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인 신호에 혀를 내두르던 그때 돛대 맨 위에서 엄청난 고함이 쏟아졌다.
“좌측, 해안 절벽에서 엄청난 속도로 배가 접근합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레지나의 손에 들린 피레아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도를 일으킨 레지나는 히죽거리는 입꼬리로 소리치며 척, 다가오는 배를 가리켰다.
“네놈한테 꼭 복수하고 싶다고 소리치던데? 네놈이 죽인 부하들의 목숨값을 받아 가겠다고, 직접 찾아왔으니 한번 잘 상대해보시지.”
“거, 검은 해골 해적단입니다!!! 선장님, 지,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그 정도 거물이 왜…! 그리고 왜 이리 빠른 거야, 미치겠구먼, 씨발, 씨바아알…!”
기세등등한 레지나의 고함을 흘려들으며 바크문과 간부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다. 후드를 눌러쓴 아르실은 갑판을 뛰어다니며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찌익…
주문서를 움켜쥔 엄지가 양피지를 뚫었다. 엄지를 박아뒀으니 손을 쫙 펴고 주문서를 찢기만 하면 담긴 마법은 곧바로 발동할 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쿵, 발을 굴러 선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패닉에 빠졌던 선원들은 나와 바크문을 번갈아보곤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각자 맡은 자리로 돌아가 그곳을 지키기 시작했다.
“검은 해골 해적단이 저 정도로 규모가 큰 해적단이었나요?”
척, 어느새 다가온 아르실에게 되묻자 후드를 눌러쓴 아르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임무 때 몇 번이고 찾아온 해골이란 이름이 들어간 해적들은 전부 검은 해골 해적단의 산하 해적단입니다.”
“거기다 산하 해적단들이 상납하는 돈을 받아먹고 본인들도 약탈과 강간, 납치를 일삼으니 돈도 넘치고 자연스레 해적단에 들어오겠다는 무법자들도 마르지 않은 결과가 저겁니다.”
아르실의 은빛 검날이 해골 선수상을 가리키자 나와 바크문은 홀린 듯이 커다란 범선을 눈으로 좇았다.
이 배와 레지나의 배를 합친 정도의 크기를 가진 배라니, 해적치고 너무 요란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지금은 불평불만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그 배가 지금 우리 배를 침몰시키려고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쏴아아아아!!!
“카사노오오오오!!! 내 부하들의 원한 어린 비명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들린다! 부하들을 위해 네놈의 목을 잘라 바다에 던져주마!!!”
압도적인 크기에 감탄하며 정신 차리던 그때 후줄근한 남자가 선수상을 발로 밟고 선두에 나섰다.
의아한 눈으로 흘겨보는 그때 툭, 옆구리를 찌른 아르실이 스칼이라는 해적이라고 알려줬고 덕분에 나는 스칼이란 놈에게 답가를 건넬 수 있었다.
“그 나이에 이명을 듣다니, 배에서 내릴 때가 됐나 보군! 부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길 빈다!”
무슨 마법이 담겨있는지 모를 주문서를 움켜쥐고 검은 해골 해적단의 배를 향해 내민다.
놈을 골리기 위해 입에도 안 맞는 고풍스러운 말투로 조롱하고 찌직, 주문서를 찢자 선수상을 짓밟고 서 있던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자 수염을 씰룩이며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어디서 덤터기라도 씌고 좆같은걸 사 왔나 보군. 그 정도면 노잣돈으로 충분하겠지- 얘들아!!! 전원-!”
-화아아아악!
내 손에서 벗어난 주문서가 바람에 날아갔다.
바람을 타고 해적선을 향해 날아간 주문서는 순식간에 마나를 머금고 붉은 불꽃을 피우며 불타올랐고 검은 잿더미가 바람 사이를 유영하며 문자를 그리고 하나의 마법진이 완성됐다.
요란했던 바다가 처음 같은 침묵을 되찾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하늘에 그려진 문자를 바라보는 해적들의 심장은 그 어느 소리보다 소음을 내며 쿵쿵쿵 뛰고 있을 게 뻔했다.
검은 잿더미가 일그러지고 하늘에 스며들었다.
뭔지 모를 전조에 모두가 숨죽여 지켜봤지만, 자신이 겁먹었단 사실이 쪽팔렸는지 스칼은 뽑아 든 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발악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거냐! 그렇게 두렵나? 응? 허풍 떨 시간에 도망이라도 갔다면 살았을 텐데-!”
퍼어어어어어엉!!!
구름이 사라진 드넓은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던 바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던 대양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잿더미가 만들어낸 커다란 불꽃은 이글이글, 세상을 불태울 기세로 하늘하늘 춤추다 커다란 고성을 내곤 천천히 해적선을 향해 쏘아졌다.
“레지나, 레지나...!”
눈앞의 태양에 직면한 스칼은 허망한 목소리로 레지나를 부르짖었지만, 레지나는 그곳에 없었다.
“이런 씨바아알...!”
주문서를 찢는 순간 마나의 흐름을 느낀 그녀는 이미 파도를 일으켜 내게서 벗어났고 산호섬이란 지옥에 남은 건 나와 스칼, 둘의 배뿐이었다.
퍼어어어엉!!! 퍼어어엉!!! 콰르르르르르!!!
조용한 바다에 울리는 연속적인 폭발음.
무언가 무너지는듯한 허름한 소리와 함께 불꽃은 그대로 해적선에 부딪혔고 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온 산호섬 인근에 홀로 불타는 커다란 해적선 한 척이 아직 남아있었다.
“뭐 이리 성능이 좋아?”
무덤덤하게 반응했지만 방금까지 저걸 쥐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저 정도 화력이라니...”
무덤덤함을 가장한 혼잣말에 대답한 아르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검은 해골 해적단의 해적선을 바라봤다.
“끄아아아아악!!!”
“제발, 제바아아아알!!!”
“죽여줘, 찔러줘어어어어!!!”
“끄르르르륵!!! 선자아앙!!!”
수많은 비명과 고통이 꽈리를 틀고 뱀이 뱀 꼬리를 물듯 비명이 비명을 낳았다.
커다란 화염구에 그대로 얻어맞은 해적선은 단숨에 반파되었다.
아니- 반파라는 건 너무 축약이었고 화염구에 선두가 충돌하는 순간 스칼을 포함한 해적선의 절반이 단숨에 전소(全消)됐다.
지금 바다에 가라앉는 건 선미를 포함한 해적선의 절반.
갑판을 뛰어다니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몇몇 해적들은 불타오르는 고통 속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콰득!
“끄하아아아악!!!”
하지만 불이 붙은 옷을 찢으면서까지 바다에 뛰어들어도 해적들에게 낙원은 없었다.
바다에 떨어진 고깃덩어리들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해수들은 해적선 인근을 유영하며 떨어지는 먹이를 낚아챘고 발버둥 치는 신선한 해적들은 해수들의 이빨에 걸려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바닷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건, 조금 불쾌할지도 모르겠군요...”
공감할만한 아르실의 감상을 들으며 아수라장을 지켜보던 그때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레지나의 배가 천천히 접근했다.
“크읏, 크으윽...!”
떨리는 파도 같은 눈동자가 반파된 해적선을 응시한다.
배가 뒤집히고 갑판 위를 미끄러지는 숯덩이들이 풍덩, 풍덩, 바다에 빠지면 해수에게 물려 바닷속으로 끌려간다.
벗어나지 못했다면 저 옆에서 나란히 똑같은 꼴이 됐을 거라 생각했는지 레지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적기라 생각한 나는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 마른 목을 가다듬고 크게 소리쳤다.
“가방에 굴러다니는 주문서 하나 챙겨왔더니 꼴이 가관이네, 하나 더 찢어줄까? 어?”
무표정을 고수하려 했지만, 세상이 무너진 듯한 레지나의 절망 어린 표정을 보자 히죽, 입꼬리가 씰룩였다.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뽑아 든 검을 빙글빙글 돌리자 순식간에 분노를 되찾은 레지나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목청껏 소리치며 피레아로 나를 겨누고 위협했다.
“지, 지랄하지 마!!! 그딴 게 수십 개가 있어도 물러날 거 같아? 한 놈 뒤졌다고 우리가 물러날 거로 생각했으면 오산이야 씨발아!”
우리라. 하늘에 퍼졌던 불꽃놀이를 떠올리며 히죽 웃은 나는 양손을 들어 눈썹에 얹고 망원경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레지나에게 소리쳤다.
“우리라니!!! 이 넓은 바다에 있는 건 네년이랑 나뿐인데. 아니면 나랑 붙어먹고 같이 돌아가겠다는 뜻인가?”
“뭐? 씨발, 지랄하지마. 응? 씨발, 씨바아아알!!!”
쿵, 쿵, 쿵, 갑판을 울리는 발소리. 누가 봐도 당황한 듯한 레지나의 반응에 크게 웃음을 터뜨린 나는 곧바로 바크문에게 손을 저어 지시를 내렸다.
파락!
크게 펼쳐지는 새하얀 돛, 흥분에 찬 선원들이 고함을 내지르고 반파된 해적선을 스쳐 지나가자 해적들의 단말마가 환호에 뒤섞였다.
***
‘덤보, 하긴, 톰슨!!! 이 개 씨발년들, 도망쳤구나!!!’
해적들 사이에 의리란 대해적이 남긴 보물 지도와도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허항된 개씹소리라는거지!’
레지나는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치솟는 울분을 애써 억누르며 속으로 삭였다.
여기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소리치며 분개하면 부하들의 기세가 한 꺼풀 꺾이고 동요하게 된다.
물론 먼저 스칼에게서 등돌리고 도망친건 레지나였지만 뼛속까지 해적인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잊은지 오래기도 했다.
지금은 저 멀리서 속도를 내며 접근하는 카사노를 상대해야 할 때. 가족들의 용기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지난날의 과오가 되풀이될 게 뻔했다.
“메파, 애들한텐 비밀로 하고 최대한 사리는 방향으로 전투해.”
“네? 선장,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지만 레지나는 직감했다. 카사노가 지껄인 주문서의 이야기가 허풍이라 해도 방금 같은 마법이 한 번이라도 더 펼쳐지면 갑판 위를 뛰어다니는 수많은 가족이 바다의 품에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
레지나는 한쪽팔로 욱신거리는 가슴을 팔뚝으로 짓누르며 눈물 젖은 눈가를 남은 손으로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