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46화 (346/395)

“필리아님?”

“아, 응?”

멍하니 레지나를 응시하는 필리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나긋하게 이름을 부르자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필리아.

어딘가 정신을 떠나보낸 그녀의 모습에 어깨를 토닥이며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한 나는 꽁꽁 감춰둔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넌지시 캐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말 못 할 고민이어도 저에게 터놓아주십시오, 지금은 같이하는 동료잖아요?”

[자아,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군요! 점점 경매도 끝을 향해가고 있지만 아직 쟁쟁하고도 엄청난 물건들은 잔뜩 남아있답니다~! 그중에서 특별한 건 이것! 이번 경매품은 고대 무구 림발의 희중시계입니다!]

“동료…”

시끌벅적한 사회자의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고개 숙인 필리아는 오물, 오물, 입술을 곱씹다가 결국 체념하기로 했는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젓고 어물쩍 넘어갔다.

“괜찮아, 아, 아직 경매 중이니까 나중에 이야기…”

[이번에 보여드릴 물건도 무척이나 대단한 작품, 아니-! 보물입니다. 멸망한 해상왕국, 왕이 지녔던 최후의 유물이 지금 여러분 눈앞에서 최초로 공개됩니다! 고고학자 수십 명의 처절한 노력으로 발굴하고 다듬어낸 이번 경매의 가장 큰 결실! 처음 시작은…]

“50골드.”

사회자 덤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 높이 뻗어지는 팻말 하나, 번호가 보이지 않았지만, 팻말을 쥔 손을 따라 훑어보니 팻말의 주인은 레지나였다.

푸른 머리칼을 검지에 배배 꼬아 흔들던 레지나는 가면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두 눈을 빛내며 씨익,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말을 끝마치지 못했던 필리아는 이를 갈며 팻말을 들려 했지만 내가 가로막았다.

“제가 입찰하겠습니다.”

“…부탁할게.”

“51골드!”

[…최소 입찰금 1골드로 치열한 경매에 끼어드는 24번! 더 입찰하실 분은 없-]

“60골드.”

찌질한 견제에도 멈추지 않고 곧바로 팻말을 치켜드는 레지나, 가면 너무 흉흉한 눈빛을 내게 쏘아내며 빠지라고 종용하는 레지나였지만 피식 웃으며 무시한 나는 곧바로 팻말을 들고 외쳤다.

“61골드.”

“씨발.”

퍼억, 의자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똑똑히 들려오는 저급한 욕설. 레지나에게 걷어차인 귀빈은 울그락불그락 끓어오르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지만 시퍼렇게 뜬 두 눈을 보곤 조용히 고개 숙였다.

“…70골드.”

“71골드.”

“씨발! 덤보, 최소금액 올려 뒤지기 싫으면!”

[히익! 입찰 최소 금액을 5골드로 올리겠습니다. 아직 쟁쟁하고 훌륭한 경매품이 남아있으니 신사분께서는 양보하는 것도 좋은…]

“80골드!”

콰앙, 팔걸이를 팻말로 내려치고 아예 일어서서 나를 노려보는 레지나, 그래도 다행인 건 그녀가 내 정체를 파악해지지 못했다는 점이었기에 고개 숙여 시선을 피한 나는 팻말만 들고 낮은 목소리로 입찰했다.

“85골드.”

그 뒤로 몇 번이고 오가는 쓸데없는 공방, 필리아가 가진 골드와 내가 가진 골드로 레지나에게 밀릴 리 없다고 판단한 나는 끈덕지게 그녀를 물고 늘어졌고 150골드가 외쳐진 순간 레지나는 파삭, 팻말을 부수고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씨발 새끼, 감히 훼방을 놔? 두고봐 개새끼야,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굴러먹는 새끼던 내가…!”

[150, 150, 150골드에 24번 신사분께 해상왕국의 유물이 낙찰되었습니다! 자, 다, 다음 물건은…!]

“이제 일어날까요?”

“응, 대단한데? 저 망할 년이 저렇게 날뛰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이리와, 이리와 씹새야! 넌 내가 죽인다. 죽일 거라고!!!”

“이러시면 안됩니다…!”

팻말을 소파에 내려놓고 필리아와 오붓이 팔짱을 낀 채 경매장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나를 덮치는 레지나.

혹시나 코앞까지 오면 반격할 생각도 있었지만 여러 경비병으로 만들어진 벽에 가로막힌 그녀는 경비병을 차마 때릴 순 없었는지 그들을 밀어내며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그 덕에 비교적 평화롭게 경매장에서 빠져나왔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는지요, 퇴장하시기 전 낙찰받으신 물품들의 확인과 대금 결제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자 카사노.”

찰랑, 금화로 가득한 주머니를 받고 품속 주머니에서 부족한 금화를 합쳐 내밀자 미약한 미소를 머금고 받아내는 직원.

레지나에게 뺏는다는 의의만으로 낙찰받은 물건이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지만, 옆에 서 있는 필리아는 레지나에게서 뺏었단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옆에서 히히덕 거리기 바빴다.

“낙찰받으신 경매품입니다. 따로 담아드릴까요?”

“아뇨, 그냥 그대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처음 낙찰한 좆같은 다이아를 제외하고 우리가 낙찰받은 것은 총 4개.

제국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세공사가 깎아낸 금반지와 드래곤 레어에서 정당한 거래로 받아온 루비 브로치, 한 달에 한번 마나를 충전해 공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유물과 마지막에 낙찰받은 해상왕국의 유물.

전부 내가 가진 돈으로 낙찰받았지만, 마지막 유물은 대부분 필리아의 돈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작은 목함 상자를 받아든 나는 미련 없이 필리아에게 건네주기로 마음먹었다.

-뽈칵

“오…”

“와아…”

푸른 파도를 엮어다 빚은 듯한 반지테, 그리고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하늘빛 보석까지. 세공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엄청난 노력으로 가공한 보석이란 게 절로 느껴졌다.

이런 게 해상왕국의 유물이라니, 어디다 쓸 목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반지만큼은 레지나의 머리카락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어버렸다.

그래도 기왕 필리아 돈으로 낙찰받은 거니 그녀에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반지를 꺼내 들고 필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응? 응? 응?”

쭈뼛, 찰랑이는 분홍빛 머리칼을 흔들며 나를 올려다보는 필리아. 레지나에게 한방 먹였다는 흥분감으로 볼이 빨갛게 물든 그녀는 촉촉한 입술을 달싹이며 나를 멍하니 바라봤고 붙잡은 손을 살짝 벌린 나는 일부러 왼손 약지 끝에 반지를 걸고 필리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물도 먹이고 낙찰도 받았네요.”

“으, 응. 그런데… 왜 나한테 끼워주는 거… 지? 나는 잘 모, 모르겠는데.”

꿀꺽, 서서히 밀려가는 반지가 약지 중간에 걸리자 데굴데굴, 하나 남은 눈동자가 팽팽하게 돌아가고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까지 시선에 잡혔다.

너무 부끄러워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좋은 반응을 보여준 보답으로 망설임 없이 푹, 약지 끝까지 반지를 밀어 넣은 나는 필리아의 약지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도와주신 보답으로 선물해드리고 싶어서요. 사실 필리아님 아니었으면 낙찰받지도 못했으니까요.”

“내, 내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하아앙!”

후욱,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고 찹, 말캉한 볼에 뺨을 얹었다.

안심되는 분 냄새와 코를 휘감는 진한 향수 냄새, 그 안에 숨겨진 진한 암컷 냄새에 흥분한 나는 직원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얇은 허리에 팔을 휘감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일단 레지나를 쫓는 건 뒤로하고… 오늘 밤은 자축의 시간을 가져볼까요? 아까 보니까 바같은데도 있던데…”

“카, 카, 카사노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꾸욱, 밀착한 필리아의 가슴이 내 가슴에 짓눌리고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강하게 휘감자 쿵, 쿵, 쿵, 가슴을 타고 요란한 심장 소리가 내게 흘러들어왔다.

이 정도면 눕힐 만하겠네.

술만 조금 마시고 즐기면 되겠다는 견적을 마친 나는 허리에 두른 팔을 살짝 당겨 필리아를 옆에 나란히 서게 고정하고 허리에 휘감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녀의 골반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럼 가볼까요.”

“응, 응!”

건네준 반지를 끼고 나서부터 말더듬이가 돼버린 필리아, 그래도 남자에 능숙한 여자보다 이런 풋내나는 귀여운 반응도 맛있었기에 나는 웃으며 필리아를 이끌고 바를 찾아 천천히 향했다.

“잠깐!”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선망 가득한 눈총을 받으며 바로 향하던 그때 나를 불러세우는 까칠한 목소리.

돌아보지 않아도 그 주인이 누군지 짐작됐지만, 필리아가 괜히 뛰쳐나가기 전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여 진정시킨 나는 필리아를 등에 숨기고 천천히 뒤돌았다.

“너, 아니- 후우우…! 당신? 잠시 멈춰봐.”

뒤돌자마자 이를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했는지 이빨을 갈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레지나. 하지만 도중 무슨 변심인지 멈춰선 그녀는 한숨을 내뱉곤 상냥해진 목소리로 멈출 것을 종용해왔다.

척, 멈춘 발을 까딱이고 팔짱을 끼자 찰랑,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레지나는 가면도 벗은 맨얼굴로 또박또박 내게 반지를 넘길 것을 권유해왔다.

“그 물건,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거든. 내가 누군진 알고 있지? 얌전히 넘겨주겠어?”

“필요하면 입찰했어야지.”

“?”

목소리를 깔고 덤덤히 대답하자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한 레지나였지만 이내 웃어넘긴 그녀는 누가 봐도 짜증을 억누르는 억지 미소로 내게 한 발짝 다가오고 다시 종용해왔다.

“그러니까 지금 달라고 이야기하잖아? 곱게 부탁할 때 들어주는 게 신상에 좋을걸? 바다 한가운데에서 물고기 밥이 되고 싶진 않잖아.”

“지금은 쉽게 못 건네주겠는데…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햐응!”

성난 황소처럼 등 뒤에 숨어 언제든 뛰쳐나갈 각을 보는 필리아의 가슴을 살짝 주무르자 흘러나오는 야릇한 신음. 그걸 들은 레지나는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는지 까득, 이를 갈고 한 걸음 더 다가왔지만 겨우 숨을 고르고 진정하더니 다시 내게 협상해오기 시작했다.

“그 선약을 뒤집으라 이 말이잖아, 뒤지고 싶어?”

…진정한 건 아니구나. 무어라 속을 더 긁을까 고민하던 그때 레지나가 등진 벽에 걸린 시계에 표시된 시간을 살핀 나는 따로 그녀와 만나기로 결심하고 약속을 잡기 위해 넌지시 운을 떠봤다.

“지금이 2시군. 내일 아침 9시쯤에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내가 당신 배로 찾아가겠다.”

“날 상대로 혼자 오겠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 응?”

상체를 살짝 숙이고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껄렁한 미소를 짓는 레지나. 가슴이 스치지 않으려고 단추를 푼 탓에 드러난 가슴골은 손을 집어넣고 싶을 정도로 늪 같은 매력을 보였지만 애써 참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알지, 레지나. 요즘 들어 개같이 패배했다는 소식밖에 없는 꼬리만 개 아닌가.”

“이런 씨발 새끼가…”

우웅, 여린 몸을 휘감는 대량의 마나.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의 그녀였지만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과 등 뒤에 숨은 필리아를 힐끗 바라본 레지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곤 내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9번 부두로 와, 안 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버릴 줄 알아.”

한 수 접고 그대로 물러나는 레지나, 그녀가 등을 돌리고 제복을 펄럭이며 어딘가로 사라지자 구경꾼들이 흩어지고 꾸욱, 내 옷깃을 움켜쥔 필리아가 천천히 옷깃을 놓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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