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와이번 토벌한 경력이 있는 경들인 만큼 가능하겠지만 저 산맥에 도사리는 와이번은 이야기가 다르지. 크기도 크기지만 화염낭이 있는 와이번이었어.”
화염낭, 와이번중에서도 일부 개체만 있는 불꽃 주머니였다. 흘려들은 말론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모아 반응 시켜 내뱉을 수 있다 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불가능했다. 눈을 빛내는 마일드의 모습에 나는 손을 들어 불가능하다 말하려 했지만 기사들의 원성이 더욱더 빨랐다.
“어차피 요새를 지키려면 그딴 도마뱀은 잡아야 합니다! 마일드경,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맞습니다. 보급도 들어오고 물자도 있으면 충분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백작 부인이 아무 지원도 없이 잡아달라 하셨겠습니까?”
힐끔- 기사의 일침에 모든 시선이 담당관에게 돌아갔다. 자신을 향하는 아홉 쌍의 눈에 담당관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무, 물론 준비해둔 물품이 있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후다닥 뛰어간 담당관이 잠시 후 병사 세 명과 함께 무언가를 낑낑 들고 쿠우웅-! 바닥에 떨어트렸다. 묵직한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여니 묵빛 쇠사슬이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뭐요?”
마일드의 질문에 헤엑- 헤엑- 숨을 고르던 담당관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크래프톤에서 만든 포획용 사슬입니다. 와이번의 목에 걸고 저 말뚝을 고정한 후에 말뚝에 새겨진 술식을 발동하면 마법이 발동됩니다. 지면에 중력을 고정해 와이번을 짓누르는 마법이 새겨져 있지요.”
“생포한다 해도 화염낭이 있는 와이번인데 어쩔 셈이오?”
“그, 그건 백작 부인께서 생포만 하면 방법이 있다 하셨습니다. 물론 그전에 생포한다면 백작 부인이 개인적인 선물을 선사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어떠십니까?”
마치 거절하면 죽는 것처럼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애원하는 담당관의 모습에 기사들과 눈을 마주 보던 마일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을 수락했다.
생포할 거면 미리 이야기하든가 언질을 주든가 이제 와서 뭐 하는 짓이야- 백작 부인의 변덕과 제멋대로에 화가 난 나는 무거운 분위기 속 홀로 화를 내며 담당관을 노려봤다. 흉흉한 눈빛에 히익- 소리 낸 담당관은 우리를 둘러보다 정리할 게 있다며 물러났고 마일드 또한 헛기침하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일단 와이번이 또다시 습격한다는 가정으로 역할을 짜야겠군. 오늘 자정에 회의를 열 테니 전부 종탑으로 오게, 카사노 그대도 부탁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병사들을 도우러 가볼까-! 자자, 경들이 힘을 써야 간만의 포식할 수 있다네. 가보자고!”
마일드의 힘찬 응원과 함께 피식 웃은 기사들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대로 보급품의 행렬에 뛰어들었다. 나 또한 두두둑- 몸을 풀며 도우러 가려 했지만 홀로 남아 고개 숙인 채 마일드에게 다가가는 소니아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저어, 단장님-“
결심한 눈의 소니아가 뜸 들이며 마일드를 부르자 꾸욱- 자신의 미간을 누른 마일드가 주변을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겠네. 소니아경, 포션은 아직 어떤 상황이 올지도 모르고 수량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됐어. 차라리 오늘 담당관의 짐 마차에 태워 보내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보살피도록.”
“그런, 그렇지만-“
“기사라면 응당 병사의 앞에 나서 그들의 선봉을 지키고 주군의 명령에 따를 것, 지금 자네의 주군이 그 종자인가? 외부인도 요새 안에서 저리 열심히 노력하는데 백작님의 기사인 자네가 이렇게 굴면 어떡하나.”
엄하면서 하나같이 전부 맞는 말이었다. 소니아의 눈이 떨리고 꽈악- 강하게 손을 움켜쥐자 새하얘진 주먹을 부들부들 떤 소니아는 결국 감정을 다스리고 마일드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본분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반성하면 됐네. 담당관에게 자네 종자에 관해 이야기해볼 테니 자네도 카사노와 함께 병사들을 돕도록.”
툭- 소니아의 어깨를 두드린 마일드가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멋있는 모습에 휘익- 휘파람을 불며 소니아에게 다가가자 표독한 눈으로 나를 찢어 죽일 기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병사와 기사들의 원망은 소니아에게 향하고 그녀의 원망은 나에게 향한다. 참 얄궂은 연결고리에 부채감을 덜기 좋은 기회라 생각한 나는 소니아의 앞에 서며 말했다.
“아무리 종자가 중요해도 그런 질문과 요청은 너무 철없죠. 안 그렇습니까?”
“닥쳐라…!”
“종자는 또 구하면 되는 거고, 물론 건강히 치료되는 게 제일 좋겠지만요.”
후웅-! 살벌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숙인 상체를 곧게 편 나는 연타로 날아오는 주먹을 붙잡고 꾸우욱- 살짝 비틀며 소니아를 바라봤다.
“또 저와 결투하시려고요? 또 저한테 대가를 빌미로 대주려고?”
일부러 속 긁는 말투로 소니아를 조롱하자 화악- 얼굴이 새빨개진 소니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타악-! 달려오는 다리를 걷어차 자세를 무너트리고 휘청이는 소니아의 목을 붙잡았지만 내 팔을 붙잡고 빙글 회전한 소니아가 팔꿈치로 내 갈비를 찍었다.
빠악-!
“크흣!”
묵직한 고통에 숨을 참으며 팔을 빼낸 나는 그대로 소니아의 뒷목을 아래로 밀며 무릎을 들어 퍼억- 그녀의 배를 찍었다. 비명을 뱉으며 침을 흘린 소니아는 스윽- 손등으로 칩을 닦으며 거리를 벌렸다.
“그만하시죠, 얼른 일하러 가야 하는데 이런 장난 칠 시간도 없습니다.”
“항상 제멋대로에 항상 남을 조롱하고…! 지크는 네놈이 함부로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야. 죽을 정도로 아픈 상처를 주고 떠난 네놈 대신 옆에서 내 옆을 지켜준 게 지크다!”
“그럼 뭐, 결혼이라도 하려고요? 아니면 뭐 이미 연인인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철부지 아가씨처럼 어리광부리는 게 맞아? 맞냐고.”
사람이 중요한 건 안다, 그런 사람도 많이 봐왔고 나도 직접 느꼈으니까. 그럴 때일수록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것을 지켜야지 토벌 때의 철부지 아가씨처럼 어리광부리며 행동하면 누가 그런 소니아에게 권리를 챙겨주겠는가. 전해주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킨 나는 그녀를 꾸짖으며 대치했다.
“내게 단 하나뿐인 동생이다…! 다신, 다신 남자는 믿지 않지만, 지크는 다르니까. 그리고 어리광? 내, 내가 기사단에서 이룬 수많은 공로에 비하면 티끌 같은 부탁이 뭐가 어리광이야!”
타앗-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소니아의 눈동자는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분노로 가득 찬 눈빛 속에서 내 품에 안겨 어리광부리며 철부지처럼 굴던 소니아가 떠오른 나는 팔을 내리고 소니아의 분노를 받아낼 준비를 했지만 지익- 몸을 틀어 멈춘 소니아탓에 엉망이 됐다.
“하아… 하아…”
“그냥 때리지 그랬어요.”
“그냥, 사과만이라도 했으면… 사과 한번이 듣고 싶었는데…”
주륵-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소니아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종탑 아래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말라가는 입술을 쩌억- 벌린 나는 무어라 말하기 전 미친 듯이 나부끼는 찢어진 깃발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이질적인 무늬처럼 홀로 떠오른 붉은 반점이 요새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펄럭- 펄럭- 나부끼는 깃발보다 커다란 소음을 내며 펄럭이는 소리에 요새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병사와 기사들이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반점은 점점 커다랗게 변했고 이윽고 날개를 가졌다. 커다란 날개와 길쭉한 대가리가 비틀리며 귀를 찢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
키이이이이잉- 이명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울음소리에 모두가 귀를 틀어막고 자세를 낮췄다. 붉은 비늘을 뽐내며 땅에 내리꽂힐 기세로 하강하는 녀석의 자태에 성벽 가장 위에 자리하던 병사가 종을 울리며 소리쳤다.
때앵! 땡! 땡땡땡땡땡!!!
“와이번이다아아아!!!”
콰아앙-!!!
와이번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쿠웅-! 요새 안으로 낙하했다. 히히히히힝-! 구슬픈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발톱에 베여 갈라진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후두두둑 요새 안에 비처럼 떨어졌다.
쿠웅-! 요새 밖으로 말을 내던진 와이번이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숨을 들이켰다. 새하얀 복갑이 뻘겋게 물들며 아가리가 벌어지자 성벽 위의 병사가 소리쳤다.
“브레스다아아!!!”
“도망쳐어어!!!”
“숙여, 숙이라고!!! 아니, 종탑으로 들어가야해애!!!”
겁에 질린 아이처럼 울부짖는 병사들과 사명감으로 종을 울리던 병사의 위에 일렁이는 불꽃이 쏘아졌다. 화아아아악-! 병사의 투구가 단숨에 녹아내리고 그들에 얼굴에 들러붙으며 치익- 타는 소리와 함께 녹은 철에 뒤덮인 숯덩이가 돼버렸다.
“제기랄…!”
타다다닥-! 와이번의 공포에 소니아는 검을 뽑아 들고 단숨에 성벽 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생긴 그을음과 고기 타는 냄새에 나는 도망치는 병사가 내던진 활과 화살을 집어 들고 화살통을 등에 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