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213. 마왕 없는 마왕군
* * *
평소, 가진 힘의 30퍼센트만 발휘하는 한아람은 별다른 생각 없이 이주하와 소라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암시장 지하층 공략의 여파로 인해 쉬고 싶은 마음이 1200퍼센트에 달했던지라 뭘 하든 그다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냥 시키니 한다는 느낌으로 소라의 정화작업을 따라다니며 주하와 소라가 표준어를 쓰지 않을 때마가 여동생인 한아름을 놀려 먹듯 채점을 하며 놀리고 있었다.
그런 별다른 위협도 없고 평화로운 정화작업이었다. 곧 있으면 다시 베이스캠프가 있는 장소로 돌아가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대충 핑계 대고 지상으로 올라가 낮잠이나 실컷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크아하하!!! 듀얼이다!! 죽고 죽이자!!!”
갑작스럽게 나타난 금발의 사내가 마치 당장에라도 싸우자는 듯이 영어로 듀얼이라 외치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시발.”
한아람은 욕을 내뱉었다. 욕이 안 나오게 생겼는가. 평화롭기 그지없던 나락 정화시간에 웬 미친 미국 놈들이 나타났으니.
더구나 영어를 쓰는 걸로 보아하니 용사인지 뭔지 하는 놈의 부하 같았다. 이미 적들의 존재를 조준에게 전해 들어 대강 알고 있었던 한아람은 빠르게 저들이 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었다. 머뭇거릴 틈 따윈 없었다.
상대가 진심으로 죽일 각오를 하고서 검을 휘둘렀으니까.
후우욱!!
바람이 불어온다.
가로막는 모든 걸 찢어 발길 흉포한 바람이.
푸화악!!!!
콰자자자작!!!!
“우어어어!!!!”
“키샤샤!!!”
용혈기사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참격은 검기를 동반한 칼바람이 되어 날아들었고, 전열에 서 있던 버섯인간들과 기생목 숙주, 칠흑바퀴의 새끼들이 광풍에 휘말려 모조리 갈려 나갔다.
촤하악!!
푸욱!! 푸우욱!!!
벽면에 붙어있던 내장도 찢겨나가 누런 위액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찢어진 육벽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바닥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크하하..!”
쏟아져 내리는 위액과 피를 맞으며 용혈기사는 미소 지었다.
그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선 여인을 보며 제법 싸울 줄 아는 인간을 만났다는 생각에 절로 흥분됐다.
그때 세 사람의 클래스를 대강 확인한 마이클이 생각했다.
‘저 셋 다 하이클래스 각성자로군. 보아하니.. 전부 노예상태인데.. 자의로 싸우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러니 여기서 죽이는 건 아까운 짓이지만... 살려서 데려갈 시간이 없다...’
마이클은 데몬 슬레이어와 신토미코, 구미호라는 생전 처음 보는 클래스를 가진 동양인 여성 세 명이 탐났다. 저들의 노예상태를 성녀의 스킬로 해주해주고 동료로 받아들이고 싶단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허나 적들에게 존재를 들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 마이클은 저들을빨리 죽이고 가는 편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빨리 처리하고 여길 뜹시다. 시간이 없어요.”
마이클은 일행들에게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말했다. 빠르게 세 사람을 죽이고 떠날 생각이었다.
“커억.... 쿠어억...”
한편 한아람은 옷이 죄다 찢겨나가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피를 토했다.
그녀는 용혈기사가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앞으로 치고 나가 이주하를 뒤로 끌어당겼다. 또한 악마화와 자체 강화 스킬들을 중첩해 걸고서 전신에 흑갑을 둘러 놈의 광풍을 받아 냈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소라와 이주하를 홀로 지켜낸 것이다.
그 대가로 그녀는 온몸이 난자당했으며 한쪽 눈이 날아가 버렸다. 왼쪽 시야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통에 머리털이 다 빠질 것 같았다.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나간다.
피가 모자라다. 어지럽다.
‘살아서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직 죽기 싫은데... 졸리네.. 자고 싶다..’
잡생각이 이어진다. 허나 그마저도 멈추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그녀는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갔다. 하다못해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 했으니까. 만약 지금 물러섰다간 정말 개죽음뿐이란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한아람은 이를 꽉 깨물고서 중얼거렸다.
“너희들.. 도망가..”
용혈기사의 뒤로 하나 둘 걸어 나오는 외국인들의 기세 또한 심상치 않았다.
분명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강자들이겠지. 이대로 싸웠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게 분명했다.
그러니 한아람은 두 사람에게 도망가라고 말했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그녀는 이때까지 도망칠 수 있다면 무조건 도망치는 삶을 살아왔다.
부모의 방임으로부터 도망쳤고, 삶의 무게로부터 도망쳤으며, 남동생 한태양의 죽음에서도 도망치고 타협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도망치기를 바랐다. 자신은 이미 도망가기 글렀으니 남은 두 사람이라도 도망쳐서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야 이주하와 소라는 여동생 아름이와 나이가 비슷해 서로 꽤 친했으니까.
자신이 죽은 자리를 잘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 도망가면.. 아람 언니.. 분명 죽습니다!! 다들 오고 있으니까 조, 조금만 버티면 될 것 같아요.”
길드 채팅으로 적들의 존재를 알린 소라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항상 자신을 잘 챙겨 준 한아람을 버리고 갔다간 계속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만 더 버티면 본진에 있을 팀원들이 올 거란 생각에 한아람을 향해 치유의 술법을 걸려고 했다.
그때 그녀를 향해 단검이 날아왔다.
“꺄아아!!!!”
소라의 허벅지에 틀어박힌 십자가 모양의 단검.
이단 추적자 카이사르가 집어 던진 석화단검이었다. 그리고 석화단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곧 단검이 박혀든 부위부터 시작해 소라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퍼뜩 정신을 차린 이주하는 돌처럼 굳어 버린 소라를 보며 발작하듯 고함을 내지르곤 카이사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공을 날듯이 뛰어오른 그녀의 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곧 구미호로 변한 이주하는 양손에 커다란 불길을 피워 올렸다.
이주하는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불꽃을 때려 박을 생각이었다.
“주께서 보우하사!!! 축복이 그대를 감싸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주문.
성녀의 결계가 빛과 함께 카이사르를 감쌌다.
쾅!!!
“이런!!!”
이주하의 공격이 결계에 가로막혀 카이사르를 꿰뚫지 못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야수 사냥꾼 킬리언이 총에 마탄을 장전했다.
“짐승이 끼여 있었군.”
그는 구미호의 꼬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좋은 목도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의 본능에 가깝게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푸확!!!
쏘아진 마탄.
미처 피하지 못한 이주하의 이마에 탄환이 박혀 그대로 머리를 꿰뚫고 뇌를 휘저으며 관통했다.
그녀의 뒤통수가 수박 터지 듯 박살 나며 피와 뇌수가 쏟아져 나왔다. 쓰러진 이주하의 몸이 꿈틀거렸다.
“주.. 주하야... 으아아아!!!!”
한아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그녀는 한눈을 팔아선 안 됐다.
“어딜!!!”
용혈기사의 대검이 한아람을 내려찍었다.
방심한 한아람은 날아드는 대검을 피할 수 없었다.
콰직!!!
“끄아아아!!!!!”
그녀의 양팔이 잘려 나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곧 용혈기사는 비명 지르며 무릎 꿇은 한아람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좀 재밌을 것 같았는데. 너도 별거 없구나.”
푸드드득!!!!
한아람의 머리가 압착되어 터져 나갔다. 반항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머리가 박살 나고 말았다.
용혈기사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이 종료됐다.
“뜻밖에 수확이로군.”
야수 사냥꾼은 널브러진 이주하를 향해 다가 갔다. 그러곤 사냥용 단검을 뽑아 그녀의 여우 꼬리를 잘라 냈다.
이제 남은 것은 석화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 소라뿐.
“그대에게 별다른 악감정은 없지만..”
거인 사냥꾼 단태가 양손에 너클을 끼우고선 딱딱하게 굳어 버린 소라를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쾅!! 쾅!! 쾅!!!!!
빠드드득!!!
소라의 몸이 잘게 으깨져 가루가 되어 박살 나버렸다.
전멸이다.
한아람, 이주하, 나나세 소라는 3분을 넘기지 못하고 전원 사망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대현자 마이클이 모든 분석을 끝내곤 피곤한 목소리로 일행들을 불렀다.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환영입니다.”
딱.
마이클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이주하가 걸어 둔 스킬이 해제되었다.
순식간에 환영이 사라지며 죽었던 시체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애초에 죽지 않았으니 흔적이 남았을 리가 없었다.
“하아.. 하아.. 이, 이걸.. 들키네...”
코피를 쏟아 내며 바닥에 주저 앉아 마이클과 용사파티를 노려보고 있는 이주하.
그녀는 스킬 사용의 반동에 몸이 떨렸다.
사실 석화단검에 소라가 찔려 이주하가 폭주한 것처럼 위장해 카이사르에게 돌진했을 때까지는 전부 진실이었다.
환술은 그다음 펼쳐졌으니.
이주하의 몸에 불꽃이 휘감기고, 화려한 이펙트로 인해 용사파티의 이목을 집중됐을 때. 그때부터 그녀가 가진 최강의 환술 ‘염상일몽’이 시작됐다.
무조건 구미호가 피워 올린 염상(타오르는 불)을 본 이들만 대상이 된다거나, 스킬 사용 중에는 움직일 수 없다거나, 속고 있는 대상들 중 하나라도 충격을 받으면 전부 환술이 풀리는 등 여러 제약이 많지만, 일단 한 번 성공 시키면 용혈기사의 눈마저 속여 버리는 극상의 환술이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던 이들을 3분이나 속였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스킬이 얼마나 뛰어난 지 증명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마이클이 없었다면 2분 정도 더 붙잡아 둘 수도 있었겠지.
“허.. 하하하하!!! 우리 전부의 눈을 속이다니..”
용의 눈을 가지고서도 환술하나 간파해내지 못했다는 허탈함에 용혈기사 아란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한 마리의 불여우에게 찬사를 보냈다. 상대를 얕잡아 보고 방심했기에 그들의 수작을 미리 간파하지 못했다.
오만한 성격을 가진 그였기에 발생한 빈틈이었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최악의 최악만을 염두해 두는 마이클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니까.
“흐... 시발.. 승냥이 새끼들아.. 도망이나 가라. 뒤지기 싫으면..”
움직일 힘까지 전부 환술에 쏟아부은 이주하는 자신의 환술에 완전히 놀아난 이들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그녀의 비웃음에 분노한 카이사르가 철퇴를 뽑아 들었다.
“죽어라!! 이단!!!”
이제야 비로소 미뤄뒀던 진짜 죽음이 다가왔다.
이주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때...
샤샤샤삿..
체셔!! 저쪽 방향이야!! 사선이다!! 쏴!!!
에일라의 외침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또한...
투다다다다다!!!
푸화아악!!!!
멀찍이서 쏘아진 레이저 게틀링에 육벽이 터져 나갔다.
둥근 모양의 길이 생겼다.
그 길의 너머에서 보랏빛 보석으로 이주하의 위치를 알아낸 에일라와 체셔가 서 있었다.
길드 채팅을 받자마자 그녀들은 나머지 전력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왔다.
또한 칠흑바퀴도 진홍지대에 퍼져 있던 모든 새끼들을 이끌고 왔으니...
“샤사사사삿!!!”
수만 마리의 바퀴 떼가 개통된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제기랄!!! 도망가야 합니다!!”
상상 이상으로 빨리 자신들을 찾아낸 적들을 보며 마이클은 경악했다. 동시에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기 전에 도주하자고 소리쳤다.
“히이잉!!!”
그리고 그때 바퀴들을 짓밟으며 해골마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마이클과 닉, 안나는 무조건 살려야 한다. 이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들의 것이기에, 그들이 전멸하면 승산이 없었다.
“먼저가라!! 마이클!!!”
“킬리언!!!”
“뒤따라 가겠다!!!”
결국 적들을 막기 위해 남기로 한 야수 사냥꾼은 거침없이 달려오는 듀라한을 향해 마탄을 쐈다.
“키샤아!!!”
허나 벽과 천장, 바닥을 기어오던 벌레들이 뭉쳐 들어 그의 공격을 상쇄했고 방향이 어긋난 마탄에 해골마와 듀라한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으랴!!”
그렇게 듀라한이 해골마를 이끌고 통로를 통과하자마자 너클을 착용한 단태가 해골마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자작!!!
엄청난 충격파에 해골마가 박살 나며 나뒹굴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듀라한도 충격에 휘말려 나가떨어졌다.
그것으로 듀라한의 역할은 끝났다.
그는 애초에 조준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을 적진 한가운데로 운반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으니.
“하나, 둘, 셋... 총 아홉.”
해골마에서 뛰어내린 검객은 적들의 숫자를 셌다.
그러곤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자 영혼이 짓눌릴 듯한 살기가 방출됐다.
“이.. 무슨...”
용혈기사는 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의 살기에 전율했다.
킬리언은 불안감을 느꼈고, 단태는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한편 적들이 오거나 말거나 이주하의 머리를 박살 내려던 카이사르는...
촤하악!!!
“끄아아아!!!!!”
순식간에 팔이 잘려 나갔다.
이단 추적자의 비명이 퍼져나간다.
동시에 다시 한번 살기가 몸을 휘감았고 현장의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움직였다간 그대로 목이 잘려 나갈 거란 사실을.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는 놈은 죽는다.”
팔어스의 등장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