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95화 (195/395)

“정말 늦지 않게 준비해주는 거 맞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약서를 건네주는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명단에 줄을 그으며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어제 저녁부터 준비했으니 금방 도착할 겁니다.”

“…그래, 영감님이 그렇게 말했으니 맡기지. 조심히 돌아가라고.”

첫째 날 노인의 대장간에 다녀온 이후 둘째 날부턴 막힘없이 서약서를 받아 내기 시작했다. 나를 좋게 봐줬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대장장이들에게 내 얘기를 전해줬는지 다른 대장장이들과 계약 이야기를 할때 수월하게 이야기가 통했다.

어느새 남은 건 두 명, 일이 너무 잘풀려도 너무 잘풀렸다. 들뜬 나는 마중 나온 사내에게 꾸벅 허리까지 굽혀 인사한 후 다음 명단에 적힌 사람의 주소로 이동했다.

“여기가 맞나?”

여태껏 찾아간 대장장이들과 다르게 외곽에 위치한 대장간, 그것도 골목 깊숙이 있어 찾아가기도 힘들어 맞나? 싶었지만 어떻게 어떻게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대장간도 보여 맞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

그래, 그렇게 쉽게 풀리면 말이 안 되지. 나는 불씨하나 없는 대장간을 둘러봤다. 차갑게 식은 철들과 내동댕이쳐진 망치, 이제는 크래프톤에서 들여와 대장간에 하나씩은 있는 간편용광로까지 온기 하나 없었다.

“어디 갔냐…”

간판이나 문에 걸린 팻말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대장간 그자체, 나는 힘빠진 걸음으로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

“후우-“

대장간 내부에도 대장장이의 개인 공구로 보이는 것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만 널브러져 있으면 모르겠지만 서랍이나 상자 등등이 완전히 박살 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결국 대장장이의 흔적을 여기서 찾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 내린 나는 대장간에서 빠져나와 근처 열려 있는 대장간에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었다.

“계십니까?”

스윽- 명단에 있는 대장장이와 반대로 이쪽 대장간은 불씨가 타오르다 못해 아주 그냥 대장간을 뒤덮고 있었다. 아니 그냥 불이 붙었다. 마른 장작과 상자등에 불이 옮겨붙어 있었고 그중앙에 남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모포같은 걸로 불씨를 두들기고 있었다.

“사, 살려 줘-!!!”

이제 막 불붙은 모양인데 제대로 불도 못끄는 대장장이라니, 당황한 나는 눈을 감고 집중해 운디네를 불러왔다.

[움- 움- 움-?]

입안 가득 무언가를 오물거리고 눈을 빛내는 운디네가 무슨 일이냐며 나를 쏘아봤다. 입가에 잔뜩 묻은 과자부스러기를 보니 그새 간식을 먹고 있던 모양이었다.

“불 좀 꺼줄래?”

[움-]

푸르릉- 좁쌀만 한 이슬이 점점 몸집을 불리고 길게 늘어났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물줄기가 촤악- 불씨와 불길을 한 번에 꺼트리고 그중앙에 서 있던 대장장이까지 물맞은 생쥐꼴로 만들었다.

“고마워, 돌아가서 마저 놀아.”

꿀꺽-

[프흐- 이거 진짜 맛있다- 하나 숨겨둘 테니까 와서 먹어-!]

입안에 가득 쌓인 과자를 삼킨 운디네가 통통- 귀여운 배를 두드리며 사라졌다. 덜덜덜- 손을 떨며 가만히 서 있는 사내에게 접근한 나는 그의 손에 쥐인 모포로 물기를 털어 주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습니까?”

“고맙, 고맙습니다- 선생이 아니었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투욱- 힘이 풀렸는지 사내의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게 그을린 바닥에 엎드리듯 쓰러진 사내는 힘들었는지 숨을 헐떡이다가 겨우 안정된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후우-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희 대장간엔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저 반대편에 이 주소에 있는 대장간 주인을 찾으러왔는데 아무도 없어서요.”

“아… 이주소라면 록시 말이군요. 록시라면 당분간 볼 수 없을 겁니다.”

록시? 여자 이름에 코를 찡그린 나는 그에게 계속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죽었다던가 다쳤다든가.”

“차라리 그런 거면 시끄러울일도 없죠, 록시가 대장간에 없는 이유는 딱 하납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무슨 일만 터지면 대장간을 닫고 술을 퍼먹죠. 유명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만약 그러면 대장간엔 보통 언제 돌아오죠?”

내 질문에 턱을 긁으며 이상한 미소를 지은 사내가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삼일요?”

삼일 정도면 그래도 이틀이 남는다. 그럼 그동안 다음 사람이나 만나고 와야하나? 생각하는 찰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세달은 걸릴겁니다. 이번엔 정말 미친 듯이 화가 나서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 질문에 하하- 멋쩍게 웃은 사내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대판 싸우는소리가 어찌나 큰지 골목에 쩌렁쩌렁 울리더군요. 더군다나 이번엔 남편과 이혼까지 알아볼 정도로 크게 싸운 모양입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 있죠?”

점점 복잡해지는 상황에 머리를 긁으며 질문하자 스윽- 사내가 대장간 밖을 가리켰다.

“저기 나가시면 좁은 골목이 보이실 겁니다. 그 안으로 쭉 들어가시면 모루에 망치가 얹어진 간판의 술집이 있는데 록시는 거기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더 감사하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숨을 내쉬며 대걸레를 움켜쥐는 사내를 뒤로하고 대장간에서 나왔다. 찌는 듯한 햇볕에 한숨을 내쉬며 말한 대로 좁은 골목길에 들어간 나는 이 대낮에 술을 먹고 있다니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하며 예시의 그 가게를 찾아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장사 안 하니 나가주세요.”

가게 안에 발을 들이밀자 싸늘한 목소리가 나를 내쫓았다. 스윽- 들여놓은 한 발을 뺀 난 앞치마를 메고 흰두건을 써 이마를 훤히 드러낸 아가씨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잠깐 물어볼게 있어서 그런데 들어가면 안 됩니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발을 떼자 길게 늘어뜨린 주황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위아래로 나를 훑어본 아가씨가 하아- 한숨을 내쉬곤 들어오라 했다.

“여급 같으신데 가게 주인은 어디 계십니까? 물어볼게 있는데…”

“네? 호호- 참, 주인은 여기 있잖아요.”

그럴 줄 알았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처음 태도보다 눈에 띄게 밝아진 주인을 바라보며 혀를 놀렸다.

“아 정말입니까? 하하, 술집이기에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어여쁜 아가씨가 계시길래 저는 잘못 들어왔나 고민했었습니다.”

“차암, 대놓고 그러신다… 그냥 들어오세요. 여기 앉으시구요.”

톡- 단추를 풀어낸 주인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입술을 쓰다듬었다. 술집주인치고 매우 젊긴 했다. 이제 막 20대 후반은 돼 보이는 미모에 단추가 풀리자 드러난 가슴골은 꽤 풍족했고 초록색 치마에 덮인 엉덩이도 빵빵해 보였다.

“그래서 무슨 질문이요? 아, 위에 누가 있긴 한데 너무 신경 쓰지마요.”

뭉클- 바에 기댄 주인이 야릇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스윽- 바를 쓰다듬으며 손을 내미는 모양새에 툭- 도발적인 미소로 옆에 있는 의자를 두드렸다.

“꽤 긴 질문이 될거 같아서, 옆에 앉아서 오붓하게 얘기 나누시죠.”

“젊어서 그런가 너무 당돌하다…♥”

툭- 툭- 검지와 중지가 일정한 박자로 살금살금 내게 다가왔다. 악어처럼 조용히 다가온 손가락이 내 손등에 얹혀지기 직전 고함과 함께 잔깨지는 소리가 위층에서 들려왔다.

“미리아 엉니히이이-!”

“하아, 이년이 또 지랄이네.”

툭- 멈춘 손가락과 함께 한숨을 내쉰 가게 주인, 아니 미리아가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꾸짖는 소리와 함께 찰싹찰싹- 후려갈기는 소리가 오갔고 조금 지나서야 새빨개진 손바닥을 흔들며 내려오는 미리아였다.

“미안 해요, 위층에 있는 동생이 자꾸 난리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록시라는 사람을 찾아서 왔거든요. 이 술집에 있을 거라던데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아, 록시 손님이었어? 뭐야-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난 또 큰일이라도 난줄 알았잖아.”

텁- 내 손등위에 손을 덮은 미리아가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슬쩍 손가락을 보니 반지도 없고 음란한 표정을 보니 한참 굶은 모양이었다. 스윽- 손가락을 살짝 빼내 깍지 낀 나는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급한일이라서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꾸욱- 도장이라도 찍듯 손가락 끝으로 미리아의 손등을 살짝 짓누르자 하아- 끈적이는 한숨을 뱉고는 까딱- 고개로 위층을 가리켰다.

“아까 들었지? 위에서 뻔질나게 술퍼먹고 있는 게 록시야. 올라가 봐.”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할짝- 계단을 오르는 나를 야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미리아가 혀끝으로 이불을 핥았다. 유혹하는 꼴을 보니 한입맛보고 싶었지만 일이 어찌될지 몰랐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발을 빼며 나중예요- 라고 전한 후 계단을 전부 올랐다.

“파하아- 너 누구야-?”

쾅- 위층에 올라오자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허리를 흔들며 맥주를 마시던 록시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날 경계했다. 얼콰하게 취했지만 눈만큼은 살아 있었기에 나는 두 손을 들고 해칠 의사가 없음을 보이며 드르륵- 맞은편 의자를 빼내 앉았다.

"카사노라고 합니다. 계약 때문에 찾아왔는데요."

"계야아악...?"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고 내 말을 듣던 록시가 계약이란 단어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까딱이다 그대로 미끄러진 팔꿈치가 툭-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게흑-"

술에 취할 거면 곱게 취할 것이지. 술주정을 부리며 벌컥벌컥- 손에 쥔 맥주잔을 들이키는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나는 품에서 서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백작 부인과의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죠."

"...아아- 그거구나아아..."

텅- 양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린 록시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자기 머리를 테이블에 내려찍었다. 그러곤 하는 말이 가관 그 자체였다.

"못해. 죽여도 못 해, 그냥 죽여."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지? 다섯 명의 대장장이를 상대했지만 처음 보는 유형의 상대였기에 당황한 나는 텅- 테이블을 두드리며 그녀를 독촉했다.

"안 되는 이유라도 말해 봐요, 아니 그전에 무조건 해야지. 그게 계약 아닙니까?"

"이유우우우-"

텅-!

이번엔 제법 큰 소리가 났다. 테이블에 대가리를 찍은 록시는 더 이상 머리를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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