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럭, 손에 든 양피지를 몇 번이고 살펴본 나는 하도 읽어 외운 문장을 뒤로하고 양피지를 뒤집어봤지만, 비밀메시지 같은 건 없었다.
“나를 진짜 병신으로 아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상선 호위에 보기 좋게 걸려든 전적이 있으니 얕보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사락, 사락, 양피지 끝자락에 남은 선명한 단검 자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며 레지나가 남겼던 선명한 자국과 동일한 흔적에 혀를 내두른 나는 레지나가 썼을 결투장(실제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을 보며 눈알을 굴렸다.
“이 함정에 걸려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다만 레지나가 만나자고 정한 장소가 마음에 걸립니다.”
“장소? 아, 산호섬?”
장소가 마음에 걸린다는 말에 턱, 양피지를 테이블에 얹고 의자를 끌어당겨 아르실의 옆에 착 붙었다.
“…!”
작은 몸집의 그녀는 상체를 흔들며 양피지에 집중하다 내 접근을 눈치채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양피지를 다시 들여다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호르미아 남쪽에 위치한 가르길 항구가 이쪽 해역으로 건너오는 항로는 하나뿐인데 그 항로 가운데에 위치한 섬이 산호섬입니다.”
“흐음.”
“…그 산호섬 주변에 상선들끼리 1대1로 정박해 거래하기도 하는 둥, 중립성 느낌의 섬입니다만, 레지나가 거길 점거하고 비키지 않는다면 가르길을 경유하는 제국 소속 상선들은 전부 그녀에게 약탈당할 겁니다.”
“중립섬인데 레지나 홀로 거길 먹으면 큰 반발이 일어나 오히려 물러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요즈음 제국에서 넘어오는 상선들의 대부분은 가르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레지나가 현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도 상선들을 계속 출항 중일 겁니다.”
“나중에 쫓겨나던 물러나든 간에 지금 출발하는 상선들은 무조건 피해를 볼 거라 보는군요.”
“그렇습니다.”
흠, 자라난 수염을 손톱으로 긁으며 잠시 고민하는 그때 아르실은 후드를 푹 눌러쓴 주제에 주황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놀이공원에 데려가 주길 원하는 아이처럼, 평생의 소원이에요- 라는 듯한 애교 넘치는 눈빛에 넘어간 나는 푸욱, 아르실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벅벅, 거칠게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바크문하고 선원들한테 준비 부탁한다고 말 좀 해주세요, 저는 잠시 준비할 것도 있고 만날 사람도 있어서요.”
“우웃, 후웃!”
벌떡,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손을 밀어낸 아르실이 흥, 콧방귀를 꼈다. 쿵, 쿵- 귀엽게 발을 구르며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방으로 올라가 방 한켠에 세워둔 가방을 열었다.
마녀들이 준 선물로 가득한 아공간 가방, 마녀들의 온갖 주문서와 선물, 포션으로 가득찬 아공간을 뒤적이며 향수를 꺼내든 나는 남정네들과 뒹굴며 더럽혀진 몸에 뿌리고 예의 물건을 잠시 꺼냈다.
-바스락
저주의 마녀 리비아가 준 주술의 두루마리. 사용설명서도 포함됐다고 하지만 지금 사용할 물건은 아니었다, 엄연한 주인이 있는 물건이거든.
쉬익, 묘한 환청을 들으며 두루마리를 집어넣은 나는 주문서들을 전부 꺼내 들었다.
“흐으음…”
실생활에 사용할법한 마법부터 전투용, 보조용, 수많은 주문서를 둘러보다가 공격용을 떠올리며 꺼내든 주문서 중 가장 화려한 문자가 각인된 걸 품에 넣고 나머지는 전부 다시 담아냈다.
“아, 그러고 보니.”
검, 한글자를 떠올리며 가방에 손을 넣자 착, 자석처럼 손바닥에 붙는 묵직한 무게감.
곧바로 가방에서 뽑아 들자 검은 가죽 검집에 감긴 묵직한 롱소드가 나타났다.
-달칵, 스릉…
고정용 버튼을 풀고 검집에서 롱소드를 뽑아 드는 순간 예리하면서도 우아한 검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과 묵빛이 조화롭게 뒤섞인 검신 가장 아래 새겨진 음각을 쓰다듬으며 감탄하던 그때 우웅, 문양이 빛났다.
음각에 닿인 검지에서 무언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 운디네에게서 자주 느낀 익숙한 감각에 마나를 불어넣자 우웅, 푸른 마나가 검에 휘감겼다가 조용히 스며들고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완전히 녹아들었다.
“레이븐, 좋은 선물을 줬었네.”
위치크래프트에서 레이븐이 무심하게 건네줬던 롱소드를 검집에 집어넣은 나는 운디네와 갇혔던 동굴에서 오랫동안 썼던 검을 가방에 집어넣고 레이븐이 준 롱소드를 허리에 찼다.
“마법검이라고 하면 되나?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레이븐이 준 롱소드는 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명검이었지만 그녀가 새겨놓은 음각에 걸린 마법은 롱소드의 가치를 몇 배, 아니 수십 배나 늘려주었다.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니.”
레이븐이 무슨 마녀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그녀는 마녀임 신화에서 내 수발을 들정도로 인정받는 마녀였다. 그런 마녀가 걸어준 마법이니 효율도 상당하겠지.
탁, 탁, 원래 차던 검보다 길어 조금 어색했지만, 롱소드의 손잡이를 털며 채비를 마친 나는 벽 한켠에 세워둔 피레아를 허리춤 오른쪽에 차고 조용히 숙소를 나섰다.
"후우..."
구름 몇 점 없는 맑은 하늘, 우중충한 무법 항구를 밝게 비추는 태양을 바라보며 인파에 스며든 나는 보름간 머물며 아르실에게 들었던 정보를 되짚다가 겨우 떠올린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척!
“정지!”
“넌 뭐야?”
쐐기 이빨 항구 중턱에 위치한 화려한 저택, 듣던 대로 웅장한 저택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감탄하던 그때 문 앞을 지키던 문지기 둘이 자리에서 벗어나 내게 다가왔다.
“뭐긴, 손님이지.”
산호섬, 항로의 가운데에 자리잡힌 중립섬에 레지나가 나를 초대했다는 건 명백한 함정이었지만 알아야 할 건 왜 ‘초대’했냐는 거였다.
상선들이 1대1로 정박해 거래할 정도로 항로가 겹치고 해역에 있는 배들이 자주 모인다는 건 레지나의 친구들도 모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기왕 결투장이라는 이름으로 초대했으니 나도 그녀를 위한 불청객 한 명 정도는 초대해야겠지.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철창 너머로 다가오는 저택의 주인과 눈이 마주친 나는 거래를 위해 미리 혀를 풀며 조용히 문지기들을 밀어내고 허리를 곧게 폈다.
***
-삐이이이이익!
하얀 파도가 몰아치는 대양, 그곳에 이제는 익숙해진 인어선수상을 달고있는 범선이 파도를 가르며 우리 배에 다가오고 있었다.
귀를 찢는 피리 소리에 선원들이 눈썹을 찌푸리던 그때,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듯한 야릇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용케도 도망치지 않고 찾아왔구나, 이곳에 나왔다는 건 죽을 준비가 됐다는 거겠지!?]
“이런 마법도 있나?”
[그래, 제국 촌뜨기는 모를 수도 있겠네- 통화 마법이라고 새롭게 개발된 마법이지, 개쓰레기, 아니- 토막 내도 모자랄 네놈의 마지막 희망까지 앗아가기 위해 사용했어]
“아, 내 말도 들리는 거구나.”
“…카사노님.”
[이런, 개 같은, 씨발 새끼…! 여유가 넘치네, 응? 한번 이겼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서 설치는데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피레아를 돌려받고 네놈의 배를 바다에 바치고 말테야!]
“레지나. 그새 내가 그리워진 거야?”
쿵, 쿵, 발을 구르며 선수로 향했다. 바다를 가르며 나아간 두 범선의 거리는 어느새 점점 좁혀졌고 과장 조금 보태면 곧 레지나와 나는 서로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사노, 이 씨발 새끼…!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라고!]
육안으로 나를 발견한 레지나의 언성이 올라가고 선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 또한 귀를 찢는 증오 어린 외침에 눈썹을 찌푸렸다가 홰액, 오른팔을 뻗어 검을 뽑았다.
-쿠우우웅!!!
으직, 으직, 인어선수상과 사자 선수상이 부딪히고 배의 궤도가 비틀렸다. 갑판을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발소리를 들으며 뽑아 든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그때 우웅, 오른쪽 허리춤에 찼던 피레아가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휘익!
휘파람 불듯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허리띠를 뜯고 날아간 피레아가 텁, 선수에서 점프한 레지나의 손에 감겨들어 갔다.
-달칵, 스릉!
늑대 같은 웃음을 지으며 검집을 움켜쥔 레지나는 텅, 완벽하게 내 옆에 착지하고 곧바로 춤추듯 허리를 꺾으며 나를 돌려찼다.
뻐억!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부츠 굽, 묵직한 소리가 났지만 버틸만했기에 검을 돌려 역수로 움켜쥔 나는 왼손으로 얇은 발목을 움켜쥐고 검을 아래로 내려찍었지만, 레지나의 탈출이 더 빨랐다.
-콰아아아아!!!
“웁, 씨바알!”
발목이 붙잡혔는데도 미소 짓던 레지나는 퍽, 피레아를 갑판에 꽂아 넣고 마나를 불어넣었고 민들레 홀씨처럼 불어난 파도는 단숨에 거대하게 솟구치더니 나를 밀어내고 레지나를 태운 채 넘실거리며 그녀의 배 위로 넘어가 버렸다.
-쿠르르르…!
온몸을 흠뻑 적시는 무거운 바닷물에 퉤, 퉤, 침을 뱉으며 옷을 털어낸 나는 피잉, 갑판에 검을 박아넣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하아, 하아, 어때 씨발놈아- 쉽지 않지? 아직 본 실력은 내지도 않았어!”
“그래그래, 잘 싸우네. 후우, 아- 안 젖었네.”
펄럭, 펄럭- 품에 넣어둔 주문서 끝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며 레지나의 말을 흘려듣던 그때 까득, 10m 정도 멀리 있는데도 들릴 정도로 이를 간 레지나는 내 손에 들린 주문서를 보고 콧방귀를 뀌곤 자신의 주머니에서 주문서 하나를 꺼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주문서를 구긴 그녀는 퍼엉, 퍼엉, 대포를 쏘아대는 자신의 부하들과 내 선원들을 바라보곤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카사노, 이 순진한 변태 새끼야. 결투장이라는 말만 믿고 여기까지 오다니- 머저리냐?”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왔을 리는 없잖아- 내 손가락에 낑낑거리면서 울어대느라 머리에 든 지식을 전부 털어냈나?”
“이, 씨바아아알…!”
흠칫, 흠칫, 희롱하는 말에 가슴을 떨며 발끝을 구긴 레지나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아름다운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데도 조각과도 같았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박수를 치며 그녀를 바라봤고 모욕으로 받아들였는지 꾸욱, 입술을 이로 짓이긴 레지나는 부욱, 주문서를 찢고 피레아로 하늘을 가리키며 내게 소리쳤다.
“그래, 계속 그렇게 굴어야 네 목을 써는 그 순간이 기대되는 법이지. 두고봐- 네 선원, 네 동료- 모두 목을 썰고, 아니- 힘줄을 끊어 노예로 팔아줄게. 생각만 해도 기대되지? 허?”
-피잉! 피잉! 피이잉!!!
주문서가 찢어지며 모인 마나들이 형형 색깔로 뭉치더니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폭죽처럼 터진 마나들이 어두워지던 하늘을 밝히고 자리 잡은 구름을 찢어발기고 소란스럽던 바다에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