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2장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어둑한 실내에서 희미하게 스민 빛에 의지해 뒹굴던 게 제대로 습관이 들어 버린 모양인지 요즘은 강렬한 햇살이 이따금 거슬렸다.

간밤 술과 약에 절어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 신경은 후폭풍처럼 아침만 되면 예민하게 서고는 했다. 편두통이 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발렌틴은 환한 빛을 투과시키는 휘장의 틈새를 내다보았다.

로트링겐 영지.

그는 이곳이 진절머리가 났다. 그건 단순한 호불호를 떠나 그의 역린 같은 과거사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13세경.

무더운 여름날 영지로 내려온 그는 그만 납치를 당했다. 처음부터 공작가의 자제를 노리고 쥐새끼처럼 저택에 숨어든, 계획적인 범행이었다.

두 달간 온몸이 결박되고 눈마저 가려진 채 그는 그곳에서 그야말로 ‘사육’을 당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해야 했고 그것이 끝나면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기 벅찬 쾌락과 고통을 번갈아 겪어야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발렌틴의 몸과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처참한 상흔이 새겨졌다.

<미, 미안해.>

불현듯 생각나는 음성에 그는 미간을 움찔했다.

억지로 내리감았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들렸다. 섬세하게 공예된 보석 같은 금안으로 화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는 신경질을 부리듯 흐트러진 흑발을 거칠게 털었다. 곧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엉망으로 구겨진 침대 위를 가로질러 시가 하나를 붙잡았다. 그는 그것을 입에 물은 채 질겅질겅 씹어 댔다.

<풀어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미안…….>

발렌틴은 납치를 당했을 때의 기억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눈으로 목격하여 머릿속에 저장한 기억이 전무했다. 붙잡힌 순간부터 눈에 씐 천이 한 번도 걷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두 달간의 그는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천으로 하여금 발렌틴은 낮이건 밤이건 어두컴컴한 구렁에 처박혀 있는 듯한 폐쇄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폐쇄의 상태에서도 스며드는 한 줄기의 햇살은 존재했다.

지금, 휘장이 쳐진 침대 안으로 성큼 파고드는 눈부신 광채처럼.

납치를 당한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던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여자아이와 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거 풀어 줘.>

<미안해.>

<이것 좀 풀어줄 수 없을까.>

<미안해.>

부탁과 그에 대한 사죄. 쳇바퀴 돌듯 도통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화의 흐름이었다.

그래도 발렌틴은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희망이 산산이 박살 난 건 납치를 당한 지 2주 만이었다.

<제기랄! 이 미친 새끼야! 하필이면 사생아를 납치해 오면 어떡해?>

<예? 사생아요?>

<그래. 저 꼬맹이는 적자가 아니라 공작의 혼외 자식이라잖아!>

<아, 아니. 워낙 곱고 예쁘장하게 생겨서 저놈이 적통 후계인 줄 알았죠…….>

<젠장, 젠장, 젠장! 어쩐지 아무리 찔러도 공작가 측에서 반응이 없더라니. 저 꼬맹이 저거 아무래도 내놓은 자식 같단 말이야.>

<내놓은 자식이라뇨?>

<공작이 저놈을 구하려고 거액을 마련하느니 그냥 이대로 우리 쪽을 통해 묻어 버리려는 것 같다고.>

<예에? 설마요. 그래도 제 자식인데…….>

<귀족 놈들은 핏줄, 혈통, 그딴 쓸데없는 문제로 자기들이 종마처럼 여기저기 씨 뿌려 생긴 사생아를 마냥 흠집처럼 여기잖냐. 오히려 에라 잘됐다, 싶어서 우리한테 흠집 처리를 떠넘긴 거 아니냐고!>

<허어…….>

<아오, 이 기회로 인생 좀 펴나 했더니. 그러게, 새끼야! 잘 좀 살펴보고 데려왔어야지!>

<아니, 그럼 이제 저 꼬맹이는 어떡합니까?>

<아직은 공작의 꿍꿍이를 모르니 일단 데리고 있어야지. 그리고…… 해서…….>

저를 조형물처럼 근처에 두고 이리저리 지껄이던 말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눈은 가려져 있었고, 양손과 발은 노끈에 결박된 채지만 귀는 멀쩡했다. 그래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발렌틴은 그 대화를 모조리 들어 버렸다.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부.

이제껏 가려진 시야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까맣게 물들었다. 마음 또한 비스무리한 색깔의 절망으로 거뭇하게 타올랐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정말로 나를 버리려 한단 말인가?

내가 사생아라서? 저를 이유로 이 구질구질한 납치범들에게 돈을 뜯기기 싫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제 예상을 깬 쓰디쓴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그는 지독히 깊은 비참함과 허망함을 맛보았다. 납치를 당한 사람이 제가 아니라 정실에게서 난 배다른 남매 중 하나였다면 지금쯤 상황은 명백히 달랐을 테니까.

<왜 울어? 배고파서 그래? 식사를 더 가져올까? 아마 안 주겠지만…… 네가 원하면 어떻게든 챙겨 와 볼게. 아니면 어, 어디 아픈 거야?>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 두꺼운 천이 푹 젖을 정도로 눈물만 흘릴 때, 저를 달래던 가녀린 목소리는 안절부절못했었다.

“으응…… 일어나셨어요?”

불현듯 곁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득한 회상을 헤집던 발렌틴의 생각이 툭 잘렸다.

이불 아래에 늘어져 있던 알몸의 여인이 잠에서 깼는지 넌지시 알은체를 해 왔다. 여인은 어젯밤까지 이어진 정사를 이어 가려는 것처럼 그의 나신을 향해 팔을 뻗어 왔다.

발렌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을 차갑게 쳐 낸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 발렌틴의 주위에는 아직도 눈을 뜨지 않은 나체의 여인이 두 명 더 있었다.

이불을 헤치며 등장한 사내의 몸은 저명한 예술가가 생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상을 떠올리게 했다. 몸체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선이 심미적으로 우아했다. 휘장 틈으로 비치는 햇살이 하나의 효과가 되어 하얀 피부를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그것마저도 황홀한 감각을 부추겼다.

“깼으면 저것들 데리고 꺼져.”

그래서일까, 여인은 서릿발 같은 응수에도 넋을 잃고 그 뒤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렌틴은 침대 끝 부근에 허물처럼 벗겨진 하얀 가운을 걸친 뒤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리고 미처 지시가 전달되지 않았나 싶어 경고하는데.”

“…….”

“다음에도 아침에 한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되면, 그 머리통에 예쁜 구멍 하나 새겨질 각오는 해야 할 거다.”

간밤의 열락은 밤과 함께 끝났으니 제가 기상하기 전에 사라져 신경 거슬리게 하는 일 없도록 하라는 의미나 진배없었다.

경고를 허투루 듣지 말라는 것처럼 그는 협탁 한편에 놓인 총을 챙겨 들었다. 밤새 뒹구는 와중에도 저기에 저것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여자는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휘장을 젖힌 발렌틴은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로 향했다. 발을 옮기니 그의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의 세기가 한층 더 강렬해졌다. 총을 서랍 안에 집어넣은 발렌틴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커튼을 타이백으로 정돈하여 묶는 이의 자그마한 뒤통수였다.

그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머지않아 턱이 슬금 비틀렸다. 어디선가 낯선 내음이 솔솔 풍긴다 싶더라니 응접실 테이블에는 티팟과 찻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발렌틴은 휘적휘적 걸어 소파에 착석했다. 주인의 기척을 눈치챈 하녀가 얼른 뒤를 돌아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깔끔하게 땋아 올려 고정한 갈색 머리칼. 검은 하녀복과 대비를 이루는 하얀 피부. 제게로 향하는 청회색 눈동자의 색소가 물에 희석한 양 옅었다. 전체적인 표정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는 어수룩한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발렌틴의 눈길을 끄는 건 단순한 외양이 아니었다.

그는 줄곧 잇새로 물고 있던 시가에 이제야 불을 붙였다. 그 몸짓은 아직도 잠이 덜 깬 양 나른하기도 했고 세상만사에 대한 귀찮음을 표하는 것처럼 권태롭기도 했다.

“후우.”

깊은 숨결 한 번에 희부연 연기가 자욱하게 퍼진다. 그 흐린 잔향을 타고 그의 시선은 다시금 천천히 이동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 너머로 요즈음 그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하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소파 팔걸이 쪽,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은 하녀가 미리 준비해 둔 차를 공손하게 따랐다. 다리를 꼬고 앉은 발렌틴의 눈길이 앙다물린 입술에 꽂혔다.

잠인지 약인지 여하간 무언가에 덜 깨 몽롱한 사내의 눈빛은 흐리면서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첨예해 보였다. 응시하는 이를 낱낱이 파헤쳐 볼 듯 집요한 기색이 그리 보이도록 하였다.

그러니 홀로 그를 담당하고 있는 하녀, 리브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찬을 준비하라고 이를까요?”

빤한 눈길의 의미를 종잡기 위하여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관자놀이 부근을 문지르던 발렌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얼마 피지도 않은 시가를 재떨이에 지져 껐다. 손짓이 다소 피로하고 신경질적이었다.

그 태도대로 그는 정말 못마땅한 느낌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약과 술에 허우적댈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목소리가 정신 온전할 때도 들려오니 지금이 대체 낮인지 밤인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커튼 사이로 성큼 드나드는 건 백주 대낮에만 볼 수 있는 햇살이 분명한데 말이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돼?>

<발렌틴? 예쁜 이름이야. 너와 잘 어울려.>

납치당했을 당시, 발렌틴은 저를 챙겨 주는 여자아이에 관하여 아는 것이 전무했다.

피부는 어떤 색인지, 눈매는 어떻게 생겼을지. 눈동자의 빛깔은 무엇인지, 말을 할 때 벌어지는 입술의 모양은 어떠한지. 그 외에 키는 어느 정도인지, 제 뺨이나 턱을 이따금 어루만져 주던 손의 크기는 얼만한지. 그 손가락의 모양새는 어떤지.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목소리.

여린 성대가 제 한 몸을 부르르 떨어 만들어 내는 곡조.

그것을 마지막으로 귀에 담은 건 족히 몇 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럼에도 그 소리는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양 여전히 그의 뇌리에 똑똑히 박혀 있었다. 고작 기억의 잔향이 아니었다. 까만 밤만 되면, 약만 처먹으면, 술독에 풍덩 빠지면 메아리처럼 귓전을 울리고는 했다.

오랫동안 쌓인 세월의 흔적까지 무시한 채 미치도록 선명한 음성을, 이곳에 와 처음 만난 하녀가 내고 있었다.

단순히 목소리로 누군가를 구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발렌틴은 당시 시야가 가려진 채 운신에 제한을 받는 상태였다. 사람이 결박당한 채로 가장 크게 의존하는 감각인 시각마저 가려진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감각들이 기민하게 곤두서기 마련이었다.

단편적인 음성만을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특정한 말을 꺼내기 전의 들숨과 문장을 이어 가는 사이사이로 새어 들어가는 날숨, 의문문에 대한 끝처리와 마침표를 찍을 때에 나오는 하향. 음률의 박자, 높낮이 등등…….

이를테면 그 사람의 어투, 말버릇 따위를 아로새기게 된다는 것이다.

납치를 당하고, 발렌틴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여자아이만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제게 소곤소곤 읊조리는 여자아이의 기척만이 제가 살아 있다는 생생한 증거 같아서. 그 여자아이가 제게로 와 줌으로써 그는 이슥한 밤을 지나 낮이 되었음을 깨달았고, 끔찍하게 사무치는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없던 시간 속의 저는 자그마한 방 안에 갇힌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유독 강렬하게 박혀서일까. 아님 그 목소리가 박혀 버린 게 머리가 아닌 가슴속 깊은 곳이라서일까. 기억 속의 어투를 그 존재처럼 재현해 내는 하녀가 심히 거슬렸다.

‘죽었을 텐데.’

그게 언짢은 흉내처럼 느껴지는 건 발렌틴이 알기로 그 아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사히 벗어난 슬럼가의 바깥에서, 그곳이 시뻘건 불에 집어삼켜져 훨훨 타오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었다.

여하간 눈앞의 하녀가 그를 알게 모르게 자극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제가 의심하는 것이 맞을지 지금 당장 확인해 봐야 한다는 욕구가 발렌틴을 충동질했다.

그가 기억하는 흔적은 목소리 말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발렌틴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음미라도 하듯 코 부근에서 잔을 한 바퀴 돌렸다. 절묘하게도 오늘 내온 차의 향은 미약한 편이었다. 입가를 향해 기울이는 척하며 부러 손에 힘을 뺐다. 찻잔이 순식간에 고꾸라지며 안에 담긴 찻물이 그의 하얀 가운 위로 왈칵 쏟아졌다.

옆에서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신가요?”

한 발 물러서 있던 하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발렌틴은 하얀 가운 위로 번지는 흔적을 닦아 내는 데에 급급한 하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분의 헝겊이 없어 제 에이프런으로라도 문지르던 리브가는 한 박자 늦게서야 제가 저지른 결례를 깨닫고 숨을 멈췄다. 아랫것은 윗전의 허락 없이는 그들의 몸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미안해.>

사과를 하기 전 무조건 들숨을 크게 집어삼키는 버릇이 동일하다. 처음 응접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양 단 한 번도 엇나간 적이 없다.

그리고…….

‘라일락 향.’

푸르른 녹음 속에 머리끝까지 잠긴 듯한 향내.

가까이 다가온 하녀에게서 나는 향마저도 그가 기억하는 것과 일치했다. 차 내음이 순식간 흐려졌다. 그를 대신하여 파고드는 여인의 체향이 그의 심장을 기이한 모양새로 꽉 쥐어짰다.

“너.”

발렌틴은 황급히 멀어지려는 가녀린 손목을 콱 붙잡았다.

“이름이 뭐지?”

하녀의 표정이 혼란의 파도에 잠식된 양 깊이 요동쳤다. 그는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끈질기게 눈을 맞췄다.

하녀는 급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 저…… 리, 리브가라고 합니다.”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발렌틴은 붙잡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연 손목을 놔주었다. 하녀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다소 부산스럽게 인사를 건네고는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교차해 올리고는 조금 전 하녀를 붙잡았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순간이나마 문질러 본,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좋은 아침.”

발렌틴은 그렇게, 제가 기상했다는 소식을 들은 퀄린이 찾아올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렇게 손만 들여다보고 있어?”

그는 눈이 빠져라 응시하던 손을 툭 떨군 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후골이 남성적으로 도드라졌다. 그것이 위아래로 거칠게 꿀렁였다. 한순간 라일락 향에 무더졌던 신경이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 다시 뾰족한 바늘로 둔갑해 발렌틴의 뇌리를 사정없이 찔러 댔다.

그는 참지 못하고 퀄린이 품 안에서 꺼내 든 시가를 가로챘다. 한순간 강탈당한 기호품을 망연히 응시하던 퀄린은 따져 묻느니 어른스러운 제가 참자고 인내하며 새것을 꺼내 물었다.

“불 필요한가?”

“공작님은 네가 그 연배에 비해 유능하다는 말을 아주 귀가 닳을 지경으로 하시더군.”

“…….”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 퀄린, 너는 참 유능하지.”

아, 퀄린은 뒷덜미가 싸하게 물드는 느낌에 그 부근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발렌틴은 영지로 내려온 이래 가끔가다가 이렇게 느닷없는 칭찬을 던지고는 하였다. 처음엔 어리둥절하였으나 이제 퀄린은 그것이 하나의 신호임을 알았다.

“그런 네가 좀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그가 지시를 내리기 전 보이는 신호, 말이다.

불법적인 허가증을 통해 타 제국에서 들여오는 하얀 가루를 조달하는 것, 더불어 술과 약에 곁들일 창부 호출까지. 단편적인 부탁에 이어 이중 삼중 덫을 쳐 그 은밀한 소행을 가리고 호출한 창부들에게 피임약을 먹인 후 확인하는 부차적인 부분까지, 전부 그의 업무나 마찬가지였다.

발렌틴이 삿된 향락을 누리는 데에 필요한 원조를 도맡아 하는 퀄린으로서는 이제 그 지시가 무언지 듣기도 전에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망나니를 한동안 책임지는 조건으로 봉급 40% 인상을 재조율하게 된 입장이라서, 그러니까,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는 처지인지라 더더욱 그러했다.

“또 뭔데, 뭐가 필요하신데.”

“옛날에 내가 납치당했던 사건.”

퀄린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때의 생존자를 좀 찾아봐.”

“생존자는 갑자기…… 아니, 그보다 그 사건은 왜?”

발렌틴의 납치 사건은 당사자인 그보다도 그의 주변인들이 숨죽이게 되는 변고였다.

공작 가문으로써 발렌틴을 구해 낼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으나 예상외의 변수가 있었다. 바로, 평소 혼외 자식을 거슬려 죽겠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천금을 들여 사생아를 구해 온다면 두고 볼 것도 없이 이혼이라며 공작과 꽤 오랜 시간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 발렌틴이 잡혀 있던 슬럼가에서 예기치 못한 화재가 일었고 그 덕분에 그는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온전한 구사일생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납치를 당하기 전과 후, 발렌틴의 세상은 완벽하게 뒤틀렸다. 이전에 누리던 평화가 산산이 조각났다. 물론 서출로서 본래의 인생이 마냥 순탄했노라고 볼 수는 없었으나, 그때는 적어도 건강했었다.

납치를 당한 동안 발렌틴은 반강제적으로 마약을 섭취했고, 그 결과 멀쩡하던 신경계가 손상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마약 중독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필이면 슬럼가에서 취급하던 약이 변변찮은 구매자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형편없는 재료로 조악하게 제작되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질이 낮고 저급한 약일수록 뒤탈이 심하고 중독 증세가 강하게 작용하는 이유에서였다.

발렌틴은 시간이 갈수록 미쳐 갔다.

어떤 유능한 의사를 불러도 그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중독 완화에 쓰이는 마약성 치료제로는 그의 고갈된 욕구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민감하게 곤두선 신경은 도통 가라앉지 않았고 그것은 다분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작 피부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사지를 벌벌 떨게 될 만큼의 고역스러운 상태가 지속됐다. 갑자기 폐부가 조여들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꺽꺽대며 구르기를 반복했다. 심할 때는 환시와 환청 같은, 환각 현상까지 겪고는 했다.

아무리 온화한 사람이라도 진종일 그런 통증에 노출되다 보면 성정은 험하게 비틀리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발렌틴은 어떻게든 버티고자 하는 의지를 버렸다. 값싼 약에 중독되어 버린 제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더욱, 더욱, 더욱 강렬하고 자극적인 약을 찾아 나섰다.

쾌락을 갈구하는 자신의 본능에 기꺼이 동조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신경계와 연결되는 오감이 망가지고, 오감이 망가지니 신체 대부분의 기능을 담당하는 뇌까지도 이상이 생겼다. 감정을 조절하고 충동을 억제하는 나사가 빠져 버렸다.

그 결과는 다소 치명적이었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할 수 있는 자극점의 경계가 급속도로 둔화된 것이다. 코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자극의 역치가 높아졌다.

살인, 그 정도의 일도 시시하다 여기는 그이니만큼 일상의 모든 것을 무료하고, 따분하며, 지겹게 느껴질 수밖에.

그렇게 부패해 버린 그가 느닷없이 이 모든 사태의 시초를 꺼내니 퀄린으로서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확인할 게 생겼어.”

“당시의 생존자가 남아 있을지나 모르겠는걸. 큰 화재가…… 났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더군다나 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고.”

발렌틴이 중독을 이겨 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 건, 그의 분노가 향할 방향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저를 이따위로 만든 슬럼가를 벌집 쑤시듯 다 뒤집어엎고 싶어도 이미 불에 타 까만 재만 남게 되었고, 그렇다고 그 칼날을 공작가로 겨누자니 어린 나이인 그는 그들 없이는 제 한 몸 보전할 힘조차 없었다.

<아버지께서 네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그 구역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재로 변한 시체밖에 나오지 않았다나 봐.>

<…….>

<이쯤이면 네가 살아남은 게 기적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치료에 성실히 임하도록 해.>

절반의 피가 섞인 이복형이 그 말을 전하러 찾아와 주었을 때, 발렌틴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저를 목숨처럼 챙겨 주던 계집애였다. 참 웃긴 일이었다. 자신이 다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안위를 떠올릴 수가 있는지.

‘걔도 죽었어?’

그 질문이 혀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목구멍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물어보기가 싫었다. 혹여나 형의 입에서 그렇다는 긍정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그게 마치, 그 여자애가 죽지 않길 바랐다는 인상을 남기는 바람에.

“굳이 그 화재 사건 생존자가 아니어도 돼. 당시 슬럼가와 관계가 있는 놈을 발견한다면 즉시 내게로 데려와. 그 누구라도 좋으니.”

발렌틴은 그 말을 끝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브.>

<내 이름은 이브야.>

이브. 리브가.

단지 우연이라 넘기기에는 이름마저도 몹시 비슷했다. 충동질은 여전히 내면 깊직한 곳에서부터 몰아쳐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충동이란 익숙하고도 친숙한 것이었다. 이성을 내버리고 본능에 삶의 선택을 맡긴 이후부터 발렌틴의 인생에서 충동이란 떼어 놓고 살 수 없는 본질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그 충동이 유독 껄끄럽게 느껴지는 건…….

뜻하지 않게 조우한 과거의 흔적, 죽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존재의 모방자가 주변에 떠돌아다니니 그럴 수밖에.

일단은.

리브가라는 하녀가 기억 속의 여자아이가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하여 목이 마른 양 굴게 되는지 모르겠는 이 조급함은 그 확인 절차 이후에나 풀릴 수수께끼 같았다.

* * *

리브가는 거울 위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 막 세수를 마쳐서 그런지 투명한 물방울이 턱을 타고 아래로 톡톡 떨어졌다.

오늘 그녀의 하루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엉망이었다.

요 며칠의 나날은 리브가의 하녀 생활 중 가장 가슴 떨리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영지로 돌아온 ‘진짜’ 주인의 아침 시중을 맡게 된 건 순전히 운이었다. 지난날 차를 건네고 응접실을 무사히 나온 리브가를 발견한 하녀장이 별 뜻 없이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하겠노라 답했으나 리브가는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그녀는 소년과 지낸 어릴 적에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어찌하여 그 소년을 그리도 챙겼는지, 왜 자꾸만 함께 있고 싶었는지, 아파하는 그를 보며 왜 제 마음도 덩달아 무너지는 듯한 안쓰러움을 느꼈는지.

그 마음의 정체는 이별을 겪고 나서야, 다시는 그와 만날 수 없단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첫사랑.

아버지로 인해 납치되어 나타났던 아리따운 소년은 리브가에게 그런 풋풋한 의미였다.

가슴속을 벌건 빛깔로 칠한 사랑은 부단히 미련스럽고 조급했다. 발렌틴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 물론 ‘납치를 당했을 적 챙겨 주었던 여자아이’라고 하면 기억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렇게 먼저 나서서 제 정체를 정의 내리기 전까지는 알아채지 못할 확률이 컸다.

그는 한 번도 제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까.

뭣보다 발렌틴이 저를 재회한다고 해서 기뻐할 리가 없었다. 그게 누군들 ‘납치’를 당했다는 건 일종의 트라우마를 유발할 만큼 끔찍한 기억일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리브가는 그 당시 그에게 끔찍한 거짓말을 했다. 그녀 또한 발렌틴의 눈을 가리는 천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많은 현실적 여건들이 그것을 망설이게 했다.

아버지의 서릿발 같은 명령, 친부에게 맞아 얼굴 여기저기에 난 멍 자국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 더불어 아무리 그녀가 그를 위해 준다지만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명확한 경계선이 나뉜 입장.

그래서 리브가는 그의 눈을 가리는 천을 풀어 줄 수도, 제 존재를 솔직하게 밝힐 수도 없었다. 풋사랑이 부른 오판이며 고집이었다.

그때 제가 한 짓들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리브가 자신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늘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고여 있었다.

그 증거로 과거 속에 포개어 버려 버린 이름 대신 새로 지은 이름이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언제건 그를 만나게 될지 모를 이곳, 공작저에 취직하게 되었다.

돈이 필요했고 로트링겐 저택의 봉급이 높은 수준임은 필히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사랑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사랑.

그럴듯한 이유 아래 숨겨진 애틋한 기다림은 발렌틴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드디어 그를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리브가의 마음은 여전했다. 그에게 제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미련한 주제에 서툴기는 또 무척 서툴러서 리브가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 이상으로 바라는 게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이후에는 무얼 하고자 하는지도 확실히 정의 내리지 못했다.

그저…… 다시 한 번 만나길 바랐을 뿐이니까.

작금의 나날은 그런 리브가의 욕망을 채워 주기에 아주 적합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제가 우려낸 차를 앞에 두고 나른히 앉아 있는 발렌틴을 볼 때마다 반쯤 넋을 잃고는 했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심장에 이는 여진은 달콤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시간은 분명 변함이 없을진대 그와 함께할 때는 잡을 틈도 없이 흘러 버렸다. 1분이 1초처럼 지나갔다. 조용히 물러나야 할 때가 순식간에 도래했다. 그럼 늘 일말의 아쉬움과 기대를 맘 한편에 쌓아 둔 채로 응접실을 나서고는 했다.

아침의 시간뿐이라도 그를 모시게 된 리브가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행복을 담은 채 굴러갔다. 그런 그녀에게 때아닌 혼돈을 야기한 건 오늘 아침, 주인이 보인 행동이었다.

<너, 이름이 뭐지?>

리브가는 손을 들어 하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핥는 듯한 발렌틴의 시선이 닿았던 부분이다. 질긴 눈초리가 마치 살갗에 들러붙어 버린 것처럼 이따금 신경 쓰였다.

발렌틴이 제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인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정확히 사흘 전부터, 응접실을 가꾸는 내내 뒤통수에 지긋한 시선이 피할 길 없는 화살촉처럼 꽂혀 들었다. 제가 무얼 하든, 어디에 있든 예의 첨예한 눈길이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럴 때마다 리브가는 등 뒤로 진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시선의 의미를 함부로 판단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물어보는 건 더더욱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로부터 기인되는 긴장감을 애써 갈무리하던 중 드디어 오늘 제대로 맞닥뜨려 버렸다.

그가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알아챈 건가……?’

머리는 난처하게 됐다고 여기는 동시에 가슴은 모순적이게도 콩닥콩닥 뛰었다. 꼭 한편으로는 상황이 이렇게 되기를 내내 바라 왔던 사람처럼. 제가 나서지 않아도 그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듯이…….

‘에이, 설마.’

그는 제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리브가는 한없이 길어지는 생각을 부정과 함께 적당히 잘라 냈다. 물기 어린 얼굴을 마른 천에 문질러 닦은 그녀는 발을 돌렸다.

낡은 숙소의 침실로 돌아오니 다른 방 하녀들이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안에 속해 있던 방 주인, 케시가 얼른 오라며 리브가에게 손짓했다.

“들었어? 오늘은 세 명이었대.”

화제를 이끌어 가던 누군가가 손가락 세 개를 쭉 펴며 속삭대자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대관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뒤늦게 동참한 리브가의 눈이 의문으로 동그래졌다.

“뭐가 세 명이야?”

“뭐기는! 오늘 아침에 주인님 침대에서 나온 여자들 수 말이야.”

침대에 앉으니 절로 잠기가 몰려와 하품을 하던 리브가가 멈칫했다.

“세 며엉?”

“대단하시다…….”

“다른 귀족 나리들도 원래 그, 그렇게나 많이 밤 시중을 찾으셔?”

“그거야 아무도 모르겠지. 여기 있는 애들 전부 다 수도 구경도 못 해 본 촌구석 출신인걸.”

하녀들이 두루두루 꺼내는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의 주인, 발렌틴이었다.

얼결에 굳어 버린 리브가는 눕지도, 그렇다고 일어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붙이고만 있었다. 어느새 이야기의 판도가 불건전한 쪽으로, 이를테면 성적인 부분으로 빠지면서 신이 난 하녀들은 그런 리브가에게 별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창부들이래?”

“그렇겠지.”

“걔넨 정말 운도 좋다. 주인님 같은 손님 받기가 쉽지는 않을 것 아니야.”

“나 정말 주인님 같은 미남은 생전 처음 봤어. 마차에서 내리시는데 눈이 머는 거 같더라…….”

“수도의 사내들은 전부 그렇게나 아름답게 생긴 걸까?”

“에이, 설마! 예전에 하울프 백작님의 친구라면서 영지로 내려오셨던 분 있었잖아. 그분도 귀족이라고 했는데 완전 우락부락하고 거칠어서는…… 주인님과 비교도 되지 않더라고.”

하녀 한 명을 필두로 어느새 전원이 발렌틴의 미목수려에 홀딱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외딴섬처럼 동떨어져 멀뚱멀뚱 앉아 있던 리브가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을 기민하게 눈치챈 케시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리브가! 네가 주인님의 아침 시중 담당이잖아. 뭐 슬쩍 보거나 들은 건 없어?”

질문을 건넨 케시가 리브가의 팔을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끌어당겼다. 졸지에 이야기꽃 사이에 파묻힌 리브가는 크게 뜬 눈을 연신 끔벅대었다. 어느새 제게로 쏠린 이목이 뾰족한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리브가, 아침에 주인님은 어떠셔?”

“분명 아침에도 그 미모는 완벽하시겠지?”

“침대에 여자가 셋이나 있었다는 게 사실이야?”

“다른 재미난 건 없었어?”

리브가는 호기심이 하늘을 뚫는 질문 세례에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나, 나도 잘은 몰라. 아침에 응접실 청소하고 차만 준비해 드린 후에 바로 나오거든. 하녀장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침실에는 들어가지 말라 지시하셔서…….”

모두가 김이 팍 식은 듯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말한 대로, 리브가는 그의 아침 시중을 들기는 했으나 그 경계는 늘 ‘응접실’까지였다. 그 안쪽으로 이어지는 침실은 집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용인도 선뜻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녀도 구경 한번 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꼬박꼬박 아침 시중을 든다지만, 그녀가 은밀한 침실 안쪽의 사정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기실 지난밤 그 침실에 창부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것도 리브가는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있잖아. 내가 이번에 헤튼 경에게 슬쩍 물어봤거든?”

순간 주의를 환기한 건 바로 케시였다.

무수한 이목이 다시 옮겨 갔다. 케시의 개암색 눈동자는 호기심을 반기는 것처럼 깊게 번뜩거렸다.

“헤튼 경?”

“왜. 이번에 수도에서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왔다가 케시랑 눈 맞았다는 기사.”

“아아.”

주인이 이곳 영지로 내려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그새 그의 기사 하나와 몰래 농탕질을 한 모양이었다. 시원스러운 성격답게 남자를 휘어잡는 데도 특출난 케시는 이러한 전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덤덤하게 반응했다.

이 순간 하녀들이 집중하는 건 노골적인 케시의 사생활이 아닌 그다음에 나올 이야기였다.

“작은 주인님, 이번에 수도에서 사고 친 바람에 쫓겨나듯이 내려오신 거래.”

“사고? 무슨 사고?”

케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몰라. 쉬쉬하는 모양인지 자세한 내막까지는 절대 안 알려 주더라고. 혹시나 말해 줄까 싶어서 정액까지 삼켰는데 얄짤도 없더라, 개새끼.”

격 없는 이들끼리 모인 자리라서 그런지 어투가 서슴없었다. 그때를 회상하니 재차 짜증이 치밀었는지 케시는 기사의 정액 맛이 비리다는 둥, 기술이 없어서 목구멍이 막힐 정도로 무식하게 박아 대기 바쁘다는 둥, 검과 다르게 허리 휘두르는 실력은 볼품없다는 둥 적나라한 불만을 토로했다.

머지않아서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님을 깨달은 듯 다소 급하게 말허리를 돌렸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우리 주인님에 관해서 언뜻 들은 게 있는데.”

케시가 잠깐 호흡을 고르는 사이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모두가 깊게 휘어져 호선을 그리는 케시의 입술에 주목했다. 허름한 숙소에 긴장감 섞인 침묵이 감돌았다.

“주인님 말이야, 어마어마한 약쟁이래.”

이윽고 케시가 꼭꼭 숨겨 둔 말을 토해 냈을 때 리브가는 잠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뭐어?”

“그게 사실이야?”

“보아하니 그간 수도에서도 엄청난 망나니에 골칫거리로 취급되신 모양이더라고. 이번에 벌어진 사고 때문에 결국 큰 주인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 여기로 내려보내신 거고. 아마 그 사고도 약과 관련이 있어서 어떻게든 은폐하려고 혈안이 된 것 같아.”

“그럼 설마 우리 퇴근 시간이 앞당겨진 것도 그런 이유인가?”

잠자코 듣고 있던 쥬다가 넌지시 의문을 토해 냈다. 모두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지 ‘아아’ 하고 미약한 탄성을 냈다.

발렌틴이 이리로 내려온 후 저택 사용인들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8시 안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퇴근하여 사용인들의 전용 숙소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어리둥절해했으나 오래지 않아서는 기뻐했다. 퇴근이 앞당겨지는 건 휴식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니 종들의 입장에서는 반색을 표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우리 같은 하인들에게 약 하는 걸 보이지 않기 위해?”

“그거겠지, 뭐겠어.”

모두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동조의 반응들을 보탰다. 그 가운데서 리브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부터 그녀의 낯빛은 창밖의 하늘처럼 어둑해져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수다의 장은 자정에 다다르고서야 그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세상에,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담?”

“이제 그만 잘까?”

“그래. 이러다가 하녀장님께 들키면 다들 크게 야단맞을 거야.”

누군가의 하품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자신의 방으로 흩어졌다. 방주인인 리브가와 케시는 주변을 정돈하고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미약한 등불을 끈 후에도 리브가는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주인님 말이야, 어마어마한 약쟁이래.>

약쟁이…….

그 단어가 마치 두통처럼 리브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아직 소문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리브가는 어쩐지 그게 허무맹랑한 소문이 아니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오늘 그의 가운에 엎어진 차를 닦아 주기 위해 몸을 수그렸을 때 리브가는 아주 미약하게 멈칫했었다. 익숙해서 끔찍한 내음. 자신을 곰팡이처럼 썩게 만들어 가던 슬럼가의 비린 향. 약과 술, 그리고 필요 이상의 환락이 범람하던 과거의 냄새가 발렌틴에게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몰랐냐?>

<네가 걔한테 꼬박꼬박 먹이던 식사, 거기에 소량의 약이 들어가 있다. 걔가 약에 중독돼서 고통스러워하는 건 네가 챙기는 식사 때문이야.>

아버지의 수하가 대수롭지 않게 툭 꺼내 놓은 진실은 그날, 리브가의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리브가는 몰랐다.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자신이 매일매일 성심성의껏 챙겨 주려고 애썼던 그 식사에 설마 약이 들어 있을 줄은. 분명 제가 살피지 못하는 시간 동안 강제로 섭취당했을 거라고 짐작했던 약은 다름 아닌 자신의 부주의로 행해지고 있었다.

발렌틴이 서서히 약에 중독된 건 모조리 자신의 탓이었다. 리브가는 그걸 너무 늦은 후에야 깨달았다. 전심을 다해 바친 호의는 한순간 그를 타락시킨 악행이 되어 버렸다.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라 치기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결국은…….’

외관상 멀쩡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리브가가 아는 중독자들은 전부 고함을 지르거나 미쳐 날뛰거나 혹은 헤벌레 풀린 얼굴을 한 채 여자를 깔아뭉개는 데에 혈안이 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얌전한 발렌틴은 다행히 그 지옥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케시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녕 그렇다면…….

“리브가.”

불현듯 이불이 스르륵 걷어지며 누군가 그녀의 침대로 올라왔다. 등을 돌리자 건너편 침대에 있던 케시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같이 자자.”

케시는 가끔 이렇게 불쑥불쑥 제 침대로 찾아오고는 했다. 누군가는 남자를 꼬셔서 쉽게 하룻밤을 보내는 그녀를 헤프다고 일컬었지만, 리브가는 그녀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색욕이 아닌 사람의 온기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 부모에게서 학대를 당했던 그녀는 간혹 밤이 되면 혼자 덩그러니 놓인 게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이슥한 밤에 꿀꺽 잡아먹힐 것만 같다고 하였다. 그건 리브가만이 아는 그녀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익숙하게 옆을 내어 주니 케시는 잽싸게 머리를 대고 옆자리에 누웠다. 정자세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두 사람 사이에서 짧은 대화가 오갔다.

“그러고 보니 벌써 2주가 지났네.”

케시가 문득 말하며 리브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할아버지를 뵈러 외출하는 거지?”

2주에 한 번씩 리브가는 외출을 했다. 제가 이곳으로 오는 바람에 홀로 지내는 노인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좀 나아지신 것 같아?”

“그냥. 비슷하시지, 뭐.”

어두움에 반쯤 잠긴 리브가의 미소가 씁쓸했다. 제 삶에 대한 걱정이 있지만, 리브가가 돈을 버는 데에 더욱 열심히인 이유는 노인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였다. 피가 섞인 친조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태어나 처음으로 저를 돌봐 준 어른인 만큼 리브가는 그를 제 유일한 가족이라 여겼다.

2주에 한 번 허가를 받은 외출 날, 리브가의 일과는 틀에 박힌 양 한결같았다. 마을의 진료소를 찾아가 미리 부탁하여 지어 둔 약을 들고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 약을 통해 혹 제가 없는 동안에도 노인에게 염려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살뜰히 보살폈다.

“너 이제 아침 시중 일도 하잖아. 그걸 빌미로 하녀장한테 봉급을 조금이라도 올려 달라고 해 봐.”

“그러기에는 정말 하는 게 없는 걸. 침실 청소라도 하면 좀 뻔뻔히 나갔을 텐데 말이야.”

실내에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지다가 케시가 먼저 잠에 들었다. 그녀가 도롱도롱 내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는 한참 동안 뒤척거렸다.

새벽이 깊어 가는데도 머릿속에 차오른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주인이자 첫사랑의 낯이 눈앞에 연신 어른거렸다. 일찍이 사용인들의 퇴근을 명한 이 시각, 어쩌면 지금의 그는…….

그렇게 리브가는 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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