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184. 최강의 패
* * *
4층, 창고구간에 등장한 비발과 아발람.
둘은 오랜만의 외출에 굉장히 들떠 있었다.
[하하하하!!!]
[그만 웃어라! 품위 없게 시리..]
[그렇지만 아발람!! 아래를 보세요!! 저 겁에 질린 모습들을 보란 말입니다!! 하하하!!]
비발은 주저앉은 체셔와 덜덜덜 떨고 있는 케시아, 넋이 나간 주살짐승과 나머지 인간들을 보며 신난 듯 소리쳤다. 그는 등장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는 생각에 굉장히 들떠 있었다.
아발람도 비발과 마찬가지로 저들의 경악한 듯한 리액션에 굉장히 흡족한 상태였지만 파이몬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애써 침착함을 유지 중이었다.
[그런데 아발람! 인간부터 죽일 겁니까!? 아니면 저기! 저! 더러운 짐승부터 죽을 겁니까!]
[흠. 과연... 저주받은 짐승이로군.]
아발람은 떨고 있는 주살짐승을 내려다보며 놈을 품평했다.
[저 정도라면 그냥 너 혼자 처리해도 될 것 같다.]
[정말입니까? 정말 저 혼자 썰어버려도 되겠습니까!! 제법 강해 보이는 짐승인데!! 저 혼자 독식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 그런데 제발 좀 조용히 말해라!! 시끄럽단 말이다!!]
[하하하하!!! 예!! 알겠습니다!! 아발람!!!]
비발이 이렇게까지 흥분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비발의 눈에 주살짐승은 분명 제법 힘이있는 강자로 보였다. 이 부분이 비발을 미치게 만들었다. 비발은 극성 전투광이었기 때문에 늘 저런 강자와의 싸움을 원하며, 또한 집착한다.
그런 비발 못지 않게 아발람도 피와 죽음을 사랑하는 전투광이었으나, 그는 주살짐승과의 전투를 비발에게 양보했다. 비발이 주살짐승과 싸우는 동안 인간들을 독식하기 위해서였다.
아발람은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인간들을 사냥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 중이었다.죽어가는 인간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듣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최상의 쾌락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발람은 비발이 주살짐승과 싸우는 동안 나약한 인간들에게 일부러 도망칠 시간을 준 다음 하나하나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도망갈 기회, 즉 거짓된 희망을 준 다음 짓밟고 망가뜨리고 싶었다. 희망고문은 음습한 아발람의 취미 중 하나였다.
[하하하!!! 좋아!!]
그런 아발람의 계획 따윈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비발은 허공에서 창을 한 자루 꺼내들고서 주살짐승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창고구간의 공기가 떨렸다.
******
미쳐 버린 주살짐승에, 창고지기 수십 마리에..
거기다 이상한 만담콤비 같은 악마 새끼들까지. 나올 수 있는 놈들은 다 기어 나왔다.
무슨 어벤저스 마냥 하나둘 멋있게 등장하는 모습이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아무래도 저 새끼들과 피터지게 싸워야하기 때문이겠지.
‘하아..’
도대체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 버릴 수 있는지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노우볼을 굴린 기억도 없는데 알아서 눈사태가 발생해 버린 느낌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린 나약한 인간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부르지도 않은 불청객들이 속속들이 모여드는 꼴을 보아하니 또 세상이 나를 억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설마 나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굴러야하는 운명인가?
어쩌면 이것도 내 행운 스탯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니, 확실하다.
분명 초반엔 행운이 666이나 된다고 엄청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냥 행운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니 개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존기간이 점차 길어지고 이상한 놈들이 하나둘 등장할 때마다 나는 666이라는 말도 안 되게 높으며 불길해 보이는 행운 스탯이 결코 좋은 게 아니란 사실을 몸소 체감 중이다.
“주, 준아..”
악마들의 등장에 체셔는 주저앉아버렸다. 그녀는 악마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경악하더니 이젠 완전히 겁에 질린 것처럼 몸을 떨며 악마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착용 중인 네온 마스크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굉장히 두려워하는 중이겠지.
“흡!!”
그사이 인형이라 그런지 빠르게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에일라가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케시아를 끌고 와선 급히 결계를 쳤다.
나는 악마를 죽여야 한다며 흥분해서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려는 아람이와 주저앉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체셔의 뒷목을 붙잡고서 결계로 뛰어들었다.
과연 에일라의 결계가 저 괴물들의 공격을 어디까지 막아줄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손수무책으로 전멸되는 상황은 잠시 지연시켜 주지 않을까 싶다.
‘빌어먹을..’
참고로 지금 악마 놈들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누구부터 죽일지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결계를 치든 말든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 저놈들은 우리를 철저히 벌레 취급하는 거다. 우리가 약해빠진 인간이라고 방심한 거겠지. 그러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거 알란가 모르겠네.
나는 방심한 새끼 한테 절대로 안 진다.
“체셔. 저것들 정확히 뭔지 알아요?”
“으응? 응. 응응... 저것들은.. 상왕의 첨병들이야.. 저놈들이 나왔다는 건... 곧 상왕이 나타날 거란 소리야.. 흐윽.. 미안 해.. 준아.. 미안 해.. 괜히 나 때문에.. 이런 곳에 오게 해서..”
상왕이 뭐 하는 새낀지는 잘 모르겠지만.. 체셔가 이렇게까지 겁에 질린 모습을 보아하니 상상 이상으로 강한 놈이겠지.
“체셔. 일단 울지 말고 진정해 봐요.”
“흐읍. 흐윽.. 응..”
나는 체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재 주살짐승, 창고지기들은 상왕의 첨병들에게 주의를 쏟고 있는 중이라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악마들도 우리보단 주살짐승을 먼저 죽이려고 마음먹은 분위기고.
놈들이 우리를 철저히 약자 취급해준 덕에 수작을 부릴 약간의 틈이 생겼다.
“체셔 그 상왕이라는 새끼... 주박궁전의 주인보다 강합니까?”
“응? 주, 주박궁전..?”
“예. 심층지주보다 강하냐고요.”
“어... 어?”
체셔는 주박궁전과 심층지주를 언급하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올려다 봤다. 그러더니 순간 몸이 굳었다.
상왕이 나타날 거란 걱정 때문에 굳어있던 그녀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그녀는 이제야 떠올렸다.
내가 악신들의 사랑을 받는 컬티스트란 사실을.
“서, 설마..”
체셔는 환희에 젖은 목소리로 나를 올려다 봤다. 절망뿐이던 그녀의 목소리에 희망이 생겨났다.
나는 주살짐승과 싸우기 시작한 악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 설마입니다.”
“파, 파이몬이 강하긴 더럽게 강하지만... 심연의 괴물이라면.. 싸워볼 만해.”
“그 말만을 기다렸어요.”
체셔의 말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곧 내 몸에서 무려 500이나 되는 마력이 일순간 빠져나갔다. 그러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나는 잠시 휘청거렸다. 그때 주저앉아 있던 체셔가 얼른 일어나 나를 부축했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싸울 의지가 다시 생긴 거겠지.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얼른 심연의 밑바닥에서 악마보다 더한 괴물을 불러냈다.
“심층지주 소환.”
예정된 패배를 뒤엎고, 자만하는 악마들을 죽이기 위한 방법.
나는 내가 가진 패 중 가장 강한 최강의 패를 꺼냈다.
이제 온갖 벌레새끼들 때문에 시끄러워진 창고를 정리할 시간이다.
******
[이런 젠장!!!!]
아발람은 비명을 내지르며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인간을 향해 창을 집어던지려고 했다. 허나 그 전에 먼저 허공이 갈라지며 그의 창을 쳐냈다.
거미의 앞발이 튀어나왔다. 일순 공기가 떨리며 창고지기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주살짐승은 물론이고 그녀와 싸우던 비발까지도 움직임을 멈춘 채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째서.. 여기에...]
아무리 멍청한 비발이라고 하더라도 저것과 대적해선 안 된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야 저건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었으니까.
[경고!! 경고!!]
[‘주박궁전’의 주인이 필드에 등장합니다!!!]
[심층지주, ‘명왕 키시리아’가 암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소환사의 레벨이 낮습니다!! 인과율에 저촉....]
순간 조준의 눈앞에 떠오르던 시스템 창이 키시리아의 손짓 한 번에 찢겨져 나갔다.
[쫑알쫑알 시끄럽다.]
조준의 몸을 짓누르던 외압이 사라진다. 분노한 키시리아는 오롯이 페널티를 감당했다. 그녀는 막대한 인과율을 지출하는 조건으로 소환시간 3분이라는 페널티를 없앴다.
유독 악마를 싫어하는 그녀는 감히 주제파악도 못 하고 모습을 드러낸 비발과 아발람을 살려서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키, 키시리아.”
소환과 동시에 키시리아의 분노를 느낀 조준은 무언가 자신이 실수라도 했나싶어 조심스레 키시리아를 불렀다.
워낙 까탈스러운 소환수였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키시리아의 심기가 불편하다면 죽는 것은 조준 본인이었기에.
허나 조준의 걱정과는 달리 키시리아는 지금 조준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불안에 떨고 있는 조준에게 같잖은 걱정 따윈 하지 말라는 듯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키싯. 왜? 저 더러운 기생충들을 죽여 달라고? 그것 때문에 부른 것 아닌가.]
“어.. 예.”
[키시싯..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키시리아는 경악한 표정의 비발과 아발람을 보며 말했다.
[감히 주제파악도 못 하고 어머니의 먹이를 넘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녀의 몸에서 심연 속 깊은 어둠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됐다.
이제 머리를 굴려야 하는 건 침입자들이 아닌 멍청한 악마들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