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으아아아아악!!!”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다가가자 겁에 질린 병사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차라리 저게 낫단 생각을 하며 남은 병사에게 다가가려는 그때 파앙! 도망치던 병사가 빛나더니 터져버렸다.
흔들, 흔들- 복도를 채우는 분홍빛 꽃잎, 참혹한 현장에 혀를 내두르는 와중 오들오들 떨던 병사가 내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아아악!!!”
겁에 질린 눈빛과 지옥에서 피어오른 절규를 내뱉은 병사는 터엉! 터엉! 내 방패를 미친 듯이 두들기며 소리쳤고 장작을 패듯 검을 휘두르는 어설픈 모양새에 나는 서걱, 얇은 팔뚝을 베어 넘겼다.
툭
“끄으으으으윽!!!”
듣는 내가 괴로워질 정도로 처절한 절규와 함께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병사, 묘한 해방감까지 느낀 빠악! 방패로 병사의 머리를 내려쳤고 뻐억, 벽에 머리를 부딪힌 병사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페리샤?”
“후웃, 후웃, 후웃…!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지. 가까이 오지 마, 피 묻으니까.”
도리도리, 고개 저은 페리샤는 푸욱, 내 등에 몸을 내던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지켜주시기 위해 묻은 피인걸요. 정말 괜찮아요.”
[응응, 그래도 되게 쉽게 끝났네? 동굴에 갇혔을 적보다 훨씬 강해진 거 같은데?]
“그게 대체 언제 적이야.”
피식 웃어넘긴 나는 운디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핏자국 가득한 복도를 지나쳤다. 발끝을 세워 핏자국과 피 웅덩이를 피한 페리샤는 포옥, 내 허리를 끌어안고 걱정된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연회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꾸욱, 긴장감, 혹은 흥분감으로 물든 손이 떨리기에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마음을 다스렸다. 꾸욱, 서로를 껴안은 아가씨들을 바라보며 다시 문을 응시한 나는 문에 손바닥을 얹고 마나를 두르려 했지만, 순간 침묵을 깬 청아한 목소리가 우리를 두드렸다.
[아무런 함정도 없으니 들어와도 된답니다?]
느긋한 백작 부인, 스텔지아의 목소리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문을 열었다. 이미 다가온 것도 아는 마당에 함정을 파두진 않았을 거 같아 취한 행동이었다.
끼이이이익-
음산한 문소리와 함께 터엉, 커다란 문을 열고 저 멀리 왕좌 같은 의자에 앉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또한 나를 발견한 그녀의 호위 기사 둘도 저벅, 한걸음 나서며 나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요. 귀여운 아가씨와 같이 기다릴 요량이었는데…”
“늙어서 노망이라도 났나? 갑자기 무슨 짓이지?”
거만한 내 말투에 툭, 팔걸이를 두들긴 백작 부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후우,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제 호흡을 되찾은 그녀는 날선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간단한 시험일뿐이에요. 카사노군에게 줄 포상도 있고,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어 당신의 역량을 보기 위함이었죠?”
“좆까고 있네. 누가 부탁했어? 괜한 사람들까지 엮이게 해놓고 혓바닥이 기네.”
“…부디 그 알량한 주둥이를 간수해줬으면 하네요. 내가 이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있다고 해서 카사노군의 가냘픈 숨통을 비틀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살랑, 백작 부인의 눈앞에서 춤추는 분홍빛 꽃잎, 노골적인 경고에도 나는 여태껏 쌓아둔 분노를 표출하며 검날을 백작 부인에게 겨눴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더니 먼저 선수 쳐놓고선 이젠 죽일 수도 있다 협박까지 염치없는 년인 건 알았지만 들은 것보다 더 해괴한 년이네. 응?”
능글맞은 말투로 백작 부인을 조롱하자 부들부들, 팔걸이를 움켜쥔 검은 장갑이 진동했다. 노골적인 분노에 코웃음 치는 한편 백작 부인의 양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크게 외쳤다.
“백작 부인의 은혜를 입고도 그따위 망발을! 건방지구나 카사노!”
“들은 적 있는 목소린데, 내가 구해준 기사 아닙니까?”
히죽 미소 지으며 검날의 방향을 돌리자 흠칫 떤 기사가 백작부인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구해달라며 발버둥 칠 땐 언제고 무너지는 배에 올라타 그 위세를 내게 휘두르다니. 기사의 긍지를 짓밟기로 한 나는 연신 히죽이며 기사에게 말했다.
“긍지고 나발이고 구해준 사람한테 칼 겨누는 게 수준이 보이는군요. 저한테 은혜를 입고도 그따위 망발이라니, 참 건방집니다. 그려?”
안 그래도 열받는 데 잘 걸렸다는 심정으로 비꼬자 덜걱, 덜걱- 기사의 갑옷이 진동했다. 덮개 너머 부들거리는 흉흉한 눈빛에 미소 지은 나는 피하지 않고 노려봤고 백작 부인은 노골적인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을 곧 하나의 신호가 됐고 검을 뽑아 든 기사가 고함을 내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아아아!!!”
분노에 뒤덮인 발걸음은 곧장 그와 내가 만나게 해주었다. 쇄액, 바람을 가르는 검날은 내 목덜미를 향해 뻗어졌지만, 맥없이 튕겨 나갔다.
채앵, 채앵, 채앵!
분노에 잡아먹힌 검로는 예상보다 정교했고 쉽게 빈틈을 찾아내지 못한 나는 몇 번이나 그와 검을 주고받았다. 절그럭, 절그럭, 나를 포위하듯 창을 쥐고 다가오는 다른 기사를 바라보던 나는 천둥 같은 고함에 정신을 차렸다.
“한눈을 파는 거냐!!!”
후웅! 온몸을 휘둘러 회전하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 일렁이는 은빛 초승달과 함께 기우는 신형을 포착한 나는 상체를 낮춰 검날을 피하고 뒤돈 기사의 찰랑이는 투구 장식을 움켜쥐었다.
“그흑?!”
꾸욱, 체중을 싣고 잡아당기자 턱끈 탓에 벗겨지지 않은 투구가 기사의 숨통을 졸랐고 타악, 타악! 발버둥 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지만 터엉, 기사는 그대로 꼴사납게 넘어졌다.
챙그랑, 맥없이 놓치는 검과 대자로 뻗은 기사, 한심한 몰골에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나는 투구 장식을 놓으며 마나를 두른 발로 빠악! 빠악! 빠악! 투구를 내려찍었다.
첫발에 바닥이 파이고 덮개가 찌그러졌다.
“끄마안…”
두발에 움푹 들어간 덮개가 안면을 짓누르며 그의 비명을 쥐어짰다.
“그마하, 그마, 그마해…!”
마지막, 마나를 두른 발이 퍼억, 안면을 짓이기는 순간 바닥에 움푹 들어간 기사는 벌레처럼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그대로 뻗었다.
쐐액!
화살처럼 쏘아진 창이 목 끝을 노렸다. 피잇, 따끔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창을 거둔 기사는 꾸욱, 창을 고쳐 쥐며 나를 노려봤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도리 아닙니까?”
쐐액!
대답 대신 날아온 창끝이 내 귀 끝을 베었다. 터업, 창대를 움켜쥐자 후웅! 재빨리 창을 거두는 기사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내가 더 빨랐다.
서걱,
마나를 두른 검날이 창대를 베어내자 봉만 거둬낸 기사가 타다다닥! 바닥을 뛰며 내게 달려들었다. 반들반들한 봉 끝이 빠악, 내 가슴을 두드렸지만 진한 고통에도 나는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베어 넘겼다.
“끄흑!”
갑옷이 갈라지고 주륵, 짙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기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톡, 톡, 톡- 그 광경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백작 부인의 손가락 두들기는 소리가 우리를 감쌌고 방해받은 나는 화풀이로 파앙! 들고 있던 창날을 그녀에게 던졌다.
푸욱!
“오…”
“……”
부들부들, 떨리는 손바닥으로 창날을 막아낸 기사가 창날을 손바닥에서 뽑아내고 남은 손으로 단창이 된 창을 움켜쥐었다.
투둑, 투둑- 검붉은 핏방울이 바닥을 더럽히는데도 물러나지 않는 기사의 긍지에 나는 미소를 거두고 파악, 앞으로 치고 나갔다.
카앙! 카앙! 카앙!
장작 패듯 창날을 두들기는 검날에 한 손을 들어서 막아내던 기사의 어깨가 떨려왔다. 높이 치켜든 창날이 몇 번이고 내려앉고 빗나간 검날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지만, 기사는 끝까지 내게 대항했다.
철컹!
무릎 꿇은 기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창날을 들었다. 몇 번이나 주고받은 공방에 거친 숨이 튀어나온 나는 후우, 숨결을 내쉬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고 툭, 손을 떨군 기사는 조용히 목을 내밀었다.
서걱!
퍼억, 쪼개지는 수박 소리와 함께 기사의 머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참혹하고 상처 많은 연회장의 몰골에도 백작 부인은 여전히 팔걸이를 두드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익-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울린 휘파람이 내 귀를 맴돌았다.
펄럭이는 면포와 함께 의자에서 일어난 백작 부인은 또각, 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왔고 나는 거리를 벌리며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이 정도라니, 대단한데요? 물론 저들이 카사노군이 그냥 용병으로 생각한 것도-”
“닥쳐.”
“네? 저요? 후후, 저한테 한 말인가요?”
살랑이는 면포, 살랑이는 웃음소리, 하지만 면포 너머 드러난 백작 부인의 도톰한 붉은 입술을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새하얀 앞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일을 벌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각오한 거 아닌가?”
스윽, 피가 흐르는 검날을 치켜들고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육감적인 몸매를 앞세우고 풍만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다가오던 백작 부인은 스윽, 스윽, 연회장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하아,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그냥 시험이라고 말했잖아요. 시험관을 죽이는 멍청이가 세상천지 어디 있나요?”
“닥치라고.”
자신을 위해 누구의 목숨이 희생되던, 자신의 요구로 인해 누군가가 위험에 처하던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해대는 추악한 백작 부인의 행보에 나는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후우,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던 백작 부인은 질렸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너무 날 선 거 아니에요? 곧 호르미아에서 일어난 소란을 알고 그분이 오실 텐데, 그분 앞에서도 그런 태도면 곤란해요. 그분을 뵈면 인사라도 건네드려요. 당신이라면 그분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확신 어린 말투로 할 말만 내뱉은 백작 부인은 이내 흩어졌다. 사락, 사락, 백작 부인의 몸이 흩어지고 덜컹, 갑자기 열린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이 꽃잎으로 흩어진 백작 부인을 싣고 그대로 사라졌다.
카앙!
바닥에 검을 내던진 나는 치솟는 분노를 갈무리하며 백작 부인에 대한 적의를 가라앉혔다. 멋대로 지껄인 그분이니, 총애니 알 턱은 없지만, 그녀를 잡아낼 미끼가 되길 빌며, 나는 텅 빈 연회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