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했습니다, 조용히 따라오길.”
드르르륵, 사슬 내려가는 소리와 뒤엉킨 경첩 소리.
철창이 열리고 복도에 우르르 쏟아진 푸른파도해적단은 맨 앞에 서 인솔하는 수인, 아르실을 흘겨보며 천천히 뒤따랐고 레지나 또한 딱붙은 두 발을 콩콩 튕기며 줄의 맨끝에 섰다.
우르르르르-
흙먼지를 풍기며 물소 떼마냥 부둣가를 점령하는 푸른파도 해적단. 수갑이나 족쇄를 달고 너털걸음으로 부둣가를 걸으며 항구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녀들은 척, 막아서는 카사노를 보고 일제히 얼굴을 굳혔다.
“…? 카사노님?”
“아르실, 이야기할게 있어요.”
“이야기말입니까?”
평소의 카사노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앞에 바짝 붙기까지. 카사노와 한 달가량을 붙어 있으면서 그에 대해 파악한 아르실은 대개 카사노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은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뭘까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까?”
이곳에 온 이유.
황자의 명령으로 푸른파도 해적단을 생포하러 온걸 까먹을리 없을 테고… 아르실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카사노를 흘겨보며 그가 또 무슨 허황된 말을 할지 두고 보기로 했다.
“해역에서 말썽을 부리는 레지나를 황자님의 명령으로 생포하러 왔죠, 그리고 레지나를 생포하면 수도로 환송하기로 했잖아요?”
“…그렇습니다.”
구구구-
카사노의 어깨에 앉는 하얀 비둘기. 그제야 아르실은 따로 기별을 넣었다는 카사노의 말을 떠올리고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통을 바라봤다.
“황자님의 명령이 온 모양입니다.”
“저희가 레지나와 해적단 일당을 환송하려고 했던 이유, 수도에 있는 제국민들 앞에서 끝없는 악행의 대가는 목숨이라는걸 만천하에 알리고 또 다른 악, 노예해방단과 결탁한 말로는 죽음뿐이란 걸 보여주겠다는 게 큰 이유였죠.”
“…그렇습니다.”
아르실과 다른 제국 첩보부 요원, 그들은 카사노가 레지나와 한 달간 몇 번이고 전투를 벌이고 항해를 다니는 동안 마냥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았다.
항구에 숨은 쥐 새끼들을 파악하고 그들의 유통경로를 쥐잡듯이 헤집어 레지나와 메파, 둘에게서 노예해방단 단장과 거래를 나누는 정황을 포착했고 전부 황자에게 보고까지 올린 상황.
점점 포위망을 좁혀 단장이란 쥐를 구석까지 몰아넣는 계획을 짠 오베론에게 레지나는 협상카드이면서도 노예해방단이란 악과 결탁한 자의 말로를 보여주기 충분한 하나의 제물이었다.
-뽈칵, 촤르륵…
“고맙다, 응.”
구구구우-
묘하게 사람에게 친근한 전서구가 카사노의 뺨에 부리를 문지르고 날개를 퍼덕이며 아르실을 지그시 바라봤다. 같은 새는 아니지만 은근히 얕보는 듯한 전서구의 눈동자에 울화가 치밀기전 전서구는 활짝 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사라졌고 카사노는 펼쳐든 편지를 읽으며 아르실에게 말했다.
“사실 아르실한테 따로 이야기 못한 게 있는데요.”
“저를 속인겁니까?”
따로 기별을 넣겠다는 말, 그리고 이곳에 온 첩보부 요원과 카사노의 목적을 물으며 질질 끄는 대화의 모양새, 그 단서들을 조합해 카사노가 무언갈 속였다는 결과를 추측한 아르실은 가라앉은 눈으로 아르실을 노려봤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황자님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니- 설령 레지나를 또다시 풀어 준다는 명령까지 내려왔다해도 저는 반항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요? 아르실은 한시라도 빨리 황자님의 명령을 완수하고 싶었잖아요.”
“보나 마나 카사노님의 간언에 황자님의 마음이 바뀌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럼 그냥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생각해 둔 게 있고 또 짜둔 판이 있어서요… 여기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누군간 손가락질하며 따지고들 수 있겠지만 아르실은 조용히 납득했다.
이곳, 쐐기이빨 항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작전과 황자의 명령에 직속된 총책임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카사노, 오베론이 데려온 전령이자 믿음직한 부하. 이미 제국의 높으신분들 몇몇에게 이름이 흘러 들어가고 여러 부서와 강자들도 이미 인지하는 남자였다.
“…선원, 아니지. 사람들 좀 잘 진정시켜 주세요. 저는 남아서 레지나를 처리할 테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숙소에서 듣겠습니다, 여태껏 많이 눈감아드렸지만 솔직히 이번 결정까지는 저도 사유가 궁금합니다. 병사들과 요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하겠지요.”
“그러니까 그걸 부탁하고 싶어요, 네? 아르실, 다 설명할 수 있으니까… 알았죠?”
사락, 종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아르실의 손바닥에 얹어지는 오베론의 답장.
짧은 내용과 유려한 글씨체는 분명 오베론 황자라는 증거였고 그 끝에는 카사노의 결정을 허락하고 존중한다는 것과 제대로 된 결과를 알려주고 보고를 위해 아르실과 수도에 방문하라 적혀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돌아오면…”
감정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얼마나 쉬울까. 아르실은 설명해주지 않는 카사노에 대한 야속함에 날개를 떨고 코끝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아르실과 선원, 그리고 선원에 섞여 잠복하고 있던 첩보부 요원까지. 그들은 아르실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도끼눈을 뜨고 이해못하겠단 얼굴로 카사노를 바라봤지만 이내 아르실의 손짓에 우르르 부둣가를 울리며 그대로 사라졌다.
‘한참 달래줘야겠네.’
어설픈 계획을 믿어 주겠다며 넙죽 허락한 오베론도 오베론이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해해준 아르실에게 많은 감사함을 느낀 카사노는 돌아가 그녀를 힘껏 위로해 줘야겠다 생각하고 철그럭- 품 안에서 열쇠더미를 꺼내며 눈치 보기 바쁜 푸른파도 해적단과 마주 섰다.
부둣가 위에 남은 건 카사노와 어설프게 눈치를 살피는 푸른파도 해적단뿐.
그녀들의 맨 앞에 서 카사노와 마주 보게 된 레지나는 흐응, 만족어린 콧김을 내뿜으며 카사노를 바라봤다.
‘그럼 그렇지, 이 새끼가 나를 그냥 지나칠리가 있어? 이럴 줄 알았어, 좆 같은 새끼!’
참아온 반동일까? 들끓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반복한 망상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레지나.
‘좆 같은 약점을 쥐고 자기 마음대로 날 다루려는 거겠지, 뻔해도 너무 뻔해… 그래도, 그래도 뭐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니까…! 황자 그 기생오라비한테 말해서까지 날 가지고 싶어 하다니.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거야?’
아르실과 대화하는 내용을 최대한 집중해 엿듣고 카사노의 의중을 파악한 레지나, 그녀는 동료들의 반발까지 억누르며 자신을 낚으려는 카사노의 노력에 킁, 기뻐하면서도 사내답지 못한 결정에 혀를 찼다.
“부하들부터 일단 돌려보낼까.”
‘…왜 저런 목소리를 하는 거야.’
투정 부리는 수인년을 토닥일 때나 침대 위에서 부하들에게 대할 때와 차원이 다른, 한없이 낮은 목소리.
마치 줄 감정도 아깝다는 듯한 느낌에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괜히 내색하기 싫었던 레지나는 무심히 고개만 끄덕였고 카사노는 대답 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철컥, 철컥, 철컥.
열쇠 뭉치를 헤집으며 수갑에 맞는 열쇠를 척척 찾아내 수갑을 푸는 카사노.
철구가 달린 족쇄까지 풀어 주며 부하들의 가슴에 머리를 문지르는 영악한 개짓거리에 두 눈을 가늘게 떴지만 줄지은 부하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걸 보고 조용히 눈감아주기로 했다.
“선장님…”
“먼저 타있어.”
마지막으로 메파까지 자유가 되자 어떻게 할 거냐는 의미로 선장을 불렀지만 레지나는 이미 홀로 상대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두 손을 흔들며 카사노 앞에 마주 섰다.
-찰칵, 쿠웅!
손목을 긁던 단단한 수갑이 바닥에 떨어지고 요 한 달간 끈질기게 그녀를 옥죄던 마나제어구속구에 천천히 열쇠가 꽂혔다.
갈고리 자국이 선명히 남은 세리느를 가만히 바라보며 들끓는 감정을 정리한 레지나는 떨어진 구속구를 품에 챙기고 허리를 펴는 카사노를 쳐다보며 그의 입술을 주목했다.
‘무슨 요구를 할까? 노예가 돼라? 내여자가 돼라? 암캐처럼 울어, 내 여자가 돼서 바다를 관리해. 나를 따라와?’
뭐, 정 부탁하면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레지나는 코끝을 찡그리며 카사노의 절실한 부탁과 약간의 대가(?)만 바르게 지급한다면 제국과 협업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권력의 개와 다를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괜찮지 않을까- 망상을 이어 나가는 레지나.
자길 왕따시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하들과 좋을 대로 즐기는 카사노를 보며 부하들에 대한 질투와 외로움을 한껏 만끽한 레지나는 이미 져 준다는 이름의 항복을 내세우고 꺾이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무슨 요구를 할 심산이야? 빨리 말해, 뭐 그쪽에서 들어줄 만한 요구를 내세우면 못 들어줄 것도 없으니까…”
본인이 말하고도 좀 뻔뻔하다 생각했는지 말끝을 흐리며 바닥을 발끝으로 긁는 레지나, 왕따(?)를 당하고도 마음을 고쳐막을 만도 한데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레지나의 매력에 카사노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한걸음한걸음 어버버거리는 그녀에게 다가 갔다.
“애들 앞에서 하려고? 아, 아직 부둣가야 병신아. 방잡고 하는 게 더 좋을 텐데… 아, 아니면 우리 배에? 애, 애들 앞에선 싫은데…”
짙은 미소를 짓는 카사노의 모습에 망상을 가속하며 여러 선택지를 제시하는 레지나, 참된 리더답게 열린 길을 여럿 보여주는 그녀였지만 안타깝게도 카사노의 선택은 제 5의 선택이었다.
‘왜 이렇게 실실 쪼개지? 골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그래-! 안지 않은 것도 날 골려리고 그랬구나. 그래, 네가 버텨봤자지. 발정 난 변태 새끼. 변태 새끼…’
미소 짓는 카사노의 모습에 결국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까지 하는 레지나.
자기 기세를 꺾기 위해 일부러 안지 않은 거라 판단한 그녀는 바다의 왕이 되겠다는 소망은 변함없지만 이미 하나의 유흥이 된 카사노와의 관계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지독한 합리화를 이어 나갔다.
넘쳐나는 힘을 갈무리하며 카사노의 입술만 지켜보며 떨어질 말만 기다리던 그때 카사노의 입술이 달싹였고 화색을 띠며 기다리던 레지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며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장하네, 끝까지 안 넘어오고… 대단하다 레지나. 내가 너무 우습게 봤나 보네.”
감탄 어린 찬사와 함께 툭, 어깨에 올라오는 커다란 손.
마치 승자를 인정하는, 승자를 치하하는 듯한 토닥임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짓는 카사노였다.
“뭐, 뭐 뭐라는 거야, 뭘 원하냐고 내가 물었…”
“이렇게 끈기가 대단할 줄 몰랐어. 내가 미안 했고… 오늘부로 자유의 몸이니까 잘 지내. 가끔 필리아한테 안부 물어볼 테니까 뭐, 더 할 말은 없네. 간다?”
삐이이이이-
주절주절 무어라 떠들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카사노의 잡소리.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카사노를 다그치기 위해 재빨리 손을 뻗는 그녀였지만 이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린 카사노는 점처럼 작아진 상태였다.
“어? 어? 어?”
따라잡으려면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카사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레지나는 그저 멍하니 점이 되어 사라지는 카사노를 눈으로 쫓았고 그렇게 그는 정말 사라지고 말았다.
-철썩, 철썩, 철썩!
[선장님! 선장님! 선장-!]
부둣가를 두들기는 커다란 파도 소리와 뒤엉키는 부하들의 목소리. 푸른 파도가 철썩이고 부둣가에 부딪혀 흩어진 물방울은 투둑, 레지나의 뺨을 두들기고 파도 같은 그녀의 머리칼을 적셨지만 레지나는 멍하니 사라진 그의 뒷모습만 쫓았다.
그렇게 뜻밖의 자유를 되찾게 된 푸른파도 해적단.
메파의 닦달에 세리느에 올라탄 레지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카사노의 비보만을 기다렸지만 항구에 카사노가 칩거한지 삼일, 항구에는 카사노가 사라졌다는 비보와 함께 새로운 파도가 바다를 덮쳐왔지만 오직 레지나, 그녀만이 보이지 않는 주박에 묶여 카사노의 망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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