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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71화 (171/221)

〈 171화 〉 170. 암시장 풀코스를 대접하다

* * *

보랏빛 네온. 적당한 습도와 은은하게 풍기는 향초의 냄새.

포근하게 자신을 안고 있는 인간의 살결. 숨소리. 그리고...

“에일라. 일어났어요?”

“으응.. 응..”

조준의 부름에 에일라는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조준의 품에 안긴 채로 기지개를 쭉 켰다. 곧, 그녀의 관절에서 뚜둑 거리는 소리가 나며 마력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녀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전원을 끈 것이라 거의 몇 년 만에 수면을 취했다고 봐도 좋았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인간의 품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에일라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고 상쾌했다.

원래는 잠드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그녀였으나 조준의 품이라면 언제든지 잠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체셔가 다가와 잠을 잘 깨지 못 하는 중인 에일라의 이마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으음..”

“에일라. 일어나.”

“응? 아...”

에일라는 곧 눈을 떴다. 그녀는 네온 마스크를 쓴 체셔를 한번 쓱 쳐다봤다.

“오랜만이네, 에일라.”

“그렇군. 오랜만이다, 체셔. 그런데 넌 어찌된게 항상 네온 마스크냐.”

정신을 차린 에일라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체셔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람들처럼 별거 아닌 인사였다. 허나 그 인사가 이뤄지기 까지의 간극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길었다.

에일라는 한동안 암시장을 방문하지 않았고 체셔 또한 에일라를 찾지 않았으니까. 어찌 되었든 둘의 사이는 썩 좋았다. 체셔는 에일라를 귀여워했고 에일라는 체셔를 안쓰럽게 여겼으니.

“그런데.. 왜 이쪽 단추가 풀려 있는 거지?”

“어? 아. 가방에서 꺼내다 풀어진게 아닐까요?”

“음.. 그런가?”

에일라는 옷이 조금 흐트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동중에 옷이 흐트러졌겠지 하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에일라의 옷을 벗겨 가슴을 주물럭거렸던 조준은 에일라가 대충 넘어가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에일라가 자신이 잠든 사이 강간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그대로 자신과 거리를 둘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체셔가 있는 걸 보아하니 암시장에 무사히 진입한 모양이군. 여긴.. 체셔 너의 거점이지?”

“맞아. 저번에 레이저 집광기 손봐주러 왔었어.”

“그렇군. 그보다 잘 지냈나?”

체셔와 에일라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사이 나갈 채비를 마친 조준은 한아람에게 고글을 다시 씌워주며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마약상이 주는 건 먹으면 안 돼.”

“알겠어. 벌써 세 번째야. 엄마도 아니고 그만해.”

“아니, 진짜.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먹으면 죽어.”

“아니, 알겠다니까.”

조준은 내심 한아람을 체셔의 거점에 두고 가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도 없는 게 암시장이 무섭다고 두고 갈 거였다면 애초에 암시장으로 데려오지를 말았어야 했다.

암시장은 지하층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장소다. 암시장도 못 버틸 정신력이라면 그냥 지하층에 데리고 가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조준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한아람을 걱정하면서도 두고 갈 수가 없다. 암시장에서 한아람의 상태를 관찰하다가 영 안 되겠다 싶으면 4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보내야 했다.

“그리고 노예상은 미친 변태 새끼니까 그냥 말 걸어도 씹어. 대충 다 무시하고 내 뒤에 딱 붙어 있어. 알겠지? 무조건이야.”

“그래. 알았떠. 이해했떠. 잔소리 그만.”

“휴우... 나는 네가 왜 이리 걱정되냐.”

“걱정하지 마라니까. 나 이상한 짓 안 해.”

“그게 아니야, 아람아. 그냥.. 여기 자체가 너무 위험해서 그래. 방어운전이 안되는 곳이야.. 여긴..”

조준의 말대로 암시장은 약간의 부주의로 목숨이 날아가 버리는 곳이다. 그나마 가이드인 체셔가 따라 붙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조준조차도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한아람은 건성건성 듣는 것 같았지만 실은 미친 듯이 조준이 말했던 내용들을 암기 중이었다. 토시하나 안 놓치고 완전 암기했다. 이건 어느 의미로 팀전이다. 만약 자신이 이상한 실수를 저지르면 팀원들이 전부 개고생을 하게 된다.

세계멸망 전에는 종합게임 방송인이었던 한아람이다. 그녀는 5인큐로 돌아가는 게임 대회도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작은 실수로 게임이 망하면 얼마나 많은 눈치를 봐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실전에 강한 타입이다. 고로 조준이 알려준 내용들에 한해서는 결코 실수하지 않으리라.

그때 쯤 체셔와 대략적인 근황 토크를 마친 에일라는 챙겨 온 빈티지 가방에서 얼굴을 어둠으로 가려주는 후드를 꺼내 쓴 다음 일행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나는 따로 움직일게. 암시장에서 꼭 만나야 할 상인이 있어.”

에일라는 이미 몇 번이나 홀로 암시장을 돌아다닌 전적이 있다. 그녀에게 암시장은 조금 위험한 뒷골목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이드인 체셔의 도움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지금 만나려는 ‘장물아비’는 굉장히 예민한 인물이라 아는 얼굴인 체셔나 에일라가 아닌 다른 일행이 끼여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럼 일단 이 방에서 나간 다음에 헤어지는 걸로 하고.. 준, 어디부터 갈 생각이야?”

“어.. 일단은 밀렵꾼부터 만나러가요, 체셔.”

“오케이. 그럼 다들 나를 잡아.”

체셔는 암시장 초행인 아람이와 주요고객인 조준의 손을 잡았다. 에일라는 적당히 체셔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들은 거점에서 암시장의 먹거리 골목으로 이동했다.

******

먹거리 골목에 도착한 네 사람. 아람이는 그래도 두 번째 이동이라 그런지 속이 좀 덜 울렁거렸다. 조준이야 숱하게 이동해봤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고 에일라는 애초에 속이 더부룩하다는 느낌을 모르는 인형이라 아무 문제없었다.

“그럼, 여기서부터 따로 움직이자.”

“네, 나중에 중앙광장에서 만나요.”

“그래, 중앙 광장에서 만나.”

그대로 에일라는 모습을 감췄다. 이미 몇 번이나 암시장을 돌아다녀 본 에일라는 능숙하게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그녀는 아마 중앙 광장 어딘가에 있을 장물아비를 만나러 갈 것이다.

장물아비는 간혹 굉장히 특이한 보물을 들여 오기 때문에 꼭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우리도 움직여볼까.”

활기찬 체셔의 말에 방독면을 쓰고 있던 한아람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먹거리 골목의 절반 이상이 모자이크 처리된 상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저해용 고글을 착용하지 않았다면 먹거리 골목을 직시한 것만으로도 구토감과 어지럼증을 느꼈을 게 뻔했다. 한아람은 굳이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금 두려워졌다.

­으아아아아!!!!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아아!!!

­끄아아아아!!!!! 그만!!!!! 그만 벗겨!!!!! 아니야!! 자르지 마아아아!!!!!!

­끼아아아아!!!!! 엄마!!!! 엄마아아!!!! 아파!!! 그만해요!!!

“시발...”

한아람은 왼쪽 골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기가 눌렸다. 그녀는 조준처럼 만마의 언어를 알아들 수 없었기 때문에 저들의 비명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피비린내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마치, 산 채로 사람을 자르고 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왼쪽은 위험하다. 상상 그 이상으로.

“어때.. 버틸만해?”

“으응.. 그런데 너, 이런 곳을 혼자 돌아다녔었다고..?”

“응. 한번뿐이지만. 체셔랑 만나기 전에 잠시.”

“미친...”

한아람은 그제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어느 의미로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존재임을 깨달았다. 평소엔 그저 조금 잔혹하지만 자기 사람은 잘 챙기는 이미지였는데..

고위이족들을 아무런 필터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목도하고도 아무런 정신적 피해를 받지 않거나, 당장 왼쪽 골목에서 수십 명이 듣기 거북할 정도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음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 있는 모습은 상당히 경이로웠다.

그때 체셔가 조준에게 말해줬다.

“오른쪽은 디저트고 왼쪽은 일식이야.”

“일식이요? 오우. 디저트 쪽으로 가죠.”

체셔의 말에 조준은 학을 떼며 오른쪽으로 가자고 말했다. 조준이 생각하기에 암시장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놈들치고 정상적인 놈들이 없을 것 같았다.

일식하면 스시고.. 스시는 산 채로 살점을 발라내는 조리법이니까.

조준의 생각대로 왼쪽 골목에선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도축과 도정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아람이 들었던 비명소리들은 하나 같이 산채로 죽어나가는 이들의 처절한 단말마였다.

특히나 이족들의 관점에서 인간들의 일본식 요리란 ‘산 채로 살을 자른다. 생으로 먹는다.’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기 때문에 그걸 가감 없이 행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일식은 장식이 많다.’라는 생각에 온갖 기괴한 이족 특유의 장식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조준이라고 해도 이족들의 예술까지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좋아 그럼..”

조준은 중간에 서서 체셔와 한아람의 손을 붙잡았다. 한아람은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으깨지고 갈려 나가며 부서지는 소리에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준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만약 조준의 손을 놓쳤다간 그대로 죽을 거란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정신력이 떨어진다. 한아람은 최대한 앞만 보려했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왔다. 아찔해지는 광경들이.

가령 커다란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서 고름 같은 걸 짜내 튀기고 있다던지. 그런데 그 고름들이 비명을 지르며 애절하게 누군가를 부른다든지.

그 비명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한아람은 생각했다. 만약 의미를 파악했다면 그녀는 더욱더 거북한 느낌을 받아야 했을 테니까.

“아람아. 괜찮아?”

“응. 버틸 만해... 이 고글.. 성능 엄청 좋다. 우욱..”

“어.. 그래.. 다행이네. 조금만 더 가면 가게 나오니까.”

“응. 난... 나는 괜찮아.”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모자이크 처리된 풍경 속에서 한아람은 지옥을 느꼈다. 여긴 미친 곳이다. 이런 미친 장소를 버젓이 걸어 다니는 체셔와 조준이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냄새가 너무 지독하다.

썩은 내를 넘어선 독특한 향취. 여긴 오감을 자극하며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시각을 고글로 방어중이라 해도 후각과 청각까진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감각정보들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푸화악!!

“으엑.. 시발..”

그때 한아람의 옆에 있던 가게에서 무언가 뿜어져 나왔다. 조준이 미쳐 막아낼 새도 없이 뿜어져 나온 붉은 액체는 한아람의 얼굴에 튀었고 고글에도 묻었다.

그건 끈적끈적한 피였다. 그건 비릿한 잼이었다. 그걸 뿜어낸 건 도넛이었다.

한아람의 눈에 그건 도넛으로 보였다. 인식저해용 고글은 한아람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걸’ 도넛으로 표현했다. 모자이크 처리된 도넛으로.

“으윽.. 냄새...”

한아람은 코끝을 아릿하게 적시는 피비린내와 자몽의 시큼한 향기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멈춰 섰다.

“아... 저 씹새끼가...”

조준은 욕을 내뱉으며 아람이를 보호하듯 자신의 뒤로 보냈다.

체셔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한아람에게 닦으라고 건네준 다음 조준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 뒤로 밀어냈다.

곧 실수를 저지른 가게의 주인이 촉수와 자그마한 영유아들의 팔로 뒤덮인 얼굴을 씰룩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놈은 한아람의 귀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꿀럭꿀럭 잘도 지껄이며 체셔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마저 듣기 역겨워서 한아람은 구토감을 느꼈다. 그래도 길바닥에서 토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참으며 얼굴에 묻은 잼인지 피인지 뭔지 모를 액체를 닦아냈다.

그때 점차 체셔와 이상하게 모자이크된 가게 주인의 언성이 높아지더니, 곧 체셔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특이한 생김새의 권총이었다.

“자, 잠깐 체셔.”

“준, 놔 바. 이 씹 새끼 죽여 버릴 거니까. 감히 누구한테 큰소리 친 건지 보여 줘야지.”

한아람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도넛(?)이 살아 움직이며 잼(피)를 뿜어냈고... 그 피를 자신이 맞았다.. 그러자 이상하게 생긴 모자이크 처리된 도넛 가게의 주인이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와 체셔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그리고 지금 체셔는 가게 주인으로 여겨지는 이족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한아람은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자경대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일이 커질까 불안불안 했다.

­탕!!!

­푸작!!

그때 총성이 울렸다. 한아람이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에 잠시 뒤돌아본 찰나, 체셔가 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머리가 터져 나간 가게 주인은 그대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다.

“어.. 어어.. 저, 저래도 돼?”

“아, 괜찮아. 저 새끼가 먼저 시비 걸었어. 지가 물건 관리 소홀히 해 놓고.. 상품 훼손 했다고 돈 내놓으라잖아.”

조준은 아무렇지 않게 별문제없다고 했다. 한아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인 자신보다 여기서 생활하는 체셔가 더 잘 알 것이며 조준이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겠지.

“그리고 체셔는 면책특권이 있데. 저런 새끼는 죽여도 자경대가 어찌 못하나봐.”

“어.. 우와.. 체셔 언니.. 멋있네..”

조준의 부연설명에 그제야 한아람은 조금 안심했다. 체셔가 가진 권한이나 권리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음, 잠시 소란이 있었네. 다시 갈길 가자.”

“네.”

“어.. 네에..”

곧 그들은 다시 밀렵꾼이 있는 가게로 갔다. 한아람은 점점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제야 대충 암시장이 뭐하는 곳인지 감이 잡혔다.

여긴 그냥 다 미친 곳이다.

쓰러진 이족의 시체를 다른 이족들이 다가와 해체하는 모습을 뒤로하며 한아람은 힘차게 조준의 뒤를 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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