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290화 (290/395)

달그락, 도기 소리와 함께 찻잔이 다소곳이 정리됐다. 텅 빈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린 황자는 차가 묻은 입술을 혀끝으로 핥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냅킨으로 톡, 톡, 닦아내곤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차는 마음에 드나?”

전형적인 안부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찻잔을 바라본 나는 묘하게 눈을 빛내는 황자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줬다.

“향도 진하고 무척이나 포근한 느낌이 듭니다. 계속 마시고 싶군요.”

내 긍정적인 평가에 오베론이 귀를 쫑긋 떨곤 배시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워했다. 황자라는 사람이 저리도 곱상하게 웃다니. 괜히 여러 생각이 들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때 황자가 다시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스텔지아와의 일은 전부 해결됐나? 자네가 협조를 부탁해 돕긴 했다만, 그녀가 화내진 않던지 모르겠군.”

“별일 없었습니다. 황자님 덕에 그녀와도 좋게 이야기로 풀었고 도와주신 덕에 어렵지 않게 해결됐습니다.”

황자의 시선이 방 한쪽을 향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벽에 기대고 있던 인영이 황자의 시선을 눈치채고 킁, 콧방귀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유능한 부하 덕에 가능했던 거지. 좋게 해결됐다면 다행이군, 내심 마음이 쓰여서 말이야.”

황자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날, 대뜸 오베론의 부하인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와 우리에게 말했었다.

‘마녀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제야 저택이 과거에 스텔지아의 수중하에 떨어졌었단 걸 떠올린 나는 어찌할 줄 몰라 잠시 당황했지만, 황자의 명령이 더 바빴다.

‘그의 부탁이 있기 전까진 지켜보고 있도록, 악연이 있는 카사노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하도록 돕겠네.’

‘알겠습니다.’

여유로운 오베론의 명령에 나는 스텔지아의 처우에 대해 황자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그 덕에 스텔지아를 방치하고 혼내주겠다- 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황자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승마도 즐기는 둥 여러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스텔지아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즐긴 활동이었다.

그런 시답지도 않은 부탁을 들어주다니, 오베론 황자는 신이다. 내심 황자에 대한 감사가 샘솟은 나는 눈앞의 오베론을 빤히 바라봤고 툭, 툭, 손가락을 두들기던 오베론은 진득한 내 시선에 큼큼, 헛기침을 내뱉곤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럼 스텔지아의 처우도 해결됐고, 전에도 말했던 시험 이야기를 해볼까 하네만.”

“네,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래, 먼저 다시 나를 소개해야겠지. 나는 지엄한 제국의 주인인 하이덴리히 3세의 칙명을 받들고 제국령을 떠돌고 대륙 곳곳을 다니며 외면받은 제국민들과 제국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해결하고 있지.”

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자 싱긋 웃은 황자가 툭, 툭, 테이블 한쪽에 놓여있던 초콜릿을 집어 들고 중앙에 가볍게 내던졌다. 매끄러운 포장지에 뒤덮인 동그란 초콜릿이 뒹구는 와중 하나를 집어 든 오베론이 하나를 톡, 가운데에 얹곤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 드넓은 대륙에 내 가신들을 파견한다고 해도 그 수는 한계가 있지. 경중을 따지려 하지 않지만, 가끔 살다 보면 저울질을 해야 할 상황도 나오기도 하고, 그러던 차에 이번 행밀 백작 사건과도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지.”

“가신들은 스텔지아를 처벌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녀에게 입은 은혜가 있는 만큼 억지로 이야기를 넘겼지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러던 차에 자네 소개를 들었지.”

“스텔지아가 과제라는 명목하에 내려준 시험을 손쉽게 해결했다더군, 하아, 그 이야기를 파고들수록 스텔지아가 저지른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스텔지아가 저지른 일이라면 요새의 일과 대장장이, 그런 거겠지. 손속에 자비가 없던 스텔지아의 행동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자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황자는 스윽,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겐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내 명령으로 제국 곳곳과 대륙을 돌며 충직하게 수행하고,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내 줄 그런 사람.”

“한낱 용병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 한낱 용병이 이곳에 떨어진 지 몇 년도 채 안 된 이방인이니 하는 소리일세.”

황자쯤 되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 스텔지아가 말했는지는 그녀에게 물어봐도 되는 거고 별다른 내색 없이 말하는 걸 보니 따로 조사한듯해 나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황자의 눈을 바라봤다.

자줏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보석 같은 눈동자, 새하얀 눈꺼풀과 기다란 속눈썹에 덮여 자취를 감추지만, 태양처럼 다시 떠올라 나를 응시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가문을 등에 업고 설치는 젊은이들과 알 수 없는 후견인을 두고 내게 줄 서는 얼간이들보다, 그대 같은 호인 하나가 훨씬 낫지.”

“제가 과연 그런 기대를 받을만한 인물일지는…”

“황자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무심한 목소리가 툭, 오베론과 나를 가르며 끼어들었다.

“릴리아.”

릴리아라 불린 기사가 움찔, 작게 몸을 떨곤 스윽, 허리를 곧게 폈다. 백금빛 갑옷이 철컹이고 굳게 닫힌 투구 덮개 너머로 불타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내게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보다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여자였다는 게 더 놀라웠던 나는 갑옷 안에 있을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황자를 바라봤다.

“…실례했네. 너무 충직해도 탈이군, 안 그런가?”

나한테 물어도…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건 제국의 황자였다. 여태껏 만났던 귀족과 아가씨들, 그런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기에 웃으며 호응하자 오베론이 웃으며 자기 뺨을 긁었다. 단정한 손톱이 새하얀 피부를 짓누르고 툭, 힘없이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때 단아한 목소리가 나를 두들겼다.

“카사노경?”

“아, 네.”

“하하, 내가 말을 편히 해서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잠시, 잠시 어렴풋이 생각난 게 있어 집중을 못 했습니다.”

뺨 긁는 걸 보다가 멍때렸다곤 죽어도 말 못하기에 대충 돌려 말하자 오베론 또한 더 캐물을 생각이 없었는지 웃으며 넘어갔다. 다만 오베론의 뒤에 서있는 릴리아라 불린 기사는 심기가 불편했는지 연신 쿵, 쿵, 발을 구르며 나를 노려봤다.

“하하, 그럼 지금부턴 조금 집중 부탁하네, 자네에게 주로 맡길 임무가 어떤 건지 설명하려 하니까… 알겠나?”

여태껏 오베론의 목소리가 조금 가볍고 듣기 좋았다면 알겠냐고 되묻는 그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은, 마치 심연을 살짝 엿보는 어두운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듣기 좋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조금 끈적하고 어두운 오베론의 목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겠습니다.”

“요즘 들어 제국은 시끄럽기 그지없네, 현 황제께서 폐지한 노예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성행하는 노예시장과 알 수 없는 악신을 추종하며 마왕을 앞세우는 이교도, 그 밖에도 제국을 어지럽히는 문제는 많지만, 황제께서 명하여 내가 맡은 문제는 앞서 말한 두 가지일세.”

“제가 도와야 하는 건…”

“이미 수많은 연락책이 제국 곳곳에서 많은 정보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연락책들은 말 그대로 연락책, 내가 부탁한 정보만 전해줄 뿐 수족 같은 존재가 없네. 마음 같아선 쓸데없이 곁을 지키는 기사단도 내보내고 싶지만…”

“허락할 리가 없겠죠.”

“그렇다네.”

내 대답에 피식 오베론은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담아내곤 싱그러운 미소를 보여줬다. 남자가 저렇게 아름답다니. 알 수 없는 감정을 밀어내며 꿀렁이는 황자의 목울대를 바라봤다. 반짝이는 금빛 사슬이 파도처럼 흔들렸고 이내 옷깃에 가려져 그 자취를 감췄다.

“카사노경, 그대에게 내 유일한 수족이 되어 달라하고 싶군. 제국도 아닌, 황제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한. 나만의 가신이 되어주길 원해,”

“황제도 제국도 아닌, 오베론 황자님만을 위한 가신으로?”

“그래, 아버님을 믿지만, 제국은 넓고 간악한 무리도 수없이 숨어있는 게 이 제국이야. 그런 상황에 품속에 비수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지.”

“제가 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내 질문에 사락,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오베론이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색이 뒤섞인 보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자신감, 긍정, 호의, 모든 감정도 뒤엉킨 아름다운 보석은 내 모습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었다.

“믿고 있네, 내가 들은 카사노라는 남자는 충분히 믿을 수 있고, 또 대단한 남자 같거든.”

왜 황자는 나를 이렇게까지 고평가하는 걸까, 하지만 이세계에 떨어져 처음, 아니 두 번째겠네. 지금은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리지만, 레미아가 내게 손을 뻗어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줬던 그 순간.

혼자서 처음 보는 세계에 떨어져 사무치도록 아려오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던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내게 스며들었다. 나라는 인간을 믿고, 순수한 호의를 내비치며 손을 내뻗는 오베론, 그의 호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여인들로 치유한 상처도, 여인들을 안으며 충족했던 만족도 메우지 못한 감정의 골, 그건 아마 인정욕이었을까? 이야기도 몇 번 나누지 않고 문서로 접한 내 이야기를 읽고 이만큼의 믿음을 보여주니 나도 황자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스텔지아가 제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저라면 황자님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될 거라고…”

“하하, 그랬었나? 스텔지아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래, 어떤가?”

스윽, 가녀린 손이 내게로 뻗어졌다.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민 오베론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나를 응시했다.

-터업

“하찮은 몸이지만 황자님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보답하기 이전에 말씀하신 시험이 먼저겠네요.”

“그렇지, 나야 사실 아무한테도 허락받지 않고 그대를 거두고 싶지만, 가신들은 영…”

쿵, 말없이 발을 굴린 릴리아가 살짝 허리를 숙여 오베론의 머리통까지 접근했다. 곰처럼 다가오는 흉흉한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황자는 꽉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말했다.

“그대가 지켜야 할 사람들, 그대의 여인… 들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대우도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여인들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화악, 오베론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구나. 황자쯤 되면 주지육림은 일과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자를 바라봤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주겠네. 호르미아에 잠시 볼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봐야 하니 그대도 쉬게나.”

텅,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난 오베론은 재빠르게 이야기를 끝내고 몸을 돌렸다. 망설임 없는 행동에 감탄하는 와중 먼저 방을 빠져나간 마법사와 호위 기사의 뒤를 따르던 오베론이 스윽,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봤다.

‘또’

‘보’

‘자’

짓궂은 아이와도 같은 말투와 미소, 오베론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곤 텅, 문을 닫은 채 사라졌다.

방금까지 맞잡았던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이 살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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