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시험 내용인겁니까?”
질문이 끝나자마자 턱, 끈으로 묶은 양피지를 내 손에 얹은 기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갑옷에 새겨진 문양과 화려한 망토, 오베론 황자의 뒤에 서 있던 기사 릴리아는 황자와의 대담 이후 내게 불만이 있는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볼일이 있어 나중에 사람을 보내겠단 황자의 말대로 삼일 정도 저택에서 여인들과 뒹굴거리고 있으니 대뜸 릴리아가 내게 찾아왔다. 쉬는 것도 질렸고 몸도 굳어가고 있던 찰나 릴리아가 와준 게 고마운 지경이었기에 나는 딱히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욕지거리를 내뱉진 않았다.
-촤락
[호르미아 동문으로 나가 남동쪽으로 향하면 제국 경계령에 걸친 호르 산맥이란 곳이 있네. 그곳을 주거지로 두고 상인들과 인근 마을을 약탈한다고 하니 처리를 부탁하지. 거기에 인근 마을 주민들이 나날이 실종되는 사태가 있다고 하니 악적들과 연관이 있을 터, 만약 주민들이 붙잡혀있다면 호르 산맥 초입에 있는 베르바로 데려오게나. 마음 같아선 직접 가고 싶으나 직접 가보아야 할 곳(제국민의 목숨을 경중으로 따지고 싶진 않다만.)이 있어 그대에게 부탁하겠네.
추신. 산적이란 놈들이 간도 크지 않나? 제국의 그림자에 떡하니 숨어 약탈하다니, 수도를 지키는 제국군들은 뭐 하는 거지 하하. (농담일세) 친애하는 오베론이]
묘하게 귀여운 사족 탓에 웃으며 양피지를 읽어내린 나는 방향과 산맥, 마지막 종착지인 도시까지 외우고 나서야 양피지를 돌돌 말았다. 오베론의 부탁대로 주민을 구출하고 인계할 때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양피지도 챙겨가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랬다.
“오늘 바로 출발해야겠다.”
거리가 꽤 있으니 늦장 부리면 안되겠지. 이동 주문서가 있어도 좌표를 모르니 마차도 준비해야 했다.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아 귀찮아졌지만 귀찮다고 미룰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재빠른 걸음으로 머물던 방에 들어갔다.
-쿵
힘없이 닫히는 문과 함께 벽에 세워둔 가방을 곧바로 안아 든 나는 그걸 침대에 얹고 방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전부 쏟아 부었다. 차곡차곡 빨려 들어가는 물건과 무게가 늘지 않는 아공간 가방, 기분 좋은 맞물림에 모든 짐을 챙긴 나는 대충 걸어둔 가죽 튜닉을 걸치고 가방을 맨 뒤 의자에 얹어둔 검까지 챙겼다.
“혼자 가려고요?”
“깜짝이야.”
“전혀 안 놀란 거 같은데요…”
허리에 검까지 차고 몸을 돌리자 침대에 앉아있던 스텔지아가 느긋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걸치던 드레스는 어디 가고 활동적인 검은 가죽바지와 흰색 셔츠를 걸친 스텔지아는 단추란걸 잠그는 법을 모르는지 새하얀 가슴골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실례에요, 그냥 갑갑해서 열어둔 거라고요.”
“실례, 그런데 무슨 일로?”
“흐응, 그냥. 호르 산맥으로 간다는데 혼자 가나 싶어서요, 아아~ 거리도 꽤 있고 귀찮을 텐데, 부탁만 한다면 손쉽게 갈 수 있도록 협조할 수 있는데요옥?!”
부스럭, 부스럭, 뒷짐 진 손을 티 나게 움직이는 스텔지아의 꼴불견에 나는 그녀를 밀어서 눕히고 손에 쥔 무언가를 뺏어 들었다. 꾸깃꾸깃해진 양피지와 정교하게 새겨진 문장, 어디로 향하는 주문서냐고 묻기도 전 찌직, 스텔지아가 하도 조물거린탓에 약해진 주문서가 내 손에서 찢어지고 말았다.
-우웅
“당신, 장난해요!”
화악, 스텔지아의 일갈과 함께 시야가 일렁이곤 순식간에 우리 둘의 몸이 붕 떠올랐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동에 침음을 삼킨 나는 쫑알쫑알 떠들어대는 스텔지아를 무시하고 그녀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화악!
턱, 턱, 시간이 지날수록 되돌아오는 시야와 함께 바닥에 허리를 펴고 선 나는 울창한 산맥 초입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앞에서 알짱대는걸 볼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바로 호르산맥으로 온 듯했다.
“아앙, 같이 와버렸어.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뭘 아니에요. 따라오려고 옆에서 떠본 거 다 알겠구만.”
“아니거든요, 그냥 혼자 털레털레 가는 거 골릴 심산으로 따라온 것뿐인데 내가 왜...”
불퉁한 얼굴로 조잘조잘 떠들면서도 희미하게 기대감을 내뿜던 스텔지아가 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럴 생각도 없다는 년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주섬주섬 짐까지 챙겨와? 솔직하지 못한 태도에 심통난 나는 가방을 앞으로 맨 후 구석에 박아둔 물건을 꺼내며 스텔지아에게 물었다.
“여기 호르 산맥은 맞아요? 확실해?”
“맞아요! 황자님께 물어보니 조용히 알려주시기에 예전에 적어둔 좌표를 활용해서 준비한 것뿐이에요. 호르 산맥이 수도 바로 뒤편에 있는 곳인데다가 초입에도 쓸만한 약초와 꽃이 많아서~”
신나서 떠벌떠벌 떠들어대는 스텔지아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빨갛고 도톰해 맛있어 보이는 입술, 문득 황자의 입술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묘한 직감을 밀어내고 눈앞의 스텔지아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찰칵!
“응?”
“뭔 응이야.”
꾸욱, 검은색 가죽을 강하게 조이며 확실히 고정하자 살짝 짓눌린 하얀 피부가 조금 빨갛게 물들었다. 꿀꺽, 상황 파악을 끝낸 스텔지아가 떨리는 눈으로 침을 삼키자 꿀렁이는 작은 목울대, 주인에게 조금씩 기어오르는 육노예의 목줄을 쥐는 데 성공한 나는 스윽, 스윽, 끈을 손에 휘감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스텔지아를 싸늘하게 바라봤다.
“따라와.”
“내가, 내가 왜 가야 하죠? 그런 더러운 산적 소굴 따위, 가고 싶지 않은-“
“딱 한 번, 지금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줄게.”
으름장을 놓으며 살짝 이를 드러내자 흣, 숨을 참고 데굴데굴, 검은 눈동자를 굴리던 스텔지아가 헤헤,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며칠 동안, 떠난다 생각하니 못 참을 거 같아서… 조금 노린 건 맞지만, 저라고 해서 갑자기 이런 취급을 받고 싶진 않다고요…?”
받고 싶진 않기는 무슨,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어대는 걸 확인한 나는 은근히 기대하면서 아닌 척하는 스텔지아가 얄미워 조용히 손을 뻗었다. 콰드득, 손쉽게 뜯어진 단추들이 투둑, 힘없이 흙에 떨어지고 새하얀 살결이 달빛 아래에 드러났다.
“흐읏, 흐으, 흐으…”
기대 반, 설렘 반, 흥분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달짝지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스텔지아, 꾸욱, 목줄을 잡아당기며 매끈한 복부를 한차례 쓰다듬자 흐으응, 달콤한 비음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주인, 님악!”
풀썩, 꺼내둔 로브를 얼굴에 내던지자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른 스텔지아가 로브에 뒤덮여 허우적허우적 손을 내저었다. 백작 부인일 때와 달리 허당 같은 모습이 귀여웠지만, 입밖에 내뱉으면 또 기어오를 게 뻔했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산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같이가아!”
주섬주섬 얼굴을 덮은 로브를 뒤집어쓴 스텔지아가 목줄 탓에 발을 질질 끌며 내 뒤를 따랐다. 눈치 없게 소리 지르길래 턱, 검지로 입술을 덮자 불퉁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는 할짝, 검지를 핥기까지 했다.
“흐응, 흐응, 흐응, 흐응…”
“조용히 따라와요.”
“힘들, 어요…!”
스텔지아와 사소한 실랑이를 벌이며 등산한 지 한 시간쯤, 야릇한 숨을 헐떡이며 내게 달라붙는 스텔지아를 팔꿈치로 밀어낸 나는 그녀에게 핀잔을 주고 주위를 둘러봤다. 간혹 마나를 일으켜 주변을 감지하거나 눈에 마나를 둘러 살펴봐도 아직까진 산적의 머리털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산맥인 거 확실하죠?”
“…20년 전 좌표, 긴 한데 산맥 이름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잖아요? 확실해요.”
20년 전 좌표란걸 말하면서 안색이 굳었던 스텔지아는 스스로 머리를 굴리면서 시간이 지나도 산맥 이름이 바뀐 적은 없단 걸 눈치챘는지 마지막엔 가서 당당하게 내게 대답했다. 허당 같은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 나는 쭈욱, 그녀의 매끈한 볼을 붙잡고 살짝 흔들며 그녀를 골렸다.
“으브브…”
내 장난에 불만이라는 듯 귀여운 소리를 내며 찹, 달라붙은 스텔지아는 풍만한 젖가슴을 팔뚝에 문지르며 앓는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니 방에서 육노예가 되겠다고 선언한 뒤 묘하게 안기거나 애교부리는데 거리낌 없어진 그녀의 특징이 다시 떠오른 나는 검지 끝으로 그녀의 턱을 긁으며 대충 상대해줬다.
“흐응, 흐응, 흐으으…”
터업, 내 허벅지에 가볍게 걸터앉듯 음부를 밀착한 스텔지아는 달뜬 신음을 귓가에 흘리며 더욱더 내게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젖가슴이 팔뚝에 찹 달라붙고 묘하게 습한 음부가 즈극, 즈극, 위아래로 문질러질 때마다 허벅지가 점점 축축해졌다.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드는 스텔지아의 모습에 나 또한 자극받아 점점 하반신에 피가 몰리는 그때 파삭, 수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씨발 뭐야?”
부스스한 몰골의 남자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다 부릅, 눈을 뜨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윽고 망설임 없이 성큼 다가온 남자는 허리에 찬 작은 손도끼를 들고 후웅,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