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260화 (260/395)

꾹, 꾹!

한창 분노를 터뜨리는 와중 옷깃이 당겨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주눅 든 표정의 페리샤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제야 내 감정에 잡아먹혀 페리샤를 방치했단 걸 다시금 깨달은 나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스윽, 페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무서웠죠.”

꾸욱, 옷깃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약해졌다. 정수리에서 손을 내려 말캉이는 뺨을 어루만지자 포옥, 뺨을 내민 페리샤가 어리광을 부려왔고 지켜보던 운디네도 꾹, 꾹! 정수리로 내 옆구리를 문질렀다.

“하하.”

귀여운 행동에 웃음을 터뜨린 나는 어리광 부리는 두 아가씨와 함께 피투성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연회장이 있는 이층 복도는 텅 비었다. 근처 골목에 쓰러진 병사들의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기에 페리샤와 운디네의 등을 밀어낸 나는 혹시나 백작 부인이 저택에 숨어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여기에도 없네요.”

쿵, 이층 복도를 전부 돌고 삼 층까지 찾아왔지만, 백작 부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용인들의 짐이나 숙소 따위. 백작 부인의 방으로 가기 위해 삼 층 끝으로 향하던 그때 벽 너머에서 가냘프게 흐르는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사노님, 여기…”

끼익, 앞장선 페리샤가 낡은 나무 문을 열며 비켜줬다.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코를 찌르는 악취와 방치된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끄으, 끄으으으…”

끔뻑, 끔뻑- 작은 눈이 몇 번이나 나를 응시하다 굳게 감겼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흐르는 투명한 물줄기. 초췌한 몰골의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흐느꼈다.

“크흐윽…”

“행밀 백작님?!”

꾸욱, 내 옷깃을 붙잡고 있던 페리샤가 화들짝 놀란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백작이라는 호칭에 누운 채로 방치된 남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고 메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누, 누구… 그 간악한 년이 보낸 시종인가…?”

분노한 목소리로 질문한 남자는 눈을 뜨며 우리를 노려봤지만, 증오 어린 눈빛에 곧바로 체념이 깃들었다.

“그래, 죽여라… 죽여…!”

체념한 백작의 불씨를 살려주기 위해 나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그가 듣고 싶을 정보를 순순히 말해줬다.

“백작 부인은 도망쳤습니다. 저택에 남아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방들을 뒤지다 백작님을 발견한 겁니다.”

“거짓말 하지 마! 그 악독한 년이 쉽게 도망쳤을 리가…!”

나서서 한마디 하려 했지만, 쓱, 한 발 앞으로 나선 페리샤가 결의가 담긴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를 믿고 맡기기로 한 나는 한발 물러서 둘을 지켜봤고 페리샤는 크흠, 헛기침을 내뱉고 누워있는 백작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휘슬 남작가의 페리샤입니다. 남작가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백작가에 의탁하러 찾아뵀지만, 백작님께서 이런 불상사에 처해있는지 몰랐습니다.”

“휘슬 남작가, 페리샤, 아… 그런가, 그래 기억나는군…”

스윽, 페리샤의 신분을 확인한 백작의 언성이 조금 침착해졌다. 꾸욱, 핏발 선 눈을 감으며 잠시 무어라 되뇌인 행밀 백작은 페리샤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자네들이 누군진 알겠네. 그렇지만 그 여자가 도망갔다니…?”

“그녀의 기사와 병사들이 저를 포박하고 납치해 가려 했습니다만, 제가 데려온 용병 카사노가 저를 구출하고 그녀의 기사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지막 기사까지 처리하고 나니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도망가버렸죠.”

담담한 페리샤의 이야기에 음, 음… 고개를 주억거리던 행밀 백작이 주륵, 눈물을 흘렸다.

“그런가, 정말… 인가보군. 저택이 조용해, 항상 그 악독한 년의 목소리로 가득 찬 저택이 오늘따라 조용하군.”

파르르, 주름진 눈가가 잘게 떨리며 백작의 숨이 거칠어졌다. 딱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나는 꾸욱,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운디네는 살랑, 가볍게 떠올라 백작의 옆에 섰다.

“응…? 정령?”

푸른 몸체를 가진 운디네가 나타나자 백작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 차오르는 투명한 물을 보고 침착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치료수라고 합니다. 피폐해진 몸을 잠시 치료해줄 수 있을 거 같아 제가 부탁했습니다.”

“그런가, 고맙군…”

쪼로로로록-

투명한 물줄기가 빛과 함께 백작의 입에 쏟아졌다. 백작은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혀를 내밀고 치료수를 받아먹더니 꿀꺽, 삼키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오오…”

바들바들 떠는 손과 함께 침대를 짚은 백작이 부스스한 머리를 흔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추한 몰골에 커흠, 헛기침을 내뱉은 백작은 떨리는 눈가로 나를 바라보며 내게 부탁을 하나 해왔다.

“자네, 중앙광장 근처에 있는 신전은 알고 있나?”

몇 번 지나가며 본 적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침착한 목소리의 백작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꾸준히 후원한 신전이지, 생명의 신 라미테르의 신관을 불러 저택에 데려와 주게.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 뒷수습이 전부 끝나면 자네와 페리샤에게 포상하지. 부탁이야.”

덜걱, 앉아있는 백작의 머리가 돌연 앞으로 기울었다. 페리샤는 깜짝 놀라 백작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제지한 내가 스윽, 그의 코에 손가락을 뻗어봤다. 미약하게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나는 페리샤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일단… 상황이 개판이네.”

백작 부인은 사라졌고 원래 주인인 백작은 기절했다. 저택 곳곳은 내가 죽인 기사와 병사가 널브러져 있고 사용인들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 일단 백작이 깨어나면 수습될 거라 판단한 나는 페리샤와 운디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백작을 지키고 있어. 나는 부탁한 대로 신전에 다녀와야겠으니까.”

“네…”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잠시만?”

철그럭, 목에 걸어둔 목걸이를 움켜쥔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둘러 목걸이를 가동했다. 붉게 빛나는 보석을 향해 훅훅, 숨결을 불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미네르바?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데 지금 어디죠?”

[음, 이제 막 오두막으로 돌아가려 했는데요.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백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히 해주지 않았기에 미네르바의 목소리엔 걱정이 깃들어있었다. 툭, 툭- 보석을 두드린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간단히 설명했다.

“어느 정도 수습은 됐는데 저택에 아가씨 한 명이랑 운디네만 내버려 두고 어디 좀 다녀와야 해서요. 불안해서 둘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한데…”

[하루나님이 가겠다 하시네요. 다른 부탁은 없을까요?]

하루나 정도면 든든했기에 괜찮다 대답한 나는 호르미아에서 가장 커다란 저택으로 찾아오게 하면 된다고 안내한 후 마나를 거뒀다. 곧바로 목걸이를 집어넣은 나는 두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고 곧장 저택을 빠져나왔다.

“음?”

문을 연 순간 저택 앞, 정원을 빼곡히 채운 인파에 나는 당황했다. 함정인가 싶어 자세를 낮추려 했지만, 선두에 서 있는 집사와 메이드, 그 행렬의 끝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고 나서야 이들의 눈빛에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남작가의 카사노님.”

몇 번 마주쳤던 노년의 집사가 아니라 처음 보는 중년쯤 되는 집사가 나를 불렀다. 행렬의 끝 수십 명의 기사가 나를 바라보는 탓에 나는 도망치지 못해 순순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혹시, 백작 부인이 어떻게 됐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백작 부인은 도망쳤습니다. 당신들은?”

텅 빈 저택과 정원에 서 있는 사용인들을 바라보며 질문하자 고개를 주억거린 중년 집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의 위세와 폭거에 여태 숨죽인 채 그녀의 명령을 들어왔죠. 하지만 오늘 갑작스럽게 저택에서 나가라 하기에 빠져나와 숨어있었습니다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저택 정문에 수습된 병사의 시체를 그제야 발견한 나는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경계심을 일으켰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백작 부인의 사용인일 수도 있고 복수하겠답시고 내게 달려드는 사용인이 한 명쯤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말 감사드립니다.”

집사가 허리를 굽히며 감사 인사를 시작하자 다른 사용인들과 병사, 심지어 기사까지 허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해왔다. 저 정도 기사 수면 백작 부인에게 덤벼도 이겼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에 깃든 공포를 읽고 생각을 거뒀다.

“아, 혹시 백작님은?”

허리를 편 집사는 꾸욱, 손을 움켜쥐며 내게 질문했고 나는 곧바로 집사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초췌한 몰골로 방치된 걸 발견했습니다. 간단히 치료하고 지금 백작님의 부탁으로 신전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정말 다행이군요. 신전에는 저희가 사람을 보낼 테니 쉬고 계십시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전한 집사는 스윽, 뒤돌아 시종들과 메이드들에게 능수능란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흩어지는 사용인들과 저택으로 들어가는 기사들, 남은 병사와 기사들은 다시 어딘가로 떠났고 홀로 남은 집사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백작 부인의 밑에 억눌린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집사에게 물으며 선수를 치자 이해한다는 눈빛의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백작 부인의 마법을 보셨습니까? 꽃잎으로 변하며 터져나간 사용인들과 기사를 보고 백 작가의 사용인들은 전부 백작 부인에게 굴복했습니다. 이내 그녀가 데려온 메이드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저희는 그녀에게 반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죠…”

“당신은 믿을 만 한 거 같지만, 다른 사용인들도 그렇습니까?”

내 의문에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믿어달라 했다. 연속된 전투에 지치기도 했고 백작 부인이 마지막으로 말한 ‘그분’에 대한 생각에 복잡해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서 물러났고 집사 또한 가보겠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지친 심신에 한숨을 내쉬며 미네르바에게 연락해 하루나는 안 와도 되겠다 전달하자 깔깔 웃은 그녀가 이미 가셨는걸요? 대답하곤 알겠다며 연락을 끊었다.

무언가 확실히 끝맺은 게 없기에 찝찝했지만, 사건이 일단락된 만큼 나는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 페리샤와 운디네를 찾았다. 백작에게 붙은 사용인들에게 밀려난 그녀들은 메인홀에 멀뚱멀뚱 서 있다 나를 발견하고 뛰어들었다.

“카사노님!”

[카사노!]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갑자기 사용인들이 밀려들어 와서, 경계했지만 깍듯이 대하기도 하고 백작의 시종이라 설명하기에 물러났어요.”

[그리고 카사노가 걱정된다고 언니가 밑에서 기다리자길래, 나도 사람 많은 데는 싫어서 내려왔어!]

스윽, 스윽- 귀여운 두 아가씨를 쓰다듬은 나는 분주한 사용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조용히 그녀들과 방으로 돌아갔다. 필요하면 직접 찾아올 테니 뻘쭘하게 서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풀썩, 침대에 걸터앉은 페리샤는 금세 뒤로 벌렁 눕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디네 또한 스윽, 페리샤의 옆에 붙어 눈을 꼭 감고 인형처럼 그녀를 껴안기 시작했다.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며 한숨 잘까? 하는 유혹에 넘어간 나는 스윽, 그녀들의 옆에 눕고 천장을 바라봤다. 하얗게 빛나는 전등과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 심란한 마음에 다시 일어난 그때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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