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
레지나의 분위기에 모든 군중이 압도됐던 그때, 이목을 사로잡는 나긋한 목소리가 노파를 일깨웠다.
“네, 네? 네! 억울합니다. 부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불쌍한 년을 곱게 봐서라도 제바알…!”
“억울하면…”
서걱, 무언가 잘리는 싸늘한 소리와 함께 흐읍, 군중들이 숨을 들이켰다. 사라락- 커틀라스에 매달렸다가 흩어지는 머리칼을 바라본 레지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파에게 말했다.
“내 가족들을 속이지 말았어야지.”
“아이구, 속인 게 아니라아, 저, 전부 여태 이렇게 장사하고 살아왔습니다. 속인 게 아니라 정말로-”
퍼억, 레지나의 말에 토달던 노파의 몸이 날아갔다.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노파를 한 번 더 걷어차기 위해 터벅, 터벅,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지만 이미 흥미를 잃었는지 레지나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그만 가자.”
"""네!!!"""
챙겨 든 상자 여러 개를 어깨에 짊어지고 떠나는 푸른 파도 해적단.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과 함께 군중들은 조금씩 흩어졌고 노파와 안면이 있던 사람들만이 노파에게 뛰어가 그녀를 일으키고 가판대를 수습해줬다.
“아이고, 아이고오오…! 저 애미애비도 없는 호로 잡년…!”
“그만 해요, 듣겠어요.”
“들으라지!!! 남들 다 럼주에 물 타고 더 재서 주는데 나한테만 지랄이야 개같은년!!! 곧 죽을 년이 노잣돈 몇 푼 더 쥐고 가는 게 그렇게 아니꼬워!”
잘못이 없고 레지나가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른 줄 알았던 나는 생각보다 잘못이 있는 노파의 발언에 주륵, 땀 한 방울을 흘렸다. 근거 있는 이유와 함께 사라진 레지나를 떠올린 나는 좀 더 그녀를 알아보기 위해 그녀가 떠났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지만 몇 시간 동안 항구를 구경해도 레지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
쏴아아, 귓가에 울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항구를 걸었다. 저 멀리 보이던 춤추는 소라게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고 쿵, 쿵, 문을 두들긴 나는 달그락거리는 내부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끼이익
“오셨습니까.”
“그건 뭐에요?”
스윽, 아르실의 머리에 걸친 삼각모를 가리키며 묻자 스윽, 가슴을 내민 아르실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마침 모든 준비가 다 끝났으니 얼른 오십시오.”
쿵, 문을 닫고 여관 안에 들어서자 보글보글, 무언가 끓는 소리와 함께 좋은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나온 나는 바에 앉아 탁, 탁, 접시를 놓는 아르실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
아르실은 그런 나를 보고 주황빛 눈을 흘기며 한 칸 옆으로 옮겼고 나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옆에 붙었다. 두어 번 자리를 바꾸는 촌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체념한 아르실은 하아, 한숨을 내쉬고 타악! 소리 내며 식기를 내려놨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같이 밥 먹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요.”
“…”
같이, 라. 무언가를 중얼거린 아르실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후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여멀건 수프와 따뜻해 보이는 빵을 턱, 내 앞에 얹어준 아르실은 무심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잘 먹겠습니다.”
달그락, 수저를 들어 수프를 떠 한 모금 삼켰다. 좋은 향기는 거짓말하지 않듯이 혀를 맴도는 진한 맛과 따뜻해지는 온기에 나는 즈윽, 빵을 찢고 수프에 적셔서 그대로 한입에 삼켰다.
“음, 맛있네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텁, 텁, 텁, 텁, 부리로 쪼듯 작은 입을 벌려 빵을 먹던 아르실은 내 칭찬에 어깨를 으쓱였다.
“직접 하신 건가요? 대단하네요, 진짜 식당에서 먹는거같네.”
“훗,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제 공입니다.”
으쓱, 으쓱,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민 아르실이 투웅, 쭉 폈던 어깨와 등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순간 무언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작은 탄성을 내뱉은 아르실의 밑가슴에 수저가 끼워져있었다. 철퍽,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뒤를 도니 나무 벽에 찰팍, 붙어있는 하얀 수프를 발견했고 나는 그제야 소리의 원인을 알아냈다.
“투석기…”
텁, 벌어진 내 입에 빵을 찔러넣은 아르실이 조금 빨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군말않고 밥이나 먹으라는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오물, 오물, 입안에 꽉 찬 빵을 씹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하아, 잘 먹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스윽, 벽에 묻은 수프를 닦고 온 아르실이 내 옆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빈 그릇을 겹치고 수저를 한데 모은 나는 주방 안에 전부 그것들을 얹어두고 다시 아르실의 옆에 앉았다.
“저, 아르실님?”
“아르실이라고 편히 부르십시오.”
“아르실, 물어볼게 있는데요.”
“대답해드릴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라면 뭐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당찬 포부에 턱을 쓰다듬은 나는 먼저 궁금했던 레지나와 해적들에 관해서 물어봤다.
“앞으로 이곳에서 해적들이나 레지나를 상대하는데 해적들의 무장 수준은 어떻습니까?”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 커틀라스나 곡도, 장검, 등등 무장을 하고 항해나 약탈을 하고 배에는 아무것도 없는 놈도 많지만, 레지나는 총 30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많은 겁니까?”
“제국 대형 군함에 적재된 대포가 평균 100문이니 무시할 수준은 아닙니다.”
“흠…”
“거기다 레지나는 잦은 약탈과 후원자를 두고 있어 무장 수준이 대단합니다. 크래프톤에서 연구 중이라는 원거리 무기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아, 아까 본 거 같은데.”
“레지나와 만났습니까?”
“가판대를 부수고 물건 훔치고 난리더군요.”
“아, 그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레지나는 같은 배에 타는 선원들을 가족이라 부르며 끔찍하게 챙깁니다. 레지나와 처음 거래하는 노파가 항상 하듯이 덤터기를 씌우다가 걸려 물건을 전부 빼앗겼다더군요.”
“오래 살았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요?”
“레지나는 이 항구에서 물건을 잘 사지 않습니다. 도리어 판다면 모를까…”
“왜요?”
내 질문에 삐딱하게 고개를 튼 아르실이 이해 안 간다는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
“모조리 약탈로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번에 약탈한 배에 마실만한 럼주가 없어서 간만에 물건을 구매한 거로 보입니다.”
“와, 개양아치네.”
“그게 해적들의 생리입니다.”
“레지나와 부딪힌다면 아까 말한 원거리 무기가 많이 거슬릴까요?”
내 질문에 스윽, 스윽,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굴린 아르실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워낙 유명한 연구기에 진척도를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차고 다니는 건 아마 마석으로 마력을 충전해 쏘아내는 방식일 겁니다. 유효 사거리도 짧고 위력도 화살 정도밖에 안되기에 아마 기습용으로밖에 사용 못할 겁니다.”
아직 총은 무리인가 보네. 대포는 만들어도 총은 무리라니- 무기에 대해 잘 몰라 넘어가려 했지만 아르실은 두 눈을 빛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본래라면 대포를 축소화해 소형화된 대포, 즉 이계인들이 말하던 총을 개발하려 했지만 마석과 화약, 두 가지 방식과 크래프톤의 장인들에게 연구가 집중되어 무기 개발이 점점 늦어지고 있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지금은 비록 연구가 늦어 개발이 늦는다지만 장인과 각국의 연구진들이 힘을 합치면 압도적인 화력의 무기들이-”
“아, 네. 네.”
“관심이 없으십니까?”
너무 대충 대답했나?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설명하던 아르실의 기세가 한 꺼풀 벗겨졌다. 주눅 든 듯한 모습에 두 손을 내저은 나는 툭, 툭, 검을 두들기며 아르실에게 능글맞게 대답했다.
“저는 그쪽보다 검을 사용해서요. 그런게 점점 개발되면 검사들은 도태되지 않습니까.”
“그런 견해도 틀리지 않다 생각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아무리 무기가 발전되고 진화해도 마나, 즉 대기 중의 마나를 몸에 축적하고 그걸 무기 삼아 다루는 기사들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처음에야 일반 검사 수준은 화기에 밀리고 점점 도태되겠지만 소드마스터라는 존재를 화기로 죽일 수 있을까요? 전혀. 화기가 아니라 같은 소드마스터를 데려와야 상대할 수 있기에, 그렇기에 무기의 발전은 소드마스터를 잡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하나의 척도로!”
아니 시발 왜 이렇게 좋아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빠져나가긴커녕 아르실의 늪에 빠진 나는 결국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선원들이 여관 문을 벌컥 열 때까지 바에 앉아 아르실의 무기론과 무력의 발전 방향, 제국이 향해야 할 방향성까지 듣고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카사노님, 여기 계셨군요.”
“헉!”
“?”
도착한 선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씻고 나온 나는 나를 찾는 아르실을 보며 단말마를 내뱉었지만, 그녀는 도리어 이해가 안간다는 눈으로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무슨 일 있어요?”
“방금 귀환했지만, 선장이 후속 임무를 하나 더 수락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 김에 같이 항해에 나가 해역에 적응도 하고 쐐기 이빨 항구의 순리를 한번 눈으로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 권유하러 왔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후욱, 조금 빨개진 얼굴로 고개 숙인 아르실이 쿵, 문을 닫고 나갔다. 왜 저러는지 몰라 훤히 드러낸 성기를 수건으로 닦고 물기를 전부 털어낸 나는 한쪽에 걸어둔 옷들을 설렁설렁 걸치고 곧바로 여관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