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187. 이제 탈출할 시간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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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정도 더러운 파이프 구간을 헤매고 다닌 결과, 우린 어렵사리 죽어 있는 약쟁이의 시신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서 죽어있는 꼴이 이상한 약을 과다복용한 듯 했다.
약기운 좀 얻을 거라고 약빤놈 피까지 빨아먹는 약쟁이 소굴에서도 감당이 안돼서 이런곳에 내다버린 걸 보아하니 어지간한 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찌됐든 시체를 찾은 순간부터 일사천리로 일이 풀렸다. 시체들을 따라가기 시작하자 죽은 지 얼마 안 된 약쟁이 좀비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고, 그 좀비를 죽이자 더 많은 수의 좀비가 몰려왔다.
물론 거울 귀신이나 지하경비대를 상대하던 우리에게 일반 좀비는 그저 지나가는 쥐 새끼만도 못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니, 실재로 여기 파이프 구간에선 약에 찌들어 죽은 좀비보다 쥐가 더 위험하다.
물리면 그대로 온갖 기괴한 병에 걸려 죽어버릴 테고, 한 마리씩 기어 나오기 시작하다 보면 어느새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나서 결국엔 떼거지로 덤벼들 테니까.
어차피 사람을 물어서 죽이는 놈들이라면 작아서 발견하기도 어렵고 잡아 죽이기도 더 힘든 쥐가 훨씬 위험하다.
솔직히 잡을 수만 있다면 여기 서식중인 정신 나간 시궁쥐들을 몇 마리 잡아다가 적들 거점에 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너무 더러워서 건들기도 싫기 때문에 그냥 망상의 영역에서 끝내겠지만.
어쨌든 길 안내 요원쯤 되는 좀비들 말고는 딱히 우리를 붙잡는 존재들은 없었다. 쥐들도 왠지 우리를 피해가고 있고, 지하층 자체가 우리에게 친절해진 기분이다.
뭐랄까. 빨리 여기서 꺼져 주길 바라는 눈치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내가 키시리아를 불러내서 네임드 두 마리를 털어 버린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단 말은 설마, 악마들이 우리를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있거나 그런 건가?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악마들이 보고 있었다면 왜 안 나타난 거지?’
4층은 악마들의 창고 아니었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곳이라서 따로 창고지기라는 경비병도 만들어 두고 나름 관리를 하던 장소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장소가 침입자들로 인해 개박살이 났는데도 비발과 아발람이라는 좀 어벙한 놈들을 제외하면 어째선지 악마들은 코빼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하급 악마들이나 여러 이상한 악마들이 나올 수도 있다고 체셔에게 경고를 들었었는데, 정작 기어 나온 것은 어딘가 조금 멍청해 보이는 새대가리 악마 하나와 마조히즘에 심취해 있을 것 같은 요상한 악마 하나뿐이었으니.
뭔가 이상하다.
더욱이 네임드라는 놈들이 둘 다 키시리아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고, 그놈들 외에는 악마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 좀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왠지 악마 놈들이 일부러 우리를 피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나 때문인가?’
행운이나 만마의 총애 같은 이유를 떠나서, 내가 알기로 악마들은 만마전에 기생하던 놈들로 악신들에게 있어선 기생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녀석들이었다.
그런 놈들이다 보니 혹시나 나를 건드렸다가 악신들에게 밉보일까 봐 몸을 사린 게 아닌가 싶다.
‘파이몬이라는 놈이 아발람의 부름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킨 이유가 어쩌면.. 이거 일수도.’
직접 나를 건들면 뒷감당이 안 될 테니까. 악신의 사도인 나를 건들면 악신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질 까 봐 다들 몸을 사린 거지. 그런 와중에 좀 멍청한 두 악마가 멋도 모르고 찾아왔다가 역으로 탈탈 털린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전의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때 선두에서 걷고 있던 체셔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준아!”
“예? 어?”
“나왔어!! 드디어 탈출이라고!”
“우와!”
선두에 선 체셔를 따라 한참을 뚜벅뚜벅 걸어간 끝에 마침내 우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밖이라고 해 봐야 아직 암시장 내부였지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탈출 성공이라고 봐도 좋았다. 솔직히 여기는 이제 그냥 옆 마을 같은 느낌이니까.
“흐아. 드디어 밖이로군.”
에일라는 나오자마자 주저앉아서 팔다리를 주물렀다. 그 모습이 꼭 애늙은이 같아서 조금 웃겼다. 생김새로만 보자면 우리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데 하는 행동이나 말투, 실재 나이는 엄청 높았으니까.
“저, 저기.. 주인님.. 이거 이제 내려 봐도 될까요?”
“어? 어. 수고했어.”
“예.. 헤헤..”
케시아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주살짐승을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끄아아!! 아파!! 좀 살살 내려놓으란 거시와요! 이 천민!!”
주살짐승은 바닥에 내던져지자 비명을 지르며 케시아를 겁박했다. 물론 케시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 내 가방에서 버섯수를 꺼내가더니 꿀꺽꿀꺽 마셨다.
“하아.. 하.. 해냈어.”
한편 아람이는 무릎 꿇고 주저앉더니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사람처럼 환희에 찬 목소리로 천장을 오려다 봤다. 그러곤 쓰고 있던 고글을 반쯤 벗어 던졌다. 그녀가 벗어 던진 고글은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그녀가 이때까지 계속 쓰고 있던 인식저해용 고글은 충격적인 장면들을 필터링 할 수록 점점 내구도가 떨어지고 금이 가게 되는 구조다.
그렇다보니 아람이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씌워뒀던 고글은 거의 다 깨져 박살 나기 직전의 상태였다.
아마 제 역할을 다 하고 죽어 버린 거겠지. 아주 훌륭한 성능이었다. 또 살수만 있다면 재구입할 의사가 있으나 보부상은 카탈로그 기능이 없어서 아쉽지만 다시 똑같은 물건이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쨌든 아람이는 지금 탈출했다는 기쁨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재앙이 시작된 이후 이렇게까지 미칠 듯이 고생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굉장히 뿌듯해 보였다.
나야 뭐 혼자서 암시장을 돌아다녀보기도 했고, 실종자들의 숲이나 전율저택 같은 마경들을 여러 차례 돌아다니다 보니 저 정도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이번에도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그리 만족스러운가.]
그때 인디크론이 말을 걸어왔다.
안 그래도 암시장에선 신의 기척이 옅어지는데, 암시장의 지하에선 거의 완전히 끊겼었다. 그래서 듣고 싶어도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인데, 그녀는 내가 탈출하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예. 만족스럽습니다. 전부 키시리아를 소개시켜준 인디크론님 덕입니다.’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자 인디크론은 한참이나 웃더니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번 일로 나는 상당한 양의 인과율을 손실했다.]
역시 키시리아가 사용한 인과율은 인디크론이 충당했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손실을 봤다고 이야기할 정도라면 정말 심각하단 뜻일 거다.
[이에 나의 장막이 일부 풀렸으니, 선신들의 수작질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확실하게 망조가 들었으니 나보고 미리 대비하라는 신의 경고.
이건 일종의 예언이자 계시였다.
‘역시, 인디크론은 지금 재정난에 빠졌구나..’
덕분에 나를 숨겨 주던 장막이 풀려 버렸다니.. 카쉬낙스는 직접적인 간섭을 막아주는 모양이라 그것만으로도 바빠 보였었고.
어쨌든 인디크론이 인과율의 손실을 메우기 전까진 고난과 역경이 예정된 상태나 다름없어졌다. 허나 나는 이때까지 계속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 왔었다. 그러니 새삼스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난 이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모른다. 나에게 제공된 정보들은 너무나 제한 적이고 악신들조차도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허나 상관없다. 내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으니까.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내가 사랑하게 된 여자들과 함께. 그리고 나의 수발을 들어 줄 노예들까지 데리고서 살아남을 거다.
그래, 내 목표는 언제나 생존이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 누구라도 노예로 만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실로 훌륭한 대답이로군. 안심이다.]
[허나 너무 방심하진 말아라.]
[선신들은 애초에 둘밖에 남지 못한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니.]
둘밖에 남지 못한 우리...
만마전에 남은 유일한 악신들인 카쉬낙스와 인디크론, 본인들의 이야기겠지.
보타밀리는 모종의 이유로 현재까지 추방당한 상태고 나머지 악신들도 모두 모습을 감췄으니.
어째서 다른 악신들이 전부 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생존하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인디크론이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려 줬다.
[이곳에서 벗어난 뒤, 나락의 밑바닥으로 가라.]
‘예?’
[그곳에서 오래전 봉인된 조력자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조력자요?’
[그래. 그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구나.]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인디크론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때까지 그녀의 말을 듣고 손해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에 있어 가장 큰 조력자는 다름 아닌 인디크론과 카쉬낙스니까. 솔직히 두 여신이 나를 존중하고 예뻐하지 않았다면 나는 진즉에 죽었으리라.
어쨌든 할말을 마친 인디크론은 곧 피곤하다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아마 당분간은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자자. 다들 이제 거점으로 돌아가자.”
주저 앉아 숨을 돌린지 대충 10분쯤 지났을 무렵 체셔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여긴 아직 암시장 내부고 체셔의 거점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방심해선 안 되니까.
“아, 체셔. 그전에 이거.”
“응? 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방에 들어 있던 영혼 추출기를 꺼내 체셔에게 건네줬다. 추출기 안에는 푸르스름한 영혼이 반 정도 들어 있었다.
이건 체셔가 악마들에게 빼앗겼었던 영혼의 반절이다.
“후후후.. 정말. 정말 얻었네.. 이걸 보니까 이제야 실감이 나...”
체셔의 목소리가 조금 축축해졌다. 그녀의 웃음에서 겨우 울음을 참고 있는 떨림이 전해졌다. 거의 평생을 찾아 헤맸던 영혼의 조각을 손에 넣자 굉장히 감동한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영혼 추출기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우리 둘 다 그림자 가면과 네온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암시장에서 체셔를 꺼내줄 수 있다. 한평생 이 어둡고 음침한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장소에서 살아왔을 체셔는 이제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바깥세상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곳곳에 좀비나 스켈레톤들이 돌아다니고 힘없는 자들은 대부분 3주차쯤에 죽어 버린 세계지만 그래도 암시장 보다는 낫다. 여긴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알 수 없는 마경이니까.
“그럼 이제 진짜 돌아가자!”
우린 체셔의 몸에 손을 올렸다. 인원수가 많아서 좀 버거워 보였지만 우린 다행히 흩어지거나 하는 일 없이 전원 체셔의 거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며칠 쉬었다가 우리의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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