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98. 재회를 기약하며
* * *
나는 체셔를 꼭 끌어안았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법한 그리 크지 않은 소파지만 서로를 껴안고 있으니 함께 누워 있을 만했다.
불편할 만도 했으나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던 체셔는 내 품에 파묻혀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다.
“한 번도 나를 이렇게 안아준 사람이 없었어. 다가오는 놈들은 죄다 나를 잡아먹으려던 놈들뿐이었지.”
“그.. 잡아먹는다는 게 진짜 뜯어 먹는단 소리죠?”
“응. 여기 사는 놈들 태반이 식인을 벌이는 놈들이니까. 나는 항상 몸을 꽁꽁 숨겨야 했어. 내 살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을 다시는 놈들이 많아서.”
“진짜... 좆 같은 곳이네요.”
“헤헤.. 그치?”
그녀는 암시장에서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린 시절부터 여기서 살아남은 것 같은데.. 어린애가 암시장을 돌아다녔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내가 만약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암시장을 돌아다니다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높은 확률로 노예상과 이상한 계약을 맺었겠지. 그러곤 철창에 갇혀 그 한국인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악신들이 어찌 도움을 줬겠지만 말도 안 되는 고생을 했겠지.
그런데 그녀는 별다른 가이드도 없이 여기서 한평생을 살았다고 하니... 대단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강했을 거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니 조금 안타까워졌다.
‘여기서 체셔를 꺼내 줄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뭘까.’
나는 체셔를 꺼내주고 싶어졌다. 두 가지 이유로.
첫 번째는 오늘 몸을 섞으며 그녀에게 애정과 애착을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하고나 섹스하지 않는다. 노예로 붙잡은 여자들만 해도 이십여 명을 훌쩍 넘겼는데 아직도 내 하렘 멤버가 여덟뿐인 이유가 있다. 비록 체셔를 굴복시켜 노예로 삼을 순 없었지만... 오늘 그녀의 몸을 탐하며 내걸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에게 질내사정을 연달아 하며 소유욕이 생긴거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암시장의 가이드를 없애버리기 위해서다. 업적을 달성하고 보상으로 블랙칩을 선택한 이들은 누구든지 암시장에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아마 곧 있으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도 암시장에 들어올 수 있겠지. 그러니 곧 암시장을 들어오게 될 이들에게서 가이드를 빼앗을 생각이다. 체셔를 내가 독점함으로써 후발주자들을 모조리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거지. 일명 사다리 차기라 할 수 있다.
‘나는 체셔가 아니었다면 봉변을 당했을 거야. 체셔는 여러 부분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지. 그런 그녀를 내가 독점해 버리면 암시장에 들어올 다른 플레이어들은 꽤 고생 좀 할 거다. 아니면 여기서 뒤지던지.’
내 입장에서 나와 같은 플레이어들은 노예로 삼거나 죽여야 할 적이거나 둘 중 하나다. 고로 노예로 만들지 못한 놈들은 항상 경계하고 견제해야 할 대상들이지.
그런 놈들이 멋모르고 암시장에 기어들어왔다가 죄다 죽어 나가면 자연스럽게 위험 요소가 사라지는 거다.
물론 언젠가 내 노예가 될지도 모를 놈들이긴 하지만... 암시장에 들어올 정도의 역량을 갖춘 각성자들이라면 내 손에 쉽사리 잡혀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강적이겠지. 그러니 정면대결을 고수하는 것보단 차도살인을 노리는 게 더 안전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와 귀를 만지작거리며 쓰다듬고 있으니 체셔가 내 볼과 입술에 마구 뽀뽀하며 애교를 부렸다.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리던 그녀의 꼬리가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목을 휘감아 왔다.
“하아... 우리 준이 따뜻해서 너무 좋네.”
“그래요?”
체셔는 내 온기가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었다. 나가라자의 즙과 보타밀리가 줬던 붉은 구슬을 먹고 난 뒤로 항상 몸이 따뜻한 느낌이 들던데. 그것들 덕분에 체셔가 선호하는 온도가 된 모양이다.
“저기. 준아 그냥 이대로 평생 나랑 여기서 살지 않을래?”
“어... 체셔..”
체셔는 내 목덜미에 키스 마크를 남기며 물었다. 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대답을 고민했다. 선뜻 거절하기에도 미안 하고 알겠다고 답하기엔 밖에서 목이 빠져라 나를 기다릴 여자들이 눈에 밟힌다.
‘분명 체셔와 함께 암시장에서 살아가는 것도 나름 즐겁고 행복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여인들을 전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야. 난 돌아가야 한다.’
하린이도 나를 위해 초원을 등지고 썩어빠진 현실로 돌아와 줬는데 내가 배신할 수는 없지. 그리고 나는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여자들도 체셔만큼이나 사랑한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그런 구분은 없다.
‘비록 노예 상태였다고 해도 힘들 때 내 곁에 같이 있어 준 여자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그녀들을 매정하게 버릴까. 나도 시발 염치가 있는 인간인데 말이지.’
더구나 만약에 내가 진짜 그냥 여기서 체셔와 살기 위해 남는다고 해도... 아마 화영이나 은지는 끝까지 나를 찾아낼 것 같아서 무조건 돌아가야겠다.
둘 다 약간 얀데레 기질이 있어서... 요즘 들어 하린이도 나에 대한 집착이 슬슬 심해지는 것 같고. 돌아가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찾으러 올 여자들이다.
‘더구나 나에게 원하는 게 있을 악신들이.. 내가 여기에 틀어박혀 있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지. 분명 훼방을 놓을 거다.. 암시장 자체로도 위험한데 악신들의 보복이라니.. 답도 없군.’
지난번 보타밀리가 나를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오게끔 유도하기 위해 지하경비대를 자극했듯 내가 체셔와 여기에 남기를 선택하면 분명 악신들이 뭔 수를 쓸 거다.
악신들은 내가 가만히 멈춰 정체되는 걸 결코 원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암시장을 박살 내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를 완전히 종속시켜 자신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인형으로 만들지도 모르고.
악신들을 배신했다간 곱게 못 죽으리라. 이거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체셔와 남는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니 체셔의 제안은 너무 감사하지만 거부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녀를 암시장에서 탈출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내가 남는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리고 악신들도 저를 기다리고 있구요.”
내 대답에 체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슬픔을 참는 사람처럼 그녀는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자기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응..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 혼자 널 독점하려는 건.. 욕심이겠지. 괜찮아.”
“미안 해요.”
“사과하지 마. 내가 버림받는 것 같으니까. 그냥 시간 날 때마다 날 보러와. 난 언제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
“그럴게요.”
나는 영 마음이 좋지 않아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체셔.”
“응..?”
“여기서.. 그러니까 암시장에서 나가는 방법. 저한테 알려주지 않을래요?”
그리 묻자 체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그건 안 돼. 너무 위험해. 그리고 나도 내 소망이 이뤄지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어. 그냥.. 네 품이 너무 따스해서.. 잠시 정신을 못 차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부담 갖지도 말고. 내 말은 잊어버려.”
역시나 체셔는 나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허나 나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도대체 그 방법이 뭐기에 저리 꽁꽁 숨기는 거지?
“그러지 말고.. 말해 줘요. 내가 너무 약해서 그래요? 말 안해주면 나를 믿지 못하는 걸로 알게요.”
“하아... 맞아. 너는 약해. 더 강해져야 해. 내가 여기서 나가기 위해선... 암시장의 지하를 공략해야 하니까.”
“지하... 지하층 말이죠.”
암시장의 지하. 경고문에서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장소다. 정신 나간 물량으로 나를 죽일뻔했던 지하경비대의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기도하고.
“응.. 괴물 새끼들이 돌아다니고. 미친 싸이코 광신도들과 악마들이 우글거리는... 끔찍한 곳이야. 거기로 들어가서. 내 영혼의 조각을 찾아야 해. 안 그럼.. 나갈 수 없어.”
“영혼의 조각..”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지하층을 공략해야 한다면... 진짜 지금 레벨과 장비로는 불가능하다. 용잡이 지크 급으로 강해져야 공략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악마들이 있는 곳이라니... 그녀는 악마에게 영혼이 저당잡힌 상태인걸까?
“더구나 지하층이 어느 정도로 넓은지도 모르는데 내 영혼 조각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야. 그러니 혹여나 이상한 생각 말고 포기해, 준아. 그냥 우리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걸로 만족하자.”
그녀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난이도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체셔를 끌어안았다. 그리 우리는 잠시 시간을 보냈다. 허나 주어진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체셔가 맞춰둔 알람이 울렸다.
“후우. 자! 그럼 다시 가 보자!”
내 품 안에서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체셔는 아무렇지 않게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알람이 울리자 다시 쾌활한 척 미소 지었다. 울면서 떠나보내기 싫은거겠지.
그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도 마주 웃어줬다. 다음 주에 실종자들의 숲에서 빨리 탈출하게 된다면 또 올 수 있다. 못 오더라도 다다음 주엔 무조건 만나러 오면 되니까.
우린 서둘러 벗어뒀던 옷을 다시 챙겨 입었다. 그러곤 체셔는 내 손을 붙잡고 중앙광장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녀는 그녀의 거처에 한해서는 어디서든 이동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중앙광장 어귀에 헬러스를 맡겨뒀던 애완인류 호텔로 돌아가자 헬러스가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반겼다.
“으어!! 왔다!! 드디어!! 날 이 정신 나간 곳에서 당장 꺼내주게!!! 부탁일세!! 제발!!”
그가 철창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외눈박이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빨리 데리고 가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으어엉... 젠장... 여긴 미쳤어.. 미친놈들이 가득하다고...”
늙은 노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에게 안겨 들어서 조금 거북했지만, 이족들 사이에 구경꺼리로 있는 동안 심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좀 진정해 봐! 다들 쳐다보잖아.”
“흐엉엉...”
“어.. 일단 빨리 영감 데리고 여기서 나가자. 더 주의를 끌면 용역들이 올 거야. 장사 방해한다고..”
“아, 넵.”
우린 처절하게 울고 있는 헬러스 영감탱이를 이끌고 꼬인 골목으로 이동했다. 난 도착하자마자 영감에게 소리치며 강하게 명령했다.
“미친놈아! 그만 울어! 이건 명령이다!”
“히끅.. 흐읍..”
“후우.. 미친 영감탱이. 도대체 뭘 본 거야.”
“애완... 애완인간이라며.. 그런데.. 도대체 왜 처먹는 겐가.. 애완용은 식용이 아니 잖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이해가 안 된다고!! 자.. 자네는 저 많은 마인들이 벌이는 미친 짓들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나?”
“어.. 좀 역겹긴 하죠?”
“감상이 그게 단가? 자네도... 정신이 이상한 게 분명해... 시발!! 여긴 이상하다고!!”
SAN치 체크 좀 해 봐야 할 것 같은 상태다. 보아하니 눈앞에서 식인 행위가 벌어진 모양인데... 그 장면을 내가 보질 못했으니 뭐라 공감하기도 뭣하고.. 그냥 기절시키고 끌고 가야겠다.
[곤란해 보이네.]
‘아.. 보타밀리님..’
체셔의 방에서 나와서 그런지 다시 시선이 느껴지지 시작한 악신들. 특히 그중에서 보타밀리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암시장은 보타밀리가 봉인된 곳과 가까운 장소니까 그녀의 존재감이 더욱 커진 모양이었다.
[컬티스트. 그 인간의 기억을 나에게 공양해.]
‘예? 그게 가능합니까?’
[나와 가까운 곳이라면 가능하지.]
[더구나 기억이라면... 나는 망각의 신이니까.]
나는 보타밀리의 말대로 헬러스 영감의 최근 기억 1시간 치를 공양하기로 했다.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일그러진 비늘을 사용했더니 놀랍게도 헬러스는 1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 잠깐의 소동이 있고 난 뒤 우린 꼬인 골목에서 문을 찾아 돌아다녔다.
“여기! 찾았어!”
“오..!”
체셔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금세 암시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구멍이 달린 문을 찾아냈다.
“다음 주는 실종자들의 숲에 가야 해서.. 못올 수도 있어요..”
“괜찮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죽지만 마. 꼭 몸성히 살아서 돌아와? 알겠지? 나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네. 꼭 다시 만나러 올게요.”
나와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라서 이별의 키스도 할 수 없었다. 우린 그저 서로의 얼굴을 비비듯 가면을 맞부딪쳤다.
혼자 꼬인 골목에 남아 작게 손을 흔드는 체셔를 보며 문을 넘어갔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이 문을 넘으리라 다짐했다.
*****
“왔다!!”
“오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이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열렬히 환영해줬다.
“어? 그 영감은 누구예요?”
“새로운 노예로군. 왔나, 주인.”
“응 무사히 돌아왔어. 그리고 이 영감님은 헬러스. 연금술사래.”
“어.. 크흠. 반가구려. 아름다운 아가씨들.. 나는 연금공방의 2급 연금술사. 헬러스라하네.”
여자들 앞이라고 괜히 목소리를 까는 영감의 뒤통수를 때려 줬다. 다 늙은 영감 주제에 여자는 좋은 모양이었다.
“오빠.. 그.. 피임약은..”
“어, 구해왔어. 이제 질내사정해도 상관없을 거야.”
“와..!”
하린이는 내 품에 안겨들었다. 강아지 마냥 꼬리를 팔팔팔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뿌듯해졌다.
“킁킁.. 으음..? 그런데 오빠. 킁킁.. 이게 무슨 냄새예요..?”
“어?”
“이거... 다른 짐승의 냄새.. 오빠.. 누구랑 놀다 온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를 올려다보며 내 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하린이. 야수의 눈처럼 동공이 세로로 길게 늘어나서 무섭다...
“확실히... 이 냄새는..”
곧 옆에 서 있던 화영이도 나를 껴안더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아예 내 자지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는다.
“흐응.. 정액 냄새잖아... 오라버님? 언년이랑 떡치다 온 거예요?”
“저기 화영아. 그게 아니라.”
“킁킁.. 잠깐만. 화영아, 이거 고양이 냄새야.”
“도둑고양이라... 누굴까... 오빠 빨리 말해 줘요.”
나를 붙잡고서 강압적으로 물어 오는 그녀들.
하린이는 내 노예가 아니라서 명령이 통하지 않고 이미 나에게 몸과 영혼을 바쳐 음문을 새긴 화영이는 그 대가로 나와 동등해졌다. 여전히 내 명령은 따르지만 뭐랄까 일반적인 노예랑은 다른 상태라고나 할까.
아무튼 난 두 사람의 등쌀에 떠밀려 암시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례차례 설명했다.
“흐음... 우리가 없는 곳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난 거네요.”
“잠깐.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라. 체셔는 믿을 만한 여자니까.”
그때 메르가 나에게 지원사격을 해줬다. 메르도 체셔의 도움을 받았었으니까.
메르는 나에게 작게 윙크를 날려 줬다.
“흐음.. 다음에는 같이 들어가요. 나도 그 도둑고양이를 봐야겠으니까.”
“어... 화영아. 그 사람.. 메르보다 강해..”
“네? 크흠.. 은지 누나부터 보내야겠네요.”
체셔가 무진장 강하다고 말하자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은지를 팔아먹는 화영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애들은?”
“은지 언니랑 예원 언니랑 희선 언니는 셋 다 옥상에서 경계서고 있어요.”
“아하.. 아람이랑 아름이는?”
“둘은 자고 있고요.”
“음.. 둘 다 잠이 많으니까.”
나는 네 사람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곤 곧바로 헬러스를 끌고 활력초가 심어진 자그마한 밭을 보여줬다.
“허.. 이건.. 활력초로군. 품질은 썩.. 좋지는 않지만. 충분히 치유 포션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그래? 다른 재료는 필요 없고?”
“음... 깨끗한 물과 소금 등이 필요하긴 하지. 그리고 플라스크와 화로도 있어야 하고. 냄비도 큰 게 필요하겠어. 그리고 또...”
“잠깐만. 다 기억 못해. 메모해. 메모.”
나는 헬러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메모해 두라고 했다. 나중에 확인하고 구해다 주기 위해. 그런데 헬러스가 메모한 글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메르를 제외하곤.
헬러스가 사용하는 문자는 오래전 영국에서 쓰였던 고어(古?)로.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진 사어(死?)라고 했다. 노예라 어찌 대화는 통하는 모양인데 문자는 서로 못알아 봤다. 헬러스는 한글을 몰랐으니까.
결국 메르가 아니고서야 그의 문자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고급 인력인 메르를 헬러스 영감 옆에 붙여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헬러스의 말을 받아 적을 기록관을 한 명 구하기로 했다.
“수민아.”
“네. 부르셨어요?”
“어. 그게 이 영감이 연금술사인데.. 네가 담당 좀 해 줄래?”
“어.. 네.. 알겠어요.”
나는 헬러스 영감을 수민이에게 맡겼다. 요즘 들어 같은 메이지 클래스가 두 명이나 더 생겨 생활이 제법 여유로워 보여서 일 거리를 안겨 줬다. 노예를 놀게 둘 수는 없으니까.
수민이는 군말없이 품에 있던 수첩과 볼펜을 꺼내 헬러스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리 헬러스가 우리 집단에 들어오고 다시 하루 정도 더 지났다.
드디어 실종자들의 숲에 들어갈 일요일이 찾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