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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81화 (181/221)

〈 181화 〉 180. 주인의 주인을 먹고 싶다

* * *

“흐읏....”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코가 굉장히 아렸다. 마치 코에 끓는 기름을 들이부은 것처럼 쓰라린 느낌도 들었다. 어지럽다. 입에서 피맛도 느껴진다. 일어나기 어려워 나는 좀 더 누워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만 주변이 조용한 걸로 보아 좀 더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잠시 누워서 숨을 고르자 조금 답답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 정체 모를 벌레가 자리 잡고 있었을 때는 답답한 느낌도 못 느꼈었는데 빠져나가고 나서야 내가 답답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건 뭐였을까. 도플갱어? 미믹? 뭔지 알 수 없다. 이미 그것은 죽어버렸고 일행들 중에서도 그 벌레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으니까.

“시발..”

그런데 어떻게 그 벌레 놈은 나의 스킬까지 따라 쓸 수 있었던 걸까.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나의 스킬들은 대부분 인디크론이나 카쉬낙스 같은 악신의 권능을 빌려다 쓰는 걸 텐데. 그런 것도 카피가 가능한 건가?

‘열화 된 권능이기에 따라 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나중에 여기서 벗어나게 되면 따로 인디크론이나 보타밀리에게 물어봐야겠다. 카쉬낙스는 나와 단독으로 대화하는게 괜히 부끄러운 건지 대부분의 물음들은 츤츤거리며 건성으로 답한다. 그러니 이런 의문점은 인디크론이나 보타밀리에게 묻는 게 좋다.

아니지, 보타밀리도 에매하다. 그녀는 공허와 망각의 신인지라 대부분의 물음엔 답하지 않거나 까먹어서 자기도 잘 모른다고 대답하니까. 역시 그냥 인디크론에게 물어봐야겠다. 인디크론은 내가 봤을 때 악신들 중에서 제일 말이 많다. 카쉬낙스가 그러길 제일 늙은 악신이라던데... 그래서 그런지 간혹 뭔가 알려주고 싶어서 환장한 느낌마저 들때가 있었다. 물론 내 정신력에 한계가 있어서 오래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입맛도 까다롭고, 말도 많고, 잔소리 쟁이에 나를 보살펴 주고 싶어하는 나이 많은 여신이라.. 이거 어쩌면 마망이 아니라 할머니 같은 느낌 아닌가?

'이런, 또 쓸데없는 생각을...'

간만에 쉬는 거라 그런지 머릿속에 온갖 쓸데없는 잡념들이 떠올랐다. 이상한 잡념이 떠오르는 걸 보니 이제슬슬 일어날 때가 된 모양이다.

난 흐린 눈을 비비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봤다.

“쿠울... 쿠울...”

거기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람이와 결계를 유지 중인 듯 눈을 감고서 무언갈 중얼 거리는 에일라가 있었다. 왠지 굉장히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라서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게 됐다.

‘케케르와 케시아.. 그리고 체셔는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또 흩어진 건가.’

우리는 여전히 거울 미로 안이었다. 그런데 세 명이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약간 불안 해졌다. 분명 쓰러지기 전에 거울 귀신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설마 놈들을 떨어뜨리던 중에 흩어져 버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목걸이는 아람이와 나만 착용하고 있으니 체셔와 케시아, 케케르를 찾을 방법이 없다. 일행들을 찾는다고 십여일을 여기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 흩어진 게 맞는다면 사실상 이번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여겨야 한다. 벌꿀주를 마시고 탈출하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띵한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으니 명상 중이던 에일라가 눈을 뜨곤 나에게 말을 걸었다.

“깨어났나.”

“어, 네. 방금 깼습니다.”

“다행이야. 혹여나 깨어나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 했는데.”

“트, 특단의 조치요..?”

“별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쓰진 마. 깨어났으니까 쓸일 없어.”

특단의 조치가 뭔지는 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도대체 뭐였을 까. 나는 괜히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다른 일행들은요? 체셔랑 케시아랑 케케르가 안 보이는데..”

내가 나머지 일행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묻자 에일라는 피곤한지 눈가를 주물렀다. 반응이 별로 안좋은데, 설마 진짜 정말로 흩어져 버린 걸까..

“체셔와 케시아는 잠시 용변을 보러 간 상태다. 곧 돌아올 거야. 3층으로 이어지는 입구를 발견해서 조준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거든.”

“아, 3층 입구 벌써 찾았구나.”

다행히 흩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그저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체셔와 케시아는 알겠는데 케케르는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나에겐 낙인이 10개나 찍힌 상태인데 왜 이렇게 평화로운 거지? 에일라의 결계 때문에 거울 귀신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건가?

“그런데 케케르는 어딨어요? 그리고 거울 귀신들은 또 어디로 간 거죠.”

나의 질문에 에일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일단 케케르는 죽었어.”

“네? 그 이상한 말투의 두꺼비가.. 죽어요?”

하와와 거리던 두꺼비... 말투가 제법 웃겨서 떠드는 거 보는 맛이 있었는데.. 거울귀신들에게 도망치던 중에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암시장의 지하층을 빠져나갈 때까지 과연 살아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었는데.

“케케르 녀석, 죽었구나.”

“응. 주살짐승이 폭주해서 케케르를 집어삼켰어.”

“허어...”

“조준 너의 등에 새겨져 있던 낙인을 급한 대로 케케르에게 넘겼는데.. 아마 너에게 찍혀 있던 낙인이 9개 이상이었던 모양이야. 낙인이 넘어가자마자 그대로 폭주하면서 케케르는 주살짐승에게 잡아먹혔어. 폭주한 주살짐승은.. 아마 아직도 거울귀신들과 싸우고 있을 거고.”

“주종역전이 된다더니.. 진짜 역으로 먹혀 버렸네요.”

케케르의 사망 소식에 나는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졌다. 죽어 버린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단순히 앞으로의 여정이 조금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4층에서 필요했을 텐데. 벌써 죽어 버리다니..’

케케르는 생긴 게 엿 같아서 그렇지 갖춘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귀엽게 생긴 케시아보다 더 뛰어난 인재였다.

특히나 케케르가 가진 해주 능력은 4층에서 기어 나올 창고지기들의 저주를 처리하기 좋았다. 또한 3층 파이프 구간에서도 케케르가 가진 해독능력이 중요해 보였었고.

“아쉽네요.”

“응.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는 에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케케르는 우리를 위해 희생한 거다. 나는 케케르의 명복을 빌어줬다. 그러곤 체셔와 케시아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아람이는 여간 피곤한게 아니었는지 에일라와 내가 떠드는 동안에도 깨어날 기미가 안보였다. 에일라도 거울 귀신들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은신용 결계를 쳐둔 상태라 다시 명상에 돌입했다.

그렇게 주위가 조용해지자 나는 절로 생각이 많아졌다.

‘난이도가 높다고 하더니..’

체셔의 말이 맞았다. 암시장의 지하층은 난이도가 굉장히 높았다. 솔직히 NPC인 에일라와 체셔가 아니었다면 나를 비롯해 나머지 인원들은 1층에서 모두 죽었으리라. 에일라가 온갖 보석마법으로 팀을 서포트하고 체셔가 미래지향적인 무기로 죄다 쓸어 버렸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1층은 밑도 끝도 없이 기어 나오는 지하경비대 놈들과 곳곳에 새겨진 악마들의 방명록 때문에 정신없이 돌아다녔었고 2층에선 무한 증식하는 거울 귀신들과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거울들 때문에 골이 아팠다. 1층과 2층도 이렇게 난이도가 높은데 대체..

‘3층은 어떤 곳일까.’

벌써 두렵다. 1층과 2층도 언제 죽을지 몰라서 불안 불안 했는데 3층은 더욱 난이도가 높겠지.

“오, 준이 일어났네.”

"체셔! 그리고.. 케시아?"

“하하.. 주, 주인님. 하하. 저, 저 슬슬. 저 좀 슬슬 너무 참기 어려워서.. 흐흐흣.”

체셔와 케시아가 돌아왔다. 케시아는 슬슬 충동을 참을 수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팔을 벅벅 긁어댔다. 저거 간지러워서 긁는 게 아니다. 살을 뜯어내는 중인 거지.

“끄으으읍!!!!!”

“쉿. 입 열지 말고. 조용히 해야지. 옳지. 소리 크게 내지 말고. 쉿..”

충동이 커지면 돌발행동을 할 수 있느니 나는 일단 케시아에게 재갈을 물린 다음 의식용 단검을 어깨에 내리꽂았다. 그러곤 후벼 파 상처를 벌렸다. 벌어진 상처에서 울컥이며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까운 피를 더 쏟아 내기 전에 차오르는 살점으로 치료해주자 케시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우. 시발.”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자 체셔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체셔...”

“헤헤.. 그 두꺼비.. 가 버렸어.”

“네.. 들었어요.”

“주살짐승 그거 비쌌는데 아깝네. 그, 재능증폭제? 그것도.”

“그러게요. 아직 본전도 못 쳤는데 벌써 이렇게 잃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체셔의 말이 맞다. 정말이지 크나큰 손실이다.

무려 2배 가격으로 구입했던 육만 팔천짜리 케케르와 구만 코인짜리 주살짐승, 끝나지 않는 충동 한잔에 케케르의 식인충동 억제제로 구입했던 냉동된 식용 애완인간 까지.

도대체 케케르의 죽음으로 얼마나 많은 걸 잃은 건지 모르겠다. 손실액으로만 따지자면 지금 나는 거의 파산한 거나 다름없었다.

‘거점 근처에는 이제 좀비도 얼마 없고 필드 보스도 안 나와서 포인트 수급도 슬슬 버거운데...’

이렇게까지 큰 손해를 입었는데 체셔를 구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게거품물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케케르의 죽음으로 인해 생겼던 근심 걱정보단 분노가 더욱 커졌다.

“그럼 슬슬 내려가 볼까.”

“아람아, 일어나. 움직이자.”

“응..? 스읍. 응.”

공기청정기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 중인 아람이까지 깨어났다. 우린 다시 아래로 내려갈 채비를 갖추고서 조금 더 이동했다.

그러자 거울이 죄다 깨진 상태로 바닥이 뻥 뚫려 있는 방이 하나 나왔다.

“후우. 밑에서 보자.”

체셔가 제일 먼저 3층으로 진입했다. 그다음 아람이와 케시아가 거의 동시에 뛰어들었고 나와 에일라도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이번엔 검은 형체라거나 뭔가 이상한 게 따라들어오진 않았다.

그저 케케르의 목소리를 닮은 무언가가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

“하아.... 하아...”

검은 물, 거울귀신에게서 흘러내린 엑토플라즘으로 흥건한 복도.

사방의 거울들은 죄다 깨져 있었고 으깨지고 찢겨나간 거울귀신들의 시체가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거울귀신들의 시체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존재가 홀로 서 있었다.

“어지러운 거시와요.. 하아...”

케케르와 융화된 주살짐승은 쓰러져 죽어 가는 거울귀신 중 하나를 집어 들어 걸레 짜듯 비틀었다.

­푸학.

“끼에에에...!!!”

거울귀신의 단말마. 주살짐승은 흘러내리는 엑토플라즘을 빨아 마셨다. 조금은 갈증이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이제 끝난 건가요? 더는 안 나오는 겁니까? 똑바로 대답 좀 해 보란 거시와요.”

주살짐승은 깨져나간 거울을 향해 물었다.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미 주살짐승의 몸에 새겨졌던 낙인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저주가 통하지 않는 육체였다. 이미 온갖 저주들로 휘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놓친 먹잇감들을 찾으러, 저는 이만 가보겠사와요.”

주살짐승은 시체들을 짓밟아 넘어가며 표적의 냄새를 쫓았다.

자신을 종으로 삼은 두꺼비를 집어삼켰으나, 그 두꺼비의 주인은 또 따로 있었으니.

주인의 주인을 먹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주살짐승은 굶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조준을 추적했다.

굶주림에 배를 억지로 달래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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