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01화 (301/395)

어제는 레이첼, 오늘은 에루카, 내일은 시에라. 빡빡한 일정과 여인들의 조임은 나를 지치게 했지만 어느 정도 붙은 체력덕에 안정적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후우…”

지금처럼 창가에 기대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예전의 나였다면 무리였겠지만 진작 뻗은 에 루카가 ‘더는 무리다아!’ 라며 나를 밀어냈기에 취할 수 있는 휴식이었다.

내가 데려온 혹은 찾아온 여인들이 머물 수 있는 가장 큰 시에라의 집 복도, 그곳에 멍하니 서서 밤하늘을 구경하는 그때 토도도, 마룻바닥을 뛰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타다다닥!

재빠르면서도 감정이 실린 작은 발소리, 츠루카, 에루카나 미네르바는 발이 컸다. 시에라가 좀 발 크기가 작긴 했지만 지금 귓가에 들리는 소리만큼 작지 않았기에 발소리의 주인을 유추해낸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창가를 등지고 복도를 바라봤다.

“카사노님!”

부웅, 다람쥐처럼 달려온 페리샤가 날다람쥐처럼 하늘을 날며 내게 달려들었다. 안아달라며 사지를 쭉 펴고 날아든 페리샤를 포옥 안아 든 나는 말캉하고 매끈한 볼에 내 뺨을 문지르며 인사했다.

“잘 지냈죠?”

“물론이에요, 응, 그래도 바로 인사하러 와주시지 않아서 서운해요…”

“미안해요, 누나들한테 쥐어짜인다고 찾아올 겨를이 없었어요. 지금도 막 눕히고 나오는 길이거든요.”

킁킁,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코끝을 움찔거리던 페리샤가 히죽 웃으며 놀란 듯이 외쳤다.

“진짜다! 흐응, 진한 냄새가 나요. 아직 안 씻으신 건가요?”

“네, 뭐 잠시 구경 좀 하다가 들어가려고 했죠.”

“그러엄…”

순진한 아가씨의 얼굴이 살짝 애욕에 물들었다. 흔들리지 않게 받쳐준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데굴데굴 좌우로 구르는 눈동자를 응시하자 살포시 웃은 페리샤가 툭, 내 가슴을 두들기곤 아니라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아, 안아주시면 그것도 좋지만, 카트라를 같이 만나러 가주셨으면 해서요, 안되옵니까?”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츠루카처럼 말한 페리샤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나를 바라봤다. 카트라- 그러고 보니 이야기만 듣고 또 만나러 가지 않았지. 어차피 상대할 사람도 없고, 이야기도 해야 했기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갈 거예요?”

페리샤의 하얀 귓불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묻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페리샤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둘이 있으면 계속 돌아가라는 이야기만 해서요, 카사노님이 같이 가주셔서 다행이에요.”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돌아가라고만 해요?”

페리샤를 끔찍이 아끼던 카트라가 그렇게 말했다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건지 아니면 심란한 카트라가 페리샤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려 그런 건지. 두 가지 경우를 떠올리며 질문하자 슬쩍 내 눈치를 살핀 페리샤가 조곤조곤 말했다.

“저, 저랑 같이 지내자고 했답니다. 아버님에게 후계자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카트라가 없으니 너무 허전하고, 또 홀로 지내려 하니 너무 불편해서…”

멋쩍었는지 조곤조곤 대답한 페리샤가 휙, 내 눈을 피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불편하다는 게 무슨 말이지- 생각하던 나는 삐뚤삐뚤한 매듭과 부스스한 백금빛의 머리칼, 정돈되지 않은 옷가지를 보며 웃었다.

“이방이 맞아요?”

-사락, 사락, 사락

“네에에…”

부스스한 머리칼을 그대로 뒀다간 사자처럼 돼버릴 거 같아 페리샤를 복도에 내려놓은 나는 그녀에게 받은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며 카트라의 방으로 찾아갔다. 복도 가장 구석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외진 방 앞에선 페리샤는 사락, 사락, 빗어지는 머리가 기분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이 방이 맞다 대답했다.

“됐다, 들어가죠.”

-똑똑똑

간결하게 세 번, 방문을 두들기자 적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자는 걸까? 페리샤가 고개를 갸웃대며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 방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끼이익

경첩 소리와 함께 방문을 활짝 열자 창문 너머 푸른 달을 바라보는 뒷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창가를 바라보는 카트라는 단정하게 틀어 묶은 머리와 다소곳이 뒤로 모은 손을 움켜쥐고 멍하니 하늘 위에 걸린 달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좋은 밤이네요 아가씨 그리고 카사노님.”

츠루카에게 듣기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만 할 뿐, 저택 안에서는 거취를 자유롭게 해줬다 했지만 지금 카트라의 모습은 마치 날개 꺾인 새와도 같았다. 저 멀리 고향을 향해 날아가고 싶지만, 새장에 갇혀 날개가 꺾인 서글픈 새,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카트라, 어디 아파…?”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 페리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옛 메이드에게 다가갔다. 초췌한 그녀의 모습에 울컥 감정이 치솟은 걸까? 그녀의 눈가엔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깊은 밤에 찾아오신 걸 보면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거 같은데.”

척, 굳은살 박힌 손바닥이 페리샤를 막아섰다. 손을 뻗어 모시던 아가씨를 제지한 카트라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방문의 목적을 물었고 먼저 대답하려던 그때 감정이 북받쳤는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드문드문 페리샤가 카트라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카트라, 내… 내가 미안해. 예전처럼 나랑 같이 지내자. 난 카트라가 없으면 안돼…”

애절한 목소리가 다른 곳을 바라보던 카트라의 영혼을 붙잡았다. 터억, 그대로 빨려 들어가듯 몸을 움찔 떤 카트라는 그제야 처음 대답했을 때부터 여태껏 피했던 페리샤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낯선 감정에 방황하는 검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며 페리샤를 응시했다. 감동, 주저, 연민, 고민- 수많은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질끈 감긴 눈꺼풀에 뒤덮였지만,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가지의 감정만 담아내고 있었다.

체념.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또 감사드리지만-”

터벅, 터벅, 입고 있던 원피스 끝단을 움켜쥐고 울먹이던 페리샤의 앞에 카트라가 우뚝 섰다. 뭉클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는지 작은 손을 뻗어 아가씨의 뺨에 손을 툭 얹은 카트라가 조금 젖어 든 목소리로 페리샤를 밀어냈다.

“원하시는 대답을 드릴 수 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아가씨를 배신했고, 설령, 아니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꾸욱, 말랑한 페리샤의 볼을 움켜쥐고 미약한 미소를 지은 카트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둘의 대화가 먼저였기에 한발 물러나 구경하고 있지만, 저렇게 맞물리지 않아 엇갈리는 감정을 보면 참 안타까웠다.

“나는, 나는 카트라가 없으면 안돼, 카트라는 내 친구, 아니 이미 가족이야. 내 곁을 지켜주고 항상 안아주던 카트라가 그립지만, 카트라에게도 카트라만의 이야기가 있겠지…”

훌쩍, 흐르는 코를 먹고 당차게 고개든 페리샤가 천천히 카트라의 손을 밀어냈다. 스스로 어미 새를 밀어내는 아기새를 바라보듯 카트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지만, 페르시아는 오히려 그걸 보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지 구겨진 원피스 밑단을 피며 말했다.

“언젠가, 카트라가 갈 곳이 없다거나- 힘들 때, 언제든지 이곳으로 돌아와. 언제까지나 기다릴 테니까, 무슨 일인지 카트라가 말해주지 않아 알 순 없지만, 나중에 꼭 말해줘…”

빙글, 미련 없이 몸을 돌린 페리샤가 툭, 나와 부딪히며 조용히 ‘나중에 뵐게요.’ 속삭이곤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늙은 유모가 떠나고 가장 정을 붙인 게 카트라라 했을 텐데 페리샤는 기특하게도 카트라에게 남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 주었다.

“당신네 단장이 찾아왔다던데.”

심장이 욱신거리는지 부푼 가슴에 손을 얹고 입술을 오물거리기에 카트라는 위해 그녀가 원하던 정보를 알려줬다. 정말 방 밖으론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는지 아주 작은 소식임에도 카트라는 화들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단장님이…”

덜걱, 카트라의 머리가 앞으로 떨어졌다. 분하기라도 한 걸까? 주먹을 움켜쥐고 바르르 떨며 무어라 중얼거린 카트라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얼굴, 일말의 감정도 없는 모습에 그녀가 내게 앙심을 품었단게 여실히 느껴졌다.

“너무 그렇게 보면 제 마음이 아픈데…”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 마을의 족장인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제 뒷조사나 하려고 온 사람을 순순히 돌려보낼 수도 없잖아요? 거기다 당신네 단장이 내 여자를 상처입히기도 했고, 똑같이 되갚아줘야 속이 좀 시원할 거 같은데.”

사실 그럴 생각은 별로 없지만, 카트라는 떠보기 위해 능글맞게 떠들어봤다. 하지만 카트라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든 상관없는지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냥 얌전히 페리샤 옆에 있지 그래요?”

“…그럴 순 없습니다. 단장에게 받은 은혜는 그녀의 대업을 돕는 거로 되갚는다, 그렇게 정했으니까요.”

“범죄자집단에 남아서 은혜 갚는 것보단 그냥 따로 돕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까득, 이가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카트라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십시오.”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 사실 아닙니까? 법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물론 억울하게 노예가 되거나 납치된 피해자를 폄하하는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하는 데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만 해도 마을이 아니라 산적 소굴이나 뒷골목에 덜렁 떨어졌다면 조용히 끌려가 탄광에 집어넣어지거나 노예가 돼서 조용히 팔려 갔겠지. 분노에 젖은 카트라는 덧붙인 내 말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끓어오른 분노를 가라앉히며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라, 잠시 인사하러 온 것뿐인데 밀회가 길어질 듯한 느낌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저벅, 한걸음 가까이 카트라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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