인 그의 눈길이 서류 어딘가에 지그시 꽂혔다. 바로, 리브가와 가족처럼 지내는 노인이 짙어진 병세로 인하여 몸져누워 있다는 대목이었다.

* * *

“네?”

리브가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00루벨로 올랐다고.”

“그게 무슨…….”

2주에 한 번.

리브가는 할아버지, 헤널드의 약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의 진료소를 찾은 참이었다. 미리 준비된 약값을 치르려는데 의사가 대뜸 꺼내는 가격이 심상치 않았다.

“지난달만 해도 20루벨이었잖아요.”

그 가격이 느닷없이 다섯 배나 오른 까닭이었다. 가파른 상승세는 폭리라 이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변화였다. 외알 안경을 까딱이며 의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듯 동요 하나 없이 대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됐네.”

“무슨 상황이요?”

“리브가 양이 부탁하는 그 약의 약초가 희한하게 척박한 환경에서만 자라나는 건데, 그래서 이쪽 영지에서는 재배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 그나마 북부 지방에서 건너오는 상단들을 통해서나 얻을 수 있는 거였어. 여기까지는 이전에 한 번 말해 줬으니 리브가 양도 잘 알고 있을 테고.”

잘 알다마다.

그러한 이유로 매달 눈물을 머금고서 20루벨이라는 거금을 치르지 않았던가. 한 달 봉급으로 36루벨을 받는 리브가에게 약값은 허황하다 여겨질 만큼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반하고도 조금 더 내야 하는 셈이니까. 그걸 탈탈 털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것도 얼마 없었다. 그럼에도 순전히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꼬박꼬박 제값을 치르고 구해 온 약이었다.

“한데 이번에 무슨 영문인지 북부 지방 상단과의 교류가 끊겼어. 한동안 첼레스테 제국으로 경유할 예정이 없다더군.”

“그럼…….”

“그나마 이곳 영지에 들르는 상단 여기저기에서 약초를 얻어 내긴 했는데 북부의 상단이 가져오는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지……. 더군다나 알잖아. 이 바닥은 부르는 게 값이고 상인들은 어떻게든 돈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된 거. 가뜩이나 희소성 있는데 찾는 이도 있으니 값을 부쩍 올렸어.”

그리하여 정해진 게 100루벨이라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100루벨이라니…….”

그 돈의 현실성이 와닿지 않아 황당함을 넘어 허망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한두 푼 올랐으면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라도 냈겠으나, 정도가 어느 기대치를 훅 벗어나니 흥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흥정할 수준이나 되나? 100루벨을 깎고 또 깎는다고 이전 값인 20루벨에 가까워지는 건 매우 요원한 일로 보였다.

“리브가 양이 매달 꼬박꼬박 돈 지불하는 건 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네.”

의사는 아마도 영지 내의 진료소 모두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덧붙였다. 다른 곳을 찾아가 봐야 별반 다르지 않은 형편일 거라는 뜻이다.

그나마 다른 진료소보다 이곳이 5루벨은 싸게 쳐주어서 이곳과 주 거래를 했던 것이니 다른 곳이 나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쪽 의사가 그녀의 사정을 잘 아니 아량을 베풀어 100루벨로 맞춰 준 걸지도 모르고…….

깊어지는 생각 뒤로 암담함만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저, 지금은 그걸 지불할 돈도…….”

“나도 갑작스럽게 전한 거니 이번엔 특별히 30루벨에 쳐줄게. 다음부터는 통보한 가격대로 받을 테니까.”

고마우면서도 암울하기만 한 호의였다. 원래도 수중에 별로 남는 돈이 없는데 오늘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일단 오늘 치의 몫은 마련했다는 데에 안도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당장 2주 후의 약값은 어떡하지? 줄줄이 이어 붙는 염려를 잘라 내지도 못하고 리브가는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언덕길을 올라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치고서야 허름한 오두막집이 하나 나왔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서니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노인이 잠든 것을 확인한 리브가는 남은 돈을 털어 사 온 식재료를 꺼냈다. 장을 갈 때마다 마주친 덕에 제법 친분이 있는 야채 가게 상인이 감자를 싼값에 내어 주었다. 노인, 헤널드가 잠에서 깬 건 감자가 푹 졸아들어 수프의 형태로 바뀌어 갈 무렵이었다.

“할아버지, 일어나셨어요?”

리브가는 그가 일어나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것을 도와주었다. 약 1년 전부터 그는 운신에 영향을 받을 만큼 몸 상태가 악화되었다. 슬럼가에서 함께 빠져나온 후 다른 영지로라도 이동을 할까 했으나, 그게 실패로 돌아간 건 헤널드의 지병 때문이었다. 별안간 가슴팍을 움켜쥐며 쓰러진 게 발단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나이도 나이거니와 좋지 않게 흡입한 가루가 폐에 쌓이고 그것이 기관지에 영향을 주어 발생한 병이라고 하였다. 슬럼가에 즐비했던 저급한 약 가루의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약 드셔야죠.”

헤널드는 2주에 한 번 만날 때마다 부쩍 기력이 쇠하는 게 느껴졌다. 리브가는 그를 성심성의껏 보살피며 식사를 도운 후 의사에게서 건네받은 약을 챙겨 왔다. 듬뿍 뜬 수프를 반도 넘기지 못한 헤널드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콜록, 잔기침을 한 그가 이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리 어두워.”

노인은 여전히 어릴 적의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그녀의 낯빛이 평소보다 좋지 않은 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어렸을 적부터 돌봐 온 까닭인지 헤널드는 손녀처럼 어린 그녀를 곧잘 꿰뚫어 보고는 했다. 뭣 모를 때에는 제 근심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였으나 리브가도 점점 머리가 자라며 감정을 숨기는 법과 때를 배웠다. 그녀는 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할아비에게까지 숨기려고?”

“……음, 별일 아니에요. 외출하기 전에 친구와 작은 다툼이 있었거든요.”

거짓말이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도는 없었다. 약값이 터무니없이 올라 당장 2주 후부터 걱정이라는 말을 헤널드 앞에서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헤널드는 그것이 거짓임을 간파한 눈치였으나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쓰디쓴 약을 간신히 삼켜 낸 노인이 말했다.

“이브, 너도 그새 참 많이 컸어.”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리브가가 작게 웃었다.

“그럼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슬럼가, 빛줄기 하나 드나들기 힘든 어두컴컴한 장소에서부터 연을 쌓아 온 둘이었다. 그 기간은 족히 십여 년을 넘었다. 노인이 쇠한 만큼 그에 비례하여 리브가가 성장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미안하구나.”

크고 따스한 손이 리브가의 손등을 덮었다.

“내가 네 젊은 날의 큰 짐이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요즈음 부쩍 그의 사과가 늘었다. 그게 꼭 금방이라도 떠나갈 자가 남기는 안쓰러움 같아서 늘 마음이 헛헛해졌다.

리브가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받은 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거잖아요. 할아버지가 곁에 안 계셨다면 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리브가는 아직도 상처가 난 제 환부를 살펴 주던 헤널드의 손길을 또렷이 기억했다.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기억일 터다. 그는 리브가의 생에 처음으로 겪어 본 따스함이었고, 그리도 바라던 가족의 온기였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은인과 같았다.

리브가가 슬럼가에서 빠져나가고자 한 계기가 된 게 발렌틴이었다면, 그 전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헤널드였다. 단순한 생활을 일컫는 게 아닌, 살아 숨 쉬며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빠져나오고서도 그가 일찍이 훔쳐 둔 돈과 보석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처지가 됐을 것이다. 그때 리브가는 어려서 돈을 버는 방법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리 작았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성숙해졌는지 모르겠구나.”

헤널드는 다정한 손길로 리브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부디 염려를 거둘 수 있도록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그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협소한 공간에 미약한 숨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리기 시작하고서야 리브가는 차츰 민낯을 드러냈다. 차마 헤널드 앞에서는 드러내지 못한 걱정의 기색이 짙었다.

헤널드를 탓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친부가 만든 열악한 환경에서 해를 입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런 마당에 그렇게나 저를 아껴 주었으니 지금 리브가가 갚는 은혜는 매우 정당한 책임감이었다.

리브가가 걱정스러워하는 건 단지 다음에 치러야 할 약값이었다.

다른 하녀들의 처지가 저와 고만고만한 걸 생각하면 빌리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한두 푼도 아니고 봉급에 세 배는 되는 돈이지 않나. 더군다나 단발성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계속…….

불현듯 볼가를 콕 찔렀던 손길이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그의 피부를 어루만지게 되었던 지난날의 아침. 리브가는 멍하니 볼가를 어루만졌다. 발렌틴이 찌른, 긴장하거나 웃을 때면 쏙 파이는 볼우물의 자리였다.

그 부분을 매만지고 있자니 당시 끼쳤던 오싹하면서도 찌릿하던 감각까지 덩달아 회상됐다. 리브가는 벌떡 일어나 오두막집을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차갑다. 잠시 후에야 바람이 차가운 게 아니라 제 얼굴이 달아올라 있음을 깨달았다.

‘주인님께…….’

일순 든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건 그녀였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주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하는지. 그가 저를 곁에 두는 건 아랫것으로서의 편리성과 용이함 때문일 텐데. 어쩌면 그가 일컬은 꽃내음 때문일지도 모르고. 무어가 됐든 현재로서 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썩 나쁘지 않은 편이라 자부했다. 그런 그에게 괜한 일로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돈이란 건 좋았던 사이마저 단번에 서먹하게 만들 만큼의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일례로 지난날 사정이 급할 때 동료이자 친구인 하녀들에게 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 몇몇이 보인 얼굴이 아직도 기억 속에 훤했다. 일말의 가련함과 난감함, 곤혹스러움.

그때만큼은 친구고 동료고 없이, 그저 돈을 빌리려는 자와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자의 관계였을 뿐이었다.

저를 보는 발렌틴의 표정이 그런 식으로 물드는 게 싫었다. 곤란함을 넘어 그에게서 동정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이기에 더더욱 저의 비천한 저변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휴우.”

리브가는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무어가 됐든 제 앞으로 부닥친 현실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한 발 떼기 벅찰 만큼 무거웠다.

* * *

“뭐? 그거 완전 사기꾼 아니야?”

케시가 경악에 잠겨 물었다. 원래도 카랑카랑한 음성이 훨씬 더 치솟아 하늘을 찔렀다. 혹여 저 밖에서 소란을 들은 하녀장이 찾아올까 봐 염려가 됐는지 그녀는 얼른 소리를 죽인 채 덧붙였다.

“아니, 100루벨이 무슨 뚝딱 하면 나오는 돈이람? 자그마치 우리 석 달치 봉급에 가깝잖아.”

“누가 아니래. 상황이 그렇다면서 어쩔 수 없다고만 하니까…….”

“다른 진료소는?”

“똑같아. 오히려 더 높여 부르는데도 있더라고.”

다 사기꾼 천지야, 천지.

케시는 세상이 돈에 미쳐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브가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에 어린 물기를 꼼꼼하게 닦았다. 이제 직업병이라도 생긴 건지 시름이 가득한 때에도 손은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찾아볼 수도 없잖아. 여기보다 높게 쳐주는 데도 없을 텐데.”

“그렇긴 해. 여기도 다른 일자리에 비해 충분히 높으니까…….”

“아, 봉급이 엄청 높은 게 하나 있기는 하지.”

“뭐?”

케시가 상체를 기울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창부.”

“…….”

“어느 정도는 예상했는데, 정말 돈 많이 받긴 하더라. 주인님 침실에 드나드는 걔네, 하룻밤에 받는 돈만 100루벨이래. 나 액수 듣고 입 떡 벌어졌잖아.”

뽀득뽀득. 윤기가 날 정도로 꼼꼼하게 수건질을 하던 리브가의 손이 멈칫했다.

“그거 진짜야?”

“그럼. 헤튼 경이 직접 말해 줬는걸.”

하룻밤에 100루벨.

리브가가 자그마치 세 달을 일해야 간신히 벌을 수 있는 돈을 그들은 단 하루면 벌었다. 하지만 그럴 만하단 생각이 곧장 따라붙었다.

제 몸을 타인에게 내어놓는 건 그 정도의 대가가 있어야지 각오가 설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그냥 내어 주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존엄과도 관련된, 성을 농락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간혹 손버릇 나쁜 손님을 만났다가 그 침실에서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는 창부도 있다고 전해 들었다.

예전, 슬럼가에서 겪었던 일상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서 거무튀튀한 성기를 빨아 대던 창부의 이목구비 어딘가에는 언제나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친부는 원체 손버릇이 나빴지만, 특히 약이나 술에 절어 있을 때는 힘 조절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부른 창부에게 치러지는 값은 그 폭력을 능히 감내해야만 얻을 수 있는 돈이나 마찬가지일 터.

속된 말로, 노잣돈이 따로 없었다.

“목숨값일 수도…….”

“하긴. 그 일이 좀 위험하기는 하지.”

“쉬운 일은 명백히 아니잖아.”

너도 그걸 아니까 그런 쪽으로는 안 갔던 거고.

리브가의 덧붙임에 케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오는 남자를 조금도 막지 않는 케시는 섹스를, 그로부터 오는 순도 높은 쾌락을 즐겼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궁할 때조차도 결코 그런 쪽의 일감을 잡으려 한 적은 없었다.

단순히 몸뚱어리를 내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정신과 본능이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걸 잘 알기에, 리브가는 저를 닮은 창부를 만나는 아침마다 가슴속에 고이는 껄끄러움을 피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일그러지고 부서진 후의 잔해를 보는 것 같으니까. 아주 내밀하고 퇴폐적인 인간 밑바닥의 내면을.

“헉, 주, 주인님?”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케시가 별안간 아연해졌다. 리브가는 덩달아 숨을 멈춘 채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인적이 드문 주방의 골방 너머, 발렌틴이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리브가는 당황하여 저와 케시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차가 마시고 싶은데.”

여기까지 귀한 몸을 이끌고 왔다기엔 다소 빈약한 이유였다.

“호출을 하셨으면 저희가 갔을 텐데요.”

“줄을 잡아당겼는데 아무도 오지 않더군.”

“네? 아……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제가 얼른 챙겨 응접실로 가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발렌틴은 등을 돌렸다. 리브가는 손에 묻은 물기를 얼른 에이프런에 닦으며 멀어지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쳐져 빛이 드나들지 않는 응접실이나 침실과 달리, 주방은 환기를 위해 사방에 창이 나 있었다. 그 창을 투과하는 말간 빛에 그의 외모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주방에 등장한 주인을 보고 얼마 없는 주방 하녀들이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리브가의 마음속 어딘가가 술렁거렸다. 질투심은 예고도 없이 피어올랐다.

“주인님께서 줄을 잡아당기셨다는데 왜 아무도 몰랐어?”

그가 직접 이곳으로 걸음 하게 만든 원흉을 찾아 꼬집자 하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줄을 잡아당기셨다고? 그럴 리가. 벨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그녀는 진정 억울한 낯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그 하녀를 믿어 주는 이는 없었고 그녀는 졸지에 근무 태만자가 되었다.

조금 전, 제가 닦아 넣어 둔 찻잔을 다시 꺼내는 리브가의 옆에서 케시가 중얼거렸다.

“근데 주인님, 언제부터 저기 계셨던 거지?”

리브가도 마찬가지로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급한 게 아니므로 가분히 넘겼다. 발렌틴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하는 걸음이 다소 분주했다.

* * *

케시의 호기심은 때아닌 곳에서 해결이 되었다.

“돈이 필요해?”

차를 내리는 리브가를 물끄럼 응시하던 발렌틴이 대뜸 물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서 리브가의 손이 순간 삐끗했다. 다행히 찻물이 넘치지는 않았다.

“그걸 주인님께서…….”

어떻게 아시느냐고 물으려고 했다. 어벙한 표정으로 반응하던 리브가는 곧 입을 다물었다. 질문을 더 이어 갈 것도 없었다. 종전 골방 문가에 기대선 발렌틴의 예리한 눈빛이 떠올랐다. 케시와 나눈 대화를 전부 들으셨구나.

“이곳에서 받는 봉급이 부족한가?”

“아뇨, 아닙니다. 전혀 부족하지 않아요.”

이 저택 사용인들에게 주어지는 보수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누누이 인지하는 대로, 여타의 직종보다 높은 편이었다. 이 마을 곳곳에서 어떠한 일을 한대도 달에 20루벨 이상을 꼬박꼬박 벌기는 힘들었으니까.

“그저 제 개인 사정 때문에…….”

리브가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주인이 자신의 사적인 문제에 이렇게나 관심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라리 다른 주제였다면 이토록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았으리라.

하필이면 그녀가 유난히 드러내기 싫어하는, 취약점과도 같은 금전 문제라서 더더욱 고개가 숙여졌다. 그럴싸한 외양으로 가려진, 변변찮고 보잘것없는 밑바닥 인생이 강제적으로 까발려진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 비루한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제 입으로 털어놔야 하는 현 상황이 자꾸만 그 느낌을 부풀렸다.

다른 이었다면 적당히 말을 돌리면 되겠지만 주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아랫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무례한 질문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순종적으로 대답해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그가 제 개인사에 관하여 자연히 흥미를 잃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눈치를 살피다가 아직 채워지다 만 차를 다시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가만 지켜보던 발렌틴이 재차 입을 연 건 찻잔이 다 채워진 후였다.

“밤 시중까지 들겠나?”

이번엔 티팟을 미리 내려 둬서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대로 놓쳐 버렸을지도 몰라서.

“……네?”

사람을 놀라게 한 주제에, 주인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밤 시중 말이야.”

“어, 저…….”

“수도에서 자주 모이던 무리가 있는데, 조만간 이곳으로 내려올 예정이라서 일손이 필요할 것 같거든.”

정물처럼 굳어 버린 리브가를 앞에 두고 발렌틴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가를 재떨이에 지져 껐다. 그 위로 흩뿌려진 지저분한 흔적을 담던 그의 시선이 차츰 이동했다. 재로 물든 양 거뭇하던 호박빛 눈동자는 이내 리브가로 가득 찼다.

리브가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주인님 말이야, 어마어마한 약쟁이래.>

<그럼 설마 우리 퇴근 시간이 앞당겨진 것도 그런 이유인가?>

<혹시라도 우리 같은 하인들에게 약 하는 걸 보이지 않기 위해?>

<그거겠지, 뭐겠어.>

나름대로의 추측만 남겨진, 제한된 밤의 시간.

발렌틴은 금단의 구역과도 같았던 침실로 모자라 이제는 이슥한 밤까지 그녀를 선뜻 제 선 안으로 들이려고 했다.

이쯤 되면 원초적인 본능이 폭발적으로 일 수밖에 없었다.

“저를…… 왜요?”

“맘에 들어서.”

그는 별것인 말을 별것 아닌 양 말했다.

리브가는 무릎 위에 얌전히 놓아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제가 마음에 담아 둔 사내가 저런 말을 하는데 가슴이 떨리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고로 지금 드는 긴장은 정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브가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맘에 든다’의 의미가 제가 품은 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조심스러워. 크게 거슬리는 것이 없어.”

“…….”

“그래서 마음에 드는군.”

그것 봐.

리브가는 ‘무엇이요?’ 하고 튀어 나갈 뻔한 말을 어떻게든 참아 내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하녀로서 적당히 거리를 지키고 매사 조심스럽게 구는 제가 흡족스러운 것뿐인데. 저와 같은 색깔의 감정이 아닌데. 지레 앞서 나갔다가 괜히 민망함만 살 뻔했다.

“보수는 섭섭지 않게 챙겨 주도록 하지.”

놀랍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는 제안이었다.

하녀들이 피운 밤중의 이야기꽃이 아직도 그녀의 속에 차가운 비수의 형태로 박혀 있었다. 지난날 그에게 마약을 먹인 주범으로서 그가 정말 케시의 말처럼 ‘약쟁이’가 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반면, 또 어느 구석에서는 그 모습이 사실이라면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제 맘이 제 맘 같지 않게 느껴질 만큼 양가적이며 복잡했다.

하지만 늘 그러했듯 수족되는 입장으로서 그의 지시를 거절한 명분 따위 없었다.

더군다나 기본 봉급에 보수를 더 얹어 준다는데, 당장 돈이 궁한 리브가가 그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지금 주인의 행동은 굶주린 동물 앞에서 먹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저보다는, 집사님이나 하녀장께서 더 잘하시지 않을까요.”

“그네들은 불편해.”

그들과 달리 나 같은 일개 하녀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괜찮다는 건가.

리브가는 그의 한마디에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이럴수록 저만 그의 발치에 엎드리게 될 패자가 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랑은 그 맘의 주인이라고 하여 뾰족한 수가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심장 속에서 발아하여 속을 쥐락펴락하는 불가항력이 아니던가.

“생각…… 해 보겠습니다.”

그렇기에 꺼림칙하면서도 단번에 쳐 내지 못했다. 제멋대로에 가까운 감정은 기꺼이 그의 선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고 속삭인다. 넘고, 또 넘고, 또 넘어서 그의 심장 속까지 기어들어 가기를 바란다. 이 기세라면 그 속이 불구덩이라도 기꺼이 뛰어들 것만 같았다.

리브가는 진정 제 사랑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 *

그럴 위치조차 안 되니 당연히 착각이겠지만, 리브가는 저와 발렌틴이 일종의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처음 제안을 건넨 이후 다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은연중의 분위기로 제안이 유효하다는 느낌을 풍겼다.

주인이 처음으로 밤 시중을 입에 올린 날의 저녁, 꽤 많은 마차가 저택을 찾았다. 수도의 많은 귀족 자제들이 이 너른 공작령에 당도했다. 주인이 여는 사교 모임의 초대라고 하였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하나같이 휘황찬란했다. 이곳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고아함과 기품이 겉으로 드러나다 못해 넘쳐흘렀다. 발렌틴을 능가할 만큼의 미남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마을 출신으로서 쉬이 접할 수 없는 고귀한 영식들의 등장에 하녀들의 눈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리브가의 신경을 건드린 건 웬 영애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높은 자리에서 태어나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왔을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발렌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가까이 서서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이 한 쌍의 연인처럼 잘 어우러졌다. 그를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던 하녀들에게 치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질투가 샘솟았다.

여인과 발렌틴이 붙어 있던 순간은 아주 잠시였지만, 효과는 거대했다.

수도의 귀족들이 도착한 지 사흘째.

당기는 발렌틴에게서 버텨 내는 리브가의 인내심은 고작 사흘짜리였다. 왜냐하면 사흘째 아침에 내내 그녀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던 귀족 영애가 주인의 침대에서 나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침대에서 여자가 나오는 건 한두 번 목격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창부인 것과 귀족 영애인 것은 몹시도 다른 일이었다.

귀족 영애는 주인과 나란한 선상에 있는 존재였다. 창부처럼 돈을 받고 그의 침대에 올라서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권력은, 만약 주인에게 사심이 생길 시 그 사심을 채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테면 같은 귀족으로서 결혼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가정이 그녀의 기분을 순식간에 시궁창에 처박았다. 아침 일찍 그 장면을 본 후로 리브가는 온종일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멀쩡한 잔을 깨뜨리거나 물건을 엉뚱한 곳에 놓는 등 평소에는 하지도 않았을 잔실수가 잦았다. 하루 종일 상태가 저조했다.

그 사흘째의 밤.

일찍 퇴근하고 숙소로 돌아온 이후에도 좀처럼 번민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리브가는 결국,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

다른 하녀의 방에 다녀온 케시는 퇴근을 했음에도 다시 하녀복을 차려입는 리브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먼저 자, 케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서 두루뭉술하게 읊조린 리브가는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왔다.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혹 지금 아름다운 영애와 그보다 더 아름다운 제 주인이 몸을 섞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투기심에 기반을 둔 염려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밤 시중을 들겠다고 들어갔다가 그 장면을 보게 되면 어쩌지. 그럼, 그러면…….

어찌해야겠단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 채 본관에 도착했다.

사용인 하나 없는 복도는 빈 고성(古城)처럼 써늘했다. 기척이라고는 벽에 걸린 등불이 전부였다. 리브가는 저도 모르게 걸음 소리를 죽인 채로 주방에 먼저 들렀다. 명색이 시중을 들러 간 입장인데 빈손인 게 무안하고 겸연쩍은 이유에서였다.

찻잔을 챙기던 리브가는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 든 건 찬장 저 안쪽에 놓인 술이었다. 고민 끝에 그것과 투명한 크리스털 잔을 챙겼다.

이윽고 매일 아침에만 향하던 주인의 침실 앞에 도달했다. 안쪽에서 부유스름한 빛이 스며 나왔다. 왠지 모를 희한한 열기도. 리브가는 심장이 꽉 조여드는 걸 느끼며 노크했다.

이후, 금제를 깨고 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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