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는 하나둘 일어나 발끝으로 바닥 끄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눈을 뜨자 반기는 건 하나같이 얼굴을 붉힌 여인들이었다.
“아아… 죽을 거 같아…”
삐걱, 삐걱, 밤새 내 밑에 깔린 스텔지아가 앓는 소리를 하며 나를 노려봤다. 저지른 게 있기에 시선을 돌린 나는 조금 두려워하는 눈빛의 여인들을 스텔지아에게 맡기고 아예 오두막을 나와버렸다.
“으으, 이, 일어나. 나왔어.”
“크흑, 흐으으…”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산적들을 향해 다가가자 앓는 소리의 산적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며 옆에 있는 산적들의 어깨를 치거나 흔드는 등 서로를 깨우기 시작했다. 너무 심하게 팼나, 산적들 사이에 번진 공포를 체감한 나는 산적들이 전부 일어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이쪽은 준비 다 끝났어요.”
“아, 다 됐어요…?”
지루함을 참고 조금 기다리자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스텔지아와 여인들이 오두막에서 나왔다. 고개를 돌리며 스텔지아를 맞이하자 그녀는 어디서 구한지 모를 커다란 배낭을 메곤 의기양양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곧바로 내려갈까요?”
“뒤에 매고 있는 건 또 뭐에요?”
“아아!”
내 질문에 빙글, 몸을 돌린 스텔지아는 배낭을 좌우로 살살 흔들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이 여태 약탈한 물품하고 돈 좀 두둑이 담았죠. 깜빡할뻔했지 뭐예요?”
“아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산적들인데 한두 푼 숨겨둔 게 있었을 텐데 생각지도 못했다. 상상도 못 한 소득에 스텔지아가 대견해진 나는 곧바로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빙글, 몸을 돌린 스텔지아는 질색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딜 만져요? 제가 챙긴건데.”
“…”
생각보다 단호한 대처에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조용히 손을 거뒀다. 저건 베르바에 내려가면 뺏어버려야겠네. 속으로 다짐한 나는 한 번 더 흘리거나 챙기지 않은 게 없는지 짧게 확인한 후 스텔지아에게 말했다.
“다리에 포박한 거만 풀어줄 수 있어요?”
“흥, 너무 쉬운걸 요구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된다고 하면 될 것이지, 내 요청에 딱, 손가락을 튕긴 스텔지아는 스르륵, 산적들의 발목에 휘감긴 뿌리들을 거두고 땅속에 스며들게 했다. 두발이 자유로워진 산적들은 하룻밤 만에 찾아온 해방감에 기뻐하면서도 제 발로 죽으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얼굴이 시꺼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여러분.”
“네엣!”
“네에?!”
산적들을 데리고 산맥을 내려가기 전, 납치당한 여인들을 불러세우자 묘하게 기겁하듯 대답한 그녀들이 나를 조심스레 바라봤다. 스텔지아를 너무 험하게 다뤘나, 후회가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들에게 물었다.
“저희는 산적들을 베르바까지 데려가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베르바까지 모셔다드릴 생각인데 괜찮으시죠?”
“무, 물론이죠.”
“저흴 구해주셨는데, 그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자의 부탁대로 웬만하면 전부 베르바로 데려가려 했지만, 마을로 따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가볍게 물었지만 전부 그런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저분들 좀 잘 챙겨줘요.”
“그럼 당신은요?”
“나는 저 새끼들 목줄이라도 잡고 있어야죠.”
산적들의 손에 엉킨 뿌리와 이어진 작은 줄기를 움켜쥔 나는 스텔지아의 새초롬한 질문에 맞받아치며 몸을 돌렸다. 내가 놀 줄 알았는지 몰랐다는 얼굴로 감탄한 스텔지아는 별다른 불만 없이 여인들을 한데 모아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고 나도 바닥에 널브러진 산적들의 다리를 걷어차며 모두 일어나게 한 뒤 조용히 산맥을 내려갔다.
***
“지, 진짜 베르바야!”
“엄마아… 흐윽!”
“꼼짝없이 노예로 팔릴 줄 알았는데…”
적갈색 벽돌을 쌓아 올린 커다란 성벽과 검문소에 오가는 수많은 마차, 수도와 근접한 도시 베르바를 발견한 여인들이 하나같이 울먹이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다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씨바알, 좆됐다. 좆됐다고!”
“나는 노예 따위 처음부터 반대했다고, 억지로 끌려다닌 건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는데!”
“제발, 나리,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손에 쥐고 있는 줄기가 들썩거리고 그 끝에 묶인 산적들이 온몸을 비틀며 개소리를 지껄여댔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법이 알아서 처벌하겠지. 쓸데없는 곳에 힘 빼고 싶지 않았다.
“아아, 피곤하다, 그쵸?”
뿌드득, 가냘픈 허리를 꺾으며 뼈 소리를 낸 스텔지아가 힐끗 나를 바라보며 내 옆에 섰다. 그녀의 말대로 호르 산맥을 내려오는 데만 네시간, 거기서 베르바까지 걸어오는데 네시간이었다. 장장 여덟시간을 걸은 데다 여인들의 칭얼거리는 소리와 제 발로 죽으러 가는 산적들의 곡소리까지 들으니 정신 사나워 죽는 줄 알았다.
“빨리 들어가서 쉽시다. 그전에 저 새끼들부터 인계해야 할 텐데.”
“정지!!!”
검문소를 향해 너털걸음으로 다가가는 그때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우리를 제지했다. 신난 걸음으로 베르바를 향하던 여인들은 우레 같은 목소리를 듣고 어깨를 흠칫 떨며 걸음을 멈추고 나와 스텔지아를 바라봤고 산적들 또한 시꺼멓게 죽은 얼굴로 바닥에 발을 쓸며 걸음을 멈췄다.
“잠시 검문이 있겠소, 베르바에 방문한 목적과 묶여있는 사람들의 설명을 듣고 싶다만.”
“반갑습니다. 먼저 용병증부터 확인해주시죠.”
품에 간직해둔 용병증을 꺼내어 다가온 검문소장에게 건넸다. 날카로운 목소리 탓에 목이 조금 갈라졌는지 큼큼, 헛기침을 내뱉은 소장은 투구 덮개를 올려 용병증과 나를 번갈아보곤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용병증을 되돌려줬다.
“음, 위조는 아니군. 카사노, 신분은 확인됐으니 이제 저들의 설명을 듣고 싶은데… 혹시 산적들인가?”
“맞습니다. 호르산맥을 근거지로 삼고 설치던 산적들인데, 두목은 죽었고 잔당들만 포박해 데려왔습니다.”
“호르산맥! 정말인가, 잔당 중에 신상이 파악되는 놈도 있을 테니 확인해보겠네. 찰스, 톰! 수배서와 산적들의 용모를 비교하고 동일한 인물들이 한 놈이라도 있다면 전부 감옥으로 인계하도록!!!”
척척척, 커다란 고함과 함께 이름이 호명된 병사들이 달려와 포박된 산적들을 전부 데려갔다. 누그러진 분위기와 호의적인 눈빛에 나는 내친김에 마저 설명했다.
“그리고 저분들은 납치됐던 피해자입니다. 전부 구출에 성공했지만 마을에 데려다주기 전 의뢰인과 잠시 만나봐야 할 거 같은데 도시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베르바는 그대 같은 호인을 환영하네.”
턱, 발끝을 끌며 비킨 검문소장이 웃으며 검문소를 가리켰다. 끼이이이익, 커다란 통나무 문이 소리 내며 열리고 터엉, 완전히 열린 순간 드러나는 도시의 광경에 여인들은 긴장이 놓였는지 흐물거리는 걸음으로 도시에 발을 디뎠다.
“고생하십시오.”
“음.”
검문소장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나는 스텔지아와 함께 도시로 들어왔다. 쿵, 곧바로 닫히는 대문과 함께 분수대와 광장, 도시를 돌아다니는 주민을 구경하는 그때 툭, 스텔지아가 팔꿈치로 나를 두들겼다.
“말 잘하던데요? 짜증 낼 줄 알았는데.”
“공권력 상대로 누가 짜증을 냅니까. 못 이길 거 뻔히 아는데.”
“맞는 말이지. 고생했네.”
“으햐악!”
스텔지아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그때 달콤한 미성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요즈음 질리게 들은 미성이었기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돌렸지만, 화들짝 놀란 스텔지아는 양팔을 세우고 하악질하는 고양이처럼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말 고생했어, 귀찮은 일이었을 텐데 만족스럽게 해결해줬군.”
후드를 푹 눌러쓴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한 번 더 찬사를 보내고 천천히 후드를 움켜쥐었다. 가느다란 조각 같은 손가락이 후드를 움켜쥐고 뒤로 젖히는 순간 황금 같은 머리칼이 반짝이며 빛났고 두 보석이 뒤섞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구출해온 여인들은 부하들이 마을로 돌려보내 줄 걸세. 정말 고생들 했어.”
몇 번이나 강조하는 건지 모를 감사와 함께 뿌듯한 얼굴의 오베론이 성큼 내게 다가와 톡, 톡, 내 팔을 토닥이며 진심 어린 미소로 나를 올려다봤다.
며칠 안 봤을 뿐인데 길어진 듯한 황금빛 머리칼이 목덜미를 뒤덮고 있었다. 그 탓에 여인 같은 행색의 오베론에게 조금 실례인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지운 나는 울먹이며 떠나는 여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황자에게 물었다.
“정말 별거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쉽게 해결해서 당황했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그대를 내 품으로 데려오기 위한 형식적인 시험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물론 제국민의 목숨으로 시험을 보는 게 아닌, 그대의 실력이라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단 믿음으로 맡긴 일이란 소릴세.”
“알고 있습니다. 황자님께서 제국민을 무척이나 신경 쓴다는 건 몇 번이나 얘기하지 않아도 느껴지니까요.”
“그런가… 후후.”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은 오베론이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눈동자 색과 함께 싱긋 미소 지은 오베론은 촉촉한 입술로 말했다. 남자일텐데, 왜 이렇게 오베론의 얼굴에 눈이 가는 걸까.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다, 일단 숙소를 안내해주겠네. 같이 가세나.”
방긋, 신부 같은 환한 미소를 지은 오베론이 내 팔에 손을 얹고 나를 이끌며 다시 한번 나를 바라봤다.
…남자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