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덩어리 1
1장
떠오르는 태양을 따라 일렬로 늘어진 장의 분위기가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했다.
그 가운데.
“리브가!”
알알이 꿰인 흑요석이 심오한 빛을 번뜩 발산했다. 인파가 물결처럼 이리저리 몰려오는 와중에도 꼿꼿이 그 자리에 서 있던 리브가는 저를 부르는 음성에 퍼뜩 깨어났다.
“가만히 서서 뭐 해?”
저만치 앞서 나가던 케시는 도통 뒤따를 생각이 없는 그녀를 눈치채고 인파의 물살을 거슬러 왔다. 똘망똘망한 케시의 눈길이 리브가가 응시하는 방향을 따라 돌아갔다.
“뭐 맘에 드는 거라도 있어? 사려고 보는 거야?”
리브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와중에도 영롱한 이채를 발산하는 흑빛 팔찌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건 그녀의 의지라기보다는 뇌가 종용하는 일종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냐, 그냥…….”
팔찌가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저 색을 보면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서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천장에 매달린 조악한 등화, 그로부터 뻗어 나와 어룽지던 화광. 그것에 반사될 때마다 윤기가 넘실대던 부드러운 흑발…….
“예뻐서 봤을 뿐이야.”
단조롭게 답하자 케시가 싱겁다는 듯 입꼬리를 휘말았다.
혹 물건을 구입할까 지켜보던 가판대의 주인은 별 소득 없을 손님임을 깨달았는지 장사 막지 말고 나오라며 성화를 부렸다.
케시는 조급한 손길로 리브가를 휙 잡아당겼다.
“얼른 가자, 이러다가 아침 조회에 늦겠어. 하녀장 아침부터 뿔나게 해 봤자 우리 손해잖아. 으으, 하여간 성깔도 뭐 같아서는.”
자유분방한 성정인 케시는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하녀장을 싫어했다. 어쩌다가 눈 밖에 나 야단을 맞는 날이면 그녀는 ‘이곳에 주인 어르신들이 계시지 않아 천만다행인 줄 알라’며 다른 사용인들 앞에서 번번이 케시에게 면박을 주곤 했다.
하녀장의 타박대로 리브가가 일하는 로트링겐 대저택에는 주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주인’이 말이다.
로트링겐의 고귀한 성(姓)을 이어받은 이가 부재한다는 의미였다.
로트링겐 가(家)의 가주를 포함한 식솔은 현재 수도에서 머무르고 있으며, 영주 대행인으로서 이곳 영지를 도맡아 책임지는 이는 가문의 친인척인 하울프 백작이었다.
그 때문에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저택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가문의 사용인들보다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하는 일이 적음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그런 환경임에도 봉급은 여타의 직종보다 월등히 높았다. 케시가 하녀장을 향해 매번 툴툴거리면서도 결코 이 일을 관두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시끌벅적한 장을 벗어나 들판을 건너 한참을 걸었다. 도중에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결국엔 달음박질을 했다.
“오늘도 아침장에 다녀왔나 보네?”
쪽문으로 들어서 주방으로 직행하니 분주히 아침 식사 준비를 하던 하녀 한 명이 알은체를 해 왔다. 리브가는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응’ 하고 답했다. 그사이, 케시는 직접 들고 온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아삭, 베어 물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주변을 쓱 둘러본 케시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주방이 조용하네? 주방 하녀들 다 어디 갔어?”
“너희 들어오면서 못 봤니?”
“보다니, 뭘?”
알은체를 한 하녀, 쥬다가 주변을 쓱쓱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훅 억누른 채 속살거렸다.
“이번에 수도에서 내려오셨대.”
주방 구석은 어차피 인적이 드물어 누가 몰래 엿들을 가능성이 적었으나 리브가와 케시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누가?”
“누구긴 누구야! 주인님이시지.”
호들갑스러운 전언에 리브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게 사실이야?”
“그래! 오늘 아침에 집사님이 오셔서 전한 소식이라고. 지금 막 도착하셨다는 얘기가 전해져서 다들 한바탕 난리가 났었거든. 아침 조회 시작하기 전에 슬쩍 구경 간다고 나간 거지, 뭐.”
“주인님이라면…… 로트링겐 공작님?”
“아니. 큰 주인님 말고, 작은 주인님.”
“작은 주인님 중 누구? 첫째 도련님? 둘째 아가씨?”
“막내 도련님. 그 왜, 사생아라는…….”
바구니를 감싸 쥔 리브가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멀쩡하게 기능하던 혈관이 바짝 수축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남들 모르게 긴 숨을 터뜨렸다. 가슴이 제멋대로 부풀었다가 꺼졌다.
“그럼 나도 구경하러 가야지!”
사과를 한쪽에 내려 둔 케시는 말릴 새도 없이 주방을 뛰쳐나갔다. 리브가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케시의 행적을 따라 눈을 옮기다가 쥬다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 앞에는 손질되지 않은 야채가 산처럼 잔뜩 쌓여 있었다. 리브가는 확신했다. 아마 당장 동료들을 따라나서고 싶은 쥬다의 걸음을 붙잡은 건 저것들일 것이라고.
“도와줄게, 쥬다.”
“리브가, 너는 구경하러 안 가?”
“어차피 일하다 보면 마주치게 될 텐데 뭘 굳이.”
“그건 그래.”
그 후로 주방에는 쓱쓱, 야채를 다듬는 소리만 났다.
곁에 선 쥬다를 힐끗 살핀 리브가는 남몰래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심장이 평소보다 투박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비밀스러운 심호흡에도 여전한 박동은 곤혹스러운 한편 벅차기도 한 그녀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리브가는 야채 더미를 응시하며 속으로 암시를 걸듯 되뇌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 * *
리브가가 이곳, 로트링겐 대저택에서 일한 건 자그마치 6년이었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이곳에 고용되어 어느새 성년을 넘긴 나이가 되었으니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질기게 붙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명실상부한 주인이 부재하다 한들 대저택의 업무는 결코 쉬운 편이 아니었다. 온종일 쓸고 닦아도 눈을 감았다가 뜨면 새로이 살펴야 할 곳 천지였다. 봉급이 제법 높은 편임에 충분한 합당성을 부과하는 이유였다.
리브가가 오랜 시간 이 저택의 하녀로 일해 온 이유는 하나였다.
돈이 필요하니까. 살아가는 데에 필수 불가결한 그것 말이다. 그건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대다수의 목적과 일치하리라.
케시는 가끔 몹시 자질구레한 일까지 시킨다며 툴툴거렸으나, 그래도 리브가는 이 일이 좋았다. 지시한 바를 따르지 않았다고 얼굴을 후려 맞는 일도 없었고, 평범하고 소탈한 일거리뿐이었으며, 뭣보다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녀가 되기 전, 리브가의 삶은 결코 지금처럼 평범하다고 볼 수 없었다.
마약상과 하룻밤을 함께 보낸 창부에게서 난 아이. 그게 바로 리브가였다. 어미는 해산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그녀 앞에 주어진 건 폭력적인 아비와 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슬럼가 환경뿐이었다.
그 악취 나는 풍경을 주름잡는 마약상의 딸. 케케묵은 먼지와 함께 부여된 호칭으로 살았던 과거는 그녀에게 수치이자 고통일 뿐이었다.
비천한 출신은 가릴 수 없는 양 그녀는 언제나 폭력과 마약에 찌든 때를 덕지덕지 묻히고 살았다. 환경이 풍기는 악취와 오물이 검질기게 달라붙어 그녀마저도 저 나락 어딘가로 추락시키는 일상이었다. 악몽이나 다름없던 곳에서 빠져나오려고 아등바등했던 지난날의 고역이 평화로운 현재의 순간을 유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소년…….
“리브가.”
창문을 닦던 리브가는 저를 부르는 하녀장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네, 하녀장님.”
“응접실로 두 분 몫의 차를 좀 내어 가렴.”
“지금요?”
“그래.”
하녀장의 지시에 리브가는 즉각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에서 잔을 고르는 손끝이 옅게 떨렸다. 차마 되묻지 못했지만, 지금 내어 갈 차를 마실 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오늘 아침 막 도착했다는 로트링겐 공작가의 주인.
로트링겐 공작가의 식솔이 수도에만 머무는 것과 별개로, 마땅히 그들을 섬기는 종으로서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가문의 기둥이자 큰 주인인 로트링겐 공작과 아내인 공작 부인, 그리고 그들 밑으로 세 명의 작은 주인이 존재했다. 장차 가주를 이어받을 첫째 공자와 아리따운 둘째 공녀, 그리고 혼외자식이라는 셋째…….
셋째, 발렌틴 루드 로트링겐.
리브가는 자신이 기억하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기 그지없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리브가! 넘친다.”
“아……!”
옆에서 불쑥 제지하는 손길이 끼어들었다. 저도 모르게 티팟이 넘치도록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아슬아슬할 뻔한 순간 개입해 준 쥬다 덕에 잔실수는 면할 수 있었다.
“고마워.”
“고맙긴. 그보다 무슨 일 있니? 너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넋을 자주 잃고 그래? 아까도 그러더니.”
평소 차분하여 좀체 실수가 없는 그녀의 성정을 아는 쥬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브가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뒤 티팟과 찻잔을 챙겨 들었다.
찰랑. 안에 담긴 향긋한 찻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리브가는 그게 꼭 제 맘속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떨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침에 쥬다에게 말한 대로, 주종 관계로서 지내다 보면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 순간이 예상하던 것보다 빠르게 다가왔고, 그랬기에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었다.
‘몇 년…… 만이지.’
발렌틴 로트링겐. 그는 이 가문의 몇 안 되는 주인인 동시에 리브가의 마음속 깊숙이 내재된 어느 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리브가의 과거는 대체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뾰족하고 날카로운 파편뿐이었다. 돌이켜 봤자 겨우 나은 내상만 탈이 나는, 그런 뼈아픈 잔상.
그 사이에서 발렌틴이 담긴 것은, 아니, 그것만큼은 영롱한 빛깔을 갖추고 있어 마냥 소중했다.
<잘 들어라, 이브.>
어린 시절.
지금은 과거와 함께 버린 그녀의 이름을 부른 아버지가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리브가는 그 악력이 꼭 몰매 같다고 생각했다. 어깨 위에 얹어진 건 분명 사람의 손일 텐데, 마치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내려앉은 것만 같은 버거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건 잔혹한 아비가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행사한 위압감이었다.
<이 꼬맹이가 바로 우리의 귀중한 돈줄이야, 돈줄. 어? 한 번 뜯어내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살 수 있는 거액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그러니 행여나 잘못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식사 꼬박꼬박 챙겨 주도록 해. 안 먹는다면 억지로라도 처먹여. 거래 끝나기도 전에 뒈지면 곤란하니까. 눈에 감긴 천은 혹시 우리 얼굴을 기억할지 몰라 씌워 둔 거니 건드리지 말고.>
<…….>
<그리고…… 혹여라도 허튼짓하면 넌 나한테 혼날 줄 알아. 알겠어?>
아버지의 으름장은 언제나 무서웠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지킬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혼난다’는 말이 결코 허울뿐인 호통이 아님을 알기에.
어젯밤, 그의 두꺼비 같은 손에 후려 맞아 볼가에 생긴 푸르스름한 멍이 지끈댔다. 그 통각을 피부 끝으로 체감하는 그녀로서는 공포심에 가까운 사명감을 끌어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비의 앞에 선 그녀는 호랑이의 발톱에도 발발 떠는 생쥐처럼 나약했다.
리브가는 아버지가 방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바닥에 쓰러진 소년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옆으로 몸을 만 채 누운 소년은 미동이 없었다.
귀족가의 자제.
이곳과는 판이할, 다채롭고 찬란한 세상으로부터 납치되어 온 소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결이 좋아 보이는 흑발이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붐하게 흔들리는 빛줄기에도 그 윤기는 쉬이 가려지지 않았다.
잔잔한 밤바다의 표면 같은, 그윽한 칠흑빛.
그대로 훅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색채였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백옥처럼 하얬다. 리브가는 저도 모르게 소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매부터 콧등까지 가리는 천을 끄집어 내린 건 다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혹시 모르니 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는, 눈앞의 매혹에 홀린 양 희부옇게 사라져 버렸다.
<…….>
리브가는 아직도 그 순간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 죽기 직전까지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자부했다.
정수리로 벼락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정수리를 타고 흐른 전류가 심장으로 짜릿하게 번진 느낌과 흡사했다.
소년은 온갖 더럽고 난잡한 꼴만 보고 자라 온 그녀의 세상에 처음 겪는 고결함이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먼지가 묻었다고 해도 태초에 빚어진 아름다움은 쉬이 가려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곤히 감긴 채였지만 리브가는 만약 저 눈이 뜨인대도 제 감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아주 곱게 그려 놓은 명화 같았다. 그래서인지 선뜻 손대면 안 될 것만 같은 조심성을 불러일으켰다. 제가 손대면 그대로 더러워지고 손상될 것만 같은 느낌. 그 두려움 그대로 리브가는 얼른 천으로 다시 소년의 눈가를 가렸다.
그게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첫인상이었다.
리브가는 소년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그는 납치를 당한 쪽, 그녀는 납치를 한 쪽이라는 데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기도 했으나 뭣보다도 아버지가 매일 그를 ‘로트링겐 꼬맹이’라고 일컬은 까닭이었다.
종종 ‘돈줄’과 ‘사생아’를 함께 운운한 적도 있었기에 그 존재의 신분을 깨우치는 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
해묵은 과거를 헤집다 보니 어느새 응접실 코앞이었다. 리브가는 옅은 심호흡 후, 간단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화병을 갈아 줘서 그런지 응접실에서는 늘 신선한 꽃내음이 났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향이 났다. 안개처럼 밑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듯한 향이었다. 속을 시끄럽게 만들던 긴장감은 그것을 코끝으로 체감하는 순간, 몸집을 훅 부풀렸다.
“차를 내왔습니다.”
“아, 그래. 이리로.”
하얀 기둥 너머 하울프 백작이 다가와도 좋다, 허락을 내렸다. 리브가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테이블로 다가갔다.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울프 백작.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까만 뒤통수가 보였다. 별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하게 여문 밤하늘 같은 흑발을 발견하자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언제까지 머물 예정이라고?”
하울프 백작의 음성은 언뜻 듣기에는 매끄러우나 자세히 들어 보면 골치 아프게 됐다는 기색을 솔솔 내풍기고 있었다.
예비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려 둔 후, 리브가는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하게 차를 올렸다. 진한 다홍빛 다즐링으로부터 올라오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글쎄. 한동안 돌아오는 건 꿈도 꾸지 말라시더군.”
억지로 찻잔에 고정해 둔 시선이 덜컥 흔들린 건, 그리워 기억으로나마 더듬기에 여념 없던 목소리가 귀를 찌른 순간이었다. 물론 그사이 변성기를 겪은 듯 변화는 있었다. 하지만 그 수준은 조금 더 굵고 나직해진 것이 전부였으므로 리브가의 그리움을 고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나를 어디 처박아 두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나셨던데. 그간 눈에 거슬려서 어떻게 가만 놔두셨나 싶을 만큼.”
“어르신이 오죽 급했으면 그러셨겠어. 너도 참. 사고를 쳐도 하필이면 그런 대형 사고를 쳐서는.”
리브가는 차를 따르며 은연중에 곁눈질을 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옆, 고급스러운 벨벳 소파 위에 앉은 인영의 몸은 제법 커다랬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고고하게 꼬아 앉은 다리였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미세한 무늬가 새겨진 구두는 번지르르한 윤기가 흘렀다.
곁눈질의 범위가 차츰 넓어져 갔다. 팔걸이 위. 매끈한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깃펜처럼 꽂힌 시가가 있었다. 불씨가 지르르 번지는 필러의 틈새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연기. 평상시와 다른 이질적인 냄새의 정체가 저것임을 리브가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과거의 행적을 찾아보려는 호기로운 탐색을 거기서 그쳐야 함을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리브가는 궁금했다. 그를 조금만 더, 살펴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시선을 무책임하게 내던지듯 움직였을 때.
그녀는 소년이 막 유괴되어 나타났던 순간 이후, 그리워하던 그 얼굴을 처음으로 똑똑히 보았다.
약 두 달이란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리브가는 단 한 번도 소년이 어떠한 눈동자 색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고귀한 것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보게 된 금안은, 태양도 감히 제 존재를 드러내지 못할 만큼 오색영롱했다.
“수도는 지금 한참 떠들썩하겠군.”
“안 그랬던 적이 있나. 거긴 늘 시끄러워서 탈이지.”
“그 소란의 중심에 있는 네가 할 말은 아닌 듯한데.”
목이 타 단숨에 비운 찻잔을 내려놓은 하울프 백작이 아닌 척 타박했다. 발렌틴은 대답 대신 시가를 물었다. 붉은 입술 사이에 끄트머리를 밀어 넣었다가 빼내니 궐련의 향이 너른 실내를 풍부하게 채웠다. 정갈한 다즐링의 향은 그 앞에서 무력하게 꼬리를 말듯 흐지부지 흐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님 설교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는데 잘됐어. 한동안 여기 썩어 빠져 있지, 뭐.”
“아직도 어르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나 보구나, 너는.”
한탄처럼 읊조리던 하울프 백작, 퀄린은 순간 제게로 돌아오는 냉엄한 눈길에 흠칫했다. 아둔하게도 그 따가운 시선을 체감한 후에야 제가 괜한 말을 꺼냈음을 깨달았다.
흠흠, 그는 공연히 목을 가다듬으며 빈 찻잔을 하녀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얼른 따라 주리라 생각한 차는 도통 기다려도 대령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퀄린은 하녀가 제 맞은편, 그러니까 잘난 로트링겐의 막내아들을 보고 넋이 나갔음을 알아챘다. 허탈한 실소가 말릴 겨를도 없이 입술을 비집고 샜다.
“이봐.”
슬쩍 눈치를 주니 얼빠져 있던 하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나온 반응일 터다.
퀄린은 눈을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잘나긴 정말 끔찍하게 잘났지.’
발렌틴 로트링겐의 미모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두 눈이 정상으로 달려 있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지, 두 눈이 뭐야. 저 새끼는 어쩌면 애꾸눈도 꼬셔 낼지 몰라……. 요컨대 문득 든 허황한 생각마저 타당성을 불러일으킬 만큼 완벽한 얼굴이다 이 말이었다.
지금 하녀가 막 보인 표정은 백작에게 낯설지 않았다. 오늘 아침, 발렌틴의 귀환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후다닥 뛰쳐나와 구석에 숨어 그를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던 하녀들의 것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기에.
개중에는 꺅, 하고 감탄하는 여자도 있었고 발그레하게 물든 홍조를 차마 가리지 못한 여자도 있었다.
발렌틴은 그런 시선의 노출에 익숙한 듯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다. 뭐랄까, 퀄린은 오히려 그 덤덤한 반응이 자신을 조금 더 초라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성깔은 몰라도 때깔 하나는 죽여주는 이 사내와 있으면 이따금 겪는 남자로서의 패배감이었다.
물론 그런 열패감을 느낀다고 해서 어쩔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첫 만남 때 미처 더러운 성질머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곱상하다 어쩐다, 허튼소리를 늘어놓았다가 녀석에게 턱주가리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비참한 심정을 애써 삼키며 퀄린은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차나 좀 더 따라 주지…….”
“아, 죄, 죄송합니다.”
무미건조한 낯빛의 발렌틴이 눈썹을 꿈틀거린 건 그때였다.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리브가를 향해 돌아갔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퍼진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시선이 다소 탁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백작의 지적에 당황한 리브가는 제게로 꽂힌 시선에 더더욱 긴장 상태가 되었다. 잘게 떨리던 심장이 지진이라도 인 양 요란하게 쿵쿵댔다. 건침이 절로 꼴까닥 넘어갔다. 저를 응시하지 않을 때는 마냥 어여쁘게 비치던 색깔이 정면으로 마주치니 묘하게 선득했다.
발렌틴의 시선은 퀄린이 알아챌 만큼 제법 오래 유지됐다.
“이만 나가 보게.”
그녀를 그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퀄린이었다. 발렌틴의 지랄 맞은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괜한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발휘한 호의였다.
리브가는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는 쏜살같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발렌틴의 시선이 유독 길게 그 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너 말이야…….”
발렌틴의 눈길이 여자를 향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게 성적인 의미든 아니면 다른 의미로든.
차라리 후자면 낫다. 전자라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졌다. 저 망나니가 여자와 얼마나 눈살 찌푸려지게 노는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수도에서도 이미 그와 관련하여 단단히 주의를 받은 바였다. 아랫도리를 단속시키지 않아 웬 여인이 어느 날 덜컥 공자의 애를 뱄다고 찾아오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했다.
그 불안감을 표출하는 것처럼 퀄린이 마른세수를 하며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여기서도 그러고 지낼 건 아니지?”
“그러고 지내는 게 뭔데.”
다 알면서 되묻는 어조가 여상했다. 퀄린은 치솟아 오르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아낸 후 말을 이었다.
“또 이상한 파티 벌이면서 놀 생각이냐고. 수도에서처럼.”
발렌틴은 대답 대신 시가를 물은 잇새를 부드러이 휠 뿐이었다. 긍정이나 다를 바가 없는 신호에 퀄린은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무지근한 두통이 이는 것처럼 발렌틴은 이따금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결코 호들갑스럽지 않은 행동은 상당히 귀족적으로 비쳤으나 이상하게도 그건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가시 같은 긴장감을 떠안겼다. 특히 미치광이처럼 구는 그의 일면을 아는 자라면 더욱이 그럴 것이라.
바로 퀄린 같은 이, 말이다.
“거기서 사고를 치고 왔으니 조금은…… 자숙할 필요성이 있지 않겠나?”
“아까부터 나보고 자꾸 사고를 쳤다 어쩐다 하는데,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퀄린.”
“…….”
“사고는 약을 조절도 안 하고 처먹다 뒤진 병신 같은 새끼가 친 거지, 내가 낸 게 아니야. 인과 관계는 올바르게 정리하라고 존재하는 거 아닌가?”
“…….”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남이 들으면 내가 직접 그놈 멱이라도 딴 줄 알겠어.”
유려한 입술 선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연기와 함께 날 선 말이 툭툭 쏟아졌다. 특유의 예민하고 더러운 성정이 튀어나오려는 조짐이 보여 퀄린은 입을 합 다물었다.
발렌틴이 생전 오지도 않던 영지로 내려오게 된 경위는 하나였다. 그가 주최한 은밀한 사교 모임에서 귀족 자제 중 하나가 숨을 거둔 까닭이었다.
사교 모임.
언뜻 듣자면 바르고 올곧은, 누구나 동경할 만한 귀족가의 웅장하고도 고상한 만남을 상상하리라. 그러나 실상은 술과 약에 진탕 빠져 허우적대며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는 퇴폐적인 온상지를 의미했다.
이곳, 첼레스테 제국에서는 마약과 관련된 모든 취급이 엄연한 불법이며 중죄에 속했다. 그러나 불법은 법이 조명하지 못하는 음밀한 틈새에서 얼마든지 자행되기 마련이었다. 빈곤층이 주를 이루는 슬럼가는 물론이거니와 제국 내 한자리를 차지하는 고위층 역시 매한가지였다.
사람은 아무리 이지를 지니고 있다 한들 결코 쾌락을 떼어 놓고 살 수 없는 동물이었다.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욕망은 빈곤하든, 부유하든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제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일 뿐. 그래서인지 잃을 것이 없고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견뎌 내는 빈곤층과 달리 귀족들은 몸을 사릴 줄 알았다. 한철의 욕망를 만끽하고자 저의 소유물들을 쉽게 내버릴 귀족은 없었다. 아니, 있기야 하겠으나 그 수는 무척 적을 터였다.
그리하여 상위 계층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마약의 범위는 무척이나 협소한 편이었다.
적어도 과거에는 그러했다. 현재에 이르러, 그 욕망의 판을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시킨 게 바로 발렌틴 로트링겐이었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자가 아닌 귀족가의 자제가.
그럼에도 사교 모임의 주최자인 발렌틴이 수도를 유유히 빠져나와 이곳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뻗치는 위험한 영향력이 수도 내에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증거였다.
그가 알선한 질 나쁜 호기심에 저 밑바닥까지 중독되어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든든한 뒷배가 많았다. 그에 더하여, 왕당파의 대표 주자 격인 로트링겐 가(家)의 권력이 더해졌으니 아무리 사람이 죽었다 한들 그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마찬가지로 사교 모임 중 일어난 사고는 유야무야 묻혀 버릴 것이다.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발렌틴은 그리 말했지만 퀄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고.
그의 말대로 그날 새벽 광란에 휩싸인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소요는 누군가 말릴 틈도 없이 벌어졌을, 사고였으리라.
다만 짜인 극본처럼 누군가의 손아귀 아래에서 일어난, 다분히 고의적인 사고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뿐이지. 그 누군가로 짐작되는 이가 바로 퀄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퀄린은 영주 대행인의 자리를 지키느라 수도에 없었으나, 끔찍한 난교 파티가 벌어졌을 그 현장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다.
허파에 바람 빠진 듯 실실 웃어 대는 남자들. 그들이 연신 들이켜는 호박색의 술. 주변에 즐비하게 쌓인 수많은 약포지에는 하얀 가루가 담뿍 들어 있을 것이다.
그 가루를 잔 안에 넣어 섞은 여자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어느 남자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을 것이고. 일찍이 약에 취해 헤롱거리던 남자는 그런 여자의 뒤로 발정 난 수캐처럼 따라붙었으리라. 아, 그들은 모두 눈이 반쯤 풀리고, 헐벗은 나체였을 거라는 추측도 함께였다.
그게 바로 퀄린이 기억하던 발렌틴식 ‘사교 모임’이었다.
그 안에서 발렌틴은 제왕처럼 군림하여 무료하고 따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여자가 무릎에 걸터앉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약이면 약, 술이면 술, 섹스면 섹스, 먹이고 요구하는 대로 행하며 누구보다도 방만하고 난잡하게 향락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을 터.
그러다가 일정 이상의 쾌락으로 뇌가 완전히 뭉그러졌을 때.
또 시답잖고 이상한 내기를 벌였을 테다. 내기의 대가는 다음 모임에 참여할 권한을 부여하는 초대권일 수도 있고, 혹은 거액을 치르고도 살 수 없다는 희귀한 술이 될 수도 있다. 여하간 이성적인 판단으로 보기엔 하등 쓸모없는 대가를 토대로 내기를 종용한 그는 한 발짝 떨어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테다.
아마 이번에 일어난 사고가 그러한 인과였으리라고, 퀄린은 감히 단정 지었다.
그러니까 발렌틴은 직접적으로 남을 해하지는 않았어도, 결국엔 그렇게 되도록 부추긴 범인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였다. 지금같이 저 공허한 눈빛으로, 제가 만들어 낸 사태를 미적지근한 유흥거리 보듯 관망하고 있었을 테니까.
“너 이왕이면, 여기 내려온 김에 마음을 좀 달리 먹어 보는 건 어떻겠어?”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시가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놓은 발렌틴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무슨 마음?’ 그 반문을 고갯짓으로 대신하는 행색이 눈살 찌푸려질 만큼 거만했다. 그러나 대들 용기는 없었기에 퀄린은 얌전히 말을 마저 꺼냈다.
“지금이라도 약 끊고…….”
그의 본론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렌틴이 실소를 터뜨렸다. 애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웃음이다. 그는 상체를 기울여 찻잔 위에 시가를 가져다 댔다.
탁탁 터는 손길을 따라 검은 재가 다즐링 속으로 하강했다.
“왜?”
투명하고 진하여 아름답던 찻물이 순식간에 더럽게 오염되었다.
“이 좋은 걸 왜 끊으라는 거지?”
진정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으며 퀄린을 향해 치들린 금안이 반질거렸다. 보통 사람의 눈에 깃든 이채는 건전하고 청명한 빛을 내지만, 발렌틴의 것은 짐작하기 버거운 느낌을 몰고 왔다.
기억하기로, 그는 초면에 제 턱을 날릴 때에도 저렇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건 온건한 의지에서 깃든 이채가 아니라 신랄한 광기에 가까웠다.
원래 미친놈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운 꼴 볼까 봐 안 건드리는 거지. 음. 그럼. 예나 지금이나 범접할 수 없는 성정이라 여기며 퀄린은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의 인고가 짙어져 갈 때 발렌틴은 물끄러미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까만 재가 둥둥 떠다니는 진한 다즐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