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해방단이라면 암시장과 노예시장을 나돌며 노예들을 해방하는 집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잘 알고 있군.”
내 질문에 톡, 톡, 검지를 두들기던 오베론이 팔짱을 끼며 얼굴을 굳혔다. 명백한 적의가 가득한 굳은 얼굴, 그걸 보고 카트라와 단장에 대한 얘기를 꺼내려 했던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삼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 상관 없는 제국민들과 다른 왕국의 국민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지. 노예를 부리던 귀족들과 연관이 있다면 무슨 사정이 있든 무분별하게 보복하는게 현 노예해방단의 실체지.”
“쓸데없는 업보를 쌓다니…”
후우, 끈적한 한숨을 내뱉은 오베론이 아련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누구를 향한 연민일까, 알 수 없는 감정을 갈무리한 오베론은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 했지만 궁금한 게 있었기에 내가 먼저 오베론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렇지만 아주 일부는 죗값을 치른자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노예해방단을 옹호하는 건 결단코 아니지만…”
“그렇지, 그대의 말도 맞아. 제국이 미처 감지 못한 썩은 살도 있기 마련, 간혹 그런 자들을 잘라주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손으로 도움받으면 상처는 깊게 남아. 제국이 스스로 도려내야 할 문제인데…”
후우, 짙은 한숨을 내뱉은 오베론이 자기 이마를 매만지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거기다 그들의 타락한 돈까지 받아먹는 몰상식한 자들도 넘쳐나지. 노예해방단의 사상에 공감한다며 뒷주머니로 돈을 챙기는 미련한 놈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제국이 넓은 게 오히려 증오스럽기 까지 해.”
“그런 놈들은 결국 파멸하게 돼있습니다.”
“그렇지, 그대의 말이 맞네. 후우, 그래도 카사노경, 그대덕에 여러 갈피를 잡았어. 제대로 해결만 한다면 이만한 성과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톡, 톡, 테이블에 얹어둔 장부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오베론이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모습에 나도 미약한 미소를 짓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
“…”
잠시나마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한 둘은 분위기가 이상해져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고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지만 먼저 화두를 던진 건 황자, 오베론이었다.
“음, 그게, 아! 그렇지. 이말도 해주고 싶었네. 나는 이미 그대를 신뢰해. 요즈음 내가 발견한 자들중 가장 정의로운 남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과분한 칭찬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정의롭다니, 남에게 들었다면 헛구역질이 절로 나올 오그라드는 칭찬이지만 제국의 기둥, 황자의 입으로 들으니 어깨가 절로 떨려왔다. 하지만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법이기에 씰룩거리는 입가를 진정시킨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거둬달라 했지만 이미 한번 말을 뱉은 오베론은 칭찬을 거두지 않고 거듭 나를 칭찬했다.
“아니, 정말일세. 이번에 부탁한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고 여인들도 안전하게 보호해왔지. 릴리아가 없으니 하는 말인데 음흉해 보이는 남자라며 그대를 깎아내렸지만, 그 릴리아도 이번 일 처리를 보고 무시할 남자는 아니라며 순순히 인정했어.”
음흉해 보이다니, 건방진 년. 절로 이가 떨렸지만 스텔지아에게 포효하던 릴리아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잠시 꼬리를 말았다. 지금 싸워서 이길 수도 없으니… 그래서 나는 거듭해서 칭찬을 건네는 황자를 위해 나도 오베론을 칭찬하기로 했다.
“황자님도 제가 본 남자 중 가장 믿음직스럽습니다. 뭐랄까, 기백이 느껴집니다.”
“뭐, 하하, 내가 그렇게 남자답나…?”
칭찬인데, 묘하게 떨떠름해 보이는 오베론의 모습에 나는 단어를 잘못골랐나 생각하고 다시 한번 칭찬을 건넸다.
“이곳에 와서 가장 마음이 맞는 분 같습니다. 저를 돕고 구해준 많은 인연도 있었지만, 황자님에게서 뭔가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이건 조금 진심이었다. 지금도 히네라 마을에 있을 내 여자들에게 많은 사랑과 도움을 받았지만, 오베론이 나를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그 느낌은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물론 여자들과 오베론을 저울질하면 내 여자들을 고르겠지만.
“그런, 그런가! 후후, 마치 친우와도 같군.”
“하하, 저 같은 무지렁이가 황자님과 친우라도 됐다간 한 소리 들을 게 뻔합니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전부 볼일 없을걸세.”
“하하, 농담도…”
“…”
농담 맞지? 푸근한 분위기와 안 맞물리는 오베론의 농담을 흘려들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그때 잠깐 대화가 끊겼다. 그 짧은 적막속 눈을 몇 번이나 끔벅이고 주변을 둘러보는 오베론을 발견한 나는 늦은 시간 너무 오래 머물러서 불편한가, 생각이 들었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 주무실 시간인데 제가 너무 오래 황자님을 붙들고 있었나 보군요. 보고는 끝났으니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응? 아?”
“먼저 일어나봐도 되겠습니까?”
“음, 어, 응. 그래 알겠네. 좋은 밤 되게나…”
자려고 한 거 아니었나? 묘하게 시무룩한 오베론의 모습에 잠시 주저했지만, 금방이라도 감길 듯이 꿈뻑이는 눈꺼풀과 기다란 속눈썹을 보고 배려심이 샘솟은 나는 곧바로 의자를 밀고 일어나 오베론의 방에서 물러났다.
“바, 밤새 담소라도 나누려했것만…”
뭐라 했지? 문이 닫히기 전, 아주 작게 들린 목소리에 방안을 바라봤지만 조금 늘어진 오베론만이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들기며 앉아있었다. 잘못 들었나 보네. 쉽게 단언한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쿵!
***
쿵, 힘없이 닫히는 문을 보며 입술을 오물거린 오베론은 이윽고 돌림노래처럼 들리는 방문 소리를 듣고 어깨를 들썩였다.
“방음이 잘 안되나 보군.”
바로 옆방에 머무는 카사노가 문 닫는 소리가 여실히 들리다니, 급하게 구한 숙소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오베론은 카사노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 넌지시 또 다른 손님에게 물었다.
“안 그래?”
“그렇네요, 뭐, 방음이 안 되네.”
속으로 모시는 황자님을 시무룩하게 한 카사노를 욕하던 릴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주군의 목소리에 황급히 대꾸했다. 완전히 숨겼던 기척을 덜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릴리아는 벽에 바짝 붙느라 굳은 몸을 풀며 오베론에게 말했다.
“황자님도 조심하세요. 이곳까지 그 쓰레기들이 와있을 수 있으니까.”
“이교도들이 여기까지 울 리가, 릴리아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몇 번이나 찾아온 적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제국의 누굴 연줄로 두고 있는지 모르지만, 악신을 추종하고 마왕을 찬양하는 이교도 무리는 몇 번이나 오베론을 습격해왔다. 자신이 지켜주니 망정이지 태연한 소리나 해대는 주군이 미덥지 않은 릴리아는 혀를 차며 오베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조심하세요. 알았죠?”
꾸욱, 아찔한 압박에 으윽, 침음을 삼킨 오베론이 힘없이 말했다.
“어차피 릴리아가 있는데 조심할게 뭐 있어.”
“제가 없을 때도 있잖아요. 후우, 니아, 아니 오베론. 그만 자도록 할까요?”
“벌써? 너무 이른 시간 아닌가.”
명색이 호위 기사인데 말하면 들은 척이라도 하지, 자기 주군에게 울컥한 릴리아는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지만 체념한 얼굴로 일어나는 오베론을 보고 목구멍에 얹힌 잔소리를 다시 집어삼켰다.
“후우, 피곤하긴 하네, 빨리 자고-”
[흐으응! 으흣, 흐응, 하으으으♥]
두 남녀는 벽에서 새어 나온 저속한 신음에 몸을 굳히고 서로를 바라봤다. 잘못 들은 거겠지. 착각일 거예요. 내포된 뜻을 담은 눈의 대화를 나눈 둘은 고장 난 팔다리를 움직이며 침구로 몸을 옮기려 했지만, 옆방의 누군가가 둘을 위해 쐐기를 박아줬다.
[히읏, 히웃, 들려요, 흐응♥ 들린다구우웃…♥]
쪽, 쪽, 몇 번이고 입 맞추는 노골적인 소리, 투정 부리는 여인의 목소리에도 덤덤한 사내는 벽에 몰아넣고 사랑을 나누는 중이었는지 쿵, 쿵, 짧게 벽에 부딪히곤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싫어?]
“웃…”
‘그러고 보니 꽤 여성 편력이…’
카사노의 이력을 떠올린 오베론은 붉어진 뺨을 손으로 덮으며 카사노에 대해 떠올렸다.
제일 신뢰하는 첩보요원이 가져온 카사노의 행적과 이력, 용병단에 머물 때도 여자와 있었고 몽환의 밀림에 있는 마을에서 이름을 떨칠 때도 곁에는 항상 여자가 있었다. 거점으로 삼은 마을에도 머무는 대다수의 여인과 백작가에서 계속 끼고 다니던 휘슬 남작가의 여식까지 어딜가던 여자를 끼고 다니던 카사노를 떠올린 오베론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미네르바가 숨겨둔 카트라도 히네라 마을 어딘가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첩보요원이 마녀의 치마폭까진 뚫지 못했기에 오베론도 모르는 정보였다. 어쨌든 오베론에게 중요한 건 카사노의 여성 편력이 화려하단 사실이었다.
“완전 바람둥이네.”
그 스텔지아를 벽에 몰아놓고 제멋대로 다루다니, 카사노에 대한 기대치를 한 단계 높인 릴리아는 귓가를 울리는 달콤한 신음에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처녀 딱지를 뗐구나.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뀐 자신과는 다른 처지에 릴리아는 울컥하면서도 흥미가 샘솟아 천천히 벽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런, 그만해!”
“에이, 니아도 얼른 와서 들어봐.”
-꿀꺽
두 사람의 침 넘기는 소리가 방안에 조용히 울렸다. 호위 기사의 종용에 오베론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천천히 벽으로 다가갔다. 쓰레기들에게 복수하겠다며 엉엉 울고, 평생의 은인으로 삼겠다며 존경한다고 엉겨 붙던 그 스텔지아가…
[아으으응♥ 크흣, 쿠흣, 흐으, 흥, 흐응, 흐응! 흐기이이이이잇♥]
두 사람이 벽에 귀를 붙인 순간 아찔하고도 천박한 교성이 귀를 찌르르 울렸다. 퍽, 퍽, 철퍽, 철퍽, 물 튀는 소리와 조용히 깔린 헐떡이는 소리까지. 두 남녀가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음탕한 하모니에 둘은 새빨개진 얼굴로 훔쳐 듣기 바빴다.
“에이씨…”
저렇게 좋아한다고? 진짜로? 자신이 아는 상식과 상당히 다른 스텔지아의 반응에 릴리아의 속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냥 매체에서 과장한 거 아니었나? 역시 지구 사람이라 그런가?’
아흐응, 흐으응! 아예 숨넘어가기 직전의 신음에 릴리아는 참지 못했다. 나는 몇 년째 거미줄을 치고 있는데, 부럽게!
-쿵!!!
“리, 릴리아!”
“아.”
[으아앗!]
소드마스터가 내지른 정권이 얇은 벽에 얻어맞자 무너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천만다행으로 미세한 금만 남았을 뿐 벽이 무너지지 않았기에 진정한 릴리아는 재빨리 오베론의 어깨를 감싸 안고 벽에서 물러났다.
릴리아가 일으킨 소란 탓이었을까, 방을 울리던 야릇한 교성이 멎고 울림이 작아졌다. 지금이 적기라 생각한 두 사람은 재빨리 침대에 누웠지만, 소드 마스터의 정권으로도 한창때의 남녀를 떨어트리기는 역부족이었는지 새벽 내내 미세하게 들리는 신음에 제국의 위대한 혈통, 황자와 그를 지키는 호위 기사는 잠을 설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