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했던 가운을 걸쳐 묶고 문으로 다가가 덜걱- 손잡이를 쥐자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이 도리어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만큼 오감을 집중해 신경을 곤두세운 나는 벌컥- 문을 열고 그대로 복도로 뛰쳐나갔다.
저벅-
괴한이 눈치채지 못하게 발걸음을 늦추며 최대한 조용히 계단 쪽으로 향했다. 마나로 청각을 강화한 후 최대한 보폭을 넓히며 다가갔지만, 방에서 들었듯이 괴한의 걸음은 여전히 거북이처럼 느렸다.
“카사노님…”
툭- 괴한에게 대응하기 위해 여러 상황을 상정하는 그때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를 두드렸다. 가운을 걸친 채 걱정되는 표정으로 꼬옥- 내 옷깃을 움켜쥔 페리샤, 내 표정과 상황에 심각함을 읽었는지 꽤 겁나는 모양이었다,
“들어가 계세요 아가씨.”
괴한이 아니라 남작가 관계자일 수도 있었기에 아가씨라는 존칭도 붙였다. 그런데도 페리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꾸욱- 내 옷깃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떨어져 있는 게 더 불안 하단 걸까? 체념한 나는 사락-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등 뒤에 페리샤를 숨겼다.
“헤헤-“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포옥- 내 등에 얼굴을 파묻는 페리샤, 그 모습에 조금 마음이 풀어져 나도 모르게 청각에 쏟은 집중이 풀렸다.
그때였다. 타다다닥- 여태껏 들린 발소리와 다르게 짐승이 달리듯이 계단과 복도를 휘젓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꽈악! 발 구르는 소리에 놀란 페리샤가 더욱더 강하게 내게 매달렸지만 나 또한 의외의 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
화악-! 불 하나 없는 어둑한 복도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마치 구울 같은 퀭한 얼굴과 구정물 냄새나는 머리칼, 침 자국이 말라붙은 입가와 덜덜 떨리는 이, 그리고 이 저택에 와서 몇 번이고 봤던 익숙한 밤색 머리칼까지.
텁- 텁- 내 양팔을 붙잡은 빈델은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은 눈알을 뒤룩뒤룩 굴러가며 자신이 들었던 페리샤의 목소리를 찾았다. 팔뚝에 묻은 흙 자국에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 다리를 들어 빈델의 배에 걸친 후 후욱- 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다리를 앞으로 내질렀다.
후웅-!
지푸라기 인형이라도 걷어찬 것처럼 별다른 타격감은 없었지만 뻐억- 저 멀리 날아간 빈델이 난간에 허리를 찍곤 끄악-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추욱 늘어졌다. 비명과 함께 흑- 놀란 페리샤가 내게 매달려왔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누구, 누구예요? 흐읏…”
첫 만남 때 당당한 여장부 같던 페리샤가 맞나? 생각 외로 매우 놀란 페리샤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켜준 나는 숨길 것 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빈델이 아가씨를 찾아온 것 같습니다.”
“빈델, 이 찾아왔다니. 저게 빈델인건가요?”
저게- 라고 지칭된 빈델은 힘없는 팔을 후들후들 떨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 성큼성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꼭 구울 같은 모양새에 속으로 비웃고 있는 와중 빈델의 벌어진 입에서 처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가, 씨이…”
터벅-
“아가씨…!”
터벅- 터벅-
“아가씨!”
터벅터벅터벅터벅
이젠 광기마저 엿보이는 푹 꺼진 눈에 나는 어느새 앞으로 한 발짝 나온 페리샤를 다시 등 뒤에 숨기며 흔들리는 머리통을 그대로 팔꿈치로 찍었다. 뻐억- 뼈를 울리는 감촉에 빈델은 휘청이기만 할 뿐 벽을 붙잡고 버텼다.
“버티면 당신만 더 힘들 텐데?”
빈델은 더 이상 휘슬 남작가의 집사가 아니다, 집사 된 도리를 저버리고 주군의 물품과 재산을 탐해 도둑질하고 귀족을 엿먹여 도망간 제국의 당당한 범죄자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그를 대놓고 비웃은 나는 팔꿈치에 얻어맞고 젖혀진 그의 머리를 콱- 붙잡은 후 짜악- 땀에 젖은 뺨을 후려쳤다.
“크흐윽!”
짜악- 짜악- 짜악- 힘들 것 하나 없는 나는 웃음을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처럼 손을 휘둘러 빈델의 얼굴을 후려쳤다.
뺨 후리는 소리가 복도를 메울 때마다 푹 꺼진 그의 얼굴을 점점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휘두르다 덜덜덜- 떠는 손으로 자신의 품에 손을 넣는 빈델을 보고 그제야 빠악- 광대를 주먹으로 후리며 그를 내던졌다.
털퍽-
“그흑, 그하아아악!!!”
쾅- 쾅- 쾅- 바닥에 내던져진 빈델이 울분에 찬 노성을 내지르며 나를 올려다봤다. 팔과 다리는 후둘거리고 몇 번이나 얻어맞은 부운 뺨은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오직 눈 하나만큼은 꺼지지 않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씨… 다아…”
“아가… 사…합…”
중얼중얼- 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한 빈델, 그 모습에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 입을 틀어막고 있는 페리샤에게 거리를 유지하라 언질 준 후 천천히 빈델을 향해 다가갔다.
“아가씨, 사랑합니다…”
소곤소곤- 빈델의 머리통을 향해 머리를 기울여도 들릴까 말까 하는 작은 사랑 고백을 전부 엿들은 나는 혀를 차며 텁- 땀과 흙탕물에 젖은 빈델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의 귀에 속삭여줬다.
“네가 사랑하는 아가씨 존나 맛있더라, 보지 하나는 황제급이야.”
혀를 굴리며 고른 천박한 단어에 파악- 증오 가득한 눈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터져 온갖 증오를 벼린 듯한 붉은 눈에 나는 거리를 두고 페리샤를 향해 뒷걸음질 치며 조소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전해줬다.
“아가씨께 그간 정으로 한 번만 살려달라고 부탁하러 왔다더군요. 염치도 없지.”
“…정말입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묵과할 수 없답니다.”
처절한 사랑 고백을 처량한 빈객의 구걸로 바꿔 전하자 페리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그 싸늘한 목소리가 빈델에겐 하나의 신호로 들렸던 걸까? 살의 가득한 눈을 굴리며 겨우 중얼거리던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페리샤에게 말했다.
“사랑합니다. 아가씨, 사랑, 사랑합니다…! 저와 함께 도망칩시다…! 이제라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분명 그건 진심일 거다. 남작의 폭력으로 자라며 몇번이고 속으로 억누르며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고 단정한, 자기 자신도 인정 못 한 진심이겠지.
그렇지만 이제 와서 꺼낸다 한들 그게 정말 올바른 의도로 전해질까? 빈델은 그걸 간과한 모양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짓말을-!”
힐끔- 내 눈을 한번 바라보고 감정을 확신한 페리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기 어린 얼굴로 빈델을 비난했다. 짧은 몇 마디 속에 어린 분노가 옆에 있는 나도 체감될 정도인데 직접 들은 당사자는 어떨까? 덜걱- 힘없이 무너지는 빈델의 머리통을 비웃은 나는 손가락질하며 뭐라 한마디 더 내뱉으려는 페리샤의 등을 쓰다듬으며 성큼- 빈델을 향해 다가갔다.
빠악-
체중을 실은 발차기에 걷어차인 빈델의 머리가 덜그럭- 뒤로 넘어갔다. 목이 부러진 것마냥 힘없이 축 늘어진 빈델을 난간에 걸어둔 나는 그를 어떻게 처리할까 혀를 할짝대며 고민했다, 아니 고민하려 했다.
벌컥-!
“아가씨, 무사하십니까!”
철컥- 철컥- 철컥- 기사들의 발소리와 함께 커다란 노성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투구덮개를 올린 한 기사는 난간에 걸린 빈델을 흉악한 눈으로 바라보다 기사의 노성에 난간 너머 빼꼼히 머리를 내민 페리샤를발견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영지민한테서 목격담을 들어 서둘러 쫓아왔지만,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랍니다, 카사노님이 저를 지켜줬기에 아무런 문책도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철컥철컥- 뒤따라온 기사들이 복도에 서곤 쿵- 무릎을 꿇으며 페리샤에게 사과했다. 이상하리만큼 충직한 기사들의 모습에 의문을 표할쯤 척척척- 계단을 오른 병사들이 빈델을 묶고 자기들끼리 의논해 짐짝 옮기듯 양발과 양손을 쥐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네!”
페리샤의 제지에 멈춰선 병사들, 축 늘어졌지만 눈 하나만큼은 살아있던 빈델은 누가 봐도 기대 어린 눈으로 페리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던 페리샤는 차가운 목소리로 툭- 빈델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버님께 말씀드려 그간의 정으로 목숨은 살려달라 건의하겠어요. 하지만 제가 약속하는 건 오직 목숨뿐.”
“…그간 살아온 그 추악한 방식으로 알아서 살아남으시길. 이제 데려가도 좋답니다.”
“네!”
타다다닥- 페리샤의 명령에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병사들, 고깃덩이처럼 흔들거리며 사라지는 빈델의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쫓은 나는 어느새 난간에 기댄 페리샤에게 침음을 삼키며 무언가를 보고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아가씨, 이런 말씀을 전해드리게 되서 정말 죄송하고 또 불충한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니에요. 아저씨. 일어나서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오랜 기간 봐온 기사였는지 따뜻한 눈으로 무릎 꿇은 기사를 일으킨 페리샤는 차가운 갑옷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그를 북돋웠다. 울컥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감정을 추스른 기사가 나를 힐끔 보곤 페리샤를 바라봤다.
페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기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하수로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그녀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있었던 일들은 전부 알던 사실이기에 놀라운 것 하나 없었지만 내가 빈델의 뒤를 쫓은 후 벌어진 일은 하나같이 놀라운 일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