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앙- 파앙-! 어깨를 두드리는 묵직한 고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환대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일단 백작 부인께 보고하기 위해 요새에 있었던 일부터 부탁드립니다.”
“아, 그렇지! 내 미안하네. 이거 정말 좆됐다 싶은 찰나에 자네가 와줘 너무 반가워서 그랬지. 하하하!”
기사가 좆됐다라니, 걸걸한 입담에 속으로 웃음을 참은 나는 가지런한 콧수염을 쓰다듬는 기사에게 경청하겠다는 맑은 눈빛을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산맥 너머에서 갑자기 와이번이 나타났다는 겁니까?”
“후우, 그렇다네. 뭐- 자네는 다 알고 왔겠지만 우리는 주군에게 이곳을 한 달간 지키라는 명을 받았네, 그러는 동안 보급과 지원도 받을 수 없었지만 백작 부인의 은혜로 보름 동안 잘 지켜낼 수 있었지.”
“이곳은 딱히 요충지도 아니고 지킬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마주 보는 건 성국과 나란히 서있는 산맥, 성국이 침공한다 해도 저 광활한 산맥을 넘고 와야 했고 성국이 먼저 침공한 역사는 없었다. 제국과 모든 왕국의 사이를 중재하는 중립국, 그게 성국이었다.
“후우- 주군께서 생각이 있으니 우리를 보내셨겠지. 뭐, 그렇게 요 보름간 문제없이 지켜냈지만 바로 어제, 요새의 기사단장인 로미안경이 와이번의 행패에 그만 당하고 말았다네.”
스윽- 건틀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트니 발톱 자국이 여실히 남은 종탑과 무너진 돌무더기, 그 아래 찐득하게 눌어붙은 핏자국까지.
“그래도 기사단장이신 그분께서…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겁니까?”
“하하, 하아… 백작 부인께 전부 여과 없이 전해야 하니 말해야겠지. 로미안경은 갑주도 벗고 승마를 위해 요새 밖을 향하고 계셨지. 사실 보름간 우리는 전혀 한 게 없었단 말이지. 침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습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해이해질 수 밖에 없었지.”
이게… 기사? 너무 솔직한 기사의 대답도 그렇지만 저 로미안이라는 기사의 행동은 정말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영지에 울고 있을 유가족도 그의 사인을 알면 불명예에 거품 물고 쓰러지지 않을까 생각한 나는 꼼꼼히 기억하며 물었다.
“그럼 로미안경이 전사…하시고 그-“
이름을 못 들었기에 손을 살짝 흔들며 눈앞의 기사에게 스스로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내 신호를 읽은 기사는 마일드- 라고 대답했고 나는 곧바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일드경이 기사단장 지위를 잇고 지금 요새를 지키고 계셨군요. 어제 낮에 와이번의 습격으로 요새가 일부 파괴되고 다른 이상징후도 있었다는 말씀도 하셨었는데.”
“그렇지, 와이번이 나타난 이후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산맥에서 고블린이나 홉고블린, 코볼트 따위가 기어 나오고 있네. 산맥 깊숙이 거주하는 놈들이 내려오는 일은 드문데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부 대답한 마일드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짙은 한숨과 함께 본격적으로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보고할 때 부디 남은 병사와 기사들의 노고를 말해줬으면-“
“물론입니다. 마일드경이 다른 기사분들과 노력하셨으니 요새도 이 정도 피해로 그쳤겠죠.”
이건 진심이었다. 기사단장이란 놈이 승마나 즐기려고 나가다가 백작부인과 항시 연락할 수 있는 마도구째로 깔려 죽다니, 정말 한심스러웠다. 그에 비해 그 일이 있던 직후 병사와 기사를 이끌고 내려오는 고블린따위를 토벌하며 와이번에 대응하려는 마일드는 정말 선녀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감사하네. 후우, 머리가 깨질 거 같군.”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는 마일드의 모습에 나는 순전히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해 저벅-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 기사라면 전부 마나를 일으켜 몸을 강화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는 지구와 달리 소드 익스퍼트나 소드 유저, 그런 명칭은 없었다. 오로지 마나를 다루고 연공법이나 검법을 이용할 뿐, 다만 경지에 이르면 소드마스터라고 칭하긴 했기에 뭔가 어설프네- 라는 생각을 했었다.
“…로미안경은 마나 사용이 조금 서툴렀지. 사실 그것도 소드마스터나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기술 아닌가? 하하-! 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기사단의 일원들을 소개해주겠네. 전부 핀델 백작님의 믿음직스럽고 충직한 기사들이지.”
본인도 계속 이야기하기 껄끄러웠는지 파앙- 내 등을 두드린 마일드가 나를 이끌고 요새 중앙으로 걷기 시작했다. 떠벌떠벌- 침을 튀겨가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마일드는 아-! 탄성과 함께 앞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저기 우리 기사단의 중심이자 믿음직스러운 후임이 오는군!”
찰랑- 요새 안에 머무는 바람이 여인의 머리칼을 흔들었고 엉덩이를 덮던 기다란 주황빛 머리칼이 햇빛처럼 확- 흩날렸다. 가지런히 모아 끈으로 묶으며 성큼- 나와 마일드에게 다가오던 여인이 부릅- 파도 같은 푸른 눈동자를 크게 뜨고 저벅저벅 저벅-! 점점 빨라지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소니아경-“
턱- 마일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척- 나와 완전히 마주 본 소니아는 흐읍- 흐읍- 거친 숨을 들이켜며 증오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책임으로 도망치고 사랑에 속박당하기 싫어 치기 어린 도피를 선택했을 때 외면했던 그 눈빛이 지금 당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증오에 마일드는 음, 음-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소니아에게 인사를 건네기 전 마일드에게 이야기했다.
“이분과 인사를 마치고 백작 부인께 먼저 보고를 올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마일드경.”
“아, 그러면 알겠네. 나는 또- 둘이 그, 험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사이 같아 지켜볼까 했는데 그러면 가봐야지.”
끄덕끄덕- 알겠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린 마일드는 힐끔- 분노어린 소니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당당한 걸음으로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후우- 크게 끌어모으자 부푸는 소니아의 흉갑에 나는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잘지냈다라-“
“못 지내신 것 같군요. 눈빛이 많이 변하셨습니다.”
몇 년 만이지? 가늠도 안 되는 세월에 속으로 손가락을 꼽아본 나는 모진 풍파에 얻어맞아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소니아의 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를 보면 사람을 희롱한 대가를 꼭 갚아주고 싶었지만, 상황도 상황이고 아무래도 귀빈인 모양이니 넘어가야겠군.”
덤덤하게 넘어가겠다는 사람치고 눈빛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증오로 점칠 된 의문 어린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저도 해후를 풀며 수없이 쌓였던 이야기를 소니아님과 나누고 싶지만 안 되겠군요. 백작 부인께 요새에 대한 일도 보고해야 하고요.”
“…오늘 밤, 종탑 뒤편으로 와주게.”
철그럭- 마지막 인사를 전한 소니아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지만 요새 벽면 아래 펼쳐진 천막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미련이 달라붙어 쩍쩍 늘어지는 걸음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오늘 죽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 식은땀이 흘렀지만 일단 백작 부인에게 보고하는 게 먼저였다.
턱- 성벽 아래 계단에 등을 기댄 나는 아무도 이쪽을 보지 않는 걸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품에 넣어둔 종이를 펼쳤다. 곱게 접힌 종이를 펴자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분홍색 솜사탕 같은 꽃잎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스륵- 스륵- 스륵- 사악-
종이 위를 쓰다듬듯 둥실둥실 날아다니던 꽃잎이 하나씩 엮이고 엉키더니 종이 접듯 차곡차곡 꽃잎이 뭉쳐 작은 새 모양이 만들어졌다. 종이 바깥에 그려진 마법 진에 입꼬리를 씰룩인 나는 움찔거리는 새의 부리에 집중했다.
[아, 아- 이제야 도착했네요. 무능한 걸까 정직한 걸까?]
짹짹거리는 새소리처럼 높게 떠올랐다 툭- 귀에 얹힌 백작 부인의 목소리에 나는 저절로 내뱉어지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마법이라니 신기하네요.”
[후후, 불만인 걸까요? 이런 게 있으면 왜 사용도 안 한 거지? 나를 진짜 개로 보는 걸까? 이런 느낌인가?]
쿡쿡- 웃음을 삼키며 농을 던지던 백작 부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죠, 제게 바칠 대가도 관수 못 하고 제가 보듬어줄 필요도 없는 페리샤양을 돕기 위한 대가로 받은 게 당신이니까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나를 처절하게 낮잡아보는 모멸적인 말들이지만 자그마한 분홍빛 새의 부리에서 튀어나오는 말이기에 나는 크게 개의치 않고 이야기했다.
“그럼 요새에 관해 보고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꽤 이야기가 기니 이해 바랍니다.”
[…후후, 로미안경에게도 이걸 전해줬는데 당신에게 건네준 새가 피어오른 걸 보니 요새가 습격당한 게 맞나보는군요. 그래요, 한번 보고해보세요]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마일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부 전했다. 승마를 위해 나서던 로미안이 요새 잔해에 깔려 죽었다는 이야기에서 쾅- 작은 새의 부리에서 책상 내려치는 소리가 퍼졌지만, 기사들이 잘 수습하고 피해 없이 지키고 있단 사실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제 호의를 받아먹고 그렇게 죽어버리다니, 쓰레기 같은 남자야. 역시-]
역시 뒤의 이야기는 끊겼지만 백작 부인의 분노는 여실히 드러났다. 깃털을 삐죽 세우고 짹짹거리듯 쫑알거리는 새의 머리를 엄지로 사악- 쓰다듬은 나는 흐응- 백작 부인의 콧소리에 손을 멈췄다.
[당신, 지금 뭘하는거죠?]
“아, 새가 귀여워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제 사역마가 귀엽긴 하죠, 계속해도 좋아요. 흐응- 보는 눈은 제법 있는 사내였네]
스윽- 스윽- 엄지로 부드러운 꽃잎을 쓰다듬자 꽃잎새가 찌르르- 부리를 떨며 부리를 크게 벌렸다.
[그흐럼- 요새에 관한 소식도 빠짐없이 전해줬으니 본격적으로 두 번째 과제를 시작해볼까요?]
탁- 부리 너머 책상 두들기는 소리를 들은 나는 귀를 기울이며 꽃잎 새를 바라봤다.
[전령 겸 지원군으로 당신이 갔으니 전령 일은 끝났어요. 지원군으로서 남은 보름간 요새를 문제없이 지킬 것. 그게 제 두 번째 과제에요]
“알겠습니다.”
여기선 항의도 할수 없었다. 뻔한 말장난을 저지르고도 신난 백작 부인은 후후훗- 진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게 이야기했다.
[핀델 백작도 저도, 그 요새가 무너지면 곤란하거든요. 당신은 요새를 지키고 남은 기사를 전부 영지에 데리고 올 것, 아! 오지 않겠다는 기사는 필요 없어요]
조금 바뀐 조건에 나는 꾸욱- 꽃잎 새의 부리 밑을 누르고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지만 전부 핀델 백작님의 기사인데 그들이 따라오겠습니까?”
[흐응- 후으, 그건 보름 뒤에 두고 볼 일이죠. 며칠 뒤 요새로 보급을 보낼 테니 기사단장에게 전해두세요. 종이는 버리지 말고 그대로 덮어서 보관해요]
마치 재활용에 관해 잔소리하는 말투에 나는 웃음을 삼키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파스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며 꽃잎으로 만들어진 새가 허물어지는 순간 무너지는 부리에서 야릇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여러모로 쓸만하네요. 기대할게요. 카.사.노.]
푸륵- 날갯짓 소리와 함께 무너진 꽃잎을 종이로 꼭 감싼 나는 그걸 품에 넣고 찌뿌둥한 몸을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