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론의 안내를 받으며 스텔지아와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오베론은 스텔지아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잠깐 사연 많은 눈빛을 그녀에게 향했지만, 힐끔, 나를 바라보곤 다시 앞을 보며 길거리를 안내했고 우리는 조용히 오베론의 안내를 들으며 숙소에 도착했다.
“황, 베론님!”
여기일세, 라는 오베론의 안내와 함께 쾅! 나무 문을 젖히고 튀어나온 검은색 머리칼의 여인이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몇 번을 들어도 참 간편한 가명이다 싶은 이름과 함께 오베론을 끌어안은 여인은 도끼눈을 뜨고 우릴 노려봤지만, 어깨를 토닥이는 작은 손길에 힘을 빼곤 오베론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만, 내가 못 참고 빠져나간 탓이니 저들을 탓하지 말게.”
“하지만, 만약 그놈들이 또 나타나면…!!!”
“쓰읍.”
제법 귀여운 경고와 함께 오베론의 두 눈이 여인을 향하자 잘근, 입술을 깨문 여인이 한발 물러나는 거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때 스텔지아가 스윽, 내 등 뒤에 숨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릴리아…”
“아, 스텔지아. 이년이!”
텁, 물러날 땐 언제고 다시 총알처럼 뛰쳐나온 여인, 릴리아가 나를 향해 덮치듯 다가왔다. 흉악한 돌진에 기겁한 나는 팔을 들어 팔꿈치로 그녀를 가로막았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던 릴리아는 막아 세우는 내 행동을 보고 혀를 차곤 다시 황자의 옆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은혜를 원수로 갚아?”
“무서운년…!”
오들오들, 내 어깨를 움켜쥐고 릴리아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스텔지아, 귀여운 욕설에 발끈한 릴리아가 다시 눈을 부라리며 우릴 바라봤지만 이미 숨어든 스텔지아는 내 등 뒤로 모습을 감췄고 결국 황자의 제지로 우리는 쓸데없는 실랑이를 마무리 지었다.
“그만, 그만들 하게. 일단 숙소로 들어가세나, 후우- 저녁이 다 돼가는데도 더워죽겠는데 경들은 어찌 그리 힘이 넘치는지.”
주륵,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낸 오베론이 짐짓 불퉁한 얼굴로 속삭였다. 확실히 시원했던 산보다 등골에 땀이 맺히는 기온임을 자각한 나는 조금 찝찝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며 황자에게 물었다.
“황자님도 곧바로 베르바에 오신겁니까?”
“응? 아 그렇네. 우리도 이제 막 도착했지. 후우, 얼른 씻도록 하게, 카사노 경도 이른 아침부터 오느라 씻지도 못했을 텐데-”
“아, 그러면 같이 씻으시죠.”
오베론의 말대로 아침부터 산맥을 내려와 찝찝한 것도 있었기에 얼른 씻고 싶었지만 땀을 줄줄 흘리며 더워하는 오베론을 보니 배려심이 절로 솟은 나는 그를 향해 웃으며 같이 씻을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같이 씻을 것을 권유한 그 순간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으응?”
움찔, 움찔, 오베론의 오뚝한 코가 떨리고 귀 끝이 조금 새빨개졌다. 절레절레, 오베론이 가볍게 고개를 젓자 그의 목에 걸린 금빛 목걸이가 흔들렸고 그 모습에 상당히 더운가, 당황하는 그때 화악, 내 앞에 코가 닿을 정도로 다가온 릴리아가 소리쳤다.
“황자님은 해결하실 업무가 있다! 황자님께서 기껏 배려하시는데 먼저 씻도록 해라!”
“응, 그래, 급한 사람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카사노 경부터 씻게.”
“아, 알겠습니다.”
기겁하는 오베론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리는 릴리아, 묘한 분위기에 조금 섭섭해진 나는 한발 물러나며 그 둘을 바라봤다.
아니 같이 씻는 게 그 정도로 기겁할 일인가? 귀족, 아니 황족이라 더 그런 것도 있겠지. 태생이 평민이기에 홀로 납득한 그때 턱, 릴리아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방 열쇠다. 2층 제일 왼쪽 방이니 거기서 묵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묘하게 짧은 어투에 코가 씰룩였지만, 명백히 나보다 강한 여자였다. 이런 부류는 한번 밉보였다간 기를 쓰고 밟으려 하기에 순응한 나는 껌딱지처럼 붙은 스텔지아와 같이 숙소로 향했다.
“저는 잠시…”
툭, 껌딱지가 떨어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겁한 주제에 이젠 또 잠시 남겠다니, 알 수 없었지만 나눌 이야기가 있음을 짐작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열린 문에 몸을 집어넣었다.
“후우…”
그러다 짙은 한숨에 힐끔 돌아보자 턱, 품에 숨겨뒀던 금빛 목걸이를 꺼낸 오베론이 강하게 움켜쥐며 무어라 중얼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살랑, 내 시선을 알아챈 오베론이 가볍게 손을 흔들곤 다시 목걸이를 목에 집어넣었고 알 수 없는 행동에 체념한 나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
“저 남자 알고 그런 걸까요?”
브엑, 이상한 소리를 내며 혀를 내두른 스텔지아가 친근하게 오베론에게 다가갔다. 간악한 년이 황자님께 스스럼없이 다가가다니, 이를 까득 깨문 릴리아가 한발 앞서 스텔지아의 가슴팍을 밀었다.
“꺄악!”
“그만, 그만! 릴리아, 그만해.”
오랜 인연 앞에서까지 경직된 말투를 쓸 필요 없었기에 오베론은 손을 들어 릴리아를 제지하고 스텔지아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네, 뭐. 외모는 여전하네요.”
싱긋, 불편한 미소와 함께 칭찬을 넘긴 오베론은 다른 주제로 이어 나가려 했으나 스텔지아의 칭찬이 조금 더 빨랐다.
“아니, 더 아름다워졌을지도.”
아름답다는 단어에 자줏빛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눈동자가 움찔 떨려왔다. 오베론의 동요에 쿡, 웃은 스텔지아는 심통나있을 주인을 위해 몸을 돌리며 인사를 건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간단히 해후를 나눈 둘이 갈라지고 미약한 걱정을 담은 눈이 스텔지아의 뒷모습을 쫓았지만 이내 감정을 털어낸 오베론은 앙심을 품은 릴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
“후우…”
재빠른 목욕과 든든한 식사를 끝낸 나는 지금 바로 옆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노크만 하면 될 텐데, 괜히 숙소 앞에서 봤던 오베론의 눈빛이 떠올라 주저할 때쯤 문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카사노경, 문 앞에 서서 뭐 하고 있나?]
“아, 죄송합니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네명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마칠 때, 호르 산맥에서의 일을 보고받고 싶단 오베론의 명으로 찾아온 거였지만 괜한 뜸을 들인 탓에 오히려 오베론이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 문밖에 서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몰라도 알아챘으니 주저할 수 없었다.
-끼익, 쿵!
낡은 문을 열고 재빨리 문을 닫자 의자에 앉아있던 오베론이 일어났다. 새하얀 가운을 두른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기에 가냘파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탄탄한 체격이었다.
이질적인 몸에 의아함이 들때쯤 몸을 돌린 오베론이 성큼, 내게 다가왔고 그 탓에 그가 목에 건 목걸이가 한차례 흔들렸다.
“어서 오게. 보고도 들을 겸 카사노경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말일세, 늦은 밤에 너무 민폐인가?”
“아닙니다. 시험 명목으로 해결한 일이니, 왕자님께서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신걸요.”
“하하, 그런가.”
웃음과 함께 짧게 대화가 단절됐다. 이 틈에 자리에 앉아 보고를 시작하려는 그때 조금 가라앉은 오베론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 그런데 그전에 그대에게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편히 말씀하십시오.”
잘리는 건가? 아니면 한 건 더?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었기에 절로 몸이 굳었지만 내 입은 편안히 이야기하라며 오베론을 다독였다.
“카사노경이 이세계인이란걸 무심코 그때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너무 무례한 언사가 아니었나 싶어서 말일세.”
황자 맞아? 생각보다 정중한 이야기에 짐짓 당황했지만, 다시 이야기에 집중한 나는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정말 미안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를 보고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그대에게 사과를 구하려고 하네.”
“아닙니다. 정말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그 덕에 황자님이 제게 관심을 가지게 됐으니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 그런가…”
“네, 거기다 다른 이세계인도 본적도 없는걸요, 쓸모없는 정보라 생각합니다.”
“하하, 쓸모없는 정보는 아닐세, 내가 아는 다른 이세계인들은 하나같이 자기 신분을 숨기는데 조심스러우니까 말이야.”
“그렇습니까.”
“아, 이럴게 아니라 앉게. 초대한 손님을 세워두다니 나도 참 무례하군.”
“그럼.”
드륵, 의자를 끌고 앉은 나는 곧바로 착석한 오베론의 눈을 들여다봤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눈동자, 사람이 이렇게 선하다니, 오베론에게 점점 호감이 피어났지만 남자다, 그 생각에 곧바로 호감에 선을 그은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는 오베론을 바라봤다.
“아, 그럼 먼저 산맥에 올라갈 때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음!”
내 보고가 정말 즐거운지 눈웃음을 지은 오베론이 힘차게 대답했고 나는 곧바로 호르산맥에 떨어지고 스텔지아와 산맥을 오르는 것부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산적들을 참살하면서 천천히 올라간 것,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꼴사나운 놈들을 베어 넘기고 무분별하게 살생하지 않기 위해 포박시켜놓고 오두막을 수색, 그 결과 노예 장부와 거래 품목 증서 등등을 발견해 장소와 금액, 상인까지 알아냈다는 대목에서 오베론은 무척이나 기뻐했지만, 안색은 무척이나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노예 시장을 꾸리는 놈들이 점점 대담해지는군, 역겨울 지경이다. 하지만 카사노경 그대덕에 장소 하나만은 알아냈으니 정말로 큰 수확이군.”
“하지만 그런 떨거지 산적이 적어둔 좌표가 진짜 좌표가 맞을까요?”
내 질문에 오베론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민하던 오베론은 덤덤히 자기 생각을 내게 말했다.
“물론 아니겠지. 장부만 봐도 그놈은 매번 같은 상인과 거래했지. 간혹 새로운 상인의 이름이 있지만 그게 진짜일 리도 없고. 다만 정확히 기입된 명부와 장부를 얻었단 것만으로도 실마리를 쫓을 수 있으니 큰 수확이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노예상인, 이런 역겨운 놈들을 뿌리 뽑을 수만 있다면… 후우,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반역자들, 거기에 자칭 노예해방단이라 칭하는 그놈들도…”
툭, 툭, 홀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중얼거린 오베론은 어느 때보다 피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노예해방단. 혀끝에 맴도는 씁쓸한 단어에 나 또한 얼굴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