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역시 이상합니다, 한번쯤은 그 악독한 여자의 재량으로 가능하지만 두 번은…”
“남자는…”
“듣고 있습니까?”
쿵, 위협적으로 갑판을 찍는 검은 군화.
말 안 듣는다고 발을 구르다니, 귀엽게 행동하는 아르실의 모습에 노래를 멈춘 나는 바다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드넓은 바다를 보고 잡념을 버리세요. 오늘같이 좋은 날 괜히 기분 나쁠 필요는 없잖아요?”
“하긴, 해적단 3개를 궤멸시키다니, 거기다 세 군데 다 월선을 시도해온 탓에 배 또한 무척이나 깨끗한 상태로 나포했고 현상금도 두둑이 챙길 수 있게 됐습니다. 거기다 악명이 높은 놈들이니 나중에 공적으로 인정된다면 황자님의 위명도 드높일…”
뚝, 무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을 멈추는 아르실.
마음같아선 방금 하던 것처럼 흥분해서 우다다 떠들어줬으면 좋겠다만 우리의 아르실은 쿵,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험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말 돌리지 마십시오! 저는 레지나의 탈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타는 현상금으로 옷이나 살까요? 아르실이 입고 다니는 로브도 다 헤졌는데 좋은 거 하나 사야죠.”
“안 그래도 함킨 상단이 차린 재봉점에서 눈여겨본게 있긴 합니다만 카사노님?”
-콰악!
“오우.”
갑판을 쿵쿵 구르던 군화가 발등을 짓밟는 순간 찌르르, 고통이 올라왔지만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비명을 삼키고 음미하는 동안 도끼눈을 뜬 아르실은 꾸우욱, 발을 짓밟은 채 나를 마주보기 위해 정면으로 자리를 옮기곤 불퉁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황자님이 이곳의 전권을 카사노님에게 맡겼으니 카사노님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러시면 매우 곤란해집니다.”
“뭐가요?”
“…레지나가 도망쳤던 도망치게 내버려 뒀던, 저도 알권리가 있고… 아니- 저도 알아야 합니다.”
펄럭, 단호한 선언과 함께 펄럭이는 로브.
로브 안 펄럭이는 연갈색 날개를 상상하며 입술을 깨문 나는 솔직하게 말할까 하다가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아르실을 바라봤다.
“아르실…”
“…네에.”
축 늘어진 슬픈 얼굴로 응시하자 말끝을 흐리는 아르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그녀를 향해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더 축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르실, 저는 아르실을 믿는데… 아르실은 저를 안 믿는 건가요?”
“그런, 지금의 사태는 누가 봐도 카사노님이 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피해자인 척 굴면 곤란합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이대로 대화가 흘러간다면 능청스럽게 넘기기 어렵다는 판단이 든 나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스륵…
“응흐읏…?!”
로브에 뒤덮여있음에도 크게 부푼 가슴, 아르실의 풍만한 윗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는다.
알을 돌보는 어미 새의 심정으로 둥근 젖가슴을 쓰다듬자 콩닥, 콩닥, 뜨거운 체온과 함께 미약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끼야아아앗!”
-촤악!
“끄악!”
곱게 넘어갈 줄 알았다면 그건 나의 착각, 아르실의 비명과 함께 날카로운 손톱이 눈을 긁었고 미간과 오른눈,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를 붙잡은 나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아르실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아파, 아파…!”
진짜 아프다, 아니 존나 아팠다. 수인은 다 이 정도였나? 츠루카나 에루카의 송곳니로 입질만 경험했던 나는 내심 그녀들의 송곳니에 두려움을 느끼게 돼버렸다.
“아무리 저와, 저와, 저와-! 친근감을 쌓았다고 해서 이런 무례는 곤란합니다!”
“미안해요.”
“저, 저번처럼 상냥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이라니 음흉합니다,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중얼중얼, 벗었던 후드를 푹 눌러쓰고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한 아르실.
그런 그녀의 재롱을 지켜보며 욱신거리는 눈가를 쓰다듬던 와중 터벅, 터벅, 발소리와 함께 한 선원이 다가왔다.
“카사노님, 해적들의 분류가 끝났습니다.”
“아- 가겠습니다.”
꾸벅, 묵례하는 선원의 넓은 등을 힐끔 바라본 나는 여전히 불퉁해 있는 아르실을 향해 손을 휘적이고 선원의 뒤를 따랐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씨발년들아, 듣고 있어? 나를 죽이면 내 형제가 복수하러 올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아이 씨발, 시끄럽네.”
쩌렁쩌렁, 갑판 중앙에 서자 울려대는 돼지 울음소리.
귀를 찢는 고함에 거친 말투가 튀어나오자 갑판에 잠시 침묵이 가라앉았지만 짧은 평화인 만큼 해적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 갑판을 가득 메웠다.
“뒤쪽이 영주성에 보낼 놈들, 왼쪽이 생포 한정, 오른쪽이 상관없음?”
“네, 맞습니다.”
짧은 안내를 읊으며 해적들을 바라보자 각자의 위치에 자리한 해적들이 어깨를 떨었다.
영주성에 보낼 해적 놈들은 쐐기 이빨 항구에서 직접 현상금을 내건 놈들, 그렇기에 직접 데려가는 게 좋아 분류했고 왼쪽 또한 상단이나 다른 왕국이 생포 한정으로 걸어둬 따로 분류했다.
대목은 오른쪽, 가볍게 훑기만 해도 험악하고 좆같이 생긴 새끼들이 한가득한 데다가 울어대는 다른 놈들과 달리 입을 꾹 닫고 있거나 선원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뱉으며 복수하겠다는 둥 잡소리를 입에 담고 있었다.
“이 새끼 죄목이 뭡니까?”
-스릉!
해적두목 한 놈이 차고 다니던 커다란 커틀라스를 뽑아 들자 흐읍, 해적들이 숨을 삼켰다.
망나니검같아서 뽑았는데 제법 무겁네.
“가디, 죄목은 강간, 방화, 살인, 절도…”
“아니 됐다, 더 말 안 해도 돼요. 입만 아프겠네.”
“넵.”
“특이사항은 있어요?”
“해적 이전에도 이미 지명수배자였습니다, 현상금을 내건 건… 제국입니다.”
“아 진짜요?”
-푸욱!
“끄아아아아악!”
“아.”
현상금을 내건 게 제국이라니, 너무 의외여서 갑판에 살짝 검을 세운다는 게 가디라는 놈의 발등에 꽂아버렸다.
주르륵, 갑판을 더럽히는 놈의 피와 함께 피슉, 핏줄기가 조금 치솟았지만 갈라진 발등을 보며 혀를 내두른 나는 곧바로 코틀라스를 뽑아 들었다.
“아, 미안해요.”
“끄으으으윽, 뽑지마아아…!”
“꽂아?”
-푸욱!
“그르르르르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나에게 쏟아지는 흉흉한 눈빛, 주성치 개그를 싫어하는 해적인지 눈빛만으로 나를 찢어 죽일 기세였다.
“잘가라.”
-부웅!
서걱, 손끝에서 느껴지는 뼈를 가르는 감각과 묵직함.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통과 함께 대기하던 선원들이 피 분수가 갑판을 더럽히기 전 잘린 단면을 바다로 향하고는 그대로 풍덩! 바다에 시체를 내던졌다.
“자, 다음… 응?”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상관없음 직군들의 목을 전부 참수하려던 그때 귓가를 울리는 환호 소리, 나만 듣는 환청이 아니었는지 선원들과 해적들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목에 망원경을 걸고 다니는 선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거 좀 잠시 빌려줄래요?”
“네!”
-푸욱!
“끄으으으읍…!”
다음 해적 놈의 발등에 커틀라스를 꽂고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두 눈에 비치는 드넓은 대양을 감상하며 천천히 각도를 조절하는 와중 한 번 더 환호 소리가 들렸고 소리의 근원지를 쫓다가 발견한 나는 망원경에 눈을 붙인 채 바크문에게 소리쳤다.
“살짝 좌현으로 틀어주실래요?”
“좌현으로!”
우르르, 갑판을 뛰어다니는 소리와 함께 살짝 기우는 배.
망원경 너머 보이는 풍경을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준비를 마쳐야 했고 실물로 보면 된다는 생각에 망원경을 내린 나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후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카사노님, 싸움에 끼려는 생각입니까?”
쏴아아, 배에 갈라지며 흩어지는 파도를 구경하는 와중 나를 찌르는 작은 목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현장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와중 아르실이 내게 질문해왔고 나는 기가 차단 얼굴로 바다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르실이 그렇게 좋아하는 레지나가 저기 있는데 당연히 껴야죠?”
“좋아하다니! 응? 레지나?”
[와아아아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대양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커다란 배.
내가 타고 있는 범선보다 몸집이 큰 두 배는 사이좋게 나란히 서 옆구리를 맞대고 사다리와 갑판이 얹어진 채 서로의 선원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만 서로 검을 빼 들고 건너가기보단 무언가 구경이라도 하는 듯, 들뜬 함성과 함께 누군가를 둘러싼 듯했고 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누구의 배인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인어 선수상이 자리 잡은 배, 푸른 파도 해적단의 배가 왼쪽에 있었고 그 옆에는 이빨이 그려진 커다란 돛과 함께 입을 벌린 사자 선수상이 자리 잡은 배가 오른편에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레지나 이 개갈보년아! 오늘이야말로 네년의 제삿날이다!”
“좋아 핑보년아, 그 새끼한테 받은 치욕, 굴욕! 네년에게 되갚아주마!”
카앙, 맞닿았다 떨어지는 두 개의 검날.
“핑보가 뭔데!”
“이계인들에게 들었거든, 너같이 머리가 분홍인 년들은 보지도 헐렁한 갈보년이라고,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핑크색이니 핑보라고 불러주는게 도리 아니겠어!”
“이 개씨발년이!”
…레지나와 필리아, 두 여자가 세기의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