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6)

3장

<솔직히 생존자가 발견돼서 놀란 건 나였어. 아니, 애초에 생존자라고 봐야 할지도 잘……. 그곳에서 한동안 허드렛일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화재가 나기 전에 말이야. 그래도 네가 납치를 당했을 때와 시기가 맞물리니 의문을 해결해 줄 가능성이 크지.>

퀄린에게 지시를 내린 지 일주일 만이었다.

발렌틴도, 그리고 막막해하던 퀄린조차도 그 실마리가 이렇게나 빨리 발견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을은 재로만 남은 슬럼가 주변을 서성거리던 이를 기사들이 아주 운 좋게 발견했고 찾는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여 곧장 끌고 온 것이다.

퀄린이 정정한 대로 녀석은 화재 사건의 생존자는 아니었다. 불이 나기 전에 슬럼가를 빠져나간 행운아나 마찬가지였다.

별관으로 이동한 발렌틴은 빛줄기가 약한 응접실로 들어섰다.

“으읍, 읍……!”

다짜고짜 이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끌려온 사내, 제이미는 준수한 미남자의 등장에 발버둥을 쳤다. 발렌틴은 준비된 의자에 앉아 침에 번들번들하게 젖은 재갈을 가만히 응시했다. 뒤에 선 퀄린이 상체를 기울여 물었다.

“저거 풀까?”

“그럼 저게 저딴 식으로 난리 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고?”

그냥 그러라고 하면 될 것을, 참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말솜씨였다. 퀄린은 멋쩍은 표정을 한 채 기사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저, 저는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전 그냥 잡일이나 하는 말단 중에 말단이었단 말입니다!”

제이미는 재갈이 풀리자마자 참고 있었던 것처럼 조급한 변명을 와다다 쏟아 냈다.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발렌틴은 느릿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단지 쳐다보는 것뿐임에도 희한한 중압감이 스며 나와 제이미의 심신을 기도 못 펴게 짓눌렀다.

“내가 누군지 알겠나?”

“이, 이곳이 로트링겐 저택이라고 하기에…….”

그것만으로도 발렌틴은 그가 당시의 납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제가 찾던 인물로서 딱인 조건이었다. 그는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제이미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내부에 감도는 스산한 공기와 퍽 어울리는 그것은 다름 아닌 총이었다.

“이름이 뭐지?”

“……제, 이미라고 합니다.”

“그래, 제이미. 지금부터 내가 이것에 손대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 혓바닥을 똑바로 놀리는 게 좋을 거다.”

“또, 똑바로라는 건…….”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한 치의 거짓 없이.”

총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으나 제이미는 그것이 벌써 제게 겨누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는 과거의 그때, 그곳에 왜 있었던 거지?”

“나, 납치를 당했거든요.”

“납치라고?”

“예…….”

발렌틴의 금안이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꼼꼼히 헤아려 볼 필요도 없이 남루한 행색이었다.

“평민인 너를? 왜지?”

발렌틴의 의문을 눈치챈 듯 그의 어깨 너머에 선 퀄린이 대신 물었다. 제이미는 마른침을 삼킨 후 얼른 답했다.

“제가 그때 어, 어린 마음에 가출을 했는데 갈 곳이 없어 빈민촌을 전전하고 있었는데요. 슬럼가에서는 간혹 저같이 출신이 분명하지 않은 애들을 데려다가 잡일꾼으로 삼고는 했어요. 거기도 굴러가려면 일손이 필요할 테니까요.”

순간 발렌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나, 나도 여기 납치당해 온 거라 힘이 없어. 네 눈을 가린 천을 풀어 줬다가는 내가 크게 야단을 맞을 거야.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 미안…….>

아버지가 저를 버렸다는 좌절에 물씬 잠겼을 때 저를 달래 주던 여자아이에게 처음으로 윽박을 질렀다. 당장 이걸 풀라고, 풀어 달라고, 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그때 그 아이는 잔뜩 풀이 죽어서 저런 변명을 주절주절 꺼내 놓았었다.

그 아이와 관련된 회상을 한 겹 한 겹 떠올릴 때마다 발렌틴은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중독 증상에 빠진 이후 그는 치명적인 결함이 생긴 것처럼 기억력이 급속도로 퇴화했다. 가끔은 저와 밤새도록 한 침대에서 뒹군 여자를 다음 날 못 알아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아이와의 기억은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고통에 버둥질을 치는 와중에도, 고통을 지나 쾌락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에서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져 인생이 무상해진 지금도.

“너 말고 그렇게 납치된 애들이 더 있었나?”

“예. 조, 좀 많았습니다. 그 슬럼가 우두머리가 마약상 중에 꽤 큰 손이라고 했었나…… 그래서 그쪽 바닥에서 밀매업을 크게 유통했었거든요. 조직의 크기가 상당했어요. 그것 때문에 자잘하게 심부름 시킬 일도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너처럼 납치된 애들끼리 마주친 적은 있고?”

“많은…… 편이었죠. 아무래도 그 안에서 함께 지냈으니까.”

발렌틴은 그 답을 듣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제이미의 눈길이 그 행동을 따라 어벙하게 상승했다.

“지금부터 누굴 보게 될 건데.”

“…….”

“네가 그곳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

그리 말한 후 총을 품에 챙겨 갈무리하는 몸짓은 대단히도 정갈했다. 제이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사의 무력에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 * *

사실 발렌틴은 결연하게 끌고 온 것치고는 크게 기대가 없었다. 저를 보자마자 덜덜 떠는 제이미의 안목에 대한 신뢰가 없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시간이 많이 경과했음을 무시할 수 없던 까닭이었다.

설령 제이미가 자신은 모르는 그 아이의 ‘얼굴’을 안다고 해도, 흐른 세월과 함께 그 이목구비가 많이 변했으면? 못 알아보고도 충분히 남을 일이었다.

“어?”

그래서 발렌틴은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축원경으로 아래를 살펴보던 제이미가 의아한 소리를 냈을 때 기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꺾여 들어와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집무실 안쪽. 창가에 서 있던 제이미는 제 눈이 의심스러운 것처럼 축원경과 맨시야를 연신 번갈아 살폈다.

풍경 너머에는 젖은 빨래를 빨랫줄에 너는 하녀 무리가 있었다. 발렌틴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던 하녀, 리브가도 개중 섞여 있었다.

“본 적 있는 얼굴인데. 분명, 분명 이름이…….”

“이브.”

“아, 맞아요!”

테이블에 걸터앉은 발렌틴이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이름을 대신 꺼내 주었다. 덥석 무는 태도는 그것 외엔 답이 없다는 양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제이미는 그 확신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다시금 축원경에 눈을 바짝 가져다 댔다.

“와, 쟤……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 컸네.”

제이미는 제 세상에 갇히기라도 했는지 감탄 섞인 혼잣말을 했다. 발렌틴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제이미에게 빤한 시선을 던졌다. 오싹한 시선의 행방을 눈치챘는지 그는 얼른 축원경을 내리고 바짝 경직된 몸짓을 해 보였다.

“그, 그래서 확인하라고 하셨던 건…….”

“저 여자가 이브가 맞나?”

“예? 예. 제가 기억하기로는요. 거리가 좀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데 눈 밑에 점이 하나 있고, 오른쪽만 패는 볼우물이 있다면 확실할 겁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발렌틴이 잘 알고 있었다.

손목을 콱 비틀어 쥐었을 때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으니까.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밑에는 핥아 보고 싶은 눈물점이 박혀 있었고, 당황했는지 경직된 오른쪽에는 찔러 보고 싶은 볼우물이 깊게 패었었다.

그러니까…… 맞다고.

자신의 기억 속 여자애가 맞다고.

발렌틴이 기억하던 그 목소리와 그 향의 주인공이 맞다고.

그 사실을 느릿느릿 곱씹는 발렌틴은 곧 가슴 안쪽에서 미약하게 퍼지는 진동을 느꼈다. 잔잔한 수면 위에 커다란 바위가 풍덩 던져진 듯했다. 진동이란 그 수면으로부터 이는 파동과도 같았다. 부단히도 이상하고 또 생소한 감각에 그는 어색하게 가슴께를 문질렀다.

무슨 기분이지, 이게.

‘아.’

그는 한 박자 후에야 그것을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 ‘이브’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처럼 납치를 당하여 그곳에 갇힌 주제에 자신을 챙겨 주지 못해 안달 내던 그 맹목적인 여자아이를. 자신이 울면 제가 더 어쩔 줄 몰라 하고 자신이 웃으면 덩달아 푸흐, 하고 웃던…….

“한데 이브가 살아 있을 줄은…… 분명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발렌틴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그 여자아이는 활활 타오르던 화마에 꼴깍 삼켜져 여지없이 황혼을 건너갔으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제 귓전에서 떠나가지 않는 음성을 매번 망령의 것이라고, 덧없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그는 화재가 나기 전, 제이미가 간신히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퀄린의 정보를 떠올렸다.

“넌 그곳에 불이 날 줄 알고 있었나?”

“예? 아니요. 설마요.”

“그럼 어떻게 알고 거기서 달아난 거지?”

“어떻게 알았느냐기보다는 타이밍이…… 좋았습니다. 불이 나기 며칠 전에 납치당한 아이들끼리 힘을 합쳐서 도망쳤거든요. 그렇게 지내다 가는 그곳에서 영영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납치당한 아이들끼리……?”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에 발렌틴의 이마에 깊은 굴곡이 새겨졌다. 이윽고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브는?”

“네? 이브요?”

“왜 너희와 함께 도망치지 않았지?”

함께 납치를 당한 입장인데 어찌하여 그녀는 도주에 동행하지 않고 그 암울한 곳에 남아 있었던 걸까.

발렌틴의 질문에 제이미는 처음으로 벙찐 표정을 지었다. 묘한 정적이 집무실 가운데로 내리꽂혔다. 한참이나 당혹스레 눈을 끔벅거리던 제이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야…… 이브는 저희와 달랐으니까요.”

“다르다니?”

“이브는 납치당한 아이가 아니었는데요.”

“…….”

“쟤는 마약상의 딸이었습니다. 저희처럼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 그 집단과 한패나 마찬가지인 아이였으니 당연히…….”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평온하게 부유하던 공기가 사정없이 비틀리듯 귓가로 잠시 삐걱거리는 이명이 일었다.

납치당한 아이가 아니었는데요, 쟤는 마약상의 딸이었습니다. 집단의 한패나 마찬가지인……. 제이미가 대수롭지 않게 꺼낸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머리통 깊숙이 처박혀 골수를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그는 창밖을 흘긋 내다보았다. 어둠에 잠식된 이곳과 달리 바깥에는 햇살이 필요 이상으로 세상을 밝혔다. 그 가운데, 빨래를 널며 웃는 낯이 해사하고 말갛다.

어쩐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체감하며 발렌틴은 품속으로 느릿느릿 손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이윽고 제이미는 허옇게 질려 더듬더듬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퇴로가 벽에 가로막히자 얼른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발렌틴의 서늘한 총구는 여전히 그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혀를.”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

“똑바로 놀리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한 치의 거짓 없이.

그가 총을 막 눈앞에 꺼내 놓았을 때 일컬었던 조건이 제이미를 사색으로 만들었다. 그는 시퍼렇게 질린 낯이 되어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사실이에요. 정말 제가 알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이브는 내게 자신도 납치당하여 그곳에 있었던 거라 말했다.”

“예? 그게 무슨…… 제가 기억하기로 이브는 분명 마약상의 딸이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틀림없습니다! 쟤가 그 시, 식사 당번이었잖아요.”

식사 당번.

그 말에 발렌틴의 유려한 눈매가 꿈틀거렸다. 코앞까지 도래한 위협에 눈이 먼 제이미는 제가 아는 바를 정신없이 쏟아 냈다.

“쟤, 쟤가 식사에 매번 약을 탔거든요. 저를 포함해서 납치당한 아이들이 그곳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쟤, 이브, 쟤가 주는 식사에 든 약 때문에 다들 상태가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는 걸 깨달아서요. 밤에 잠도 안 자고 그 식사만 찾는 애들이 늘어 가고 이래서…….”

제이미는 조금만 긴장을 풀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두려웠다. 속에서 ‘젠장’이라는,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거친 말이 연신 메아리처럼 울렸다.

발렌틴에게 고한 말 중 거짓은 없었다. 갑자기 끌려왔으나 제이미는 현재 부닥친 상황이 절대로 가볍고 우습게 여겨도 되는 상황이 아님을 곧장 깨달았다.

자칫하다가는 목숨이 위협당할, 아주아주 위급한 상황이었다.

애당초 그는 억울했다. 아주 오랜만에 전소된 슬럼가 주변을 전전하다가 그것만으로 의심을 사 덜컥 잡혀 와 버렸으니.

어릴 적 그가 가출했던 이유는 구질구질한 가난 때문이었다. 그것에 신물이 나 도망갔다가 마약상의 아래에서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후에 그는 무어가 됐든 바르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상당히 늦게 납치가 되어 끌려갔고 그리하여 섭취한 약의 양도 적은 편이었다. 뒤탈은 있었으나 배앓이나 두통의 수준으로서 의지만 있다면 견디고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손 틈새의 모래처럼 쥘 틈 없이 흐른 시간 속에서 제이미의 인생 궤도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의 삶은 여전히 빈곤했고 구질구질했다. 그것이 지겹고 구차하다 여기던 도중, 슬럼가가 떠오른 건 문득이었다. 정확히는 잡일꾼 노릇을 하며 언뜻언뜻 보았던 돈다발이.

그때 제이미는 제 너절한 세상에선 보는 것조차 불가능할 목돈을 참 여러 번 구경했었다. 이브의 아버지가 유통시키던 마약이 호황을 이루어 얻어 낸 돈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약상과 그 수하들 사이에서 오가는 목돈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냥 그때의 생각이 나서 가 본 것이었다.

혹시나 다 타 버리고 남은 그 폐허에 돈다발 하나 떨어진 건 없을까 하고. 이미 화재가 난 지 수년이 흐른 상황인지라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참하리만치 구저분한 인생인지라 눈먼 희망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는 했다. 그걸 희망이라고 봐야 할지 절박함이라고 봐야 할지.

여하튼, 별안간 그리로 가고자 한 충동이 그에겐 자충수였고 발렌틴에게는 기회였다.

“……약을 타?”

길게 길게 이어지던 변명 중 발렌틴이 반응을 보인 건 바로 그 대목이었다. 제이미는 목이 떨어져 나가라 고개를 끄덕이며 “예, 예.” 하고 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렌틴은 이제야 자신이 어떤 경로로 약을 섭취하게 된 건지 깨달았다. 장님으로 살아온 두 달간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처음에는 납치를 당했다는 패닉으로, 다음으로는 약이 혈관 속으로 주입되며 심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게 전부 그때 먹었던 식사 때문이었나.

<이거 먹어야 해. 이거 먹어야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지.>

<배고파? 많이 배고프면 내가 어떻게든 더 얻어 올게.>

뚝뚝 잘린 기억 너머, 제 입가로 스푼을 내밀며 달래던 목소리가 고막을 살살 건드렸다. 발렌틴은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제 귓가를 퍽! 내려쳤다. 그의 앞에 꿇은 제이미는 물론이거니와 구석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퀄린까지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발렌틴은 그들의 반응일랑 신경 쓰지 않고 두어 번을 더 귓가를 후려친 후, 제가 든 총구를 응시했다.

주장이 완벽히 대립한다. 빨래터에서 해사한 얼굴로 빨랫감을 널고 있는, 아마도 기억 속의 여자아이일 하녀는 자신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저보다는 선명할 눈앞의 평민은, 여자가 마약상의 딸이며 애초부터 그들과 한패였노라 말한다.

거짓은 과연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일까.

간사하고 교활한 거짓말쟁이는 누굴까.

적어도.

적어도, 죽음의 위협을 앞에 둔 제이미는 아니리라는 추측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이미가 거짓을 고하는 건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 거짓을 고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이 약삭빠르며 절박한 평민은 그 점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는 낯짝이었다.

이자의 입에서 나오는 게 거짓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저 하녀는 이브가 맞으며, 과거에 ‘납치’를 당하여 끌려온 잡일꾼도 아니었다는 건데…….

“……데리고 나가.”

그가 총구를 치움으로써 안도의 숨을 내쉬던 제이미는 기사들에게 붙잡혀 집무실에서 끌려 나갔다.

“풀어 줘?”

“아니. 가둬 놔.”

나중에 다시 찾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퀄린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저조해진 듯한 발렌틴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반응을 그쳤다.

발렌틴은 등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하이얀 천을 넓게 편 하녀가 맞은편 동료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휘말았다. 거리가 상당히 먼데도, 볼 위로 길쭉하게 행적을 남기는 볼우물이 눈에 콱 박혀 들었다.

“……왜?”

왜 속였을까.

진정 마약상의 딸이 맞다면. 그러니까, 발렌틴을 납치했던 그 무리와 한패였던 거라면.

과연 그녀는 저를 챙기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모른다. 발렌틴은 그녀를 만나는 이래 언제나 눈이 가려진 장님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를 걱정해 주는 목소리와 달리 그 얼굴은 웃고 있었을지라도 그는 모른다. 배가 고프다는 제 입 속에 마약이 담긴 수프를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흥미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짐작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정말로 그녀가 주장하던 게 전부 거짓이라면.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거네.”

이유를 알 수 없던 호의가 농락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

결론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발렌틴은 천천히 시가를 꺼내물었다. 침실에 가득 쌓여 있을 하얀 가루를 그 끝에 덕지덕지 바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신경이 잘 벼린 날처럼 바짝바짝 올라섰다.

시가의 씁쓰름한 맛에도, 뒷골이 당길 정도로 언짢은 감각은 계속해서 솟구쳤다. 오래지 않아 그는 시가를 내렸다. 여느 때처럼 약이 필요하여 몸이 보내는 신호가 아니었다. 그보다 배는 거슬리는 뜨거운 감각이 단전에서부터 용솟음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날까?

그건 바로 분노였다. 제가 내린 정의와 그로 인하여 다다른 결론이 그의 속에 무더운 열기를 함빡 고이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노여움이 치미는 게 실로 오랜만이라 일견 생경하기까지 했다. 별것도 아닌 계집애였다. 보잘것없는 기억의 조각일 뿐이다. 화르르 타올라 잿더미가 되어 버린 슬럼가와 함께 가슴속에 묻어 버린 존재였는데. 그리하여 죽었다 여기며 잊고 살던 존재가 아니던가.

‘아니, 잊은 적이 있기는 한가.’

다음 순간 자조가 실소에 몸을 실은 채로 밀려왔다.

잊었다고 자부하기엔 그 목소리와 향을 그리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번 신경 쓰이자마자 한시도 빼놓지 않고 주의를 기울였으면서. 눈앞에 나타나는 족족 몰두했으면서.

저를 속였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놓고서.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무가치하고 쓸데없어졌으니 잘라 내는 게 나았다.

“조사해.”

“어?”

의아하게 되물은 퀄린이 움찔했다.

제게로 돌아오는 발렌틴의 동공이 전에 없이 흉흉했다. 늘 무료하거나 텅 빈 눈빛이었던지라 그 대비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실내는 빛도 잘 들어서지 않아 어두침침했다. 그러니 저 눈에 깃든 게 화창한 햇살일 리 없었다.

“저 계집에 대해서 전부 다 조사하라고.”

저건, 그럴듯한 안광의 탈을 쓴 광기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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