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님, 아까 인사드렸던 집사, 햄슨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카사노님을 찾는 분이 오셨습니다]
노크와 함께 들려오는 햄슨이란 집사의 목소리, 누워있는 페리샤와 운디네가 움찔거리는 걸 보고 일어난 나는 밖으로 나가 중년 집사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쿵, 문을 닫았다.
“누가 절 찾아온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다만 황가와 관련된 인물 같더군요.”
황가? 생각도 못 한 출신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집사가 스윽, 길을 비키며 내게 말했다.
“일단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백작 부인에 관해 질문하기에 이것저것 대답하니 카 사노님을 찾더군요.”
“백작 부인을 추격하려고 묻는 걸까요.”
“글쎄요, 저희와 백작님은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황실기사단이 이런 일에 나설 리가 없으니…”
체념한 집사의 눈동자에서 백작의 눈빛을 엿본 나는 킁, 콧김과 함께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집사의 안내로 응접실에 도착한 나는 손잡이를 움켜쥐고 당기려는 순간 황가와 관련 있다는 집사의 말을 떠올리고 문을 두들겼다.
똑똑-
“실례합니다.”
[들어오십시오]
미려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건네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줄지어 서 있는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갑주와 덮개로 엿보이는 무감정한 눈빛, 갑주에 그려진 태양 문양과 그들이 두른 붉은색 망토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란 걸 여실히 증명했다.
다만 그들이 나를 부른 게 아닌지 척, 자세를 고친 기사들은 소파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응시했고 앉아있던 그가 후드를 벗으며 내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태양기사단에서 파견된 조사관, 베론이라 합니다.”
후드를 벗자 찰랑이는 금빛 머리칼이 태양처럼 일렁였다. 찬란한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순수한 금빛에도 놀랐지만 정교한 장인이 다듬은 듯한 보석 같은 눈동자도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웠다.
자줏빛, 붉은빛이 뒤섞인 보석 같은 눈동자와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 유려하면서도 매혹적인 외모에 가냘픈 목소리와 자그마한 체구,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중성적인 탓에 성별을 짐작 못한 나는 베론을 들쑤시기보단 그의 인사를 받기로 하고 마주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휘슬 남작가에 의탁 중인 카사노라고 합니다.”
“오! 자네 왔는가!!!”
터벅터벅- 들뜬 걸음 소리와 함께 활기찬 목소리가 나를 두드렸다. 슬쩍 기사들의 뒤편을 바라보니 얼굴에 생기가 맴도는 백작이 커다란 웃음과 함께 내게 다가왔고 후드를 벗은 베론이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분들은 6황자님의 전속 기사단인 태양기사단일세. 황자님께서 내가 겪은 고충을 어떻게 아셨는지 이들을 보내 내가 입을 피해를 살펴보라 하셨다는군. 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린 백작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떠들어댔다. 기뻐보이는 그의 웃음을 끊기 그랬던 나는 잠자코 그의 손길을 받아냈고 한참을 웃어댄 백작은 후드를 뒤집어쓴 베론을 보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참, 황자님이 보낸 조사관이 자네에게 물을 게 있다 했지. 이거 방해해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백작의 시선을 피한 베론이 후드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휙, 몸을 돌린 백작은 방안을 둘러보며 조용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황자님은 대체 어디 계신 건지 원…”
응접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행밀 백작, 그의 걸음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슬쩍 베론을 바라보더니 척, 척, 척- 일사불란한 발걸음으로 백작의 뒤를 따랐다.
내가 왔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걸까? 아니면 백작이 말한 대로 백작의 피해 규모를 알아보기 위해 떠난 걸까, 알 수 없는 진실을 고민하는 그때 쿵, 문이 닫히고 맞은편의 베론이 후드를 벗었다.
“음, 그럼 아무도 없으니 사건의 전말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건의 전말이란?”
“카사노경께서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된 경위와 그녀가 시켰다는 과제, 그리고 그녀가 떠나기 전 행보를 전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머리를 굴리며 여태껏 벌어진 사건을 정리하다가 익숙지 않은 칭호에 손을 들고 베론에게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황자님의 부하시면 저 같은 용병보다 높은 신분일 텐데… 그리고 용병이 경이란 호칭을 듣기도 쑥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용병이라 하더라도 제국의 녹봉을 받아먹고 제국의 아들로서 유서 깊은 가문에 벌어진 농간을 해결해준 분께 가볍게 대하는 건 옳지 않은 대우라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겸손하고 나를 치하하는 화법에 귀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제국 제일의 미녀가 나를 띄워주는 듯한 고양감에 붕 떠올랐던 나는 잠시 까먹었지만, 앞의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고 툭, 테이블에 손을 얹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그럼, 처음 시작은 휘슬 남작가에서…”
남작의 중태에 빠진 것, 행밀 백작가에 도움을 받으러 왔다가 백작 부인을 만나고 그녀가 낸 과제를 해결하면 도움을 주겠다는 계약으로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 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와 대략적인 내용과 결과, 백작 부인에게 건네준 물건 등을 전부 말해줬다.
“음, 음, 후우, 산맥 앞 요새, 마녀들의 마을. 후우…”
스텔지아의 행보가 꽤 골치 아팠는지 베론은 수첩에 끝없이 받아적으면서도 연거푸 한숨을 내뱉었다. 새하얀 얼굴이 피곤함에 물들 때마다 괜히 마음 쓰였지만, 남자한테 왜 이리 마음 쓰나, 싶어 신경 끄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후우, 감사합니다. 하나같이 중요하고 꽤 큰 사건과 연관된 이야기뿐이군요.”
“그 정도입니까.”
“네, 솔직히 말해서 골치 아픕니다.”
꾸욱, 펜 끝으로 미간을 누른 베론은 하얀 앞니로 입술을 짓이기며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야릇하면서도 시선을 끄는 표정에 가만히 바라보자 펜을 거둔 베론이 사과해왔다.
“이런, 추태를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그, 백작 부인, 아니 그 마녀는 앞으로 처우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위치 크래프트에서 스텔지아가 마녀였다는 이야기까지 했던 나는 베론의 반응을 살피며 질문했다. 마녀 마을의 이야기를 들을 때 스텔지아 라는 이름을 되뇌며 수심에 잠겼던 베론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역으로 내게 질문했다.
“카사노경은 그녀를 찾으면 어찌할 셈입니까?”
그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제 여자를 건드렸으니 대가를 치러야 하기에, 복수할 생각입니다. 아무 상관 없는 여인을 끌어들이다니, 솔직히 지금도 분이 삭히지 않는군요.”
솔직하게 대답하자 툭, 펜을 내려놓은 베론이 손을 모으고 자신의 손등을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무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몇 분 동안 눈동자를 굴리면 고민하던 베론은 조용히 내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확실히 시험이니 과제니, 어쭙잖은 말로 남을 떠보는 행동도 지탄받을 행동이죠. 그런 의미에서 백작 부인, 아니 스텔지아의 행동은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고급스러운 어휘와 배려가 담긴 눈빛, 하나하나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따스한 행동에 나는 베론의 정체를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녀 나름대로, 그녀만의 사연과 이유가 있다면…”
베론이 말하려는 바를 눈치챈 나는 테이블에 쿵, 손을 얹으며 그를 바라봤다. 동요어린 눈동자와 어렴풋이 내 대답을 깨달은 체념의 눈동자.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저지른 짓은 옳지도, 용서받지도 못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소파의 팔걸이를 붙잡고 일어났다. 뒤도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베론의 눈빛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봐줄 수 없냐는 어투의 베론과 대화를 이어 나가면 그에게 괜한 화를 낼 거 같아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 벗어났다.
쿵!
조사관과의 협조도 끝났으니 이렇게 나가도 괜찮겠지. 순간 욱해버려 뛰쳐나왔기에 조금 진정되자 불이익이 생기는 게 아닌가 미친 듯이 걱정됐지만 나는 다시 감정을 다스리고 기다리고 있을 페리샤의 방으로 돌아갔다.
**
“용서받지 못한다, 인가…”
툭, 테이블 위에 수첩을 얹은 베론은 후드를 벗고 수첩에 써놓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읽기 시작했다.
금빛 실로 자수가 새겨진 하얀 정장, 가슴팍에 자리 잡은 훈장과 셔츠 밖으로 삐져나온 금빛 목걸이, 은은하게 피어오른 마나는 베론의 몸에 걸려있는 마법을 유지해 주고 있었다.
끼이익!
“업무는 끝나셨습니까.”
백작의 뒤를 따라 떠났던 백금빛 갑옷의 기사 중 가장 화려한 갑옷을 걸쳤던 기사가 응접실에 돌아왔다. 익숙한 여성의 음성에 뒤돈 베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백작 부인의 정체가 스텔지아였다니,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후원에 설마설마했지만…”
“황자님의 은헤를 입고도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다니, 당장 황명으로 스텔지아를…”
“아니, 그러기엔 제국이 그녀에게 저지른 짓이 더 몰상식하지 안 그래?”
묵빛 사슬을 목에 차고, 인간들의 저열한 조롱에 짓눌린 어린 마녀, 물론 마녀라는 상등품 탓에 아무도 그녀에게 손대지 않았고 스텔지아 또한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안도했지만, 그 시절 그녀가 입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겠지. 홀로 되뇐 황자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베론 황자님…”
자신을 부르는 슬픈 음색에 억지로 미소 지은 황자는 꾸욱, 허리를 펴며 카사노가 떠난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실감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피어오른 한줄기 호감과 황자로 살아오며 몇 번이고 느꼈던 탐욕이 황자의 몸을 에워쌌다.
“그나저나 카사노, 저 친구 제법 탐나는데.”
“그냥 떠돌이 용병일 뿐입니다. 황자님이 관심 가질만한 인물은…”
“아니, 언제나 보장된 길만을 달려온 경과, 좋은 집안, 좋은 환경에서 자라온 경들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나완 다르지. 거칠고, 투박하지만… 손에 쥔 무언가를 누구보다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사람 같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애초에 들은 게 없기도 하고요.”
질렸다는 듯이 말하는 기사의 어투에 하하, 웃은 황자는 감명받아 줄을 그어놨던 부분을 기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봐 릴리아, 포상을 주겠다는 백작 부인의 사병들과 싸우며 그녀를 찾아간 이유, 자기 여자에게 위해를 가해서.”
“위해요?”
“납치하려 했다는군, 그전에 막아서 어찌 됐을지는 모르겠다지만 스텔지아의 성격상, 포박된 페리샤양을 옆에 두고 카사노를 조롱했겠지.”
“참, 한결같은 아이네요.”
황자가 스텔지아를 구출할 때부터 곁을 지켰던 릴리아는 질렸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골적인 반응에 하하 웃은 오베론은 스윽, 수첩을 품에 집어넣고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행밀 백 작가의 일이 일단락되면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어.”
여인 혹은 사내, 중간을 오가는 오베론의 미소가 찬란한 태양에 그대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