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262화 (262/395)

달그락달그락

눈앞의 메이드가 어질러진 접시를 다소곳이 담고 귀빈들을 피해 사라졌다. 떠들썩한 연회장, 그곳을 가득 채운 귀족들과 제국의 유명 인사, 호르미아의 재력가 모두가 웃고 떠들며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베론과의 조사를 끝내고 백작의 저택에 머문 지 3일, 페리샤, 운디네와 호르미아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행밀 백작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 셋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이거 맛있다! 난 고기가 좋더라, 육즙이 살아있잖아?]

“그건 생선인데.”

[어쩐지 별로더라!]

꺄르륵,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연회를 즐기는 페리샤와 운디네, 둘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지었던 나는 자기를 둘러싸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다가오는 백작을 보고 가볍게 묵례했다.

“카사노! 잘 즐기고 있는가!”

파앙, 내 허리를 두드린 백작은 초췌한 몰골은 어디 가고 금세 투실투실한 턱살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다만 스텔지아가 남긴 후유증으로 인해 백작에게 일어난 변화도 있었다.

“저기, 반갑습니다! 저는…”

“끄악! 저리, 저리 가!”

아리따운 아가씨 하나가 홀몸인 백작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지만, 미모의 여인을 보고 기겁한 백작이 손을 휘저으며 여인을 쫓아냈다. 어설픈 코미디 같은 상황에 웃음을 참은 나는 헛기침과 함께 백작에게 물었다.

“크흠, 기사들과는 만나 보셨습니까?”

백작 부인의 명령으로 잠시 저택을 떠났던 소니아, 마일드, 헤나. 그들이 도착하고 역변한 저택의 풍경에 당황하며 나를 찾아온 걸 떠올렸다. 이후 백작에게 소개하고 셋과 따로 면담한 행밀 백작이었기에 근황을 듣고 싶었다.

“아, 그렇지. 소니아경을 제외하곤 백작가에 남고 싶다더군. 요새에서 이야기는 들었기에 그런 성실한 기사들이 내게 힘을 보태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감사합니다.”

“자네가 감사할 게 뭐 있나? 자네가 나한테 해준 게 얼만데!”

그윽한 눈빛, 베론이 저렇게 바라봐도 역겹진 않았는데 투실투실하게 살 오른 백작이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니 조금 싫었다. 내색하지 않은 나는 손을 저으며 백작을 띄워줬고 끈덕지게 붙어 떠들던 백작은 황자님이 보이지 않는다며 요란스럽게 떠났다.

“당신, 여기 있었네요?”

또각, 구두소리가 멈추고 앙칼진 목소리가 내 귓가를 두들겼다. 어느 상단의 어느 아가씨일까? 미소 지은 나는 뒤돌며 시에라와 툭, 코끝이 부딪혔다.

“꺄앗!”

“하하.”

우물우물, 접시를 들고 요리를 집어 먹던 페리샤와 운디네가 우리 둘을 바라봤다. 뭔가 무감정한 눈초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눈을 돌린 둘은 저 멀리 연회장 중앙에 세워진 케이크를 자르는 걸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저건 먹어야 해!]

“빨리 가자!”

“백작하곤 인사했어요?”

스윽, 망사장갑을 낀 시에라의 손가락을 움켜쥐자 시에라의 가냘픈 턱이 수줍게 끄덕였다.

“당신을 좋게, 아니- 거의 신봉하던걸요? 당신 이름을 들으니 더 듣지도 않고 인장을 찍어줄 테니 내일 찾아오라네요.”

백작의 배포에 크게 웃은 나는 마찬가지로 히죽이는 시에라의 볼에 손을 얹었다. 성공할 수 있단 기대감에 뜨거워진 체온과 앞으로 자신을 짓누르려는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는 긴장감, 그 모든 게 느껴졌다.

“뭐든 도와줄 테니까 말만 해요.”

“흥, 당신은 당신 할 일이나 잘해요. 마을에 제대로 묻지도 않고 페리샤를 도우려다가 이게 무슨 꼴이에요?”

이제는 백작 부인의 흔적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연회장을 둘러본 시에라가 날선 말투로 나를 꾸짖었다. 마님의 꾸중을 들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흘려들었고 꽈악! 가냘픈 손가락이 내 옆구리를 쥐어짰다.

“아파요, 그만, 그만!”

정말 아파져서 크게 소리치자 쿡쿡, 소악마처럼 웃은 시에라가 천 스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거뒀다. 이윽고 싱긋 웃던 시에라는 생각났다는 듯이 아! 탄성과 함께 내게 말했다.

“사업 관련해서 이야기할 게 있어서 좀 다녀올게요. 어디 가지 말고 자리 지키고 있어요?”

또각또각, 붉은 드레스에 갇힌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시에라가 떠났다. 가지 말라 해도 이 넓은 연회장에 용병 나부랭이에게 관심 가질 사람은 없었기에 테이블에 얹어둔 샴페인을 집어 든 나는 조용히 홀짝이며 놀고있는 운디네와 페리샤를 바라봤다.

“잘즐기고 있나 보군.”

“소니아님.”

기분 좋은 취기가 온몸을 감쌀 때쯤에 도도한 목소리가 툭, 내 옆에 가라앉았다. 소니아의 목소리에 조금 풀린 눈으로 돌아보자 흠칫 놀란 소니아가 스윽, 내 뺨에 손을 얹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혼자서 몇 잔을, 우웃! 술 냄새…”

후우, 짓궂은 미소와 함께 숨을 내뱉자 코를 막은 소니아가 뻐억, 내 팔뚝을 내려쳤다. 내 옆에 나란히 선 소니아는 연회장 중앙을 뛰어노는 페리샤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읽은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귀엽죠? 페리샤아가씨.”

“응? 응, 그렇군. 한창때의 아가씨처럼 파릇파릇하고 생기 넘쳐서… 연회장을 뛰노는데도 화사한 꽃밭을 뛰어다니는 거 같아.”

묘하게 늙은 표현에 히죽 웃자 쿵, 내 어깨를 내려친 소니아가 엄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쪽, 하얀 뺨에 키스하고 넘어간 나는 붉어진 귀끝을 매만지는 소니아에게 물었다.

“잘 지켜줄 수 있죠? 멀지도 않고, 자주 볼 수도 있으니까 제 몫까지 지켜주세요.”

“그대는 정말 너무하는군. 그런 말을 해버리면 조금이나마 남은 미련조차 없어지지 않나.”

은빛 드레스를 살랑이며 나를 돌아본 소니아가 꾸욱, 푸른 눈을 하얀 눈꺼풀로 덮었다. 촉촉하게 젖은 분홍빛 입술을 엄지로 매만진 나는 조용해진 연회장을 흘겨보다 쪼옥, 그녀의 입에 입 맞췄다.

“미안해요. 귀족, 거기다 장녀를 제 마음대로 데려갈 수 없어서… 그렇다고 홀로 두기엔 너무 걱정돼서요. 믿을 수 있는 게 소니아뿐이에요.”

“알았다, 몇 번이고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했으니까… 믿고 맡겨다오. 아가씨는 내가 지켜줄 테니.”

쪽, 화장기없는 볼에 입 맞춘 나는 스윽, 스윽- 주황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당당한 어투의 소니아를 바라봤다. 쿵, 자기 가슴을 두드린 소니아는 휙, 몸을 돌리고는 내 손목을 붙잡은 채 페리샤와 운디네에게 향했다.

그 뒤 돌아온 시에라에게 어디 갔었냐며 한 소리 듣고 흥에 취한 백작의 어설픈 소란과 함께 연회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얼콰하게 취한 소니아와 은은한 붉은빛을 띤 시에라를 방에 데려다준 나는 곤히 잠든 페리샤와 운디네까지 방에 눕히고 나서야 내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창문을 뚫고 방안을 가득히 채우는 푸른 달빛, 방안에 가라앉은 싸늘한 밤공기가 코끝을 맴돌 때 화악, 분홍빛 꽃잎이 내 앞에 내려앉았다.

“제가 없는 연회는 즐거우셨나요?”

웃음기 어린 스텔지아의 목소리와 함께 분홍빛 꽃잎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을 갖춘 꽃잎들은 하나로 얽혀들기 시작했고 살랑, 바람과 함께 스텔지아가 내 앞에 나타났다.

“전부 지켜보고 있었군.”

내가 내고도 덤덤한 목소리가 조용히 퍼지자 쿡쿡 웃은 스텔지아가 걸친 로브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제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요?”

“당신이 준 선물 같은 게 있나?”

“왜 없어요? 이 제국에서 가장 튼튼한 동아줄을 당신 앞에 내려드렸잖아요. 카사노군.”

툭. 갈라진 로브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새까만 드레스를 걸친 스텔지아는 여느 때처럼 짙은 색의 면포를 펄럭이며 내게 다가왔고 꾸욱, 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계하지 않네요. 이렇게 접근하면 조용히-“

파앙, 마나를 두른 주먹이 스텔지아의 가슴을 꿰뚫었지만 살랑이는 꽃잎이 내 시야를 가득히 채웠다. 빠르게 손을 거뒀지만 팔에 붙은 분홍빛 꽃잎은 천천히 내게 스며들었고 구멍을 메운 스텔지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기다리고 있었군요? 안심해요, 이젠 정말 당신에게 손댈 생각은 없어요. 그분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고요? 욕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그 눈동자를, 당신을 떠올리면서…”

할짝- 핥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노기를 비친 스텔지아가 빙글 뒤돌더니 창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그리고 동아줄 같은 건 필요 없어. 네년만 죽이면 다 끝날 일이야.”

“아니에요, 하나도 끝나지 않잖아요? 오늘 연회로 체감하셨잖아요. 제국의 벽은 드넓고 또 높아요. 알량한 자원으로 이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오늘 연회에 초대된 귀빈 중 아무나 붙잡고 당신의 마을에 데려간다면…”

끽, 장난스레 목을 그은 스텔지아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지금이야 백작이 당신에게 배를 보이며 낑낑거리겠죠.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 탐나는 보물들도 제법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번 자기 밑이라고 인식한 순간 그가 얌전히 있을까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노예들을 불법으로 구하던 저열한 인간이?”

백작의 민낯을 드러낸 스텔지아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나를 설득했다. 확실히 연회에서 본 귀족들과 부호, 다양한 유명 인사를 본 순간 체감했었다. 나는 이 세계에 있어 이방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손에 귀한 보물을 들고 떠들 뿐인 처량한 이방인, 그게 나였다.

“그건 맞아, 당신 말도 딱히 틀린 건 없지. 내가 지니기에 과분한 것들도 많고, 내가 끌어안기에 과분한 여인들도 많지. 그걸 나만의 힘으로 지키는 건, 솔직히 힘들어.”

“그래요, 그래서-“

듣기 싫은 목소리를 끊기 위해 나는 크게 소리쳤다.

“그렇다고!!!”

펄럭, 스텔지아의 얼굴을 덮은 면포가 휘날렸다. 일그러진 입가, 노골적인 분노를 목격한 나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스텔지아를 향해 말했다.

“내가 왜 네년 말을 들어? 내 뒤통수나 치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 끌어다가 알량한 네년 호기심 때문에!!! 희생시킨 년 말을 내가 왜 듣냐고.”

쫘악!

분노에 잠식된 가냘픈 손이 무언가를 찢었다. 힘없이 나풀거리는 검은 천과 함께 드러난 스텔지아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