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133. 속여라, 불태워라, 강탈해라 (3)
* * *
불길이 타오른다.
이주하가 지핀 여우 불이 활활 타올라 학교를 집어삼켰다.
“꺄아아아!!!!”
“시, 시발... 불이야!!!”
그들은 이주하의 여우 불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건물을 집어삼킨 화마는 그저 일시적인 환상일 뿐. 실질적으로 건물을 불태우지는 않았다. 이는 이주하가 사용한 요술이었다.
“다들 멈춰!!! 이거 가짜라고!!!”
“시, 시발...! 다들 말을 안 들어요!!”
“제, 젠장...! 막아!!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가면 떼 몰살이다!! 못 나가게 막아!!”
“밖에는 늑대가 있다!!! 멈춰!!!”
제정신을 차린 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을 말리려고 했다. 엔지니어에 의해 요새화된 건물 내부엔 곳곳에 고기능 터렛들이 설치되어 있어 적으로 간주되는 이들을 공격한다.
그러니 적들이 안으로 들어오게끔 만들어야 그들은 싸우기 훨씬 유리했다. 허나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침략자들의 공격에 학교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이주하게 보여주는 요술이 진짜라 믿었고 패닉에 빠진 이들은 혼비백산해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마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이었다. 즉 비각성자들은 저항력이 낮아 죄다 속았고 진짜 건물에 불이 났다고 믿은 것이다. 그렇게 학교 건물에서 벗어난 이들은 플랜트 파머가 키워둔 나무들을 박살 내며 날뛰는 괴물들의 모습에 기가 질려 주저앉았다.
운동장엔 성하린이 불러낸 거대한 늑대 두 마리와 김예원이 불러낸 소환수들, 칠흑바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또한 듀라한이 해골마를 타고서 효선 여고 측의 플레이어들을 짓뭉갰고 날개를 펼친 메르헤레는 담벼락에 설치된 터렛들을 박살 내며 파괴를 흩뿌리고 있었다.
“저 새끼들.. 대체 뭐야..”
“빠, 빨리 학교 밖으로 나간 사람들 구해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예요...?”
“아니... 저런 것들이랑.. 어떻게 싸워.. 이건... 이미..”
학교 내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각성자들은 어쩔 줄 몰라 비명을 질러댔고 미쳐 빠져나가지 못해 교내에 남아 있던 여학생들도 무참히 죽어 나가는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모습에 소리를 지르며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때 그 상황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앞으로 나섰다.
“무기. 무기 줘!”
“어..?”
“내가 간다고!! 빨리!! 저대로 다 죽게 내버려둘 거야!!?”
“어어..! 자, 잠깐만요!! 아저씨!!”
학교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간 남자는 진심공략조의 리더였던 마검사 이선재였다. 그는 유혜지의 스킬에 의해 자신의 파티원으로 설정된 여고생이 들고 있던 검을 뺏어 들고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저 개새끼들이.. 감히...”
그는 도망친 끝에 결국 다시 장조준 일행을 만나게 됐다는 사실에 이들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또한 무참히 죽어 나가는 효선 여고의 사람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지금과 같이 박살 난 세상에선 정의로움이나 자애, 자비, 인류애야말로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독임에도... 그는 여전히 바보였다.
“잠깐! 같이 가자!!”
“어! 기성이!!”
“형!!”
“지태야!! 그리고... 지호 너!! 드디어 정신 차렸구나.”
“그래, 빨리 가자.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대로 두면 다 끝이야. 우리라도 정신 차리고 싸워야 해.”
그리고 그런 바보가 셋이나 더 있었다. 진심 공략조가 다시 뭉쳤다. 세태와 야합한 끝에 조용히 쥐 죽은 듯 살아가려던 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도피처로 쳐들어온 장조준 일당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너희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든 거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죄를 물어.. 모조리 죽여주마..!'
더욱이 이선재와 그의 일당들은 차별 없이 자신들을 받아들여 준 효선 여고의 사람들을 지켜 주고 싶었다. 법과 도덕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 버린 시대에 인의를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해 싸울 수만 있다면..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거친 운명에 저항하고 싶었다.
“가자. 저년들을 다 죽여 버리는 거야.!”
“오우!!”
“야이 시발 년들아!!!”
그들은 그렇게 의지를 되새기며 한참 날뛰고 있던 성하린에게 달려 나갔다. 지금 한창 자신을 향해 검이나 창을 휘두르던 효선 여고의 선생과 여고생들을 패 죽이고 있던 성하린은 마침 등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건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이선재와 그의 일당들은 운동장에 가득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은엄폐하며 성하린부터 잡아 죽이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 갔다.
그리고.
쾅!!!
“끄아아아아아!!!!”
이선재의 등으로 옥상에 서 있던 이은지가 집어던진 차륜이 날아들었다.
차륜은 이선재의 척추 뼈를 반쯤 으스러뜨리며 그를 땅바닥에 처박히게 만들었고 성하린을 기습할 거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살금살금 걸어가던 이선재는 그대로 빈사 상태에 빠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언니가 처리했네?”
“응. 훤히 다 보이는데 아직 안 들켰다 생각하는 게 꼴사나워서.”
“그러게. 건물에서 나올 때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아마 하린이도 뭔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을 걸.”
“그렇겠지? 하린이가 우리 중에서 감이 제일 좋으니까.”
강화영과 이은지는 이주화가 피워올린 불길을 본 순간 담벼락을 넘어 학교 내부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녀들은 후문을 박살 내며 들어온 성하린과 듀라한이 워낙 성대하게 날뛴 덕분에 들키지 않고 조용히 숨어들 수 있었고 학교 옥상에서 한아람을 향해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내던 두 명의 여고생을 기절시켜 포박해 둔 상황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학교 내부 청소나 하러 가 볼까.”
“아, 은지 언니. 저 새끼들. 내가 잡아도 돼?”
“어? 그래. 죽이지는 말고. 오빠 특이한 노예 수집하는 거 엄청 좋아하니까.”
“그런 거 쯤이야 나도 알고 있거든!”
항상 조준에 대해 자신이 훨씬 많이 알고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려 드는 이은지에게 한마디 톡 쏘아붙인 강화영은 얼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그대로 죽어 가는 이선재를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힐을 걸고 있던 클레릭 차지태를 짓밟았고 차지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선재 위에 엎어져 기절했다.
“이, 이 미친년이!!!”
같은 뱀파이어 계통인 혈전사 김기성은 갑작스럽게 차지태를 짓뭉개며 등장한 강화영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며 달아들었다. 그는 지난날 조준 일행을 피해 도주하며 강화영의 피냄새를 맡은 상태였다. 이에 동족혐오가 발동한 것이다.
그렇게 이성을 반쯤 놓은 김기성이 거침 없이 달려들 때 강화영은 핏빛 단검을 뽑아 들고서 김기성과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육체 능력이 굉장히 높은 혈전사 김기성은 강화영과의 난타전에서 결코 꿀리지 않았다. 하지만 템빨까지 받고 있던 강화영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김기성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릴수록 강화영은 피렌체의 혈석 반지에 의해 몸의 활력이 증가하며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됐고 신체능력도 버프를 받아 더욱 높아졌다.
결국 흡혈템으로 무장한 그녀가 피를 갉아먹으며 덤벼들자 김기성은 이길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신체 능력이 비슷해진 상태에서 강화영이 혈흔폭발과 같은 혈술까지 사용하자 김기성은 그대로 양손이 터져 나가며 쓰러졌다.
뱀파이어라 쉽게 죽지는 않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확실히 죽을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야! 화영아!”
그사이 술수를 부리려던 비술사 윤지호를 나무뿌리로 붙잡아 반쯤 으깨버린 강희선이 강화영을 불렀다.
“희선 언니! 오빠! 얘들 어떡하지? 손대중 잘못해서.. 죽겠는데?”
느긋하게 다가온 장조준은 땅바닥에서 피거품을 물고 있는 이선재와 전신에서 피를 줄줄 쏟아내는 김기성을 살폈다.
“이 새끼들... 이거 그놈들이네.”
“응?”
“그때. 구교한 우리한테 버리고 도망간 새끼들.”
“어...? 맞네! 와..”
이제야 그들을 알아본 강화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주인님인 장조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그에게 예쁨 받고 싶다는 생각이 반, 그의 피를 원 없이 빨고 싶다는 생각이 나머지 반이라서 이런 조무래기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허나 뒤끝이 장난 아닌 조준은 그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허어... 이 새끼들 거리에서 안 보이기에 어디서 객사한줄 알았더니. 이리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들 하고 계셨어? 파릇파릇한 여고생들이랑? 아주 즐거웠겠다. 어? 대답 좀 해 봐 새끼야.”
조준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과다출혈로 죽게 생긴 뱀파이어 김기성의 어깨에 의식용 단검을 찔러 넣으며 물었다.
“끄윽... 사.. 살려.. 줘.. 제발...”
슬슬 피가 모자라 몸을 덜덜 떨던 김기성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하염없이 빌었다.
“야. 고개 들어.”
“윽.. 쿠헉...”
눈을 반쯤 감은 채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김기성. 그는 기억변환 반지에 의해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조준과 겨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 장조준은 형용할 수 없는 공포로 비춰졌다.
“시.. 시발.. 겨우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야, 너 살고 싶지."
“사, 살고 싶어... 제발.. 살려 줘..”
“그럼 너 내 부하할래? 보아하니 뱀파이어 같은데.”
“부, 부하..? 쿠헉...”
“어.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죽이는 부하.”
“조, 좋아.. 부, 부하 할 테니..”
조준은 곧 눈앞에 떠오른 눈에 익은 알림 창을 대충 치우고선 의지가 꺾인 김기성의 이마에 지장을 찍었다.
치이이익!!!
“끄아아!!!”
“이건 아픈 것도 아니니까 조용히 하고.”
곧 그는 김기성에게 자해, 팀킬, 배신 금지라는 기본적인 명령을 내린 다음 차오르는 살점을 사용해 온몸이 난도질당한 김기성을 치유했다.
“끄아아아!!! 그만!!! 그마아아안!!!!”
자체 치유력이 높아 웬만한 상처는 자동으로 치유가 되고 혹여나 심하게 다치더라도 힐러인 차지태의 부작용 없는 치유만 받아오던 김기성은 차오르는 살점이 선사하는 획기적인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아.. 한 놈 됐고.”
장조준은 이선재와 차지태에게도 노예낙인을 새겼다. 척추가 박살 났다가 차오르는 살점으로 치유된 이선재는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고 형들이 무력하게 굴복하자 차지태도 모든 희망을 놓았다.
비술사 윤지호만이 끝까지 반항했으나 그마저도 팔이 잘렸다 붙기를 3번 정도 반복하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상대가 무한하게 고문할 수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반항하길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하린아! 다 잡았어?”
진심 공략조를 굴복시킨 장조준은 소환수들과 함께 기절한 플레이어들을 한곳에 모아 두고 있던 성하린에게 소리쳤다.
“네!! 운동장 상황 종료!! 학교 건물만 털면 끝!!”
성하린이 그리 외치며 꼬리를 흔들흔들 휘저었다. 그때 학교 건물에서 고개를 빼곰 내민 이은지가 마주 소리 질렀다.
“오빠!! 엔지니어 확보했어요!! 교내 안전해요!!”
학교 담벼락에 설치된 터렛들을 산 중턱에서 확인했던 조준과 일행들은 그걸 조종하는 사람부터 사로잡자고 이야기를 끝내둔 상황이었다.
이에 은신술을 쓸 수 있는 이은지와 인간 탐색기인 강화영이 옥상에서 활잡이 이수경과 김지선부터 처리하며 건물 내부로 들어가기로 했다. 물론 강화영이 중간에 진심 공략조를 잡기 위해 이탈했으나 엔지니어를 찾는 일은 이은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케이. 그럼 화영이랑 주하는 안으로 들어가서 각성자들 적당히 죽이고 굴복시켜.”
“네!”
“알겠습네다.”
“희선 누나는 운동장에 있는 생존자들 나무뿌리로 휘감아줘. 예원이도 여기 남아서 저 인간들 어디 못 도망치게 누나랑 하린이랑 같이 감시 잘해주고.”
“응응!”
“네..!”
대충 명령을 내린 조준은 정문 부근에서 기절한 유혜지를 끌고 오던 한씨 자매에게 소리쳤다.
“야! 아름아! 괜찮아? 다쳤다며!!”
“네!! 문제없어요!! 팔꿈치 살짝 까진게 다예요!!”
“오빠가 치료해 줄까!!?”
“싫어요!!!”
한아름은 이미 히토미의 따스한 치유스킬 맛을 봐버렸다. 더는 아파죽을 것 같은 조준의 차오르는 살점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조준은 그 점이 조금 슬펐다. 뭔가 자기 환자를 빼앗긴 의사로서의 박탈감 마저 들었다.
“그럼 아람이랑 아름이도 건물 내부 소탕해!!”
“네!!”
“알았어!!”
메르헤레는 조준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강화영 쪽에 합류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본교 건물로 들어간 상태였다.
이번에도 조준 일당의 습격은 순조롭게 끝났다.
지금껏 축복받은 클래스를 가진 몇 명의 플레이어 덕에 꿀을 빨고 있던 효선 여고의 생존자들은 오늘부로 이때까지 누린 모든 행복을 반납하고 조준의 노예가 될 운명을 떠안게 됐다.
또한 조준 일행들이 마트에서 한참 좀비 웨이브를 탱킹하고 있을 동안 열심히 가꾸어둔 학교도 그들에게 빼앗기게 됐다.
주변 정찰을 게을리하고 외부의 적들을 무시하던 인과응보를 받게 된 것이다.
방심하고 자만했던 이들의 말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