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64화 (364/395)

“더 다가가다가 배라도 뒤집히면…”

“뒤집히진 않을 거고 그냥 섬 가까이 잠깐만 머물러줘요, 제가 건너갈 테니까.”

“파도도 강하고 계속 물쌀에 밀려날겁니다. 지금이라도 물러서야…”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와중 걱정이 앞서는지 말이 많아진 선원. 괜찮다고 다독여도 자꾸만 불안해하는 모습에 나는 텁,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따뜻한 한마디를 해줬다.

“그냥 갑시다. 죽어달라곤 안할게- 어차피 저 섬에 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응?”

“…알겠습니다.”

“어차피 금방 멎을거예요.”

“이 정도 파도가 쉽게 가라앉을리가…”

철썩-

섬이 맨눈으로 보일 때쯤 조금씩 멎기 시작하는 파도. 가라앉을리가 없다던 선원은 무안했는지 고개를 돌렸고 순풍에 흐름을 탄 배는 선원과 무관하게 빠르게 섬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저기 사람이…”

“고생했어요.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아까 지나친 섬에 대기만 해요.”

“알겠습니다.”

괜한 잡담이 길어지기 전 대화를 끊고 허리를 편 나는 끼익, 끼익, 소리나는 갑판을 밟으며 배 선수쪽으로 향했다.

-투둑, 투두둑, 투두둑

비가 그치질 않는구만.

몰아치던 파도는 멎었지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이전부터 내리던 비는 쉽게 멎지도 않고 이미 옷을 흠벅 적셨다. 체온이 조금씩 뺏기는 불쾌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던 무렵, 해변가에 서 있던 레지나가 피레아를 치켜들었고-

-쏴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선원의 비명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배, 파도가 자아를 가진것처럼 배의 후미를 밀었고 촤악, 바다를 가르며 섬에 가까워진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갑판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타앗!

“용케 도착했네, 멍청한 머리를 어떻게든 굴렸나보지?”

“보지는 너잖아.”

“…저급한 새끼.”

경멸 어린 욕설을 내뱉는 레지나,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림을 한 채 뚜둑, 뚜둑, 손목을 꺾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푸른 물빛이 감도는 감색 제복 상의에 광택을 내뿜는 판금 갑옷을 덧대어 걸치고 새하얀 제복 바지를 입은 그녀는 은빛 그리브를 덧대고 평소 신던 가죽 부츠가 아닌 판금장화까지 신고왔다.

완전 무장 그 자체에다가 피레아를 뽑아 든 레지나는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바다를 조종한 것 치곤 안색이 멀쩡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강해지긴 했나보네.

푸른 머리칼을 올려묶고 무언가 다짐한 날카로운 눈빛을 한 레지나는 여태껏 싸웠던 모든날과 비교해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살기’까지 내뿜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강함, 레지나와 부딪치며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기세에 나는 레지나에 비해 초라한 무장을 슥 훑어보며 레지나의 속을 긁기로 했다.

“그렇게 꽁꽁 싸매고 올 줄 알았으면 나도 몇 개 걸치고 올걸그랬네.”

“…”

터벅, 터벅, 터벅.

느긋하게 걸려 온 대화에 일절 반응하지 않은 레지나는 그저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올 뿐. 장화에 푹 파인 모래가 흩어지고 앞굽에 걷어차인 모래가 파스스 흩날리는 순간 레지나는 그대로 사라졌다.

도발이나 대화 따위에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낯짝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레지나, 언제 달려들지 몰랐기에 검을 뽑아 들고 침착하게 기다리던 중 오싹한 살기가 어깻죽지를 찔러왔다.

-카아앙!!!

저릿, 흘려내려고 뻗은 검이 찌르르 울리고 어깨가 마구 요동쳤다. 비껴맞았음에서 서걱, 검을 두드린 레지나의 풍압은 해변까지 베어냈고 푸왁- 터져 버린 모래가 하늘을 날다가 비에 섞여 투두둑, 우리의 몸을 더럽히기 시작했다.

“후우…!”

“어딜!”

촤악, 모래를 발끝으로 걷어차려는 그때 정강이를 걷어차는 레지나, 처음 달려온 순간부터 자세를 낮춰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던 그녀는 다리를 거두고는 내가 자세를 잡기 전 흩뿌리듯 검을 아래서 위로 크게 휘둘렀다.

-후웅!

앞머리를 스치는 피레아의 칼날, 번뜩이는 은빛 칼날이 파공음과 함께 휘둘러지는 순간 쩌억, 빗물을 가른 풍압은 구름마저 베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흉악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많이 쎄졌네.”

“닥쳐!”

짜증어린 대답과 함께 카앙, 카앙! 도끼질처럼 내 정수리를 내려찍는 레지나, 감정이 담긴 단순한 검격- 하지만 손바닥을 검날에 얹고 양손으로 받아 내도 내 양발은 푸욱, 푸욱, 늪에 빠지는것처럼 모래에 깊숙이 파묻혔다.

-뻐억!

“큭!”

이대로면 발이 묶이는 건 당연지사, 움푹 파이는 내 몸을 보며 레지나가 머리뒤까지 검을 치켜드는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손잡이 쥔 주먹을 휘둘러 레지나의 갈비를 후려쳤고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빠진 레지나는 투두둑, 쉼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시 한번 피레아를 고쳐쥐었다.

-타다다닥!

나 또한 모래구덩이에서 발을 빼고 자세를 다시 바로잡은 뒤 달려오는 레지나를 맞받아쳤다. 부딪치기 전 레지나에게서 느꼈던 위세는 정말 대단했지만 지금 검을 주고받는 순간만큼은 우린 대등했다.

그래서였을까? 조급함을 느낀 건지 레지나는 쉴 새 없이 내 품 안을 파고들며 목이나 심장, 허벅지 같은 곳만 노리며 얌체처럼 굴어댔고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으며 뒷걸음질로 해변가 곳곳을 누볐다.

“하아, 하아, 하아…!”

“후웁!”

빗방울이 얇아지고 비도 점점 그쳤지만 우리는 계속 검을 주고받았다.

처음 한합을 주고받은 지점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해변을 빙빙 돌던 그때, 크으읏…! 짜증어린 소리를 내지른 레지나는 피레아를 역수로 쥐곤 크게 검을 휘둘렀고 해변째로 베어낸 검격은 굳은 모래를 쩍- 가를 만큼 엄청난 위력을 선보였다.

“힘, 낭비하네에…”

“너, 너야말로, 씨바알, 그만 도망쳐어어…!”

어느새 비가 멎고 구름이 조금 흩어졌지만 해가 보이지 않는 만큼 비에 젖은 멈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가 절로 떨리고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레지나에게 얕보이기 싫어 한마디했더니 그녀 또한 내게 지기 싫었는지 짜증을 내며 타앗,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덮쳤다.

-뻐억!

“큭!”

명치를 걷어차는 단단한 부츠 밑창.

“돼지 년…!”

“닥쳐어어!!!”

엄청난 중량에 데굴데굴 모래밭을 구르자 레지나 또한 온몸을 내던졌기에 나처럼 해변을 구르며 모래투성이가 됐다. 흠뻑 젖은 머리칼에 모래가 달라붙고 아름다운 얼굴이 모래범벅이 되어도 레지나는 푸욱, 피레아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곤 퍼억, 퍼억, 내 머리 옆을 검 끝으로 찍으며 덤벼들었다.

“씨발, 죽어, 흐읏, 그만 죽어!”

기를 쓰다못해 악에 받쳐 검을 내지르는 레지나. 정말 나를 죽일 심산인지 피레아를 내려찍는데만 정신팔린 그녀의 배를 걷어차고 다시 일어나는데 성공했지만 레지나 또한 화살이 쏘아지듯 재빨리 일어나 피슉, 내 귓불을 베어냈다.

왜 저리 악에 받친거지?

하지만 아무리 악에 받쳤다해도 레지나도 결국엔 인간이었다.

“흐으으으…”

젖은 몸으로 붕, 붕, 힘차게 피레아를 휘두르지만 파랗게 질린 입술과 새하얀 얼굴은 그녀 또한 지쳤다는 방증이었다. 비에 젖은 몸을 힘겹게 움직이며 다가오는 레지나의 모습에 나는 지금이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 판단, 마지막 숨겨둔 한수를 꺼내기로 했다.

카앙, 카앙-!

우측으로 횡 베기를 먹이면 그에 맞춰 커틀라스 뒷날로 받아치는 레지나, 이후 검을 쳐 낸 그녀가 직선으로 휘두르면 나 또한 옆면으로 쳐 내고 근접전으로 전환해 보려하지만 레지나가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난다.

한합씩 주고받지만 쉽게 기울지 않는 실력, 비등하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기였지만 레지나가 거리를 벌린 지금이 적기였기에 나는 눈을 감고 마나를 끌어모았다.

“하, 본격적으로 해 보자 이거지?”

이전까지 나눈 게 마나를 두르지 않고 나눈 탐색전이었다면 마나를 사용하는 순간이 진짜 시작이었다. 레지나 또한 기다렸다는 듯 마나를 일으키고 피레아에 코팅하듯 휘감았지만 내가 하려는 건 다른 거였다.

“운디네.”

[푸하아~]

보글보글, 등 뒤에서 들끓는 거품소리가 일어남과 동시에 오랜만에 듣는 귀여운 목소리가 귓가에 살포시 울렸다. 나와 마주고보고 있던 레지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검을 치켜들다 소환된 운디네를 발견하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했다.

“정령?!”

‘운디네, 내 몸에 묻은 물을 빨아들여 줘. 그리고 그거랑 저 여자 몸을 적신 물을 함께 이용해서 여자가 못 움직이게 막아줄 수 있어?’

[응, 맡겨줘!]

오랜만의 부탁임에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해준 운디네는 검을 휘두르기 직전인 레지나를 향해 손을 뻗고 꾸욱,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보글보글보글…

“뭐야 이건!”

축축하게 젖어 변색된 제복이 뽀송뽀송해지고 젖은 머리칼이 마른다. 나 또한 레지나처럼 온몸이 물기 하나 사라졌고 한데 뭉친 커다란 물방울은 달려들던 레지나를 그대로 풍덩, 덮어 버렸다.

-서걱, 서걱, 서걱!

[으으응…!]

단숨에 레지나를 가둔 물감옥, 저 정도 물이 몸을 누르고 있었다니 감탄하던 그때 발버둥 치는 레지나의 사지가 꾸물, 단단해진 물이 옥죄기 시작했고 단숨에 사지가 꼿꼿이 펴진 레지나는 공기를 가득 머금은 빵빵한 볼을 씰룩이며 나를 노려봤다.

[크으으읏…! 너무 따가워어어…! 도와줘 카사노!]

레지나의 얇은 목을 휘감는 물밧줄, 손목과 발목을 비트는 물방울에 레지나는 보글보글, 커다란 공기 방울을 내뱉으며 괴로워했지만, 그녀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쏴아아아아!

서걱, 서걱!

붙잡혀 있는데도 파도를 화살처럼 쏘아내는 레지나, 마나가 담긴 파도는 운디네를 꿰뚫을 때마다 해류로 헤집으며 그녀를 괴롭게 했고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조종하는 파도는 잘라도 잘라도 금세 거머리처럼 운디네의 몸에 달라붙었다.

뿌드득…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와 함께 꺾이는 레지나의 손목.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내린 운디네의 결단에 심음으로 칭찬한 나는 툭, 물감옥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지는 피레아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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