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64. 터트리고, 부수고, 빼앗아라 (2)
* * *
삐이이
귀에 남은 폭발의 잔향.
이명에 주변의 소음이 가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씨바알....”
뭔가 터졌다.
폭탄이었을까.
모르겠다.
한참 옆에 여자를 끼고서 양주를 마시고 있을 때 두 명의 중앙회 소속 각성자가 회의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기다란 폭죽이 들려 있었고, 그들이 뭔가를 말하려 할 때 폭발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간부 회의실에서 술을 마시던 이들 절반 이상이 폭사했다.
특히나 그들이 달려들어온 입구 부근에 있던 이들은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시발...”
문근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방패막이로 사용한 여자의 살점이 묻어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순간 문근오는 옆에서 술을 따르던 이름 모를 비 각성자 여성을 붙잡아 들어 방패로 썼다.
날아오는 파편과 폭발의 여파를 막아 내는데 요긴 하게 쓰인 여자는 그대로 불탄 고기가 되어 죽었다.
“야. 태석아. 야! 일어나 봐!!!”
그의 오른팔인 강태석의 배에 나무 조각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강태석이 살긴 그른 것 같다고 여긴 문근오는 연신 욕석을 내뱉었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죽거나 죽어 가는 중이거나.
정상적인 놈이 없다. 간부 회의실에 있던 놈들은 죄다 어디가 박살 나 있었다.
“후우..”
문근오는 손목에 달린 팔찌를 보며 한숨 쉬었다.
지난날 보부상에게 구입한 이 팔찌가 아니었다면, 옆에 끼고 있던 여자로 얼른 폭발을 막지 않았다면, 자신이 입구 근처에 앉아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도 아마 휘말려 죽었겠지.
물론 그렇다고 문근오가 정상적인 상태인건 아니다.
그 또한 몸 곳곳에 화상이라도 입은 듯 피부가 아려왔고 폭발의 여파로 고막이 찢긴 건지 소리도 잘 안 들렸다.
더구나 여자를 들어 올려 폭발을 막아 낸 덕에 오른손 손가락이 몇 개 꺾이고 손목도 살짝 뒤틀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팠다.
“어떤 개새끼들이.. 우릴..”
그는 침입자들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 하면서도 홀로 박살 난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기는 또 두려웠다.
군중제어가 주특기인 선동가 클래스 데마고그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만약 멸망 초반에 향우회에서 안면을 익혀 친근감 있던 생존자 그룹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진즉에 특수 좀비에게 죽었겠지.
데마고그는 그만큼 전투 능력이 낮은 클래스였다. 레벨을 올려도 스탯의 증가가 낮고 스킬도 전투와는 영 거리가 멀었으니.
‘습격한 놈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작정하고 다 죽일 생각으로 온 걸까... 모르겠어.. 어제 간부 중에 한 놈이 안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후에 세 명을 더 보냈는데도 안 돌아왔었지.. 젠장... 만약 적들이 악마 빙의자 넷을 먹어 치울 만한 놈들이라면.. 나는 그냥 썰린다.’
문근오는 건물내부, 별관 지하에 있는 패닉 룸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서 숨죽여 있다가 침입자들이 다 죽으면 밖으로 나가고 역으로 중앙회 소속의 인원이 패배하면 비상탈출구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야, 야. 일어나. 우리 빨리 가야 해.”
“어.. 으윽... 교주님..”
“빨리 가야 한다고. 어서 일어나 좀..”
그렇다고 혼자서 움직여 봐야 약해빠진 그로서는 앞으로 계속 생존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최측근 중 하나인 김율을 깨워 끌고 가려 했다.
비록 김율이 각성자는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가장 자신의 스킬에 많이 현혹된 악마 빙의자니까 쓸모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또한 무엇보다 당장 혼자가 되는 게 두렵기도 했고 이마가 찢겨 피가 줄줄 흐르고 있긴 하지만 김율은 그나마 다른 놈들보다 상태가 양호해 보였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김율을 일으켜 세운 문근오는 조심스럽게 간부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후우.. 교, 교주님.. 조금만 천천히..”
“야, 빨리 가야 해. 임마 지금 여기에 뭐가 찾아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리 말하며 패닉 룸을 향해 가던 그들의 앞에 누군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걸어오는 모습이 사람이라기 보단 차라리 좀비에 가까운 사내였다.
얼굴은 눈에 익었지만 이름까진 기억하지 못한. 아까 전 강당에서 봤던 비 각성자 같아 보였다.
“어, 야. 너, 너 뭐야! 왜 그래!”
문근오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사내는 그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가올 뿐이었다.
팔다리가 심하게 떨리고 심지어 입으로는 누런 거품을 질질 흘리더니 곧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이, 이 시발... 도대체 뭐냐고...”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폭발도 정신 없어 죽겠는데 강당에 있어야할 인간이 여기까지 기어 나와서 발작하다 쓰러지기까지 하다니.
문근오는 그저 빨리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쓰러져 발작하는 남자를 피해 가려고 했다. 괜히 가까이 다가 갔다가 봉변당하기 싫었기에.
그때 바닥에 쓰러져 발작하던 남자는 옆으로 피해가던 문근오에겐 반응하지 않다가 김율이 지나가려하자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 놔! 놓으라고!!!”
김율은 자기 발목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 남자에게 발길질했다. 머리를 밟고 손을 걷어찼다. 그래도 놓지 않기에 김율은 미약한 마기까지 내뿜었다.
그러자 남자는 더욱 심하게 발작하더니 곧 돌아누웠다.
“야, 야! 저거 뭐야!!!”
돌아누운 사내의 배가 볼록해지더니...
꿈틀.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안에서 뭔지 모를 것들이 꿈틀거리며 뱃가죽을 찢고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아아!!!! 교, 교주님!! 도와주세요!! 아아!!”
문근오를 벌레 떼에 휩싸여 산 채로 뜯어먹히기 시작한 김율을 버리고 달렸다.
뒤에서 김율이 악마화를 시작했지만 벌레들은 그보다 빠르게 김율의 눈과 혀를 파먹고 목을 미친 듯이 물어뜯어 악마로 변하기 전에 죽여 버렸다.
“으아.. 으아아.. 으아아아!!!!”
문근오는 달렸다. 그저 안전하다 여겨질 때까지 패닉에 빠져 계속해서 달려 나간 끝에 그는 벌레들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어째선지 모두를 강당 쪽으로 유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상태였지만.
사사사삿. 사사사삭. 바스락바스락 바스락. 스슷 스스슷.
벌레들이 들끓는 강당.
그 안에는 방금 전 남자의 배를 뚫고 기어 나왔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사람만 한 크기의 벌레가 인간의 몸에 매달려 뱃가죽을 뚫고서 뭔가를 그 안에 낳고 있었다.
“아... 아아...”
문근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조준이 불러냈었던 칠흑바퀴였다.
주인은 사람이 아닌 건 전부 죽이라고 명했다. 또한 사람은 되도록 죽이지 말고 가둬두라고 명했다.
이에 칠흑바퀴는 성혈을 마셔 타락자가 되어 버린 존재들을 과연 인간으로 여겨야할지 많은 고민을 한끝에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들을 모조리 숙주 삼아 배에 알을 낳았다.
그도 그럴게 타락자들은 이미 영혼이 오염된 상태였으니까. 마지막 공정이 치뤄지지 않아 완전한 악마 빙의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제물로 바치지도 못하고 노예로 삼기도 역겨운 것들이었다.
결국 칠흑 바퀴는 악마 빙의자를 찾아내 죽이거나 새끼들의 둥지로 만들며 나머지 생존자들은 위협했고 도망갈 길을 차단하고 전부 강당 쪽으로 오게끔 유인했다.
물론 일부 각성자들이 바퀴 떼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으나 그건 조준의 나머지 일행들이 붙잡을 놈들이니.
“이건.. 미쳤어..”
멍하니 선 문근오는 뒤돌아 도망가려 했다.
허나 이미 다리와 몸에 수십 마리의 검은 바퀴벌레가 달라붙어 그의 움직임을 억제하려고 했다.
문근오는 비명을 지르며 몸에 달라붙어 오는 바퀴들을 때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살이 씹히며 피가 터져 나왔고 발버둥 치면 칠 수록 바퀴들 또한 더욱 거칠어졌다.
결국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문근오는 넘어졌고 그대로 바퀴들의 파도에 휩쓸려 강당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리 비 각성자들 대부분이 강당의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였다.
*****
한편 우리마음교회의 출입구엔 하진성과 하진우, 강화영이 서 있었다.
후문 쪽에는 강은정과 황수민, 김예원, 강희선이 지키고 있을 거다.
장조준이 이곳을 습격하기 전에 임시로 나눠둔 팀이었다. 입구봉쇄와 내부 소탕을 위해 팀을 나누고 악마 빙의자를 상대하기 위해 자신과 한아람, 메르헤레를 한팀으로 넣었다.
지하 주차장엔 장조준, 메르, 한아람만이 남고 나머지는 교회 내부에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거나 노예를 사로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 빙의자의 마기를 어찌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조준은 악마로 변하기 전에 죽이면 그만이라며 조금이라도 변신하려는 조짐이 보이면 바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덕분에 지금 교회 건물 내부엔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약간만 의심되어도 죄다 썰어 버리는 탓에 악마 빙의자가 아닌 비 각성자들마저 은지와 아름이의 공격에 찢겨 나가고 있었고 하린이의 도끼질에 뚝배기가 깨져나갔다.
그나마 양민학살에 특화된 강화영과 김예원이 각각 정문과 후문을 지키기로 한 덕에 피해가 덜한 편이었다.
“다들 항복해라!!!”
“시발!!! 거기!! 머리 뒤에 손!!! 죽고 싶어!”
하린이와 아름이가 건물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끌고 나왔다. 조준의 명령대로 그들을 강당에 들여보내 놓을 생각이었다.
끌려나온 비 각성자들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고 각성자들은 호시탐탐 그녀들의 뒤를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하린이와 아름이 둘 다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15레벨에 다다른 파이터 클래스 하나가 주머니에 숨겨둔 너클을 끼며 아름이의 뒤통수를 공격하려 했다.
파바박!
순식간에 그의 어깨와 다리, 복부에 그림자 비도가 박혀든다.
어둠 속에 숨어 모습을 감추고서 그들의 행동을 빤히 감시 중이던 은지의 소행이었다.
“꺼륵..”
너클을 낀 사내는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무릎 꿇었고 그의 옆에 있던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다들 가만히 안 있어!!!”
한아름이 악을 쓰며 고함지르자 사람들은 바들바들 떨며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수십 명이 멋모르고 그녀들에게 덤벼들었다 찢겨나가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끄흑...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아름이의 뒤를 치려던 남자는 피를 흘리며 애원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의 성하린은 가만히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제물 확정이다. 우리가 반항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대로 도끼를 휘둘러 남자의 오른손을 잘라 낸 성하린.
“끄아아아아!!!!”
장조준은 말했다. 너무 반항이 심할 경우 그냥 죽이거나 제물로 바치게 목숨만 붙여 놓으라고 말이다. 괜히 사로잡으려다 다치거나 죽어 버리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더욱이 밖에서 붙잡은 중앙회 소속 간부에게 각성자들 중 히든 클래스는 겨우 셋뿐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마당에 거리낄게 없었다.
“끄흐아아아!!!”
잘려 나간 손목을 붙잡으며 남자가 비명 질렀다.
이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과다출혈로 죽겠지만 그전에 조준이 온다면 제물로 삼을 수 있었다.
‘그거면 된 거야. 생각하지 말자. 그냥 시키는 대로.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하린이는 그리 생각했다.
멸망이 시작된 직후엔 그녀도 많은 고충을 겪었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고 첫 주에 마트를 습격했을 적엔 조준 몰래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토하며 자신을 달래야 했다.
그만큼 누군가를 죽이고 빼앗는 것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으니.
허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그녀는 살인에 많이 무뎌졌다.
같은 사람이라면 결코 해선 안 되는 죄악이라는 인식 보단 이젠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하나의 수단쯤으로 여기게 됐다.
누군가의 죽음이 당연해져 버린 세계에서 언제까지나 여린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성하린은 차라리 무자비하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오직 같은 주인을 모시게 된 일행들에게만 친절이나 배려, 자비를 베풀고 그 울타리 밖의 모든 이들을 잠정적인 적이자 언젠가는 죽여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덕에 그녀는 이제 사람을 죽이고도, 죽는 모습을 보고도 구토하지 않게 됐다.
멸망한 세상에 온전히 녹아들게 된 거다. 그리고 그건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변화였다.
“일어서라. 안 그러면 다음은 머리다. 빨리 일어서서 걸어!!!”
“끄흡....”
성하린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알까?’
‘지금 죽지 않고 자신들을 따라와 봐야 어차피 인신 공양당할 거란 사실을.’
‘모르겠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으니까 따라나서는 거겠지.’
‘미련하게도...’
하린이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조준이 돌아오기 전까지 교회의 생존자들을 강당에 모아 둬야 한다.
그런 명령이었으니까.
*****
콰쾅!!!!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SUV차량 한 대가 강한 충격에 폭발하며 그 옆에 있던 악마 빙의자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 순간 메르가 불길을 뚫고 달려들어 낫으로 놈의 목을 썰어 버렸다.
푸화악!!!
잘려 나간 목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또 한 마리의 악마 빙의자가 절명했다. 그리고 그 옆에선 망치를 연달아 내려찍으며 악마 빙의자를 다진 고기로 만들고 있는 한아람이 있었다.
분명 3대 5로 수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악마 빙의자들은 손쓸 도리 없이 죽어 나갔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공격은 조준의 일그러진 비늘에 죄다 막혀 반사됐고 조금만 틈을 보였다간 심연아귀가 사지를 뜯어가 버린다.
더구나 정확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오는 촉수를 비롯해 이상한 스킬을 난사하는 사내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지랄 발광을 하며 공격해 오는 두 명의 여전사들까지.
마기에 데미지를 입지 않는, 오히려 마기를 흡수하는 분홍 머리 여자는 걸리적거릴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망치를 휘둘렀고 낫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약간의 빈틈만 보여도 목을 썰어 버리는 신장 190의 피지컬 쩌는 외국인까지 더해지니 그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애초에 상성이 안 맞았다. 악마 빙의자의 가장 큰 무기인 마기를 흡수하는 한아람부터. 악마의 마기를 그냥 꿇고 들어와 목을 가져가는 메르까지.
더구나 틈만 나면 사지를 뜯어가고 촉수로 발목을 붙잡으며 원거리 공격은 죄다 차단해서 반사시키는 저 미친 남자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 이게.. 이게 아닌데.. 이게.. 아. 이게 무슨...”
전투가 시작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끌고 올라온 네 명의 고위 악마 빙의자들은 전원 사망해 피떡이 되어 있었다.
이에 정신 줄을 놓아버린 다니엘.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사지가 잡아 뜯기고 촉수에 뽑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재생하면 재생하는 족족 뜯어내니 이젠 결손 된 신체를 복수할 마기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비정상적일 정도로 질긴 생명력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주고 있을 뿐이다.
“별거 아니네?”
"이.. 빌어먹을 놈이... 네놈..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다.. 모든 악마들이 너를..."
"악마? 아악마아아? 지랄. 난 악신 숭배자다. 악마 따윌 두려워 하면 이 험한 세상을 살 수가 없어."
"뭐.. 뭐? 악신..? 그, 그런 것도 있었다고..?"
"그래. 선신도 있는데 몰랐냐? 참고로 여기 얘는 내 여덟번째 와이픈데 전직 천사야. 굉장하지?"
"미, 미친놈이냐..? 그게 대체 무슨..."
"됐고. 너, 네가 숭배한다는 악마랑 대화는 해봤냐?"
"그, 그분들은 결코 나 같은 미천한 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 고귀한..."
악마 숭배자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단 한번도 악마들은 그의 질문이나 물음에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마치 자신이 숭배하는 악신들과 꽤 친하다는 식으로 이야길 했다.
도무지 다니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장조준이 버둥거리는 다니엘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냥 네가 너무 모자란 놈이라 너의 말에 대답안한게 아닐까?"
다니엘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악마 같은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어 나온 걸까.
“끄으... 그, 그럴 리가! 없...”
콰작!!
조준은 다니엘이 뭔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머리를 뭉개버렸다. 놈에게서 뽑아낼 정보는 딱히 없었다. 또한 노예로 만들 수도 없고 제물로 바칠 수도 없었다.
겨우 20대 초반이라는 이 어린 놈은 그저 클래스에 기대어 이 집단에서 한 자리 차지했을 뿐인 바지사장이었다.
실질적인 일 처리는 문근오라는 남자와 양지상이라는 노인이 다 하고 있었다.
“후. 빨리 올라가자. 다른 애들 걱정돼.”
“그러지. 이봐, 아람양? 안 오고 뭐 하나?”
“자, 잠깐.”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그때 아람이가 잠시 허공을 봐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조준의 눈에도 무언가 비춰졌다.
[노예 한아람의 업적달성! ‘반인반마의 업’]
[업적달성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데몬 슬레이어가 충분한 양의 마기를 모았습니다.]
[클래스에 새겨진 선대의 능력이 일부 계승됩니다!]
[반마의 피에 폭주하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현재 악마사냥꾼에게 걸려 있던 모든 종류의 속박과 제한이 해제됩니다.]
[경고!!! 플레이어 한아람의 노예낙인이 지워집니다!!!]
“이런... 시발...”
조준은 곧장 한아람과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아직 한태양을 죽인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을지도 몰랐기에.
그와 동시에 한아람은 망치를 버렸다.
그와 싸워 봐야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기에.
그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미 계산을 끝냈다.
이대로 장조준과 적대하거나 싸우게 된다면 필패한다. 이길 방도가 없다.
그의 스킬이 가진 강함은 이루 말할 것도 없으며, 나아가 메르헤레의 저 붉은 낫을 막아 낼 자신도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은 그저 악마 한정으로만 강할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확하게 상황을 인지했다.
여기서 장조준이라는 사내와 적대하는 순간 죽임당해 뭔지 모를 존재들에게 공양되거나 다시 한 번 굴복당해 노예낙인이 찍힌 다음 한 번 배신했던 인물로서 가축보다 더한 대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될 바에는 먼저 항복하고 다시 한번 그의 비호 아래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분명 장조준은 한아람의 남동생인 한태양을 죽인 인물인 것은 맞다. 허나 먼저 습격한 것도 한태양과 자신들이다.
더구나 멸망 전에 한태양과 친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
한태양은 늘 밖으로 나돌던 녀석이고 성향도 자신과는 상당히 맞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싸우면 싸웠지 우애가 돈독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름이와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단지 한태양과는 멸망한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게 가족뿐이라 이전보다 좀 더 가까워졌을 뿐.
차라리 아름이가 더 걱정이다.
이대로 자신이 되도 않은 복수심에 그를 공격한다면... 아름이는 정말 혼자가 되고 만다.
“굴복하겠습니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한아람은 존댓말까지 써가며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조준은 한아람을 나쁘게 대하지 않았다. 한번 떡정이 생겼기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여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남자다.
비록 자기 혈육을 죽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과 아름이를 지켜 준 남자이기도 했다.
아람이가 고개를 조아리며 복종의 의사를 내비치자 곧 조준의 눈앞에 이전에 한번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상대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한아람이 선대인지 뭔지 모를 존재의 힘을 일부 계승했고 그 순간 노예낙인이 지워졌다고 해서 조준은 상당히 걱정했다. 이제 낙인을 찍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다행히 노예낙인을 찍을 수 없게 된 건 아니었다. 단지 당장 걸려있었던 저주나 속박, 지배 관련 스킬들이 죄다 풀렸을 뿐인 거였다.
“하아...”
조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그녀의 턱을 잡아 이마를 드러내게 한 다음 다시 한번 그녀에게 낙인을 찍었다.
“고마워. 그리고 잘했어. 좋은 선택이었어. 앞으로도 잘해줄게.”
"고, 고맙습.."
"됐어. 너 한텐 그냥 반말 듣고 싶어."
"으응.."
조준은 그대로 한아람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혹여나 상황이 틀어져 버릴까 봐 그는 걱정했다.
이미 함께 몇 번이나 잠자리에 들었던 여인을 자기 손으로 처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감각에 머리가 아찔해졌었다.
조준은 그녀를 안아 들어 일으킨 다음 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줬다.
그러고 나서도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몸을 살짝 떨고 있는 한아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나가자. 딴 애들 기다리겠다.”
한아람은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생존하기 위해. 동생을 위해.
그리고 나아가 자기 행복을 위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