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가 건네준 공간이동 주문서로 호르미아에 도착한 나는 수많은 인파를 가로지르며 저택으로 향했다. 툭, 툭, 가방에 사람들이 부딪힐 때마다 복잡한 인파에 짜증이 났지만 결국 뚫어낸 나는 저 멀리 우뚝 솟은 저택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푸욱, 고개 숙인 노년의 집사는 팔을 뻗어 나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의 눈가는 잘게 떨리고 있었고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면포를 쓰지 않은 몇몇 시종들의 눈가도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배정받았던 방에 짐을 풀고 물약을 꺼내 백작 부인의 방으로 향한 나는 그제야 사용인들이 긴장한 이유를 알아냈다.
또각 또각
송곳으로 귀를 찌르는듯한 날카로운 구두소리와 함께 부채를 쥔 채 다가온 백작 부인은 후욱, 면포 너머로 들끓는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응시했다. 면포 너머 보이지 않는 눈동자까지 엿보이는 듯한 착각과 함께 서로를 바라보길 몇초, 백작 부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내게 물었다.
“연락이 안 되던데.”
“대마녀라는 분이 바싹 태워버리시더군요.”
타악!
손에 쥔 부채를 손바닥에 내려치며 짜증 낸 백작 부인은 까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걸 누가 몰라요? 그걸, 왜, 가만히, 보고만, 있냐고요.”
툭, 툭, 툭, 툭
가슴을 찌르는 부채 끝에 피식 웃은 나는 거친 숨결에 펄럭이는 면포 끝을 바라봤다. 가냘픈 흰 턱이 엿보인 순간 턱, 손을 뻗어 면포를 누른 백작 부인은 한 걸음 더 물러나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가 그분들에게 손대거나 반항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주시죠.”
차압.
검은색 망사로 이루어진 장갑이 내 뺨에 얹혔다. 꾸욱, 볼에 얹은 손을 살짝 움켜쥔 백작 부인은 스윽, 손가락 끝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요?”
“진실이기도 하죠.”
쉽게 물러나지 않으니 백작 부인 또한 물러서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아예 면포가 뚫릴듯한 착각과 함께 몇 분을 대치하자 후우, 끈적한 한숨을 내쉰 백작 부인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미안해요. 다른 일로 신경 쓰이는 게 좀 있어서 예민해졌나 보군요. 저도 모르게 너무 흥분했어요.”
“괜찮습니다. 사람이란 게 다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이야기하자 탁! 부채를 두들긴 백작 부인이 아주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좋아요, 그럼 가져온 물건을 한번 볼까요?”
달그락, 병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상자를 들고 툭, 책상에 얹어 잠금장치를 열었다. 가로로 네 개 세로로 두 개, 여덟 개의 임신 물약에 백작 부인은 하아, 끈적한 한숨을 내쉬며 촤락! 부채를 폈다.
살랑, 살랑- 검은 프릴로 끝이 장식된 부채가 살랑이며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펄럭이는 부채, 그 바람을 타고 흐르는 백작 부인의 향기를 여과 없이 들이킨 나는 달콤한 그녀의 향을 음미하며 면포 너머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좋아요. 오늘 사용인에게 휘슬 남작의 치료를 진행하라 일러둘게요. 세 가지 과제를 완벽히 해냈군요.”
드르륵! 손바닥에 부채를 두들기며 부채를 접은 백작 부인은 휘휘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아, 카사노군은 나중에 따로 포상을 받으러 오세요. 제 개인적인 선물이 있으니까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거절은 안 돼요. 나중에 메이드를 보낼게요.”
“…그때도 늦는지는, 지켜볼 테니까요.”
툭, 백작 부인의 압력에 밀려나듯이 방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꾸욱, 문고리를 움켜쥐는 백작 부인의 손을 응시하다 고개를 들었다. 펄럭이는 면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엿보이는 순간- 쿵! 문이 닫혔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문에서 멀어지는 구두소리, 뭔가 달아오른 듯한 뺨을 매만진 나는 이를 갈며 백작 부인에 대한 욕을 지껄였다.
“언제는 눈 뒤집혀서 좋다고 난리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지랄이야?”
고작 삼일인데, 늦는지 지켜보겠다니- 엄중한 경고에 코웃음 친 나는 그대로 페리샤의 방으로 찾아갔고 그 덕에 백작 부인의 방에서 들리는 히스테릭한 비명을 듣지 못했다.
**
“아아아아아아악!!!”
카랑카랑한 비명과 함께 몇 개나 집어 던졌을지 모를 장식품을 움켜쥔 백작 부인은 그대로 벽을 향해 내던졌다.
파삭!
힘없이 조각나는 장식품과 움푹 파인 벽, 분노가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에도 백작 부인은 아직도 모자라다는 듯이 쾅, 쾅! 카펫 위에서 발을 굴리며 구겨진 편지를 바라봤다.
[이 이상 제국의, 더 나아가 인간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정도로 개입한다면 본 마녀회의 마녀들은 꽃의 마녀 스텔지아, 귀하를 구금하거나 위치 크래프트에 유폐할 수도 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바라며 잘못된 선택을 이어 나갈 경우 제국과 협력해 귀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제국령에 그대가 묶이는걸 방관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무덤덤한 어투와 무심하게 찍힌 인장에 그대로 속이 뒤집힌 백작 부인은 쫘악! 쫘악! 편지를 찢으며 소리쳤다.
“라우라! 이 개 같은 년!”
텁, 바구니에 담긴 와인을 움켜쥔 백작부인은 쨍그랑! 그대로 벽에 내던지며 벽지를 바라봤다. 와인 빛으로 젖어 든 벽지와 벽에 박힌 날카로운 파편, 짓이긴 시체의 흔적 같은 모양새에 꾸욱, 면포 너머 입술이 짓이겨질 때쯤 책상에 얹힌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툭, 백작 부인의 손가락이 수정구를 건들자 수정구를 휘감던 빛이 벽에 투영되며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벽에 그려졌다.
“이 개 같은 년…”
적나라한 욕설을 들었음에도 흥, 콧방귀를 뀐 라우라는 스윽, 책상 위에 손을 올리며 수정구 너머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부들거리는 그녀의 주먹과 어질러진 방의 풍경을 봤을 때 제 분을 못 이기고 난리라도 피우고 있던 모양이겠지. 하고 넘긴 라우라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손님은 잘 도착했나?]
“손님, 아, 카사노군말인가요.”
라우라의 입에서 그의 소식이 들릴 줄 몰라 잠시 이해하지 못한 백작부인은 꾸욱, 팔을 움켜쥐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자님께서 한낱 인간에게 관심도 참 많네요.”
라우라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백작 부인, 스텔지아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지독한 화법에 한숨을 내쉰 라우라는 보란 듯이 싱긋, 미소를 짓곤 스텔지아를 향해 대답했다.
[한낱 인간이라니, 우리 마을의 은인인 걸 그대는 모르나 보군]
노골적인 비웃음에 굳은 스텔지아는 라우라의 뻔뻔한 대답보다 그녀가 짓고 있는 미소에 놀라 척,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당신, 어떻게 웃고 있죠?”
혹한의 마녀라는 이명을 가진 라우라가 표정을 잃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한 스텔지아는 라우라의 변화에 놀라 물었지만 마침 스텔지아의 행동과 행보에 불만이 있었던 라우라는 피식 웃으며 보란 듯이 그녀를 약올렸다.
[글쎄,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알려주지]
“…날 놀리려고 연락한 거라면 잘못 찾아왔다고 말해두죠. 누구 씨 때문에 기분이 뭣 같거든요.”
앙칼진 스텔지아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인 라우라는 툭,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용건은 없다. 말 그대로 손님이 안전히 돌아갔나 확인하기 위함이니까]
“당신 정도 되는 인물이 굳이?”
카사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 스텔지아는 의문을 그리며 수정구 너머 라우라를 노려봤다. 시골 마을에서 도시로 상경해 용병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던 풋내기가 위치 크래프트의 축을 담당하는 라우라의 호의를 받다라.
“그 남자와 잔 건가요?”
남은 선택지는 그것뿐, 유난히 여색을 밝히는 카사노를 떠올리며 질문한 그녀지만 라우라는 스텔지아의 순진한 질문을 보고 짐작하고 있던 생각 하나를 완전히 확정 지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뭐, 그대라고 해도 모르는 게 있나 보군. 더 할 이야기는 없으니 이만 끊지. 경고장은 몇 번이고 되 읽었으면 한다]
우웅, 빛무리에 둘러싸인 수정구가 그대로 빛을 잃고 벽에 그려진 라우라도 이내 모습을 감췄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 라우라의 파렴치한 행동에 스텔지아는 까득, 이를 갈면서도 타악, 타악! 손에 쥔 부채를 손바닥에 내려치며 고민했다.
“도도하고 인간 생각 따윈 안하던 라우라가 은인이라며 끼고 감싼다고? 내가 놓친 게 있나?”
마을의 마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면 진작 카사노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스텔지아였지만 그녀는 마을을 나와 마녀회의 방향과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스텔지아는 풀썩, 의자에 주저앉고 뜨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수정구 옆, 정돈된 체스판을 바라봤다.
“목석같은 여자의 표정을 되찾아줄 정도면 남자구실은 제대로 하겠네.”
개처럼 짖고 얻어맞으며 질질 싸대는 한심한 수컷들을 머릿속에서 지운 스텔지아는 황자님과의 오붓한 하루 전 심심풀이로 갖고 놀기 딱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 하지만 내 몸을 순순히 안게 해주기엔 너무 아쉬운데…”
스륵, 풍만한 가슴을 쓰다듬은 스텔지아는 카사노가 해준 일들에 비해 포상이 너무 무겁다고 판단해 꾸욱,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고 싶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안겨주긴 싫고. 뭐 건수가 없나- 고민하던 스텔지아는 툭, 체스판 위에 놓인 나이트를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아가씨를 한번 인질로 잡아볼까?”
저택에 찾아올 때부터 꼬마 아가씨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나서던 열정을 떠올린 스텔지아는 이번 시험으로 그가 가진 끈기와 야성을 전부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친분이 있는 기사들은 따로 보내놓고...”
툭, 가느다란 손가락이 체스 말을 뒤집었다.
“그가 진심을 낼 수 있게,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들을 세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알아보자. 만족스럽다면 심심풀이를 떠나서 황자님께 쓸만한 심부름꾼이라며 소개해 드리는 것도 괜찮을지도?”
스스로 펼친 상상의 나래를 끝없이 잡아 늘린 스텔지아는 자신이 벌일 계획이 가져올 후폭풍을 상상도 못 하고 체스판을 뒤적거리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