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212. 나락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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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크기의 높다란 돌기둥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뻥 뚫린 공간을 나와 일행들은 한참이나 걸었다.
정말 나락의 유적지엔 아무런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토착 생물을 모조리 멸절시켰을 거란 헨리의 주장에 걸맞게 나락의 유적지엔 아무런 생명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버섯인간들과 칠흑바퀴 본체를 데리고 왔는데 별로 쓸모가 없어 보여서 다시 거점에 돌려보냈을 정도였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 어귀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이 우리의 몸을 천천히 적셨고 생글생글 피어난 이끼들과 말라 죽은 식물을 뿌리들이 우리의 발목을 간혹 붙잡았다. 전체적으로 조금 눅눅하고 차가운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그리고 삭아버린 병장기들과 곳곳에 널려 있는 뭔지 모를 지성체의 뼈다귀들이 한때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이들이 있었음을 알려 줬다.
‘정체불명의 종족들이 남긴 흔적들로 가득하네..’
대충 보아하니 이곳에 살았던 이들은 나름의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를 잃고 폭주한 헨리의 손에 전부 죽은 모양이었다.
‘이때까지 봤던 곳들 중에서 제일... 정상적이고 아름다운걸...’
암시장부터 오류들로 가득하던 이면세계나 벌레천국인 실종자의 숲, 꼬여 있는 전율저택, 암시장의 더러운 지하 등등. 이때까지 내가 돌아다닌 장소는 하나같이 더럽거나 역겨운 곳들 뿐이었다.
그래서 별 기대 안하고 있었는데 유적지는 조금 스산하고 음침하다는 점만 빼면 굉장히 멋있었다. 무슨 외국의 관광지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너무 평화로우니 오히려 조금 불안한걸...’
한편으론 나는 아무런 사건사고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 유적지를 둘러보며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그야, 분명 사고가 터져도 서너 번은 더 터졌어야 정상인데 이상하리만치 여기까지 도달하는 길이 순조롭고 쉬웠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에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나의 불안감은 길드 채팅이 먹히지 않게 되자 더욱 커졌다.
육벽으로 뒤덮여 있던 진홍지대를 벗어나 너무 멀리 와서 그런지 나락의 유적지로 들어서니 더 이상 유혜지의 길드 채팅을 사용할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그저 헨리의 인도에 따라 유적지 안을 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부디 우리가 없는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행들은 그저 평화로운 나락의 유적지에서 잡담을 나누기 바빴다.
“김치찌개는 역시 참치잖아요. 그쵸?”
“아니지! 은지 언니! 김치찌개엔 돼지고기 넣는게 더 맛있어.”
“나는 둘 다 맛있더라.”
“에이. 오빠, 그래도 딱 하나만 골라야...”
“저는 오빠 말을 존중해요. 저도 둘 다 맛있거든요.”
“앗..! 야!! 강화영!! 태세전환 뭐야!! 저도! 저도 다 맛있어요 오빠!”
“은지 언니.. 이미 늦었어.”
“이게!”
은지와 화영이가 나의 오른쪽 팔과 왼쪽 팔에 달라붙어 재잘재잘 떠들며 장난쳤다. 주제는 주로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둘의 취향이 너무 달라서 놀랐다. 참고로 나는 그냥 주면 잘 먹는 타입이라 둘 중 누구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워서 계속 중립적인 답변만 늘여 놓았다.
“킁킁.. 흐음..”
“어. 하린아. 그거 지지야. 먹으면 안 돼.”
“아니, 오빠. 나도 그쯤은 아는데.. 너무 개 취급하지 마요..”
“아.. 하린아, 미안..”
하린이는 마치 주인과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유적지 곳곳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다 간혹 죽은 지저인들의 뼈다귀에 관심을 보여서 중간중간 먹으면 안 된다고 말했더니 발끈한다.
‘그런데 하는 짓이 너무 개 같은걸...’
목줄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 그거.. 괜찮을지도..’
꼬리와 귀가 달린 이누미미라 할 수 있는 하린이에게 개 목줄을 달고.. 나체로 산책하는 상상을 잠시 해봤다.
‘가만 보니.. 예전에 하린이에 24시간 동안 풋잡 받기로 했었던 것 같은데..’
사는 게 바빠 까먹었다. 하린이도 중간에 일주일 정도 다른 공간에 가 있어서 시간이 없기도 했고. 다음에 하린이랑 진득하게 놀 때 부탁해 봐야지.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워낙 많아서 말이지..
“아니, 그런데 조준 오빠. 울 언니 저한테 너무 일을 많이 떠넘겨요.”
“그래? 아람이가.. 좀 잠도 많고.. 살짝 게을러 보이긴 하지.”
아름이는 평소에 친언니인 아람이에게 품고 있던 불만들을 나에게 토로 했다. 지금 아람이가 옆에 없으니까 무슨 봇물 터진 것 마냥 불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가만 듣고 있자니 대부분의 불만은 언니가 자신에게 짬을 때린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듣다 보니 아람이가 동생인 아름이를 많이 놀려 먹는구나 싶었다. 가만보면 아람이는 의외로 장난기가 많은 것 같다. 그에 반해 동생인 아름이는 건들면 돌아오는 반응이 꽤 찰져서 나도 좀 괴롭히는 편인데.. 아람이도 만만찮게 동생에게 질척거리며 괴롭히나보다.
‘하긴.. 아람이는 약간.. 시스콘이니까..’
아람이는 아름이를 엄청 좋아한다. 나와 거의 동급으로 여동생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남동생이었던 한태양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메르는 요즘 어때?”
“응? 나야 뭐.. 주인의 명대로 한글 가르친다고 바쁘지. 외국인의 비중이 꽤 높아져서 말이야.”
“아하.. 이거 일을 너무 많이 시킨 것 같아서 미안 하네..”
“괜찮다, 주인.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인간들에게 지식을 내려주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지.”
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내가 없는 동안엔 거의 모든 잡일을 하진성이 다 도맡아 처리하고 중대사는 메르가 전부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런데 헨리.. 정말 다와 가는 거 맞습니까?”
“물론이지. 슬슬 이 근처일 텐데...”
“아니.. 한 시간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그, 그게. 조금만 더 돌아다녀 보게. 곧 나올 거야!”
헨리는 나락의 유적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몸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모종의 저주 때문에 그의 힘으로는 몸의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 가능할 뿐 가까워지면 오히려 찾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하린이의 후각을 빌리기로 했다. 헨리의 냄새를 인식시키고 몸통을 찾게 만드는 거지... 왠지 성인 여성한테 사냥개에게 시킬법한 일을 시키니 뭔가 배덕감이 느껴졌지만 하린이는 일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기뻐 보였다.
아니, 그냥 나랑 유적지 산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 보인다. 앞으로 자주자주 산책을 데리고 나가야겠다..
“킁킁.. 어! 저기다!!”
코를 벌름거리며 땅바닥의 냄새를 맡던 하린이가 한쪽 방향을 쳐다보며 소리치더니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봉을 달리는 야수답게 엄청난 속도로 헨리의 몸을 추적했다.
“얘들아, 뛰어!!! 저거 잡아야 해!!”
“알겠어요!!”
넋 놓고 보고만 있다간 놓칠지도 몰랐기 때문에 우리도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따라가며 살펴본 헨리의 몸통은 다 낡아 빠진 흑의에 양손에는 시미터를 들고 있었다.
“끄아아!!!”
“이런!! 하린아!!!”
먼저 헨리의 몸통에 도달한 하린이의 비명에 우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멀리서 보아하니 몸통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으려다가 팔이 베인 것 같았다.
‘하린이도 빠른 데.. 그보다 더 빠르다니..’
헨리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도 어려운 속도였다. 혼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다. 다굴이 필요하다.
“하린아!! 괜찮냐!!”
“주군!! 이 녀석..! 더럽게 빨라!!! 그리고 빈틈이 안 보여!!”
하린이의 팔은 조금 깊게 베여 있었다. 허나 그녀는 고통을 참고서 검을 휘두르는 헨리를 피해 다니며 그가 가려는 진행 경로를 막았다.
허나 슬슬 역부족 같다. 헨리의 몸통이 하린이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시미터 두 자루를 빈틈 없이 휘둘러대며 검막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저 몸뚱이 어떻게 못합니까?”
내가 급하게 묻자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헨리가 암담하게 대답했다.
“일단.. 제압해야 해. 이미 홀로 돌아다닌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조건 반사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을 베어 가르고 있는 거야..”
“이런..”
결국은 쓰러질 때까지 죽이지 않고 잡아 패라는 소리였다.
“얘들아!! 들어가자!!”
“예!!!”
“우오!! 가자!!!”
은지와 화영이는 다친 하린이를 뒤로 빼내곤 둘이서 미친 듯이 헨리의 몸통을 몰아붙였다. 아름이와 메르 또한 치고 들어갈 틈을 찾기 시작했다.
“하린에 조금만 참아.”
“으윽... 으아아악...”
나는 그사이 얼른 하린이의 팔을 차오르는 살점으로 치유했다. 피가 보글거리더니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그만큼 고통도 컸는지 하린이는 결국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이제 다 됐어.”
“후우.. 후우.. 읏챠..”
하린이는 상처가 치료되자마자 다시 일어섰다.
“바로 가게?”
“네!”
짧은 대답과 함께 그대로 돌진하는 하린이. 그사이 헨리의 몸통과 싸우고 있던 은지와 화영이가 슬슬 밀리기 시작했다.
“죽어!!!”
깡!!!
“끄아악!! 이 새끼가!!”
은지가 휘두른 도깨비왕의 대검이 시미터와 충돌하더니 뒤로 퉁겨져 나왔다. 심지어 그 틈을 노려 등 뒤를 공격한 화영이의 스킬도 막혔고 아름이와의 공방에선 모든 움직임을 파악했다는 듯이 역공을 가했다.
“이런 미친!!!”
“으아!!”
세 사람이 뒤로 밀려나자 메르와 하린이가 뛰어들었다. 하린이가 헨리의 앞에서 그를 견제했고 메르가 다짜고짜 몸통을 세로로 양단할 기세로 헨리의 등에 낫을 휘둘렀으나 그 또한 피해냈다. 낫의 궤도까지 정확히 파악하고선..
‘아니,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건가? 감각이 저렇게 뛰어나다고..? 머리는 여기 있는데...? 설마.. 피부로 공기의 흐름을 읽어내는 건가.. 아니야..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는데.. 그런 짓이 가능할 리가..’
거의 철옹성을 공략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틈이 안 나온다. 마치 자기 상태를 탑 뷰 시점으로 관찰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다 캐치하는 것 같다.
“음.. 이거... 묘하게.. 팔이 저린 것 같은데. 어째서 몸의 감각이...”
그때 팔이 저린 것 같다는 헨리.
‘잠깐.. 혹시 어쩌면...’
나는 헨리의 머리통을 향해 소리쳤다.
“헨리! 눈 감아요!”
“응?”
“당신의 시야가 지금 몸통에 공유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눈 감으시라고!”
“아! 이런!! 알겠네!”
헨리는 서둘러 눈을 감았다. 또한 소리로 움직임을 파악할까 싶어 나는 그의 귀를 휴지 조각으로 막았다. 심지어 공기의 흐름마저 읽어낼까 싶어서 그의 머리를 급하게 붕대로 휘감았다.
그러자 헨리는 이제야 등 뒤를 완벽히 막아 내지 못하고 공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더니 서로의 감각이 기묘하게 연결되어 버렸구나..’
머리와 몸이 따로 논지 너무 오래되어서 헨리의 머리가 몸통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오니 감각이 반쯤 연결되어 서로도 알지 못한 채 우연히 공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헨리의 머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보니 그의 시야가 자연스레 몸 쪽으로 공유되어 전 방위 감각을 펼친 괴물마냥 모든 공격을 다 막아 내 버렸단 거지.
어쨌든 헨리의 머리를 붕대로 휘감아 오감을 제한시킨 덕에 움직임이 조금 굼떠졌다.
“지금이다!! 반쯤 죽여 버려!! 팔다리 잘려도 내가 붙일 수 있으니까!!!”
“파, 팔다리를 자른다고!!! 아, 안 돼!!!”
헨리가 소리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은지는 그림자로 물든 도깨비 왕의 대검을 휘둘러 헨리의 몸통을 내려쳤다.
또한 배후를 잡은 화영이가 땅바닥에 흘려져 있던 하린이의 피를 이용해 헨리의 다리와 등에 혈흔 폭발을 일으켰다.
촤하악!!!
콰광!!!!
시미터를 교차시켜 메르의 낫을 막아 내고 있던 헨리의 몸통은 뒤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자 앞으로 고꾸라지며 비틀거렸고 그 틈에 은지의 대검이 그의 다리를 날려 버렸다.
확실히 헨리의 눈을 가린 효과가 있었다.
“끄으으으아아!!!!”
“아, 시발!! 깜짝이야!!”
“아파!!! 아프군.. 아니.. 이게 얼마 만에 통증인지.. 허어... 아파..”
다리가 잘려 나갔으니 당연히 아프겠지.
어쨌든 펄떡이는 헨리의 몸을 메르와 하린이, 아름이가 찍어 눌렀고 은지와 화영이가 그의 손을 내려쳐 꽉 쥐고 있던 시미터를 빼앗았다.
“으윽.. 이거 칼 손잡이랑.. 피부 가죽이 붙어 있어요.”
워낙 오래 붙잡고 있어서 검과 손이 하나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붙잡는데 성공했다.
'이거... 차라리 머리를 안 붙이는 편이 더 강할 것 같은데...'
머리가 분리되어 있는 편이 전투력이 더 높겠지만, 그랬다간 몸통을 제대로 통제하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붙여야 할 것 같다.
“헨리. 이제 어떡합니까.”
“어.. 일단 내 머리통을 몸에 가져다 대보게.”
“예.”
헨리의 말대로 그의 목을 몸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의 몸쪽에서 꿈틀거리는 혈관 같은 것들이 뻗어 나와 머리를 끌어당겨 접합했다. 심지어 잘려 나갔던 다리마저 같은 방식으로 다시 붙었다. 잘린 부위에서 피도 안나오고.. 좀 이상한 몸뚱이 같다.
“하아.. 됐네. 붙었네. 드디어 내 육체의 지배권이 돌아왔어.. 저기, 메르씨? 비껴주지 않겠나?”
“아, 예.”
헨리의 말에 메르가 얼른 비켜섰다.
“후후후... 정말로 다시 몸을 얻을 수 있을 줄이야.. 정말 고맙군.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네.”
헨리는 나와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곧 그는 정식으로 나를 섬기겠다고 말했고 그와 나 사이에 모종의 연결점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것으로 나락의 망령을 동료로 얻었다.
이제 거점에 돌아가서 필요한 물건 챙긴 다음 황반으로 가면...
"으윽..!"
순간 머리가 지끈 거리며 거점이 위험하다는 경고가 전해졌다.
그건 칠흑바퀴의 외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