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 앞도 안 보고 달린 탓에 날카롭게 솟은 나뭇가지에 팔이 찔린 빈델은 저절로 튀어나오는 욕설을 겨우 삼키며 다시 자세를 낮췄다.
“후우우…”
후들거리는 무릎과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겨우 진정시킨 빈델은 살짝 자세를 낮추며 녹슨 철창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기억해둬서 다행이군.’
지금 빈델이 기어들어 온 입구는 휘슬 남작의 명령으로 옆 영지에서 넘어온 밀수꾼들의 행적으로 조사하는 와중 들었던 입구 중 하나였다. 잊지 않은 자신의 기억력에 감사한 빈델은 질척이는 흙을 양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앞으로 기어갔다.
주변에 커다란 농지와 저택 하나뿐인 휘슬 남작가와 다르게 제대로 된 성벽이 있는 영지인 만큼 오래 머물 수 있을 터, 조금 마음이 풀린 빈델은 가슴에 묻은 흙을 손등으로 털어내며 힘없이 벽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언제 기사들이 자신을 찾아낼지 모르기에 잠시의 휴식도 용납되지 않았지만 이대로 휴식 없이 달렸다간 부러질 것만 같아 빈델은 도망치겠다는 이성 대신 쉬고 싶다는 감정에 손을 들어줬다.
그때였다.
“여기도 없나?”
화륵- 어두운 공기를 밝게 태우는 횃불이 일렁였다. 횃불을 든 병사는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이 살펴본 장소를 일일이 설명했고 파우치에서 수첩을 꺼낸 기사는 진중한 표정으로 하나씩 받아적은 후 병사를 독촉했다.
“너희는 자정이 되기 전까지 계속 찾아라.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네!”””
병사들은 합창과 함께 영지 곳곳으로 흩어졌고 병사를 통솔하던 기사 한 명만이 우두커니 서서 빈델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지키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제 막 들어왔을 뿐인데 여태껏 여길 수색했다니- 같은 생각을 하며 뿌득 이를 간 빈델은 흙 묻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누구보다 조용히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탈출구야…’
어느 정도 크기가 되는 영지였기에 오래 머물 생각이었지만 병사들을 풀어놨다면 얘기가 달랐다. 판단을 내린 빈델은 골목 건너편 눈을 빛내는 기사를 살펴보며 주위를 둘러봤고 결국 실낱같은 희망을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찾았다…!’
기사가 지키는 골목 옆 길목 아래 특유의 무늬가 새겨진 맨홀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제국의 지하수로는 어느 곳이건 입구가 될 수 있었지만 빈델이 발견한 무늬가 새겨진 맨홀은 특히나 더 중요했다. 지하수로 곳곳에 자리 잡은 암살길드나 도둑길드 따위가 마련해놓은 비밀통로기 때문이었다.
‘나도 말로만 들어본 곳이지만…’
이대로 기사에게 잡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남작에게 바쳐지거나 비밀통로로 들어가 뒷세계 인간들에게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빈델은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있는 쪽에 걸 요량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대로 골목을 향해 뛰어들었다.
타다닥- 물에 젖은 흙이 튀며 발소리가 울렸지만, 영지를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안심한 빈델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며 끼익- 녹슨 맨홀을 잡아당겨 힘겹게 연 뒤 그대로 냄새나는 지하수로에 스스로 몸을 내던졌다.
수우우욱- 이끼나 물 찌꺼기 가득한 배관 사이로 공기를 가르며 떨어진 빈델은 뛰어내린 지 몇 초가 지났음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도박에 몸을 내던진 건 자신이었기에 결국 체념하며 눈을 꾹 감고 결과를 기다렸다.
풀썩-
이윽고 귓가에 들리는 짚풀이 부서지는 소리, 안전장치가 있었구나! 안심한 빈델은 가쁜 숨을 내쉬며 파스스- 몸에 붙은 짚 부스러기를 털며 주변을 둘러봤다.
애초에 휘슬 남작의 저택에서 멀지 않은 영지인 만큼, 지하수로의 풍경 또한 낯설지 않았다. 드워프의 가게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구역임을 알아챈 빈델은 가게 거리에 들어가기 전 황급히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후우…”
여기저기 긁힌 상처와 꾀죄죄한 몰골, 거기에 몇 시간을 넘게 뛰어다닌 탓에 온몸에서 땀 냄새가 풀풀 풍겼다. 물과 땀, 흙탕물에 젖어 만신창이인 옷들이 차라리 봐줄 만한 상황이었다.
촤르르륵-
품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은 빈델은 손바닥에 흐르는 청량한 금화 소리에 망설임 없이 가게 거리로 뛰어들었다. 국경을 건너던 지하수로에 숨어들던 잃어버려선 안되는 게 이 금화였다.
“이번에 월광석 물량이 확 풀렸다며?”
“말도마, 그것도 옛말인 거 몰라? 노예해방단 그 새끼들이 하나같이 전부 쓸어갔다고.”
“씨발년들, 해방령으로 풀어줬으면 됐지. 원래 노예인 년들까지 풀어주는 건 무슨 경우야?”
상인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훔쳐 들으며 인파에 스며든 빈델은 툭툭 부딪히는 어깨들을 무시하며 좀 더 자세를 낮췄다. 빈델이 뿌렸던 월광석이 꽤 효과적이었는지 인파나 상인들의 화제는 대부분 월광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거 들었나? 그 호르미아 쪽 잡화거리에 불났다는 거?”
“여기서 불 지르는 미친 새끼가 있어? 난리 났겠구먼.”
“안 그래도 도둑길드가 나서서 진압했는데 귀족이 있었다는 모양이던데…”
“허, 속 시끄러웠겠구먼. 그래서?”
호르미아 쪽 잡화거리면 드워프가 있는 거리였기에 걸음을 멈춘 빈델은 좀 더 가게 쪽에 몸을 붙여 이야기를 엿듣었다. 툭툭툭- 덩치들이 어깨를 두드리거나 부딪히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무엇보다 정보가 중요했던 빈델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 화재에 당한 게 귀족이라던데? 건물에 깔려서 제법 많이 다쳤다는군.”
“이런 씨발, 그럼 좆된거 아니야?”
퍽- 욕설을 내뱉는 상인의 어깨를 내려친 상인은 코웃음을 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 발로 찾아온 데다가 불 지른 놈도 튀어서 좆될 구석도 없어. 본인이 내려와서 본인이 건물에 갇혔는데 누굴 벌하나?”
“그 나리도 병신이구먼, 근데 왜 귀족 나리가 이런 곳까지 내려왔데?”
“들은 이야기론 도둑을 잡으러 왔다던데- 소문의 월광석 주인이 그 귀족인 모양이야.”
“……”
화재에 당한 귀족이 휘슬 남작이란 걸 들은 빈델의 귀에는 더 다른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쿵쿵쿵쿵- 흥분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각이 온몸을 휘감는 감각을 느낀 빈델은 움직이는 인파에 그대로 휩쓸려 말없이 가게를 향했다.
웅성웅성-
사람들에게 부딪혀가며 찾아온 가게 근처는 이미 수많은 사람에 덮여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괜히 튀는 행동을 했다간 아직도 남아있을지 모를 남작의 사병에게 잡힐 수 있었기에 빈델은 몰려있는 사람들을 피해 잠시 몸을 숨겼다.
-텁
한 발 빠져 사람들을 지켜보던 빈델은 가판대에 여러 잡화를 얹어둔 노인에게 다가가 대충 구겨져 있는 로브 하나를 구매하고 그대로 덮어썼다. 로브를 입자마자 온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에 눈을 찌푸린 것도 잠시 방비를 갖춘 빈델은 곧바로 모여있는 인파를 가르며 가게를 향해 다가갔다.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가던 길이나 마저 가도록!”
마치 뒷골목 양아치나 뱉을만한 협박을 뱉는 기사들의 모습에 빈델은 머리에 덮은 후드를 좀 더 푹 뒤집어쓰며 힐끔 가게를 엿봤다. 그나마 번듯한 나무 지붕이 얹어졌던 가게는 이미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거기에 이미 접근한 놈팽이들 몇 명 썰어넘겼는지 가게 근처엔 흩뿌려진 피와 움찔거리는 양아치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후웁…”
코를 가득 채우는 메케한 탄내에 코를 틀어막으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남작이 보이진 않았다. 이미 어딘가로 장소를 옮겼거나 상인들의 헛소문임을 고민한 빈델은 코를 간지럽히는 탄내와 악취에 고개를 숙이며 가게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가게 꼴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기둥이 무너지면서 가게가 폭삭 내려앉고 가게 안의 모든 건 이미 잿더미로 변모한 지 오래였다. 지하수로 안 가게 거리에 몸담은 상인들이니만큼 서로 거짓된 정보를 주고받을 리도 없었기에 남작이 크게 다친 건 확실한 게 분명했다.
툭-
“……”
꾸벅-
남작에 대해 깊게 생각하다 앞을 못 본 빈델은 부딪힌 상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굳고 말았다. 온몸을 덮은 은빛 플레이트와 투구 덮개 너머 흉흉한 파란 눈, 흉곽에 새겨진 문장은 휘슬 남작가의 문장이 분명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이 멈춰 덩그러니 내던진듯한 기분을 느낀 빈델은 쿵쿵쿵 미친 듯이 울리는 심장 소리를 음악 삼아 기사의 눈을 피하며 제발 지나치길 간절히 빌었다.
철그럭- 철그럭-
빈델을 힐끔 쳐다본 기사는 별 생각 없이 그를 지나쳐 가게로 간 지 오래였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왔다고 느낀 빈 델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마를 때까지 그대로 골목에 쥐새끼처럼 숨어있을 뿐이었다.
‘지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이게 맞는 건가?’
호기롭게 도망치면 된다고 한 게 언젠데 벌써 한계에 부딪힌 것만 같아 빈델은 지치고 말았다. 탁한 눈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주민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빈델은 저 멀리 익숙한 가판대를 발견하고 조금 생기를 되찾았다.
노파 혼자서 온갖 보석들로 반짝이는 가판대를 지키며 괴팍한 호통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내뱉고 있었다.
“아…”
변함없는 노파의 모습과 가판대에서 엿봤던 황금빛 토파즈, 크게 다쳤다는 남작과 홀로 저택에 남았을 페리샤와 불륜남과 뒹굴고 있을 남작 부인까지. 모든 게 퍼즐처럼 탁탁 들어맞는 느낌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던 빈델은 겨우 하나씩 정리하며 마지막 희망을 발견한 눈으로 노파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아가씨에게 달려가 목숨을 부지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 목숨을 부지하는 게 아니라…’
한낱 집사가 가져선 안될 감정과 한낱 집사에게 가져선 안 될 페리샤의 마음, 본래라면 허망하게 버려져야 할 사랑이 남작 한 명이 없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미 자신의 멍청한 행동으로 페리샤의 마음속 저울이 기운 것도 모르는 빈델은 노파가 자랑하던 보석 하나를 떠올린 것만으로 자신이 살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 아가씨께 돌아가자. 나에겐 그것뿐이야. 지금이라도 전부 바로 잡는 거야…’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할 수 있었던 빈델의 사랑은 이미 퇴색됐다. 남작의 목줄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치며 도착한 지하수로에서 그의 감정은 이미 하나의 수단으로 변질되버렸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곧 아무도 없는 저택에서 페리샤에게 벌어질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빈델의 망상은 그렇게 지하수로 한가운데서 조용히 꽃피기 시작했다.