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벅- 찐득한 피에 물든 흙이 밑창에 들러붙는 느낌은 몇 번이나 겪어도 역겨웠다. 지익-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에 밑창을 긁으며 닦아낸 나는 반쯤 무너진 종탑 아래 크게 펼쳐진 천막에 걸어간 후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말했다.
“백작 부인의 전령인 카사노라고 한다.”
이름과 임시직책을 듣자 병사들은 사전에 귀띔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악- 천막을 들추고 내게 안내했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나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인근 지형을 그린 지도를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오! 카사노, 백작 부인께 보고는 끝났나?”
백작 부인이란 단어에 지도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기사들의 눈빛이 일렁였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내게 집중되는 시선을 이겨내고 덤덤히 이야기했다.
“백작 부인께서 남은 보름간 여태껏 지켜온 것처럼 부족함 없는 노력 보여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날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 보급을 보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급이란 단어에 하아- 밑 빠진 독처럼 진득한 한숨을 내뱉은 기사들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툭- 툭- 자신들끼리 어깨를 부딪쳤다. 그 모습에 나는 슬쩍 마일드의 곁으로 다가가 백작부인과 나눴던 이야기를 조금 전달했고 내 거취나 자신들의 임무를 깨달은 마일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둘러봤다.
“드디어 보급이군, 길러온 물이랑 밀빵으로 끓여댄 것만 먹어대느라 미치는 줄 알았어.”
“휴우- 주군은 왜 이곳을 지키라 하신 건지…”
기사단장의 죽음 이후 많이 지쳤는지 기사들의 푸념이 쏟아졌다. 주군에 대한 의문이 내뱉어지자 쾅- 탁자를 세게 내려친 마일드가 엄한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주의시키기 시작했다.
“주군에 대한 의심은 금물-! 백작 부인도 지원을 약속했고 기사는 아니지만, 용병의 몸으로 인정받은 카사노도 보름간 함께한다고 하니 잘 지내도록.”
“”네!!!””
군기가 바짝 들린 대답과 함께 파앙- 내 등을 후려친 마일드가 진한 웃음을 지으며 기사들을 내보냈다. 마지막까지 나를 노려보는 소니아를 끝으로 기사 전부가 나간 후 마일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일단 자네의 역할을 정해줘야겠군. 병사와 같이 묶을 수 없으니 기사들과 같이 편성할 생각인데 불만 있는가?”
“괜찮습니다.”
“후우- 지금 보다시피 기사는 여덟 명이지만 나는 기사단장이기에 병사들이 지휘와 기사들의 편성으로 바쁘다네, 그렇기에 부하들 두 명을 묶어두고 있지만 한 명 홀로 지내는 기사가 있으니 그녀와 같이 묶겠네.”
마일드의 지칭에 나는 슬쩍 고개를 틀고 마일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니아경입니까?”
하아- 한숨을 내쉰 마일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자네가 소니아경과 무슨 사이거나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홀로 행동하는 것도 소니아경뿐이고 다른 기사들이 소니아경에 대한 불만도 쌓여있기에 자네밖에 적임이 없네.”
“기사들의 불만 말입니까?”
눈을 굴리며 묻자 고개를 끄덕인 마일드가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주저하다 결국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소니아경의 종자가 큰부상을 당했네. 동생처럼 아끼는 아이인 건 우리도 전부 알지만 지금 그녀는 임무나 명령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 아이를 보살피고 있지. 물론 다친 이를 보살피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기사 된 도리를 다하지 않고 있어.”
마일드 또한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소니아에 대한 화제가 이어지자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그녀를 탓했다. 모든 기사와 병사가 각자의 역할을 맡고 노력하는데 소니아만 기사가 해야 할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 될게 분명했다.
“내가 자네에게 명령하거나 일을 맡긴다면 소니아경을 잘 구슬리던 같이 좀 행동해줬으면 하네. 부탁함세.”
꾸벅- 마일드의 콧수염이 쳐졌지만, 그는 숙인 허리를 쉽게 펴지 않고 내게 부탁했다. 알겠다며 허리를 들라 하니 그제서야 허리를 든 마일드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니아경이 나쁜 건 아니지만, 주군의 기사라면 요새 안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큰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고맙네! 카사노.”
파앙- 내 어깨를 두드린 마일드가 이만 가보겠다며 천막을 나서기에 나도 그를 뒤따랐다. 소니아와 한번 이야기해보라며 권했지만, 나중에 하겠다고 넘긴 나는 그렇게 밤이 되기 전까지 요새 안을 둘러보거나 도와달라는 병사들에게 맞춰주며 천천히 요새 안의 호감도 작업을 시작했다. 보름간 지내야 했기에 굴러들어온 돌인 내가 미움받는 순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푸드드득-!
스윽- 천막에서 빠져나온 나는 횃불을 들고 요새 안을 돌아다닌 병사에게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낮추고 걸었다. 야밤에 새가 퍼덕이는 소리를 들으며 종탑 뒤편으로 향한 나는 꾸욱- 손을 강하게 움켜쥐며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카사노.”
투구를 벗은 소니아는 몇 년 전 봤던 외모와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여인으로서 성숙해진 외모와 좀 더 커진 게 확실해 보이는 부푼 가슴, 종탑에 기대 살짝 짓눌린 엉덩이까지. 요새에 보름간 갇혀 이런 여인과 둘이 짝을 맞춰 지내라니 마일드도 참 힘든 부탁을 하는 사람이었다.
“더욱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짜악-!
분노어린 손바닥이 뺨을 후려갈겼지만, 고통보다 씁쓸함이 더 컸다. 순진하고 사랑을 갈구하던 소니아가 지금은 표독한 눈으로 나를 증오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더 강해 지신 것 같은데요. 열심히 단련하셨나 봐요.”
“닥쳐!”
진심으로 한 칭찬이었는데 조롱으로 받아들인 듯한 소니아가 하아- 여러 감정이 섞인 한숨을 내뱉곤 나를 노려봤다.
‘오…’
백작 부인에 대한 짜증과 오랜만에 만난 소니아의 반응이 조금 복잡미묘하게 느껴졌다. 제멋대로에 건방진 여자를 깔아뭉개고 싶단 갈 곳 없는 욕망을 내게 분노를 토하는 소니아에 푸는 건 어떤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강간 같은걸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소니아 스스로 따먹어달라고 애원할 수 있는 상황이 없을까- 고민한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는 소니아에게 말했다.
“그래도 외롭지 않으셨나요? 그렇게나 귀엽게 엉겨 붙었는데 지금이라도 그냥 안아주시죠.”
홰액- 머리를 날릴 기세로 날아오는 손을 붙잡은 나는 꾸욱- 손목을 움켜쥐며 소니아를 뒤로 밀어냈다. 덜덜덜- 얼마나 세게 힘을 줬는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종탑에 부딪혀 갈 곳 잃은 소니아는 치욕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날 노려봤다.
“이젠 아예 저열하게 나오는군, 한때나마 사랑한다고 생각한 내가 머저리였다!”
“그러지 마세요, 그럴 생각 없으니까요.”
툭- 벌벌 떠는 손을 놔주자 홰액- 홰액- 채찍처럼 내게 몇 번이나 손바닥을 휘두르는 소니아였지만 전부 피한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종자가 크게 다쳤다면서요? 괜찮아요?”
종자의 이야기에 덜덜- 눈을 떤 소니아는 잠시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지만,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가라앉은 눈으로 내게 대답했다.
“후우, 이제 괜찮아지겠지. 백작 부인의 지원으로 포션이나 신관만 온다면 요새에 있는 부상자들은 물론이고 지크도 회복할 수 있을 거다.”
“저는 그런 건 못 들었지만요.”
백작 부인은 내게 끝까지 무엇을 보급하겠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백작 부인의 측근인 내 증언에 소니아의 눈은 또다시 떨려왔지만 애써 진정한 소니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에 요청하면 될 일이다.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너무 차갑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는 소니아님의 종자를 도울 수 있어서 하는 이야기에요.”
“네가 무슨 수로?”
흥-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는 소니아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 끝에 마나를 불러일으켰다. 소니아도 마나를 볼 수 있는지 부릅- 크게 뜬 눈으로 손가락 끝에 맺힌 마나를 바라봤다.
“제가 계약한 정령이 있는데 그 아이의 능력으로 만들어내는 치료수면 치료도 가능할 거 같아서요. 크게 다친 모양인데 덧나기 전에 지금이라도 치료해야죠.”
“…거짓, 말이야. 또 입에 발린 달콤한 이야기로 나를 속이려는 거지.”
꾸욱-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진정한 소니아는 내 말이 거짓이라며 애써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나는 화악- 손 전체에 피어오른 마나를 보여주며 근거를 제시했다. 그녀와 지낼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마나에 소니아는 결국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가 조용히 내뱉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신 네놈 따위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 언제나 그랬지 달콤한 속삭임으로 나를 현혹하지만 결국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건 카사노 네놈이야.”
그거에 관해선 딱히 반론할 게 없었기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소니아를 바라봤다. 이걸로 딱히 협박할 생각도 없고 옛정으로 호의를 베풀고 대가를 받을 생각이었던 나는 거절하는 소니아에게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저는 작은 선의를 베풀고 작은 대가를 받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스윽- 어느새 가까이 다가가 풍만한 가슴골을 향해 손을 뻗자 깜짝 놀란 소니아가 파악- 내 손을 쳐냈다. 얼얼한 손목에 장난이라며 물러난 나는 소니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정말 거절하실 겁니까?”
“그래, 네놈 따위의 도움은 아무도 바라지 않아. 혹시나, 혹시나 사과나 자신의 과오를 용서해달라 할까 만나자 했건만 저열하구나! 그대는.”
오랜만에 듣는 그대라는 말투에 피식- 웃었다. 히네라 마을에 자리 잡고 한명 두명, 내 곁에 후회 없이 지내는 여인들과 소니아가 겹쳐 보인 나는 괜히 피어오르는 욕심을 애써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