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04화 (304/395)

‘무슨 속셈이지…’

카트라는 목적을 알 수 없는 카사노의 미소를 보며 경계했다. 다만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정말 목이 떨어진다거나 제국의 끄나풀에게 넘어갈 게 뻔했기에 최대한 그에게 순응해야 했다.

‘의중을 파악하고 비위를 맞추는것쯤은 익숙하니까…’

단장의 부탁으로 수많은 곳에 잠입하고 정보를 빼내 왔다. 백작 부인이었던 스텔지아에게 협조하라는 단장의 명령으로 그녀가 지정한 휘슬 남작가로 찾아가 그곳의 메이드가 됐다. 남작가의 후계자, 장녀인 페리샤를 모시며 귀족가의 정보를 빼돌렸고 그곳에 머물며 아가씨의 호의에 물들었다.

“카트라 씨가 어쩌다 페리샤와 만나게 됐는지 듣고 싶은데요.”

‘내 속을 읽는 걸까?’

아가씨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그 화제부터 이야기하다니, 카트라는 크흠, 목을 가다듬고 순순히 이야기했다. 단장의 명령이었다. 스텔지아의 밑에서 이곳저곳 오가다 휘슬 남작가에 잠입해 귀족가의 정보도 빼돌리고 남작이 쌓아둔 물자나 다른 귀족들에게 공물을 주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뻔한 이야기였다.

‘매일매일 어딘가를 떠도는 삶…’

노예해방단은 인간으로서 카트라를 구해준 집단이었지만 정작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안정된 장소, ‘집’이라는 존재를 원했던 카트라는 속으로 목말라했고 이곳저곳 떠돌며 정보나 빼내던 자기 삶에 무언가 결핍됐음을 자각했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위로받지 못하니까.’

“힘들었겠네요. 익숙치 않은 장소에 계속해서 돌아다니다니.”

움찔, 카트라의 어깨가 잠시 떨렸지만 그것뿐이었다. 형식적인 위로겠지. 뺀질뺀질한 저 남자의 의중이야 뻔했기에 카트라는 흘려들으며 대충 대답했지만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몸이 굳어버렸다.

“그래도 저한텐 다행이네요, 카트라 씨를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

뻔한 말, 너무나 뻔히 내뱉어 오히려 듣는 쪽에서 소름 끼치는 말이지만 카사노는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히 내뱉었다. 얼마나 능글맞은 거야- 속으로 질린 카트라는 힘겨워하면서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몸이 이상했다.

-주륵

“잠시.”

톡, 톡, 말없이 손수건을 빼든 카사노가 카트라의 뺨을 두들겼다. 폭신폭신한 면의 감촉과 함께 물기가 사라지고 눈가가 뻐근했다. 카트라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눈을 굴렸지만, 카사노바는 괜히 이야기를 꺼내기보다 말없이 그녀를 위로했다.

“…바람둥이 같군요.”

여자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가, 거리낌 없는 행동에 괜히 불퉁해진 카트라는 눈앞의 남자를 힐난하며 눈에 힘을 주고 바라봤지만 허허, 웃어넘긴 남자는 옅은 미소와 함께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렸다.

“바람둥이라뇨, 그만큼 호감이 있으니 그런 행동을 하는 거죠.”

“조금 떨어져 주지 않겠습니까.”

얼굴 하나 안 변하고 무슨 말을- 뻔뻔하기 짝이없는 카사노의 언행에 카트라는 귀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자신을 가두듯이 에워싼 카사노는 오히려 얼굴을 가까이 내밀며 조용히 속삭였다.

“싫은데요.”

“하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가씨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아는데, 이렇게 나오면 아가씨를 뵐 낯이 없습니다.”

…사실 페리샤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지만- 페리샤를 사랑하는 저 남자라면 이런 말에 물러나겠지. 라는 심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카트라는 스스로가 비겁하다고 느끼면서도 이 정도면 카사노가 물러나리라 생각하고 안심했지만 뻔뻔한 그는 오히려 톡, 코끝을 부딪치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같이 있고 싶고…”

툭, 코끝이 다시 한번 닿았다.

“보고 싶고.”

흑진주같이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꿀꺽, 입에 고인침을 삼킨 카트라는 문득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내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왜 이렇게 얼굴이 뜨거울까, 또- 왜 머리가 둥실둥실, 어지러운 거지?

“아껴주고 싶고, 그런게 사랑 아닌가요.”

스윽, 굳은살로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뺨에 맞닿았다. 두근, 두근, 문에 붙인 등을 타고 자신의 심장 소리가 온몸에 울려 퍼졌다. 아니- 온몸이 심장 같아. 카트라는 눈앞의 남자를 밀어내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괜히 멍청해진 머리는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를 일부러 유혹하기 위해 지어내는 말이란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너무 차갑게 이야기했나? 카트라는 살짝 빛을 잃는 남자의 눈동자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히죽, 짜증 나는 미소를 지은 입술은 또다시 듣기 좋은 말을 내뱉었다.

“아름다워요, 몇 번을 봐도요. 지어낸 게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생각했던 거예요.”

나에 대해 모르잖아. 나는 당신을 알아, 여자를 좋아하고, 능글맞고, 잔인하고, 난폭해. 나도 그냥 마음에 드는 여자라 지어내서 말할 뿐이잖아.

카트라는 홀로 되뇌면서 어지러워진 머릿속, 정보들이 충돌하면서 생각이 끊길 때마다 눈앞의 남자가 증오스러워졌다. 그냥, 단장이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정보를 캐낼 땐 이런 고통- 전혀 없었는데.

“정말 아름다워요.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 같지만, 페리샤를 볼 때 희미하게 짓는 미소나 아이들을 보고 포근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 보조개가 귀여워요.”

귀여워, 귀엽다니.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카트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피식 웃은 카사노탓에 얼굴을 찌푸렸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어라 꾸짖으려 할 때 조금 달아오른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걱정할 때나 짜증 낼 때 입술 오물거리는 거나 누가 봐도 기분이 안 좋은데 괜찮은 척, 표정을 지어내는 게 귀엽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극돼.”

자극돼- 끈적하게 늘어난 설탕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난생 처음 듣는 적나라한 애정 표현과 폭력적이란 생각이 절로 드는 칭찬, 난데없이 두들겨 맞은 카트라는 허물어지는 마음의 벽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꾸욱, 꾸욱, 긴장 탓인지 흥분 탓인지 모를 떨림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카사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바위처럼 우뚝 솟은 그는 한 발짝도 밀려나지 않았고 오히려 툭,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에 입술을 부딪치며 무어라 속삭였다.

“거짓말 아닌데.”

귀를 뜨겁게 달구는 목소리에 쿵, 기대던 뭉에 머리를 찍은 카트라는 이곳에 잡혀 정면으로 부딪쳤던 허무감과 공허함이 사라졌단 걸 느꼈다.

붙잡혀 자신의 은인인 단장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자괴감으로 자학해 상처 입은 자신의 자아가 치유받는 듯한 느낌.

노예에서 구출됐지만 온전한 ‘나’로서 사랑 못 받은 카트라는 카사노가 읊는 사랑에 영혼이 채워지는 걸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만 가볼게요.”

덜컥, 조용히 손을 뻗은 카사노가 문고리를 돌리고 끼익- 문을 열었다. 문과 같이 밀려난 카트라는 문이 닫히기 전까지 살랑살랑, 손 흔드는 카사노를 바라보다 쿵,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이상야릇한 감정의 호수에서 건져졌다.

“그냥, 그냥 지어낸 말이니까…”

그래도 듣는 기분은 좋았으니까, 하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겠지.

필요 이상으로 끈적하게 달라붙던 카사노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다정한 칭찬과 애정을 쏟아붙는 카사노의 목소리에 조금 스며들은 카트라는 조용히 침대에 누웠지만, 평소보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심장 탓에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두근거리는 그날 밤의 밀회가 있고 나서- 카사노는 매일 밤 자신을 찾았다. 카트라는 거부할 수 없을 뿐이니까- 라며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방문을 열어 손님을 맞았고 능글맞은 손님은 매일같이 칭찬과 사랑을 쏟아내며 마음을 부딪쳐왔다.

‘그래, 정보라도 빼내려는 거겠지.’

이틀째에도 그의 숨겨진 의중을 파악하며 애써 밀어냈다.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사랑 따윈 상관없다. 자신을 구해준 단장에게 은혜를 갚는 것. 그게 이 목숨의 이유니까.

사흘, 나흘, 똑같은 시간 똑같은 미소로 찾아온 카사노는 끝없이 자신에게 말 걸었고 끝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캐물었다. 하루 이틀간 여러 이야기를 쥐어짰던 카트라는 계속 캐묻는 카사노를 위해 단장의 부탁으로 파견 간 곳에서 얼떨결에 기억했던 우스웠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하하하, 진짜요? 와,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 너무 웃기다. 하하, 하- 아 자꾸 생각나네. 크큭.”

‘…정말 웃긴가보네.’

어찌나 크게 웃는지, 자꾸 생각난다며 웃어대고 걸터앉은 침대를 팡팡 두들기며 웃어댄 카사노는 한참을 흐느끼며 좋아했고 그 모습에 무언가 자극받은 카트라는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 방금 이야기했던 일과 유사한 경험을 쥐어짜다 떠오르는 게 없어 사소한 이야기를 쥐어짜 카사노에게 말해줬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달빛을 머금은 푸른 꽃밭이 반짝반짝, 마치 꿈이라도 꾼 것 같은 추억입니다.”

“잠입이 아니라 소풍이라도 간 거 아닌가요? 그런 오지에 동산 하나를 뒤덮는 푸른 꽃밭이라니- 거짓말.”

“다시 말하지만 거짓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잠입했을 때 본 풍경 이야기, 좋아해서 다행이다.’

카트라는 카사노를 제외하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페리샤에게도 나서서 이야기해준 적 없고 동생처럼 아껴줄 뿐, 페리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었지, 나서서 그녀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는데-

‘계속해주고 싶어.’

무언가 해주고 싶다, 시들었던 욕망이 피어오른 카트라는 그날 이후 매일같이 찾아오는 카사노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의 이야기도 들었다. 저절로 웃음이 나는 재밌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카트라는 점점 카사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페리샤가 사냥을 다녀올 동안 수첩에 적어둔 이야기를 되읽은 카트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몇 번 지우고 계속 접었다 폈다해 꼬깃꼬깃해졌지만 좋아하겠지. 침대를 두들기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카사노를 떠올린 카트라는 옅은 미소와 함께 창가에 서 카사노를 기다렸다.

-그렇게 그날 밤, 히네라 마을에 온 이후 처음으로 카사노는 카트라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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