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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54화 (54/221)

〈 54화 〉 53. 기분 나쁜 어둠 속으로 (2)

* * *

난 가게 내부를 둘러봤다.

밀렵꾼의 움막이 굉장히 난잡하고 엉망진창으로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배열되어 있었다면 마약상의 가계는 뭔가 술집 같은 분위기였다.

가게 내부엔 화려한 병에 담긴 온갖 종류의 약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술이나 특이한 생물이 들어간 담근 주도 있었다.

그리고 벽 곳곳에 붙어 있는 여러 특이한 포스터들이나 가게 내부에 달린 전광판에서 반짝이는 알 수 없는 문자, 코를 간질이는 달달한 향기와 주크박스 같이 생긴 기계인지 생물인지 모를 것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일정한 박자의 비트까지.

여긴 네온사인과 여러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근 미래적인 분위기의 바(Bar)였다.

분위기만 놓고 봤을 땐 암시장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장소이며 동시에 묘한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이곳이 마약상의 가게만 아니었다면 맘 편히 술을 마시고 싶을 정도다. 아마 이게 마약상의 노림수겠지.

의도된 안정감을 선사해 상대의 긴장을 풀어 주고 느슨하게 만든 다음 뭔가 수작질을 벌일 생각일 거다.

“얼른 마셔봐.. 심신안정에 좋아.”

“아뇨, 됐습니다.”

그가 건네 오는 정체불명의 음료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용 수칙에 의하면 마약상이 건네는 음식이나 음료엔 이상한 게 태워져 있을 확률이 높다고 했으니 일절 먹지 않는 게 좋다.

“그래? 기분 좋아지는데. 아쉽네. 그럼 기왕 온 김에 상품이나 확인하고가. 싸게 줄게. 우리 귀여운 인간 친구에게선.. 친숙한 향이 나거든. 마음에 들어.”

만마의 총애가 여기서 작동하나?

밀렵꾼은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마약상은 내 주변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만마의 총애가 작용하는 대상이라면 조금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자. 여기 잠시 앉아 볼래. 나쁘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알려 줄 것도 있고. 초행길에 혼자 암시장을 돌아다니는 건 긴장되는 일이잖아.”

사실 물건만 간단히 보고 금방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런 나를 억지로 붙잡은 여장남자는 길쭉한 테이블과 몸이 빠져드는 것 같은 너무나도 안락한 소파에 나를 앉혔다.

기왕 마약상을 만난 김에 무슨 물건을 파는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고, 나에게 알려줄 것도 있다는 말에 내심 이 정신 나간 암시장에서 빠져나갈 구석이 있나 싶어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여장남자 마약상은 가게를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챙겨 왔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약병을 하나 둘 올려 두기 시작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2시간 5분 남았다. 딱 10분만 여기서 소모하자. 그 이상은 안 된다.

“그런데 땀을 너무 많이 흘린 거 아니니? 뭔가 무서울 일이라도 겪었어?”

약병을 보기 좋게 전시하며 포근하게 물어 오는 여장남자. 테이블에 놓인 약병은 총 4개였다.

그녀인지 그인지 모를 녀석의 포근한 목소리에 살짝 소름 끼쳐 닭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대강 답했다.

“길이.. 많이 복잡한 곳이더라고요.”

“그래? 그런가? 음. 처음 이곳에 온 거라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 뭐, 자경단 친구들 말만 잘 듣고, 지하경비대만 제대로 피하면. 그리 무서울 것도 없지만.”

“그, 잠수모 쓰고 있던 사람들이 자경단 맞죠?”

“응. 맞아. 암시장의 용역. 좋은 말로는 자경단이지. 대놓고 물건을 훔친다거나 무전취식을 하면 그들이 잡으러 올 거야."

그리 말하며 그가 처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것은 주황색 약병으로, 안에는 하얀 알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약을 한번 확인해 보라며 내게 건네줬다.

[크란의 신경 안정제: 하루 한 알 정신적으로 위태로울 때 복용하십시오. 하루를 더 살고 싶게 도와줄 겁니다. 전투 시 집중력이 조금 높아집니다. 30일분.]

[가격: 2000C]

난 약의 설명을 대강 눈으로 확인하고 궁금한 걸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이 암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아니 열쇠구멍이 있는 문을 어찌 찾아야 하는지 아시나요?”

당장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빠져나갈 구석부터 찾아 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불안 해서 암시장을 똑바로 돌아다닐 수 없을 것 같다.

“벌써 나가고 싶어? 근데, 아무것도 사지 않고 정보만 물으려고? 나는 정보상이 아닌데..”

“아.. 잠시만요. 구입하겠습니다.”

신경 안정제는 밀렵꾼이 제시하던 물건들처럼 지갑이 거덜 날 정도로 비싸지는 않았다.

이 정도 지출은 해도 된다 싶을 정도의 아주 합리적인 가격.

다른 물건의 가격들도 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전부 구입할 수 있겠다.

그럼 보부상의 물건을 매진시켰을 때처럼 마약상도 그런 트리거가 발동할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이 녀석은 만마의 총애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던 밀렵꾼보단 더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니까 호감도를 올리면 나에게 여러 도움을 줄 것 같다.

난 얼른 값을 치르고 약병을 가방에 넣으며 여기서 나갈 방법을 다시 물었다.

“빠져나가는 방법. 그걸 알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긴 해.”

“정말이요?”

“응. 우리는 가이드라 부르는 친구지. 본인은 자신을 ‘브로커’라고 자칭하고 다니지만. 어쨌든 친절한 친구야. 이곳에서 그리 친절한 사람은 보기 어려운데 말이지.”

“혹시.. 머리통에 상자가 달린 녀석은 아니겠죠..?”

“아니? 흐음. 너, 그를 벌써 만났구나. 다행히네? 후후. 진짜 가이드는 박스 맨이 아니야.”

역시 그 상자 머리의 괴인은 위험한 녀석이었구나.

인디크론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내가 뭔가 꺼림칙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신중하지 않게 그를 따라갔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 그럼 그 브로커인지 가이드인지 하는 분 소개 좀..”

그리 말을 꺼내자 그가 두 번째 약병을 건네며 웃었다.

[외면하는 파란약: 이 파란 알약을 한알 삼키고 꿈의 세계로 가세요. 특별한 만남이 당신을 기다릴 지도 몰라요. 1회 분.]

[가격: 5000C]

“한 알에.. 오천..?”

“구하기 어려운 거야. 특별 상품이지.”

바로 구매했다. 특별한 만남이 과연 어떤 이벤트일지 약간 기대가 됐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런걸로 고민하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그 브로커 좀..”

“아직 소개비로는 부족해.”

난 바로 남은 물건 2개를 살펴봤다.

[젊어지는 미용 팩: 얼굴에 붙이고 10분이 지나면 신체나이가 5년 젊어집니다. 수명도 5년 증가합니다. 몸속 노폐물이 소변으로 싹 빠져나갑니다. 2인분. 1인 1회 사용 권장.]

[가격: 1500C]

[치페인 용액: 탈모치료제입니다. 두피에 바르면 머리카락이 자라납니다. 또한 모발이 탄력적이고 단단하게 변하며 쉽게 상하지 않게 됩니다. 10회분.]

[가격: 2000C]

2개 다 미용관련 물품들이다.

마약상이라고 해서 엄청 위험한 물건들만 팔 줄 알았는데 그는 비교적 정상적인 물건들을 보여줬다.

“그럼 남은 두 개도 전부 구입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곤 물건을 가방에 챙겨 넣자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주머니에서 검은색 버튼이 달린 작은 스위치를 꺼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안내자 체셔를 부를 수 있어. 자, 받아.”

“오..”

“1만 코인 이상 소비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물건이지.”

그가 나에게 제시한 물건들의 합계 금액이 딱 1만하고도 5백 코인이었다.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격이 딱 맞아떨어지는 물건들로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혹시 나에게 오기 전에 먼저 누구의 가게에 들렀니?”

“그게.. 밀렵꾼의 가게입니다.”

“흐음.. 그라면 처음부터 높은 가격의 물건들만 보여줬겠네. 뭐든 하나 골라잡으면 바로 가이드를 만날 수 있게끔.”

“아...”

그래서 그가 보여 준 오늘의 추천 상품이 죄다 만 단위였구나. 어쩌면 그 나름의 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심술쟁이니까. 뭐, 그래도 노예상 그 개자식보단 밀렵꾼이 나아. 노예상이라면 아마 가이드의 존재 자체를 알려주지 않았을 걸? 그 녀석은 항상 누군가의 파멸을 바라거든.”

세 명의 암시장 상인 NPC중 노예상이 제일 악질적인 녀석인가 보다. 마약상 마저 치를 떨 정도니.

솔직히 가게 밖에 널브러져 있던 약쟁이들의 꼴을 보면 그도 별반 다르지 않은 악질이지만.

“어쨌든 이제라도 만나게 됐으니 다행이지?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면 곧 체셔가 여기로 올 거야.”

“네. 감사합니다.”

곧 그는 카운터로 돌아가 담배를 피며 뭔가를 작성했다. 여전히 약에 취한 한쪽 머리는 못 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리면서.

딸랑.

버튼을 누른지 정확히 3분째에 가게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어. 제키. 새로운 고객?”

“응. 여기 이 인간친구 오늘 처음 왔다나 봐.”

“오, 이런. 귀여운 인간이군. 그보댜 제키! 자연스럽게 음료 건네지먀! 난 네가 주는 건 절대 안 먹으니꺄.”

검은색 우비를 깊게 눌러쓰고 파란색 불이 들어온 네온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인물.

그가 나에게 다가와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휴우. 급하게 오느라 힘들군. 반갑댜, 방문객.”

네온마스크의 기능인지 그의 목소리는 변조된 기계음이었다.

“나는 체셔. 블랙마켓 최고의 운반책이쟈 브로커지.”

“그리고 햇병아리들을 위한 가이드기도 하고.”

“이봐! 제키. 난 가이드가 아니야! 여길 빠져나가지도 못 하는 머저리가 가이드라니. 웃기는 일이라고.”

체셔는 가이드로 불리는 걸 굉장히 꺼려했다.

모종의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 파고들 정도로 그와 나 사이에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체셔와 간단히 악수했다.

뭔가 장갑 안이 좀 푹신한 것 같은데.

‘장갑에 담이라도 들었나?’

딱히 불길함이나 꺼림칙함이 느꺼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보고 있을 여신의 경고도 없었고.

“저는..”

“잠깐 친구. 우리 서로 본명은 알지 말쟈고. 여기선 본명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얼굴도 최대한 가려.”

“어.. 예.”

“어디 보쟈.”

체셔는 메고 있던 사이드 백에서 낡은 방독면을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넸다.

“암시장에서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놈들은 실력에 자신 있는 놈들 뿐이지. 너는... 내가 볼 때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러니까 가려. 뭐든 들키지 말고. 최대한 숨기고 가리는 편이 좋아. 그게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이야.”

난 체셔가 건넨 방독면을 꼈다.

시야가 확 좁아지며 뭔가 고소한 향이 방독면에서 났다. 방독면 끼고 뭘 처먹은 건가... 문득 나는 배가 고프단 사실을 깨달았다.

“좋아. 그럼 이제.. 아 참, 2시간 동행에 5천 코인이야. 선불제고. 우리 계산부터 하지.”

“아, 예. 그런데 어떻게 주죠?”

이때까지 물건을 구입한다고 하면 자동으로 코인이 빠져나갔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결제는 어찌해야 하는 거지?

“하하! 이 친구 완전히 초짜군. 인족 뉴비라니.. 얼마 만인지.. 귀여워...”

방금 귀엽다고 말한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내가 의문을 가질새도 없이 체셔는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이렇게 내 쪽으로 손목을 내밀고 5천 코인을 준댜고 생각해.”

“어.. 여기..”

“좋았어! 확실히 받았습니댜! 고객님.”

체셔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나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그냥 지금 바로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열쇠가 있는 문이 있을 장소에 대해서 물었다.

“열쇠가 달린 문이라면 꼬인 골목 어딘가에 있지. 그런데 탈출까지 몇 시간 남았어?”

“2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동안 어디어디 가 봤는데?”

난 체셔의 질문에 파이프로 가득한 골목을 나와 뭔가 불쾌한 음식점이 가득한 지하상가를 지나서 약쟁이들로 가득한 하수도를 걸었다고 알려 줬다.

뭔가 가득했다는 설명에 체셔는 배를 잡고 웃었다.

“흠. 꼬인 골목으로 들어왔고.. 미식의 거리도 가 봤고. 약쟁이 소굴도 지났고. 그럼 남은 건 중앙광장하고 슬픈 축제로군.”

“그런데 여기 구조가 어찌됩니까?”

다음에도 또 방문할 수 있으니 최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내 질문에 체셔는 대략 암시장의 내부구조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선 암시장은 왜곡된 공각으로 이리저리 뒤틀려 있으며 나 같은 뉴비는 이 뒤틀림을 조절할 수 없으므로 어딘가의 출입구를 지나면 반드시 불특정한 다른 장소로 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암시장엔 크게 5가지 구역이 있는데 내가 처음 넘어온 파이프가 가득했던 그 좁은 골목이 열쇠달린 문이 불특정 장소에 나타나는 꼬인 골목이며 거기서 빠져나와 도착한 곳이 밀렵꾼이 자리 잡은 미식의 거리고 방금 지나온 곳은 통칭 약쟁이들의 소굴이라 불린단다.

남은 2개는 중앙광장과 슬픈 축제라는 곳이었다.

“중앙광장은 말 그대로 모든 장소의 중앙에 있어. 그래서 거기선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잡상인들도 많고 정상적인 음식점도 몇 개 있지. 그리고.. 슬픈 축제는 노예상 그놈이 있는 곳이야. 중앙 서커스 장의 지하 감옥에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그리 말한 체셔는 웃으며 물었다.

“어디부터 가 볼래? 기왕 온 거 다 둘러보고 가야 안 되겠어?”

“시간이 될까요?”

“이런 너무 걱정하지 마. 남은 두 곳을 둘러보는데 30분도 안 걸려. 그리고 꼬인 골목에 들어가면 문을 찾는데 15분에서 20분 정도 밖에 안걸리고. 어때? 그정도면 충분하잖아.”

이제 가이드가 있으니 이 정신 나간 공간에서 빠져나갈 구석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네온마스크를 온전히 믿을 수 있냐 묻는 다면 그건 아니지.

솔직히 이 요상한 곳에서 누굴 믿을까. 그래도 못 믿는다고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체셔가 미친 광인이 아니길 바랄 뿐.

그저 나는 아무 말없이 잠자코 있는 인디크론과 카쉬낙스를 믿었다.

두 여신이 나의 주님인데 그녀들을 믿지 누굴 믿으랴.

“노예상이 있는 곳부터 가죠.”

“좋아. 이동 중에 내 손을 놓지 마. 튕겨 나가면 찾으러 가기 귀찮거든!”

난 체셔가 내미는 손을 붙잡았다.

“그럼..! 축제의 장으로!”

체셔가 마약상점 드러그 앤 러쉬의 입구를 여는 순간.

쑤우욱!!!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며 우린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버려진.. 놀이공원..?”

그곳은 검은 천장에 가로막힌 아주 낡고 오래된..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이었다.

“으스스하지? 어서 가자고.”

난 얼른 체셔의 손을 놓고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놀이공원엔 아무도 없음에도 기계들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 저게 사람인지 이족인지 구분이 안가는 검은 그림자 같은 형상들이 스쳐 지나가듯 시야에 잡혔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무 주시하지는 마. 부끄러움이 많은 녀석들이니까. 너무 빤히 쳐다 보면 해코지 해. 들러붙으면 때내기 어렵거든.”

“아, 예..”

난 그냥 체셔의 장화만 보고 걷기로 했다.

그래도 이리 뭔가 팁을 알려주는 존재가 있으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펄럭..!

곧 서커스 장 앞에 도착한 체셔는 입구를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나야!”

서커스 장의 관객석은 마네킹으로 가득차 있었다.

집요 하리 만치 활짝 웃고 있는 마네킹들은 굉장히 꺼림칙하고 불길해서 자연스럽게 기가 눌린다.

“소란피우지 마라, 체셔.”

곧 서커스 장의 중안 바닥이 꺼지며 입구가 열리고 광대분장을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울고 있는 광대 분장을 하고 있었는데 무표정하게 체셔를 한번 보더니 곧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드를 달고 오다니. 재미없는 놈이군. 따라와.”

그리 말하며 지하로 내려간다.

“헤. 기분 상했나 본데? 개수작질 부리려다가 내가 같이 오니까 당황스럽겠지.”

체셔는 마치 광대를 비웃듯 킥킥 거리며 지하로 내려갔다.

둘을 따라 내려간 지하실에는 온갖 종족이 갇혀 있는 철창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비명과 분뇨의 냄새가 역겨워 숨 쉬기가 버거웠다.

“이봐. 관리 제대로 안 하는 거냐?”

“신경 꺼라. 여기의 주인은 나야.”

“하. 오직 사람을 수집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괴물 같은 놈. 사로잡으면 그걸로 끝이냐고.”

광대는 체셔의 말을 무시하곤 나에게 물었다.

“상품은 4개다. 하나만 골라라. 딱 하나만이다.”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내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네 명의 노예를 바라봤다. 전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자기소개 시작.”

노예상이 쇼라도 보여주듯 채찍을 바닥에 휘두르자 벌벌 떨던 넷 중 가장 왼쪽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크레톤.. 위대한 대전사. 힘이 좋고. 일도 잘한다. 살려만 준다면.. 평생 모시겠습니다.”

머리에 소의 뿔이 달린 수염 덥수룩한 노장이 고개를 숙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게 수치스러움을 겨우 참는 모습이었다.

분명 전력증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털 복숭이 아저씨는 조금 거부감이 생긴다.

“이놈의 가격은 삼만 사천 코인. 그럼 다음.”

무감정한목소리로 채찍을 휘두르는 광대 노예상.

크레톤의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어인 여자가 흠칫 거리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 저는! 케시아!! 어.. 그러니까 그래! 대양인 여전사! 물 속에서 특히 강하고, 알을 낳아서.. 알이 영양가 있어서..”

말이 뚝뚝 끊기는 게 조금 머리가 나빠 보이지만 상당히 눈이 가는 외모다.

뭐랄까 신비롭다. 그리고 바다색의 푸른 피부가 굉장히 매끈하고 탄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년의 가격은 이만 칠천 코인. 그럼 다음.”

물론 그래 봤자 다음 노예보단 미모가 덜하지만.

“나는 메르헤레. 추락한 천사. 모든 권능을 잃었다. 가진 건 이 비루한 몸밖에 없다. 날개도 헤일로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살 생각도 없다. 그러니 알아서 해라 이방인.”

차갑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장신의 여인.

나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나보다 크다. 거의 190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풍만하다못해 파묻혀 죽을 것 같은 가슴과 폭발적인 골반, 무엇보다 아름다운 백금발까지.

품 안에 껴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나 가격을 듣는 순간 마음을 접었다.

“이것의 가격은 육만 팔천 코인.”

추락한 천사라더니 더럽게 비싸다. 영끌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마지막.”

마지막은 아직 어린 소년 같아 보였다.

“히끅.. 어, 엄마....”

“똑바로 소개 안 해!”

쫘악!!

광대는 울고 있는 소년의 등을 채찍으로 내려쳤다.

그러자 세상 순해 보이던 소년의 눈물 기 가득한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며 그 자리에 진득한 살기와 독기가 들어찼다.

“으아!! 이런 씨발!!! 빌어먹을 광대새끼가!! 연기 중 인 거 안 보이냐!!! 젠장! 퉷.”

놈은 바닥에 침을 탁 뱉더니 건들건들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뭘 그렇게 봐! 이래 봬도 80살이나 처먹은 하프풋이다. 됐냐! 후우. 젠장.. 인간 따위에게.. 이름은 로우. 소매치기, 자물쇠 따기, 함정 해제 기타 등등 도둑질 전반에 능하다. 구입하면 쓸 모가 많을걸.”

그리 소개를 마친 로우는 바닥에 주저 않았다.

"이놈은 사만 코인."

네 명의 노예를 전부 소개 받았다. 다들 이종족이다. 누구를 골라야할지...

그때 고민에 빠진 나를 향해 노예상이 그 특유의 무감정한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골라라.”

난 본능적으로 시계를 한번 확인하곤 네 명의 이종족들을 둘러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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