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68. 망가진 악몽 속으로
* * *
띠리리릭.
띠리리릭.
“흐음...”
익숙한 알람 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겨우 눈을 떴다.
“어..?”
그런데 내 방 천장을 보고 있으니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상하게 집이 낯설었다. 분명 몇 년이나 살아온 집일 텐데...
'평소의 집인데.. 왜 이러지?'
고개를 꺄우뚱 거리며 기지개를 한번 켰다.
그러곤 곧장 화장실로 가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서 커피를 한잔 마셨다.
출근 전의 일과. 항상 하던 행동들인데도 이상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었다.
“후루룩..”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
왜 이리 여유로운 걸까. 원래도 이렇게 여유로웠나?
회사에 지각할 걱정이 없으니... 왜 지각할 걱정이 없지?
“이상하네.. 이상한데.. 왜 이상한지를 모르겠어.”
커피를 마시며 찬찬히 기억을 떠올려 봤다. 원래의 나, 이상한 내가 아닌...
“그래.. 나는 회사에 가기 싫어해야 해. 그게 정상적인 장조준이지...”
그리 생각하자 곧바로 무기력증과 회사에 대한 뿌리 깊은 짜증,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 대한 증오심이 샘솟았다.
잊고 있던 감정들을 떠올리니 이제야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던 위화감이 조금 사라진 기분이 든다. 마치 어긋나 있던 그림이 살짝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런 안정감이었다.
“로또 당첨 좀 안 되나..”
벌써 십년째 매주 꼬박꼬박 로또를 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5등 당첨도 잘 안 된다.
운이 얼마나 없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빌어먹을 내 삶에서 행운을 바라는 게 잘못된 일이겠지만.
“에휴... 비루한 인생...”
신세한탄을 하며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오늘도 빌어먹을 좆소의 개 같은 인간들과 싸우지 않고 원만하게 어울리려면 벌써 쳐져선 안 된다.
억지로라도 힘을 내야 한다.
안 그랬다간 이리저리 인간들에게 치여 하루의 대부분을 짜증과 분노로 보내게 될 게 뻔했다.
덜컹.
엿 같은 인생을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어 보자고 다짐하며 현관문을 열과 밖으로 나갔다.
그때마침타이밍이 겹쳐옆집여자와 마주쳤다.
‘옆집여자... 은지?’
잠깐, 내가 어떻게 옆집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지...
그리고 뭘까. 이 애틋한 감정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껴안고 싶다. 그래도 될 것만 같다. 그녀가 내 여자처럼 느껴진다.
‘내가 진짜 미쳤나? 오늘 자꾸 왜 이러지?’
연휴가 너무 길었나보다. 기분이 붕뜨고 익숙했던 오늘이 익숙하지 않게 느껴진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옆집여자가 나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하세요..”
난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반갑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오랜만이라고...
아니, 애초에 마주치는 일 자체가 별로 없는데..
생각이 깊어져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옆집여자는 나를 이상하게 보더니 곧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어! 이, 이게 무슨..!?”
“아침 인사요. 몰라요? 우리 항상하던 건데?”
“어.. 네?”
“이러다 지각하겠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오빠.”
그녀는 내 아랫도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그대로 그림자에 녹아들어 난간을 타고 내려갔다.
“이게 무슨.. 크윽..”
그녀가 1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현실이 뒤틀릴 정도의 이상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뇌를 후벼파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뭔가 방금 엄청 어긋났는데. 뭘까 이 느낌은?’
모르겠다. 그냥 옆집여자가 참 예쁘다는 생각에 집중하니 곧 이상함도, 일그러짐도 사라졌다. 동시에 일그러짐이 사라진 자리에 저 여자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찼다.
‘나도 저런 여자랑 연애도 해 보고.. 결혼도 할 수 있을까?’
여자와는 연이 없는 인생이었다. 연애 경험도 전무하고.
애초에 나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여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방금 옆집여자는 나에게 꽤 적극적인 대시를 한 것 같은데...
난 옆집여자와 사귀고, 결혼하고 애까지 낳는 상상을 하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바삐 걸었다.
‘지옥철...’
역시나 아침이라 그런지 지하철엔 사람이 가득했다. 그런데 죄다 여자들이다.
도끼를 든 여자, 피어싱을 한 여자와 190은 될법한 장신의 여자부터 지하철 안에는 낯익은 여자들이 가득했다.
“어...”
회사에 늦을 것 같아 일단은 그녀들의 틈바구니로 비집고 들어가 탑승했다.
이곳저곳에서 가슴이 날아들며 내 얼굴을 때린다.
“후우...”
가슴들에 파묻혔다.그녀들의 야릇한 체취가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뭔가 자꾸 아랫도리가 커지려고 하는데... 이러다가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엉덩이에 닿기라도 하면 답이 없다.
난 억지로 발기를 참았다.
그때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엉덩이를 자꾸 들이밀어 나의 아랫도리에 비볐다.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참기 어려웠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엉덩이가 비벼지면 비벼질 수록 더욱 숨결이 거칠어지고 자지가 커져갔다.
‘이런 미친!! 이 여자 왜 이래!’
내리기 전까지 나는 속으로 애국가를 한참이나 불러야했다.
·
·
·
순식간에 시간이 지났다.
왠지 중간 과정이 생략된 것 같지만, 일단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하아.. 피곤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엎어져 잠시 숨을 골랐다.
“하. 김 대리 그 망할 년... 꼭 나한테만 개지랄이야. 공양하고 싶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겹다.
반복되는 짜증이 이젠 질린다.
“때려치울까...”
아무리 엿 같고 짜증 나도 여기 말곤 갈 곳이 없어서 계속 버티고 있었는데 이게 맞는 건가.
홧김에 때려치웠다간 인신공양을 하거나 노예사냥을 전전해야 하는데...
“어쩌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급도 좋다는데 그냥 이참에 사표 쓰고 컬티스트 인생이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좆소 월급이나 컬티스트 시급이나...
회사 때려치우고 김 대리 그년한테 개지랄도 좀 떨고 싶다.
나만 보면 지랄병 걸린 개 마냥 짖어대는 그 쌍년의 면상을 박살 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하고 있자 문득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맥어보이와 안젤리나가 나오는 그 영화.
거기서 주인공이 모종의 기회를 얻어 회사를 때려치우게 되는데, 그때 직장 상사를 윽박지르고 동료의 면상을 키보드로 후려치는 장면이 나온다.
‘좆 같은 상사나 동료를 둔 모든 직장인들의 회한이 담긴 명장면이지..’
키보드를 들고 그 장면을 그대로 따라 했다간 바로 교도소행이겠지만 그래도 그 쌍년의 면상에 촉수 정도는 갈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띵동.
“응..?”
나에게 찾아올 사람이 있나?
그것도 이 늦은 저녁에?
난 가족이 없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친구도 없다.
친인척들은 원수보다 못한 놈들이고.
도대체 나에게 누가 찾아온 걸까.
외시경으로밖을 확인했다.
“응...?”
외시경 밖에는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비정상적으로 예쁜 여자가 서 있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채로.
“뭐야.. 저 여자. 이 밤중에.”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이 밤중에 우리 집에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거지?
“시발...”
살짝 소름 끼쳐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곤 얼른 집안 곳곳에 불을 켰다.
“하아.. 게임만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나 같이 연고 없는 인간은 답이 없다.
보살펴줄 가족도 보살핌 받을 수 있는 재산도 없으니.
‘정신병에 걸려 허우적거릴 바에야 그냥 뒤지는게 낫지.’
정신병원에 끌려들어가서 신경 안정제를 온종일 처맞고 미친놈들 사이에서 파랑새나 쫓긴 싫다.
“시발..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어..”
정말이지 끔찍한 인생이다. 나만 계속 망하는 것 같다. 나만 꼬이는 것 같다고.
기왕 꼬일 거라면. 이 세상 전부 다 꼬여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 공평하게 다 같이 망하는 거지.
점차 부정적인 생각이 깊어진다.
나는 어느새 매듭을 만들어 거기에 목을 걸려고 하고 있었다.
띵동.
그때 다시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이런 씨발!!”
도대체 뭐 하는 새끼기에 자꾸 우리 집 초인종으로 지랄하는 거지?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무서운 거고 나발이고.
나는 집에 있던 야구 배트를 꺼내 들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우어어어...”
현관문 앞에는 윗집 아재가 서 있었다.
가끔 술에 떡이 되면 아래층인 우리 집을 자기 집인 줄 알고 잘못 찾아오는 윗집 아저씨...
그런데 뭔가.. 이거.. 왜 한번 본 장면 같지?
이 기시감은 뭐지?
왜 윗집 아저씨는 좀비가 된 거지?
좀비?
‘데자뷰...?’
나는.. 이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모르겠다. 흐릿하다.
“우어어어!!!”
그저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깡!!
아저씨의 머리에 직격한 야구 배트.
그대로 균형을 잃은 좀비의 머리를 계속해서 내려쳤다.
그러곤 쓰러져 죽어 가는 놈의 목덜미를 짓밟았다.
“하아.. 하아.. 하아.. 씨..바..”
피로 흥건한 손.
죽어 있는 한태양.
한태양..?
“뭐야. 여긴..”
어느새 나는 어딘지 모를 주택에 홀로 서 있었다.
슬슬 위화감이 극에 달했다.
“아... 아...”
그때 주택의 안방,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누군가 나를 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 씨발!!! 누구야!!”
“우... 우...”
그건 아내를 잃은 이름 모를 남자였다.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놈은 나를 증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안 곳곳에서 내가 죽인 이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원망한다는 듯이. 나를 죽이고 싶다는 듯이.
“잠깐. 내가.. 죽인 인간들...? 내가 죽였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
서서히, 점진적으로 기억들이 하나둘씩 깨어난다.
그제야 나는 이게 꿈이란 걸 인지했다.
“꿈... 그래. 외면하는 파란약. 시발.. 꿈이었구나.”
그제야 나를 옭아매던 위화감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어쩐지 오늘 온종일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전부 꿈이었다니.
‘외면하는 파란약.. 뭐야. 특별한 이벤트가 있다고 해놓고선. 이따위 재미없는 꿈이나 꾸게 만들고...’
왠지 속은 기분이다. 이런 시답잖은 악몽이나 꾸자고 몇천 코인이나 소모했다니.
죽인 이들에게 죄책감이라도 들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공포에 질리길 바랐던 걸까.
난 내 손으로 죽인 놈들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죽어 마땅한 놈들만 죽였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이미 한번 죽인 놈들에게 공포를 느낄 이유도 없고.
여기가 꿈인걸 깨달은 이상 무서울 것도 없다.
그리 생각하자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하며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완전한 자각몽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일상의 악몽’에서 ‘공유몽의 비극’으로 넘어갑니다.]
“공유 뭐? 으윽...!”
뭐라 따져 묻기도 전에 나는 다시 잠들었다.
*****
“으윽... 머리야..”
조금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긴...”
내가 눈을 뜬 곳은 불그스름한 하늘과 뭔지 모를 것들이 잔뜩 자라난 땅이 펼쳐진 곳이었다.
마치, 지옥의 한 면을 잘라 내서 만든 장소 같았다. 뭐랄까 불길하고 꺼림칙한 하늘이다.
피에 물든 것처럼.. 붉고.. 또 붉다.
그저.. 붉어서... 아름다운..
저건... 대체..
“이봐. 고개 숙여.”
붉은 하늘에 정신을 빼앗겼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기계음이 섞여 들리는데 누구지?
모르겠다.
분명 고개를 내려서 누군지 확인해야 하는데..
저 붉은 하늘, 저 붉은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못 때겠..
파지지직!!!
“끄아아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충격.
전기충격기인지 뭔지 모를 물건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자극.
나는 발작하며 게거품을 물곤 바닥에 쓰러졌다.
덕분에 겨우 붉은 하늘에서 시야를 땔 수 있었다.
“크으으윽...!!!”
바닥에 쓰러진 채로 나를 공격한 녀석을 올려다 보니 뭔가 중무장한 군인 같은 모습의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로봇..?’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자세히 보니 그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안드로이드에 가깝다고 할까.
관절부에 이음매가 보인다. 또한 뜯겨나간 피부엔 기계 파츠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로봇 아니면 사이보그인가?’
정확히는 모르겠다. 개조 인간인건지 그냥 안드로이드인건지.
단지 보이는 외관을 통해 그의 신체 대부분이 기계 파츠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공격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입가에 묻은 게거품을 겨우 옷소매로 닦아낸 나에게 그는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차가운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나를 죽이려 했다면 이미 몇 번이나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살려 둔걸 보아하니 뭔가 나에게 시킬 일이 있거나 엄청 친절한 로봇이거나 둘 중 하나다.
제발 후자였으면 좋겠다.
“끄으흡...”
“이봐, 하늘을 올려다보지 마라. 저 하늘을 봐서 좋은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아.”
“아.. 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야구모자와 선글라스를 꺼내 나에게 씌웠다.
모장의 챙에 하늘이 조금 가려 의식하지 않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선글라스 덕분에 시야가 좀 더 차단됐고.
“결코 저 하늘에 뜬 것을 봐선 안 돼. 그대로 이 땅의 거름이 되고 싶지 않다면.”
이 땅의 거름이 된다니. 여긴 그저 꿈이 아니었나?
설마 죽으면 그대로 현실에 돌아가지 못하는 종류의 꿈인가.
잠든 동안 아예 이상한 곳으로 끌려왔을지도 모른다.
난 로봇에게 질문했다.
“저기 여기 꿈속인 건 맞나요?”
“뭐라고? 꿈? 꿈이라니..? 잠깐만 꿈이라.. 그래 꿈이지. 꿈 맞아. 여긴 꿈이었어. 흐음.. 꿈이었군.”
순간 안드로이드는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난 그 모습이 조금 기괴하고 소름 끼쳤다.
혹여나 그가 미쳐서 나를 공격할지도 몰라 촉수로 억제하기 위해 스킬을 사용해 보려 했지만.
‘스킬 사용이 안 된다. 심지어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고.’
암시장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상층, 그러니까 빙의자나 귀환자, 환생자 같은 치명적인 오류더미들이 모여드는 이면세계에서 처럼 여기서도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소지품도 입고 있는 옷이 전부다. 그나마 이면세계에서는 폭죽이나 여러가지 물건이라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긴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다.
‘꿈이니까 빈손인 게 당연하지..’
카쉬낙스와 인디크론의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속이라 그녀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 같다.
‘어..?’
그런데 어째선지 보타밀리의 존재는 느껴졌다.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강한 존재감이다.
난 보타밀리에게 말을 걸었다. 제발 그녀가 대답해 주길 바라며.
[흐음.. 흐음.. 여긴..]
[경계로군. 경계선이라... 무엇의 경계지?]
[몰라. 모르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론 못 나와.]
[결코 거기서 정신 줄을 놓아선 안 돼.]
[말려들어 가면 ‘악몽’의 일부가 된다.]
[네 앞의 그 존재에게 도움을 구해라.]
[그라면 너에게…….]
보타밀리의 목소리엔 노이즈가 잔뜩 껴있었다.
몇 마디 덧붙인 것 같은데 잘 안 들렸다.
‘내 옆의 존재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나는 여전히 뭔가를 중얼중얼거리는 안드로이드를 한번 쳐다 봤다.
나에 대한 악의나 살의는 느껴지지 않지만 그 이전에 그는 어딘가 이미 망가진 존재였다. 이런 놈을 믿어도 될까...
“분명..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기 위해.. 나는 웜홀을.. 통과했고.. 여긴.. 꿈.. 나는 누구지? 나는 과학자.. 연구를 위해.. 무슨 연구였지..? 아, 분명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기 위해... 나는 웜홀을.. 통과했고.. 여긴...”
오류에 빠진 기계처럼 똑같은 문답을 계속해서 되뇐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끝도 없이 혼자서 같은 말만 중얼거릴 것 같아 얼른 그를 깨우기로 했다.
“저기! 이봐요!”
“허억...!”
내가 어깨를 툭툭 치며 부르자 그는 곧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다. 나 또한... 너무 이곳에 오래 있었나보군. 자꾸 정신이 오락가락해.”
“아니, 여긴 도대체 어딥니까. 꿈속인건 알겠는데...”
일단 아는 게 없으니 나보단 아는 게 많아 보이는 그의 지식을 좀 빌려야겠다.
“여긴... 연옥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곳...”
“연옥이요?”
“그래. 방금 네가 말한 대로 여긴 꿈속이야. 문제는 누구의 꿈인지 아무도 모른단 점이지. 덕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분명히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시스템 알림이 공유몽의 비극 어쩌고 했는데...
“공유몽의 비극에 대해 아십니까?”
“공유몽의 비극...? 공유지의 비극은 알지만... 공유몽의 비극이라.. 나도 잘 모르겠군.”
“공유지의 비극이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내가 아리송해 하자 남자가 공유지의 비극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정말 간단히 말해서 아무런 규칙이나 법 없이 개인들 앞에 공유자원을 놔두면 너도나도 마구잡이로 사용해 전부 고갈시키고 망가뜨리게 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공유몽의 비극이라... 뭔가 의미심장한 키워드로군”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곤 급하게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단 해가지기 전에 얼른 베이스 캠프로 가야 해. 자네는 여기 초입인 것 같은데, 갈 곳이 없다면 일단 따라오게.”
난 일단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어서 그를 따라갔다.
어디서든 밤이 낮보다 훨씬 두려우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