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43화 (343/395)

“휴우…”

툭, 넘어지던 가방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이공간주머니를 연 나는 주머니 안에 따로 준비한 물건 중 빼먹은 게 없는지 적어둔 목록을 보며 대조하고 혹시 몰라 빼둔 신발마저 넣은 뒤 마지막의 마지막 확인까지 마친 후 주머니를 다시 품에 넣었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

스윽, 침대 위에 올려둔 가지런한 정장을 들어 올린 나는 절로 뱉어지는 한숨을 다시 삼키며 아르실을 떠올렸다.

영애와 잠입하는데 제대로 갖추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준비해둔 옷을 보곤 어딘가로 뛰어갔다 와 작은 두 손으로 한 아름 싸 들고 온 검은색 정장.

지원금의 대부분을 썼다고 덤덤히 말하는 모습에 몹쓸 남편에게 용돈을 퍼주는 불쌍한 아내가 떠올랐지만, 면전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고맙다는 인사와 포옹을 선물해줬다.

“좋은 냄새였지.”

포옥,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고 등골을 쓰다듬는 아르실의 야릇한 손길, 그녀가 떠나고 많이 맡았던 진한 향기의 갈피를 곰곰이 떠올리다가 슬슬 준비할 시간임을 자각한 나는 재빨리 옷을 벗었다.

책상에 올려진 작은 쪽지, 팬티 바람으로 쪽지를 펼친 나는 [항구 남쪽 부두 거북이 바위, 자정 12시]라는 글귀를 곱씹으며 정장을 입었다.

아르실과 인사도 나눴고 물건도 다 챙겼다, 지금 시간은 11시 40분이었으니 지금 나가면 딱 알맞게 도착하겠다는 계산을 마친 나는 곧바로 숙소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갈매기들이 울어대고 술 취한 인부들이 어깨에 부딪혔지만 멈추지 않았다.

귀한 정보가 도사리는 암시장으로 향한다는 기대감과 레지나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기대감과 기대감을 곱하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여긴데.”

남쪽 부두 옆 진짜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 하나. 바다로 기어가는 듯한 거북이 모습에 툭, 툭, 등껍질을 발로 밟아보던 그때 쏴아아, 파도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사노!”

또각또각, 갑판 위에 울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당찬 미음, 고개를 들자 부웅, 손을 흔든 필리아가 밤하늘을 머금은 들뜬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올라와.”

필리아가 내려준 그물사다리를 잡고 천천히 올라가자 갑판 위에 서 있던 몇몇 선원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고 갑판 위에 단둘이 남게 된 상황.

“배가 생각보다 작네요.”

“대형 범선으로 갔다간 도망쳐야 할 상황에 버거우니까.”

합리적인 선택에 휘익, 휘파람을 불며 감탄한 나는 턱, 배에 손을 얹고 밤바다를 바라보는 필리아를 바라봤다.

그때 입은 드레스보다 길이가 조금 짧았지만 아름다움은 똑같았다. 아니- 그때가 결혼식 복장이었다면 지금은 사교회에서 입는듯한 느낌? 야릇하고 간질거리는 느낌에 갈피를 못 잡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턱, 필리아의 손등에 손을 얹고 그녀를 칭찬했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흐흐, 흐흣! 정말…?”

음흉하게 웃긴, 귀여운 모습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홰액, 바닥에서 무언가 집어 든 필리아가 펄럭, 수수한 갈색 로브를 펼치곤 내게 건네줬다.

“치, 칭찬은 고맙고! 일단 모습을 숨겨야 하니까 이거부터 입어.”

“필리아님부터 입으시죠.”

곱게 펴진 로브를 건네주는 손을 밀어내고 바닥에 떨어진 남은 로브를 펄럭, 가볍게 털고 펼쳤다. 그렇게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로브를 걸치고 후드까지 푹 눌러써 바다를 구경했고 조용한 침묵을 즐기던 중 옆에 선 필리아는 시도 때도 없이 히히덕 거렸다.

“내가, 내가 이쁘데, 아름답다니…!”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히히덕거리며 입가를 가리는 필리아, 그 모습이 귀여워 또 골려줄까-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암시장에 도착하기 전 합을 맞춰야 할 거 같아 재빨리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애인 관계로 정했으니 합을 맞춰야겠죠?”

“응? 응! 아, 그렇지! 합을 맞춰야겠지?!”

툭, 가볍게 부딪히는 어깨와 함께 살짝 내 쪽으로 기댄 필리아, 그녀는 하나 남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저 기대하고 있어요- 하는 티를 잔뜩 냈고 거부할 생각도 없었던 나는 맞닿은 어깨에서 흐르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와 하나씩 합을 맞췄다.

표면상으로 자신의 애인으로 동행한 필리아. 문지기가 검문할 때 강하게 나가 필리아를 검문하지 못하도록 막고 암시장 내부에 들어가면 곧바로 경매장으로 향하기, 차근차근 계획을 정하던 그때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은 가죽 백을 연 필리아는 커다란 주머니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따로 준비한 돈도 있고 협조해준 의미로 경매장에서 원하는 물건 하나쯤은 사줄 테니까 얼마든지 말해.”

원하는 거 하나쯤은 얼마든지 사주겠다니, 정장을 갖다 바친 아르실과 동류의 냄새를 풍기는 필리아의 모습에 곧바로 수락한 나는 주머니 안에 든 금화를 가늠하며 다시 계획을 마무리 지었다.

“필리아 아가씨! 카사노님! 도착했습니다!”

“벌써?”

“아, 저기 있네.”

척, 내 손이 덮인 손은 꼼지락거리면서 다른 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는 필리아, 그녀의 손끝을 쫓으니 휘황찬란한 조명과 정박한 수많은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출렁, 출렁, 파도를 견디며 자리 잡고 있었다.

커다란 돔 형태로 이루어진 건물, 멀리서 보는데도 가벽이 아닌 제대로 된 재료인 것까지 눈에 들어왔고 정박한 배들은 그 수가 수십이었다. 생각보다 커다란 규모에 혀를 내두르던 그때 필리아가 도착했다 알린 부하에게 큰소리로 지시했다.

“정문 가까이 정박해. 그리고 책잡힐 짓 하지 말고 얌전히 대기해!”

“알겠습니다!”

“대단하네요, 바다 위에 저런 걸 지었다는 게.”

“대단하지, 마법과 마법 공학을 뒤섞었다고 해도 저 정도 규모라니, 뭐- 다른 소문으론 레지나 그년이 관여해서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레지나가요?”

끄덕, 고개를 주억거린 필리아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설명해줬다.

“그년이 가진 무구로 파도도 다루고 바다 마녀의 딸인 덕에 바다에서 펼칠 수 있는 영향력 하나는 확실하거든. 아마 마녀와 거래해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무언가 처리한 게 틀림없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 한자리에 저 거대한 규모를 얌전히 띄울 수가 없잖아?

필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납득한 나는 거의 경기장만 한 규모를 유지하는 바다의 마녀, 아우리아의 능력을 상상했지만 좀처럼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나중에 만나보면 알겠지.

“정박했습니다!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귀 안 먹었어!”

추욱, 필리아의 구박에 어깨를 늘어뜨리는 선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천천히 연결된 다리를 걸었다. 정박한 부두들이 미로처럼 보이긴 했지만 결국 모든 부두는 정문을 향했다.

“우웃…”

앞장서서 구두소리를 내며 걷던 필리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 몸을 돌려 당차게 전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주점에서 구두를 불편해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신발을 챙겨왔으니 나중에 주면 되겠지, 편하게 생각한 나는 앞장서는 필리아를 가로질러 턱, 그녀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앞장설 테니 천천히 따라오세요. 발이 불편하시잖아요?”

“고맙, 다…”

꾸욱, 앞니로 입술을 가볍게 누르고 고개를 돌리는 필리아, 수줍어하면서도 확실히 인사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정지.”

성인 남성 두명만한 높이의 커다란 주황색 쿠션문. 그 앞에 선 덩치 둘이 천천히 우리를 제지했다. 다른 손님들을 맡는 문지기들의 덩치와 비교해보니 우리 쪽에 온 문지기들의 덩치가 조금 더 크기까지 했다.

“초대장을 꺼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스윽, 품에 소중히 간직한 무기명 초대장을 내밀자 빤히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에스코트하느라 붙잡았던 필리아의 손을 좀 더 잡아당겨 등에 붙게한 나는 입술을 달싹이는 문지기를 보고 그냥 후드부터 벗었다.

“당신은…”

유명하다는 필리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문지기와 초대장을 받은 문지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슥, 슥, 위아래로 스캔하는 눈동자에 로브를 살짝 걷어 무기 같은 게 없다고 확인시켜준 나는 기세를 몰아 먼저 말을 꺼냈다.

“빨리 들여보내 주세요, 자리 잡아야 뭐라도 건지지.”

“음…”

“그냥…”

내 재촉에 저들끼리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문지기들, 무언가 합의했는지 찌익, 초대장 끝을 찢고 내게 다시 내민 문지기는 천천히 옆으로 비켜 길을 터주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했다.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네, 정문입니다. 예의 그 남자가…”

허리를 펴고 제자리로 돌아가던 문지기들에게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주황빛 보석을 입에 대고 소곤소곤 무언가 일러바치는 모양새를 보니 상부에 보고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사고 치면 안 되겠는데요?”

“난 카사노 당신을 믿어. 레지나 그년만 조지자고.”

사고 칠 생각 가득하잖아. 당찬 필리아의 포부 탓에 땀이 조금 새어 나왔지만 따뜻한 손바닥을 검지로 쓰다듬은 나는 화악, 바람을 일으키며 열린 커다란 문 너머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보며 필리아와 함께 암시장 안으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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